호주시드니 수필반 10차시 자료(2022년 10월 14일 금)
수필에서 재미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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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의 접점
문학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된다는 것은 작품을 읽고 나서 ‘무슨 내용이더라.’라고 말하는 것이 별반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문학 작품 읽기에 특별한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일까?
문학에는 뭔가 특별한 즐거움과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이 주제 찾기의 즐거움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주제를 찾아가는 즐거움에 가깝다. 말 자체가 주는 재미, 혹은 말을 이어가는 즐거움 내지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에 참여하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인생의 어떤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유용성이다. 예를 들어 ‘백발가’에 나오는 대구나 비유를 즐기다 보면 인간이 나이 먹는다는 사실이 지니는 의미를 새삼 깨달을 수 있게 된다.
1. 문학은 재미다
- 버스기사 이야기 /어느 고등학생
야간수업을 마치구요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이 광안리에 있는지라 집에 가서 또 라면 먹어야 하는 고민과 함께 집으로 가는 51번 버스를 탔죠. 야간 5교시까지 하면 얼마나 배고픈지 모를 겁니다.
배가 고파서, 차야 어서 가라. 하면서 먹을 라면 종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뒤에 오던, 아마 134번 용당으로 가는 버스일 겁니다. 앞지르기를 시도하다가 우리의 51번 운전기사 아저씨와 경쟁이 되어서 드디어 싸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신호등 앞에서 두 버스가 마주치게 되었는데, 51번 버스 아저씨와 134번 아저씨가 동시에 문을 열고 피튀기는 말싸움에 돌입했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51번 아저씨가 열이 받을 대로 받아 134번 버스로 올라가, 또 싸움이 시작 되었죠. 정말 흥미 진진 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아저씨 이겨욧!! 아저씨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라고 응원 했는데.
젠장, 134번 기사아저씨가 신호등 바뀌자마자 우리의 51번 아저씨를 실은 채 떠나버린 겁니다. 휭, 그 순간 51번 버스에 있는 사람은 멍해졌습니다. 기사 없는 51번 버스 안에 찬바람이 휭하고 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쒸, 기사 아저씨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100미터 전방 유엔묘지 커브 도는 데서 열심히 뛰어오는 51번 기사 아저씨를 보았더랬습니다. 엄청 불쌍해 보이더군요. 얼굴 벌개가지고.
들어 와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운전을 계속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저씨가 불쌍했어요. 정말루. 땀 삐질 삐질. 불쌍한 아저씨. 51번 버스는 패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부터입니다. 2분뒤, 뒤에서 경찰차가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우렁찬 경찰차의 스피커로, “51번! 갓길로 대세욧! 갓길로 대욧!”
신경질적인 경찰의 목소리. 경찰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는 51번 아저씨.
우리는 이렇게 생각 했습니다. 134번 한테 깨지고, 이제는 경찰한테까지 깨지는구나.
그런데, 올라온 경찰의 한마디가, 걸작이었습니다.
“빨리 차 키 주세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51번 아저씨는 134번 버스 차키를 들고 뛰어온 것이었습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134번. 차안 승객은 또 한 번 뒤집어졌고, 51번 아저씨의 능력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라면 먹으면서 죽어라 웃었습니다.
- 무서운 년 / 김점선
마흔을 훌쩍 넘겼던 해의 어느 날, 부모님이 우리 집에 왔다. 구석방에서 남편을 앉혀 놓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관심도 없었다. 부모님이 가시고 난 후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무서운 년이래.”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아버지는 내게 한 푼의 돈도 더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더없이 완강했다. 아무리 그런다고 내가 포기하겠나. 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동생들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다 학교를 자퇴해라. 너희들의 월사금은 다 내가 쓰겠다. 너희들 중 한 놈도 밤새워 공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수한 놈도 없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놈도 없다. 미래에 대한 야망도 없는 너희들은 어정쩡한 놈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돈을 쓰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낭비다. 너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교통표지판과 날아오는 고지서만 읽을 줄 알면 충분하다. 너희들은 이미 한글을 깨쳤으니 그만 공부해라. 그렇지만 나는 너무나 우수하다. 지금 공부를 중단한다는 것은 민족 자원의 훼손이다. 내 민족의 장래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더 이상 돈을 안 쓰는 것은 애국 애족하는 길이다.”
동생들은 입을 쩍 벌리고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 광경을 부모님이 보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않고 내게 등록금을 줬다.
그날 남편은 부모님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부모님이 그렇게 선선히 등록금을 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동생들에게 한 일장 연설을 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부모님은 남편에게 “쟤는 무서운 년이니까 너도 조심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모님은 남편이 나처럼 무서운 년과 십 년이 넘도록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과 연민을 표했다. 백수였음에도 남편은 평생 내 부모님으로부터 무한한 동정과 연민을 받았다. 오로지 나와 살아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 부부 /홍억선
나는 6남매의 맏이고, 아내는 8남매의 막내다. 이 평범하지 않은 결합이 원인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30년 전에 처음 만난 우리는 많은 것이 맞지 않았다. 일단 나는 밖으로 퍼내는 형인데, 아내는 뭐든지 움켜잡는 형이다. 아마도 여러 동생을 둔 나로서는 아래로 흘려보내야 된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고, 아내는 내려오는 대로 받았을 뿐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개념엔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내는 개뿔도 없이 속을 탈탈 털어내는 내가 헤프다고 불만이었고, 나는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뭐든 창고 속에 처박아두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성격의 차이도 있었다. 내가 파르르 끓는 냄비라면 아내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뚝배기였다. 내가 틈만 나면 밖으로 돌아다니는 체질이라면 아내는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드라마와 수면을 고루고루 즐기는 여유만만 형이었다. 비유하건대 내가 파닥거리는 닭이라면, 아내는 슬금슬금 어느새 나무꼭대기까지 가는 늘보곰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런 차이를 가진 데는 자라온 집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조부모님을 모시고 삼대가 살았다. 할아버지는 동이 트기 전, 아직 밖이 어둑한데도 일어나서 말간 마당을 쓸면서 컹컹 기침을 하셨다. 그러면 아버지도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 하릴없이 닭장을 기웃거리거나 마구간을 둘러보셨다. 우리도 덩달아 일어나 그 추운 아침에 방안을 서성였다. 우리 집에서 빈둥빈둥 이불을 덮고 누워 있다는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까웠다.
그런데 결혼하고 처가에 첫걸음을 했을 때였다. 하룻밤을 묵고 아침이 됐는데도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동창이 밝았고 노고지리가 요란스럽게 지저귀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내 기준으로 거의 대낮이 되었을 즈음,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사인 장인께서 출근 준비를 할 때가 되자 하나둘 부스럭대며 눈을 뜨는 눈치였다. 그것도 한 번에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이불 속에서 나와 앉는 데까지 한 1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앉아서 하품을 한 열 번쯤 하고, 손으로 얼굴을 또 열 번쯤 부비고 나서 그제야 죽기 살기로 일어났다. 그야말로 두 집안의 아침이 한 쪽은 허례허식의 극치요, 한 쪽은 실리추구의 극치였다.
무엇보다도 결혼하고 살면서 서로 적응하기 힘든 것은 밥 먹을 때 마시는 물 문제였다. 우리 집에서는 늘 식사 중간에 숭늉이 들어왔다. 사랑방에서 조손이 겸상을 하고 앉았으면 어머니나 고모가 살짝 열어놓은 문틈으로 식사과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중반을 넘어갈 듯하면 따뜻한 숭늉을 소반에 담아왔다. 할아버지께서 한 모금 마시고 그 뒤에 내가 받아 마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와 밥상을 마주했다. 밥상 양쪽에는 밥그릇과 나란히 맥주 컵에 냉수가 찰랑찰랑 넘칠 듯이 놓여 있었다. 숨이 딱 막히고 저 물에 내가 빠져 죽을 것 같았다. 먹는 물은 넘치게 담는 것이 아니라고, 모자라면 더 가져다 먹는 거라고 길들여졌는데 그 물을 보니 공수병에 걸린 것처럼 숨이 가빠왔다. 제발 물 좀 가득 담아오지 말라고 애원하는데도 아내는 먹고 남기면 될 것을 별스럽게 야단 떤다고 타박이었다. 지금 이날까지 부탁을 거듭해도 그 청을 아내가 안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못 들어주고 있다. 나 역시 살아가는 방편으로 찰랑거리는 물컵을 밥상 밑으로 내리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30년을 넘게 살았으니 어찌 무사태평한 날만의 연속일까. 수없이 톡탁거리고 와장창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힘을 모아 자식을 낳고 보금자리를 만들고 집안을 둘러보면서 웃는 날이 훨씬 많았다. “저놈의 파닥거리는 성질” “저놈의 미련 곰탱이 성질”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날에도 돌아서면 금방 미안해서 민망해서 처연해서 또 고마워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라는 이름이다.
한번은 “우리, 한날한시에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은근슬쩍 눈치를 떠보니 돌아온 답이 명쾌했다.
“꿈도 야무지다. 당신 죽고 나서 아이들과 우째 살까, 그기 최대의 고민이다”
부부로 살면서도 혹시나 상대편의 성격이 바뀌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은 엄청나게 미련스러운 일이다.
2. 문학은 감동이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로버트 포로스트
자연의 연초록은 찬란하지만,
지탱하기 제일 힘든 색.
그 떡잎은 꽃이지만,
한 시간이나 갈까.
조만간 잎이 잎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에덴은 슬픔에 빠지고,
새벽은 한낮이 된다.
어떤 찬란한 것도 오래가지 못하리.
- 다시 희망을 갖자/ 임만빈
퇴원하는 날이다. 우리 과科 외래로 간다. 간호사를 만나니 눈물이 왈칵 솟는다.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옛날 건강할 때의 권태롭고 큰 변화가 없던 일상생활이 미치도록 그립다.
병실로 돌아와 퇴원 약을 받는다. 반대 측을 수술하기 위한 재입원 날짜도 통보받는다. 병실 문을 나선다. 갑자기 눈물이 눈가에 돈다.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처량하기도 하다.
한 번 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이 수월할 수도 있으나 처음의 괴로웠던 경험 때문에 더욱 두려울 수 도 있다. 앞으로의 예후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임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울컥 마음이 상한다.
여러 개의 퇴원 짐을 들고 아내와 함께 택시 정거장으로 간다. 1월 말의 날씨는 아직 차다. 택시기사가 밖으로 나와 친절하게 짐 싣는 것을 도와준다. 조그만 친절이 가슴에 와 닿는다. 병을 만난 다음에야 삶을 새롭게 깨닫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의사 이외의 남이 내 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내 아픔을 알고, 그것을 이해해주며,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절망에 빠진 한 인간에게 큰 희망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집 안으로 들어서니 아늑함이 감싼다.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에 눕는 다. 오래된 라디오, 책상, 책꽂이 등의 사소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바쁘게 사느라고 잊어 버렸던 어릴 적 친구들 같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이 일상의 삶 안에서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책을 읽으면서 마시던 따뜻한 커피 한 잔의 맛, 음악을 들으면서 쓰던 한 문장의 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보면서 한참 동안 무아지경에 빠지던 여유로움……. 비로소 퇴원한 것이 느껴진다. 안도감이 몸을 감싼다.
15층 아파트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하늘의 푸름이 돋보인다. 겨울의 찬바람이 자주 쓸고, 흘러가는 구름이 빈번하게 닦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흰색의 월드컵 경기장이 하늘의 푸름 때문인지 더욱 희게 보인다.
그 풍경은 무척 쓸쓸하다.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도 준다. 봄, 여름, 가을에는 그렇게까지 쓸쓸하게, 움츠린 듯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걷고 뛰고 있다는 것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추운 겨울인 지금은 다르다.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그런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내 삶도 계절로 따지면 겨울에 접어든 것 같다. 봄, 여름, 가을이었던 오십대까지의 시절에는 주위에 사람들도 많았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움과 쓸쓸함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외롭고 쓸쓸하다. 수술 받은 몸과 마음은 움츠러들어 있기까지도 하다.
밤이 찾아왔다. 전등을 켜지 않은 채 창밖을 본다. 사물의 형태가 조금씩 불분명하게 뭉개진다. 현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앞으로의 삶은 과거와는 다를 것 같다. 미래의 삶이 모습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어둠 속에서 유영한다. 낯섦, 두려움, 슬픔 등의 단어들이 자꾸 눈앞에 떠다닌다.
잠을 청한다. 위안해 줄 묘약이라 절실하게 원한다. 어릴 적 밀짚 방석 위에 누워 별을 세다가 잠이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창밖 하늘 속에서 별을 찾는다. 전등을 켜지 않은 어둠의 덕택인지 희미하게 별이 하나 보인다. 자세하게 살피니 또 하나가 있다. 그리고 또…….
심한 기침을 하며 잠을 깬다. 새벽이다. 기침을 할 때마다 수술상처부위가 아프다. 아내가 잠을 깨고 근심스런 얼굴로 다가온다. 물과 기침약을 가져온다. 약을 먹었는데도 기침은 계속된다.
일어나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창밖에는 아직 어둠이 깔려있다. 한참 멍하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둠의 물살이 썰물처럼 사라진다. 물이 언제 해변 쪽에서 저 멀리 바다 속으로 사라졌는지 모르듯이 순식간에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온다.
산 넘어 동쪽 끝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간다. 시야의 끝인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선은 바다의 수평선과 무척 닮아 보인다. 어둠에 싸인 편편한 지상이 바다처럼 보이고 불쑥불쑥 솟은 산들이 바다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섬들 같다.
스카이라인 위로 붉은 빛이 후광처럼 비쳐 오른다. 무엇인가 탄생의 조짐처럼 보인다. 붉은 해가 산 위로 솟아오른다. 해가 뜨고 있는 것이다. 닭이 계란을 낳듯 지평선 위로 해가 빠져 나오는 것이다.
어둠이 덮인 저 지상에는 많은 어려움과 절망들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뚫고 지금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희망도 저 해처럼 어려움과 절망 속에서 솟아오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 희망을 갖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앙상한 나무들도 봄이 되면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싹들을 밀어 올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지 않는가.
절망만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저 어둠 속에서 매일 해가 솟아오르는 희망이 존재하듯이, 아픈 이 몸에도 완쾌될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 스무 살 어머니 / 정채봉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송하다. 어쩌다 사원들끼리 우스갯소리라도 하면 뺨에 먼저 꽃물이 번진다. 한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서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우유를 더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을 하면서 돌아서다 말고 물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그러자 신입 사원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면서 가만가만히 대답하였다.
“스무 살이에요.”
여자 나이 스무 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키웠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 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내음은 때때로 떠오르곤 한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 타는 내음. 고향의 그 내음이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히 보이게 한 날을 기억한다.
유년 시절,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던 날이었다. 이웃 민주네 할아버지한테서 <장화홍련전>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서 나오니 저녁밥 짓는 연기가 골목을 자욱이 덮고 있었다. 먼 바다 쪽으로부터 물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돌을 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할머니가 군불을 때고 있었다. 부엌 문설주에 기대서 있는데 해송 타는 연기가 자꾸 나한테로만 몰려들었다. 그때 기침을 하면서 눈을 비비며 서 있는 내 앞에 막연히 어머니의 모습이 다가오다가는 사라졌다 .해송 타는 연기와 함께. 그 뒤부터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해송 타는 내음이 생각키웠다. 해송 타는 내음을 만날 때면 어머니가 조용히 떠올랐다.
중학생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된 9월 어느 날이었다. 들녘에 나가서 토끼풀을 뜯어 가지고 돌아오니 이불 홑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너 없는 사이에 너그 담임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늘귀에 실을 꿸 양으로 계속 거기만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허긴 너의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솔띠재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 찬 고개를 넘어야 했거든. 너를 업고 네 에미가 친정을 몇 번 다녔으니 그 솔냄새가 너의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네 에미 얼굴을 보여 주랴?”
할머니는 일어나서 장롱 위에 있는 부담을 끌어 내렸다.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가 뚜껑을 열어 보여 준 그 부담 속에는 여러 벌의 여자 옷이 있었다. 남치마며 인조 저고리며 단속곳이며,그리고 색이 바래지 않은 흉배도 있었고 나막신도 있었다.
나는 부담의 맨 아래에서 한지로 싸여 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내게 참으로,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었다.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번 들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희 삼춘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어. 형수 젖, 형수 물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다.
그때 문득 내 앞에 환상의 지구역(地球驛)이 떠올랐다. 순간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대신 어린 아기들이 내려오는 곳. 떠나는 늙은 분들 틈에 끼어 앉았을 스무 살의 우리 어머니……. 쪽찐 머리를 보고 혹시 남겨 놓고 가는 아이가 없느냐고 물어서 울린 사람은 없었을까.
서른한 살 때 나는 아이 하나를 얻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기만 하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이쁜짓을 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괜히 저 혼자 방글거리곤 했다. 나는 그러는 아이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다.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났다.
“네 에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너가 배고파서 울어도 좀체 젖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보다 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서야 일손을 놓고 가서 젖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단다.”
그제야 비로소 스무 살 우리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었다. 아이 우는 소리에 타지 않을 어머니 속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들한테 눈치 보일까 봐 자리를 얼른 뜨지 못했을 우리 어머니.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나였대도 때로는 어머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볼까 봐 내 어린 뺌에 볼 한 번 비비는 것도우리 어머니는 참 어려웠으리라.
오늘도 하얀 박 속 같은 스무 살 우리 어머니는 그 앳됨 그대로를 지니고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 가는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신다. 풋콩에서와 같은 비린내 나는 부름이 들릴 듯도 한데……. 그러나 이제는 해송 타는 내음마저도 점점 엷어져 가는 것 같아 나는 참 가슴이 아프다.
- 재활 /공도현
아내는 나를 MRI 촬영실로 들여보내고 이곳저곳으로 나의 사고를 알렸다. 간단한 조사에 의해 이미 뇌출혈로 밝혀진 후였다. 더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고자 찍는 것이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부모님께 알렸고, 가까운 친지들과 나의 친구, 직장으로 전화를 돌렸다.
그날은 2008년 4월 1일이었다. 친구들도, 회사 직원들도 아내의 말을 믿으려고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를 나무라기까지 했다. 아무리 만우절이지만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는 것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도현이같이 건강한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쉽게 믿지 않았다.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때 예방주사를 잘못 맞아 걸린 장티푸스를 제외하고는 앓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내 사고 소식을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만우절이 아니었던가. 몇 번은 속았을 오후 시간이고 보니 그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가족력이 있는데도 과로와 과음으로 몸을 관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고 당일 아내와 같이 친구 공장에 업무상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까지 시간이 있어 잠시 피곤한 몸을 뉘였다. 살짝 잠이 들려는 찰나 찬 기운이 몸을 관통하였다. 몸이 한번 부르르 떨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별 이상이 없어 시간에 맞춰 출발하였다.
화창한 봄날, 오랜만에 아내와 같이 나선 나들이라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웃기도 하였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며 봄을 만끽 하였다. 친구 공장은 영천에 있었다. 아내는 S화재에 근무했기에 내가 연관이 되는 거래처에는 늘 동행했다. 막 청통휴게소를 지나 청통와촌IC로 빠지기 직전에 엑슬레이트를 밟고 있던 오른발의 감각이 없어졌다. 이상하게 생각 했지만, 잠시 후 감각은 돌아왔다.
공장에 도착하여 S화재에서 왔습니다하고 경비실에 말했는데 못 알아듣겠다고 해서 세 번이나 말하고 겨우 통과 할 수 있었다. 메모 수첩이 든 박스를 들고 가다가 팔에 힘이 빠져 놓치고 말았다. 여러 징조로 볼 때 몸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그때까지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마주 앉은 담당 직원이 내 얼굴이 이상하다고 해서 거울을 봤다. 한쪽이 쳐져 있었다. 그때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고 느꼈다.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구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비몽사몽 누워있는데 간호사가 왔다. 다행히 출혈량이 적어 수술은 하지 않고 약물로 치료한다며 한동안 절대 일어서면 안 되고, 베개에서 머리를 떼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천천히 몸을 움직여 봤다. 손가락 발가락은 모두 움직였다. 몸도 이쪽저쪽 뒤척일 수 있었다. 죽지 않고 사지 멀쩡한 게 어디냐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다음날 아버지가 오셨다. 내 손을 잡았다. 많이 놀란 모습이었다. 평생 걱정만 끼치다 이제는 몸 간수조차 못 하여 누워 있었으니 말할 수 없이 죄송했다. 나는 괜찮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숟가락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 그냥 밑으로만 축 늘어뜨려졌다. 아내가 밥을 입에 넣어 주었다.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내가 손으로 입을 벌려 밥을 밀어 넣었다. 웃으면서 국물도 반찬도 넣어주지만, 눈꼬리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순간 아내도 나도 평생 이러면 어쩌나 걱정했다.
병원에는 두 달 남짓 있었다. 원장인 형이 치료는 다 했으니 집으로 가서 재활 운동하고 약 먹으면서 차차 경과를 보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반가웠다. 하지만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화조차 받을 수 없었으니 다른 일이야 오죽했으랴. 한창 열정적으로 일 해야 할 나이에 그렇게 집에서 무위도식 하려니 몸도 마음도 무척 괴로웠다. 당장은 말을 하지 못하고 글씨도 쓸 수 없으니 무슨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게 힘들어 외출을 삼가지만, 괴로운 것은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이 한창 공부할 때였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집에서 빈둥대는 모습만 보여 주는 것이 무척 가슴 아팠다. 아버지는 올 때마다 다른 걱정 하지 말고 몸만 신경 쓰라고 말하지만,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있던 아내가 듣기에는 한숨 나는 말이었다. 나는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고가 난 지 6개월 되자 병원에서 복지카드를 발행해 주었다. 뇌병변장애 4급이었다. 다시 MRI를 찍어 봤다. 뇌에는 시커먼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담당 의사는 훼손된 부분은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니 슬퍼졌다.
그래도 아내는 이제 다 나았는데 뭐 그러냐며 위로해 줬다. 그러고 보니 많이 회복되었다. 천천히 걸으면 누구도 이상을 몰랐다. 글씨도 20자까지는 잘 썼다. 간단한 서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말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으면 정상으로 보였다. 간단한 몇 마디 말은 이상 없이 할 수 있었다. 식사는 혼자 잘하고 술도 한 모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찬 바람이 불더니 연말이 되었다. 고교동기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던 친구가 송년회 준비 때문에 전화가 왔다. 2부 사회를 보라고 했다. 해마다 2부 사회는 내가 쭉 해왔었다. 그해는 내가 말이 어눌하여 대화도 제대로 못 하는데 사회가 웬 말이냐며 사양했다. 그래도 친구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면서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막무가내로 떠맞기는 친구가 야속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친구들 앞에서 어눌한 말투로 행사를 망치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과 함께 나의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뿌듯했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사람 많은데 하필이면 언어장애자에게 사회를 맡기냐하면서도 진짜냐고 되물었다. 아프고 난뒤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이왕 맡은 일 잘해야지 다짐했다.
신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또박또박 한자 한자 읽었다. 쉬운 말은 그런대로 읽었지만, 어려운 말은 몇 번을 반복해도 발음하기 힘들었다. 그날 노래시킬 친구들 이름을 적어봤다. 평소에는 무심코 넘겼지만 무슨 이름이 이렇게도 발음하기 어려운지 몰랐다. 한명씩 크게 불러봤다. "정병무, 강석찬, 백성도". 입을 삐뚤거리며 정확한 발음을 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이시원' '우운하'처럼 쉬운 이름이 나오면 한숨 돌렸고 '김성' '허인'처럼 외자 이름이 나오면 그 친구가 고맙기까지 했다.
평소 하루에 열 마디도 하지 않다가 온종일 집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지르니 아내도 아들도 싫지 않은 듯 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 못 한다고 하라더니 내가 들떠 열심히 고함지르는 모습을 보고는 같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거기는 좀 더 길게 빼세요, 손을 펼치면서 하세요 하면서 코치도 해 주었다. 애들도 다 나은 것 같다며 응원했다. 그동안 집에서 말도 하지 않고 병치레만 하던 내가 신이나 큰소리를 지르며 모션을 연습한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니 애들은 즐거워했다.
지성이며 감천이라 했던가. 하루하루 달라지더니 어느 순간 알아들어 줄 정도가 되었다. 어렵지 않게 신문 사설은 쉽게 읽어 내려갔고, 이름을 부르면 호명 당한 사람이 자기인 줄 알고 대답할 정도는 되었다.
드디어 행사일 되었다. 무척 떨렸다. 아내도 그 친구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부가 끝나고 그 친구가 2부 사회자로 내 이름을 불렀다. 무대로 힘차게 올라갔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 참석자는 내 사정을 잘 몰랐다. 일 년에 한두 번 나오거나, 몇 년에 한 번 송년회라 참석하는 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긴장되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2부 사회를 맡게 된 공도현이라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친구들은 박수로 맞아 주었다. 유독 아내와 사정을 아는 몇 친구들은 더 큰 박수와 환호로써 용기를 북돋아줬다.
준비해간 Y담과 퀴즈로 산만한 주위를 집중시켰다. 노래를 골고루 시키고, 술 취한 막무가내 친구도 말리고, 선물도 적절히 나눠주며 나름 재미있게 진행했다. 큰 실수 없이 끝을 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너무 잘 했다면서 활짝 웃어주었다. 친구들도 한마디씩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고마웠다. 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행사였다.
그날 이후론 가벼운 산행도 하고, 그동안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에게 전화도 했다. 이젠 거의 예전으로 돌아왔다. 뇌졸중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뇌출혈로 고생했지만, 이렇게 이겨 냈다고 당신도 곧 좋아질 거라며 용기를 준다. 오늘도 건강에 유념하며 다시 태어난 나에게 주어진 일이 무언가 생각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
《합평 작품》
결핍 /박새미
오랜 벗에게서 엽서 한 장을 받았다. 맥주 회사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엽서 속에는 영어로 ‘발음할 수 없는 도시로 여행하라’ (Travel to a city that you cannot pronounce)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초록색 바탕에 비스듬히 쓰인 흰 글씨가 하나의 그림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때 막연히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지도에서 지구의 반 바퀴쯤 되는 지점에 손가락을 가져가 본다. 페루의 쿠스코.
비행기에서 내려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또 택시에 올라탄다. 한참 큰길을 지나 굽이진 동네 길로 진입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어 온다. 쿵쾅쿵쾅 요동을 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기분 좋은 떨림이 꼭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러 가는 느낌이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그 시간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들뜬 마음을 숨기려 헛기침을 몇 번 해본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두근거림을 애써 꾹꾹 눌러가며, 마을의 생김새를 눈에 담아본다. 나는 지금 지도에 닿은 손 끝에서만 보았던 지구 반대편에 도착해 있다.
마을은 마치 구름 속에 가려진 요정들이 사는 곳 같다. 드라마 세트 장 같기도 하고 언젠가 엽서에서 본 사진 같기도 하다. 산언덕 위에 층층이 쌓인 집들과 돌 길, 유럽풍의 오래된 성당들이 이국적이다.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잠시 넋을 놓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점점 박동 수가 빨라지기 시작하고 나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괜찮은 걸까?’ 택시가 멈추고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두발로 땅에 서서 방향을 가늠해 본다. 숙소는 돌계단을 몇십 개는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진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계단을 한 칸 한 칸 오를수록 호흡이 가빠진다. 살짝 현기증도 난다. 서둘러 숙소에 가서 몸을 뉘이고 싶지만 금세 숨이 차올라 빨리 걸을 수가 없다. 무슨 일이지? 그제야 지금 이곳이 해발 삼천 팔백 미터라는 것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로 올라오며 낮아진 공기 내 산소 농도로 인해 저산소증이 온 것이다. 서울의 해발이 삼십팔 미터이니 서울보다 백배쯤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높이지만 몇 발자국 떼어보면 금세 온몸으로 느껴진다. 한 발작, 한 발작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의식의 끝을 단단히 붙잡으려 눈을 몇 번 깜빡여 본다.
코카잎을 우려낸 차를 한잔 마시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혈액과 뇌로의 산소 공급을 촉진한다는 효능보다는 코카인이라는 마약이 먼저 떠올랐지만 놀랍게도 맛이 좋다. (마약 성분은 없다). 그러나 상태가 나아지기는커녕 산소의 결핍이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느껴진다. 숨을 연달아 쉬어도 답답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부족함은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다.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실로 괴롭기 그지없다. 숨 쉬기처럼 매 순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비자발적 행위에 대한 자각은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무한한 고통이 되어 버릴까 봐. 그리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증폭된다. 당연한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아 지는 순간 또 다른 의식의 세계로 이끌려간다.
높은 지대에 올라보지 않고 서는 산소가 부족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수 없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이해한다고 했던가. 배고픈 이에게 빵 한 입은, 배부른 이가 남기는 빵 한 봉 지보다 더 큰 의미를 가져온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는 행위를 반복한다. 몸과 마음이 온통 숨을 쉬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다. 당연한 것에 대한 결핍은 머릿속에서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비워진 존재의 빈자리가 말해주는 지나간 것에 대한 가치를 그제야 온몸으로 깨닫는다.
문득, 결핍이야 말로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 듯 너무나도 당연하게 결핍을 느끼는 순간 그것을 채우려는 욕구가 삶의 방향을 만들어 왔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호주로 이민을 와서는 영어의 결핍이 항상 발목을 붙잡았다. 그 후 수년간은 영어에 대한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당시에는 영어만 유창하게 할 줄 알면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영어를 잘하는 것은 겨우 남들과 같아졌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 만으로는 사회에서 나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새로운 결핍은 나를 다음 길로 안내했다.
호주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수업의 주제는 글짓기였다. 원하는 주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지어내면 되었는데, 첫 단어부터 막막했다. 한국에서는 글짓기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데, 영어로 쓰라고 하니 머릿속이 캄캄한 것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글 짓기는 창작보다는 어휘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의 주제를 잘 알아들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었다. 무언가를 써야 하는데, 그간 배운 ‘도와줘’, ‘필요해’, ‘고마워’, 정도의 단어 몇 개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백지와 연필, 그 앞에 덩그러니 놓였던 어린 나와, 해발 삼천 팔백 미터 위에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현재의 내가 오버랩되자 무언가 허탈한 기분이 든다. 아등바등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들 호흡에 집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시곗바늘의 발걸음에 맞춰 호흡을 가다듬는다. 오차 없이 반복되는 리듬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시간은 예외가 없다. 한없이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시간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누구에게 더 가혹하거나 친절한 것 없이 그저 제 갈 길을 걸어간다. 야속하게 느껴지다 가도 그 한결같음에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묵묵히 걸어갈 뿐이지만, 시간은 결여된 많은 것들을, 어쩌면 모든 것들을 해결해 준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인생이 무한대로 흘러가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할 때가 있을 뿐이다.
잠시 누웠다 일어나자 정신이 한결 맑아진 것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이 상황에 적응하자 평온이 찾아온다. 마치 더운 날 땀을 잔뜩 흘리고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처럼, 부족했던 산소가 차오르는 충만한 기분은 불안했던 느낌을 싹 가시게 해 주었다. 잃어봐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어리석은 중생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기 시작한다.
무기력함이 무능함에서 오는 것이라고 느껴질 때, 해발 삼천 팔백 미터에서 나의 작은 어깨 위에 올려졌던 배낭을 떠올린다. 빠른 걸음을 천천히 하고, 오 키로 짜리 배낭을 숙소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잠시나마 틔어지던 숨통을 기억한다.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 속으로 빠져들다 예상치 못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음을 깨닫던 그 실낱 같던 희망의 순간들을. 호흡을 가다듬고, 현재에 집중하며 결여된 것들을 하나씩 채워 나가다 보면 열리게 될 인생의 다음 막을 기대해 본다.
2. 봉귀띠기 /안성아
“이게 누고? 삐나 아니가? 얼라 때는 저거 오라비 한 귀퉁이만도 못하더마, 마이 이뻐졌네”
“안녕하세요” 어린 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엄마 뒤에 숨는다. 욕인지 칭찬인지…매번 고향에 갈 때마다 귀신같이 나와 자기 할 말만 하고 쿨하게 사라지는 저 할매는 우리 할매랑 갑자를 다투는 봉귀띠기다. 출생연도나 택호의 기원 따위는 알 수가 없다. 그냥 늘 사람들이 봉귀띠기라 불렀고, 도랑 위 골목 초입에 아슬하게 붙어 있는 작은 초가집에 사는 할매였다.
봉귀띠기는 사람이 저렇게도 새까말 수가 있나 싶도록 검은 피부색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동양인이 햇볕을 많이 보면 얼마나 검게 탈 수 있는지 실험을 한 표본 같았다. 칠흑 같은 무광의 검은색이 아니라 구두약을 가죽에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발라 광을 낸 듯한 검은 피부색이었는데 그나마 몇 올 남은 흰 머리카락이 이마와 머리의 경계를 알려 주었다. 그 검은 피부가 너무 강렬해서인지 이상하리만치 주름은 없는 얼굴이었고 숱도 없이 쪽 진 머리가 골프공만 하게 달랑거리며 붙어있었다. 어릴 때 나는, 검은 얼굴에 유독 하얗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굵은 목을 가진 봉귀띠기가 동물원에서 본 물개랑 똑같이 생겼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봉귀띠기의 허리는 각도기를 잴 것도 없이 정확하게 90도로 꺾여 있었는데, 속으로 문맹인 그녀를 놀리며 낫 놓고 ㄱ도 모른다는 속담을 씹으며 킥킥거리곤 했다. 막걸리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인지 쇳가루가 목 안에서 타는 듯, 목소리는 걸걸하고 우렁차며 걸음걸이는 씩씩했다. 젊어 과부가 되었고, 자식을 몇 잃었고, 논 밭이 없어도 절대 기죽지 않는 봉귀띠기는 쾌활하고 거칠 것이 없는 여장부 스타일이었다.
봉귀띠기가 나에게 각인된 것은 특이한 외모에서 오는 포스만이 아니다. 어릴 때 오빠가 그 집에 막걸리를 받으러 갔다가 눈을 뜨고 자는 봉귀띠기를 보고 기겁을 하고 돌아와 며칠 오줌을 싼 이야기부터, 방금 도랑 앞에서 빨래 하는 걸 봤는데 돌아서면 뒷산에 있고 다시 고개를 돌리면 남밭을 다 매고 일어나는 봉귀띠기가 어린 나에게는 축지법을 쓰는 도사나,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귀할멈처럼 기괴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런 봉귀띠기의 캐릭터가 호러에서 코메디 쪽으로 기운 것은 텔레비전 때문이다. 전자 제품이 없는그 집에 미닫이가 달린 텔리비젼이 용케 들어가게 된 것은 어떤 특별한 믿음 때문이었다. 봉귀띠기는 텔레비전이 보급된 70년대 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그 안에 모든 이야기를 진짜 사실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매일 밤마다 보는 전원일기, 수사반장,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영화까지, 할매는 모두 실제 상황이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으며 시청했다. 우리 할매를 비롯한 많은 동네 사람들이 가짜로 꾸민 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봉귀띠기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저렇게 사는 동네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 드라마에서 죽었던 배우가 다음 드라마에 또 나오면 비슷하기는 해도 끝까지 그 사람은 아니라고 우기니 이건 이길 장사가 없다. 사극에 대한 믿음은 사극촌에 가보고 더욱 확고해졌다. 그들만의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부럽기까지 하다. 얼마나 행복하고 다이나믹하게, 꿀 맛나게 엿보았을까? 마르지 않는 화수분 같은 이야기 세상을.
봉귀띠기는 또 구두쇠, 차돌이로 유명했다. 평생 세탁기는 물론이고 밥통도 없이 아궁이 가마솥에 밥을 하고, 냉장고도 아까워 사지 않고 해가 지나는 길을 피해서 음식들을 그늘진 벽 뒤로 숨기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마흔이 되기도 전에 이백만원이 넘는 삼베 수의를 맞췄다고 자랑을 했다고 한다. 이리 살아도 저승 갈 때는 제일 좋은 걸 입고 갈 거라고.
유학 후 다시 고향을 방문했을 때, 도랑 앞에 서있던 봉귀띠기 할매의 집은 주인처럼 새까맣게 타 주저 앉아 있었다. 이른이 넘은 봉귀띠기는 밭농사를 마치고 혼자 티비를 보다가 닷새를 앓고 그 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는 봉귀띠기의 등처럼 둥글게 말린 초가지붕이 몇 번이나 뒤돌아 보였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이제 허리를 쭉 펴고 껄껄껄 웃으면서 가셨을까?
그러고도 이십 년이 훌쩍 지났다. 고향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나의 고향은 많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아는 사람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남지 않았고, 아마도 할매 마져 돌아가시면 나의 고향은 흑백영화 필름처럼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람, 귀한 사람들에 대한 회고와 이야기는 세상에 넘쳐난다. 내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봉귀띠기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 고향에 대한 무의식의 독백일지도 모른다. 초가지붕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던 낯익은 저녁 풍경이 내 머릿속 신경회로 안을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3. 황혼에서 영혼으로 /정예지
호주 바닷가 앞 요양원에서의 퇴근길, 마스크를 벗자 온종일 갇혀 있던 한숨이 살랑 부는 바람에 숨을 얹는다. 지친 하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에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 무렵 온종일 바다를 비추며 파랗던 하늘이 황혼에 물들어 가고 있다. 등 뒤로 내리쬐는 황혼빛을 싫어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없다. 고개를 숙인 채 앞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호주에서 치매 전담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부터 나는 황혼빛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들어버린 황혼빛이 치매 노인들의 발그레한 볼처럼 보여서일까? 보랏빛으로 옅어지는 황혼빛이 핏기없어진 그들의 입술 같아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형형색색의 줄지어 있는 구름 조각들마저도 그들 이마 주름처럼 보이는 듯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병동에는 황혼빛이 질 때쯤 창가에 앉거나 침대에 누워 태연히 황혼을 되감는 치매 노인들이 있다. 황혼빛에 물들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은 무거웠던 머리를 점점 가볍게 비워내고, 현재에 얽매이지 않은 채 수시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그때 그 시절의 그들로서 살아간다.
그들의 시간은 빠르게 거꾸로 돌아간다. 내 주된 업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죽박죽된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그들을 내 앞에 불러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우리가 정해놓은 일정을 알려준다. 그들은 영혼이 되기 전 신의 부름을 기다리듯, 다음 일정을 알려줄 때까지 그들의 세상 속에서 겸허히 기다리곤 한다. 그들의 방에는 벽시계가 걸려 있지 않다. 벽에는 그들의 화려한 황금기를 보여주는 사진들만이 걸려 있다. 말도 없이 온종일 침대에만 누워있는 환자들은 사진들만 멍하니 바라보며 하루를 보낸다. 학교 선생님, 간호사, 소방관, 스님, 무용수 등 그들 각각의 시절은 바래진 사진들에서 나와, 그들의 눈동자 속에 머무른다.
오늘 일과를 마칠 때쯤 팀원인 레이첼이 마가렛 방 앞으로 나를 호출했다. 마가렛은 요양보호사들 모두가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항상 스무 명의 환자 중 마지막 순서로 그녀를 돌본다. 키는 179cm, 단호한 인상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나이 칠십에도 자신을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머리를 항상 곱게 빗고 옷을 말끔히 차려입어야만 방 밖을 나왔다. 거울 앞에서 분홍 립스틱을 바를 때면 그녀는 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갖가지 보석들이 어우러진 목걸이들과 반지들을 뽐내며 병동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은 그녀에게 최고의 낙인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옷과 귀금속들을 어쩔 수 없이 벗기려 할 때면 그녀는 폭언과 폭력을 가해서라도 그것들을 지켜 내려 했다.
평소 그녀의 방은 호텔 방처럼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다. 그녀는 그녀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녀 스스로 각 맞춰 정리했다. 젊었을 적에 하우스키퍼였던 걸까. 나는 그녀의 겉모습과 그녀의 방을 통해 그녀가 살아왔던 삶을 감히 짐작하곤 했다.
마가렛 방문 앞, 닫힌 방문 틈 사이로 스며 나온 똥 냄새가 우리를 재촉했다.
“준비됐지?”
레이첼의 물음에 나는 “남자 요양보호사 도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미적거리며 답했다.
“오늘 남자 직원들 다 쉬는 날이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누구라도 그녀를 백 프로 막을 순 없어. 그래도 너가 정 힘들 것 같다면. 음…. 옆 병동에 있는 제인한테 도움을 요청해볼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레이첼이 무전기로 “안녕, 제인!”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익숙한 듯 “안녕! 마가렛 일이지? 바로 갈게.”라며 대답했다. 제인은 5분도 안 돼서 마가렛 방 앞으로 와 주었다. 문을 열기 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번갈아 마주치며 의기를 투합했다. 방문을 열자 화장실을 비롯해 이곳저곳 물똥이 묻어 있었고, 마가렛의 옷과 몸이 똥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마가렛은 이 와중에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똥이 묻은 손으로 그녀의 옷장 속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정돈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전, 기저귀를 안 차겠다는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며 입혔던 기저귀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레이첼은 대번에 기저귀를 찾아냈다. 기저귀는 서랍장 안 가지런히 정리된 팬티들 사이 물똥이 잔뜩 묻은 채로 곱게 접혀 있었다.
마가렛의 옷을 벗기고 샤워시켜야 했다. 그녀의 앞에 서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역할을 정했다. 레이첼과 제인은 마가렛의 손을 양쪽으로 붙잡고 있기로 했고, 나는 그녀가 입고 있는 팬티와 바지를 벗기는 임무를 맡았다. 레이첼이 옷을 벗기려는 이유에 대해 마가렛의 손을 잡고 차근차근 설명하자 마가렛은 레이첼의 눈을 마주치며 경청했다. 마가렛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린 후 마침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마가렛의 눈치를 보며 바지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러자 마가렛이 갑자기 상욕을 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가슴을 거세게 발로 찼고, 순간 제인은 마가렛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몸집이 작고 정년퇴직을 앞둔 제인에게 세차게 뿌리치는 마가렛의 손을 계속 붙잡고 있는 일은 역시 역부족이었다. 마가렛은 자유로워진 한 손으로 레이첼의 뺨을 후려쳤고, 레이첼의 눈 보호 고글이 날아갔다. 그 순간 레이첼의 입에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육두문자 한마디가 나왔다. 그러던 중에도 레이첼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자 마가렛은 낙타처럼 눈물이 고여있는 레이첼의 눈으로, 얼굴로 쉴 새 없이 침을 뱉었다. 당황할 틈도 없이 제인과 나는 다시 달려들어 그녀의 윗옷을 벗겼다. 그러나 마가렛은 손끝에 동글동글 말려져 있는 옷자락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한 상황은 계속 반복되었고,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마가렛의 샤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제인은 자신이 손을 놓쳐서 정말 미안하단 말을 다섯 번이나 하고 나서야 그녀의 병동으로 돌아갔다. 레이첼의 볼은 그새 빨갛게 부어 있었다. 레이첼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고글을 주우며 물었다.
“마가렛을 혼자 샤워시킬 수 있겠어? ”
좀 전에 맞았던 갈비뼈 마디가 욱신거렸지만 나는 괜찮다고 답하며 샤워기를 집었다. 레이첼은 잠깐 화장실에 가서 얼굴만 정돈하고 금방 돌아오겠다며 방을 떠났다. 레이첼이 정신없이 돌아왔을 땐 내 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샤워기는 마가렛 손에 들려 있었다. 마가렛은 샤워기로 내게 물을 뿌리는 것이 엄청 재미있는지, 양 볼이 노을빛을 띤 채로 킥킥거렸다. 나는 괜히 너스레를 떨며 “레이첼, 미안! 내가 졌어. 마가렛이 나를 샤워시키고 있어.”라고 말했다. 요양보호사를 13년째 하고 있다는 레이첼은 “그래, 우리가 항상 이길 순 없지.”라며 나를 보고 호탕하게 웃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샤워를 마친 후, 나는 이곳저곳 남아있는 물똥 자국들을 닦았다. 우연히 보게 된 벽면에는 농구선수 전성기 시절, 그녀가 MVP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이 아주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를 나는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샌가 자신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 고개를 들고 황혼빛을 마주한 채, 뒤로 걸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 본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고 조마조마하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덜 드는 느낌이다. 어쩌면 조각난 과거 속을 넘나들며 거꾸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절망적이고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분적으로 잊혀야만 아름다운 기억들이 있고, 잊는다고 잊히면 좋은 시절도 있을 것이다. 신비로운 황혼빛이 내리쬐는 이곳에는 황혼에서 영혼으로 가는 시간을 되감아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4. 무늬 / 손양희
수예품들이 주욱 걸려있다. 각종 퀼트와 손뜨개 작품들이 화려하게 벽면을 채우고 있다. 가지각색의 색감으로 어우러진 다양하고 화사한 무늬들이 시선을 끈다.
어떤 계획들이 틀어지고 문제들이 발생하자 좌절감이 고개를 들게 되고 무기력하게 지냈다. 이럴 때 나이테 같은 삶의 무늬는 어떻게 짜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느슨해지고 코도 빠지고 삐뚤빼뚤 우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이 생을 마감할 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짜낸 생의 무늬들을 펼쳐 본다면 어떤 무늬를 하고 있을는지… 엉터리 무늬로 헐렁헐렁하게 짜인 것은 내가 봐도 후회막심일 것이다. 누가 대신 짜줄 수도 없지 않은가… 우유부단하며 남의 눈치 보며 살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주체성이나 자율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나의 상황과 환경, 자질과 인성 안에서 일상을 통해 날마다 짜이는 삶의 무늬. 가장 고독한 순간에 인생 항해의 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내가 줘야 하듯 인생의 바늘로 짜내는 무늬도 나의 책임이고 몫이다.
마지막 들숨과 날숨을 몰아 쉴 때, 환경과 과거, 운명과 누군가를 탓할 수 있겠는가. 무늬들을 망가트렸다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며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가.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막을 내릴 것인가. 위로나 도움을 바라며 남이 대신 완성시켜주길 바랄 것인가. 그도 아니면 우울과 무기력 상태로 눈을 감아버릴 것인가. ‘데려가려면 데려가시오’라고 오기와 배짱으로 버틸 것인지. (아~ 내겐 그런 오기와 배짱도 없다)
삶의 장막은 드리워졌고 죽음의 천사가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내일을 반납하고 신에게 항복해야 하는 순간에 마지막 바늘을 움직이고 작품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 지루한 지금이란 시간만이 자신의 무늬를 짜낼 수 있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일 뿐… 지금을 천대하지 마라. 우울과 무기력, 원망에게 지금의 무늬를 내어주지 마라. 그 책임은 고스란히 네게 돌아온다.
무늬의 색상과 패턴은 선택 가능하다. 그것은 상황과 환경, 운명에 대한 태도이자 반응이다.
돌 짝귀를 돌듯 우울과 무기력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을 것인지, 자신의 할 일을 성실히 찾아 도전하고 마무리하며 보람 속에 성장하고 달란트를 사용할 것인지. 자신의 관점과 반응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칙칙하고 엉성하게 마무리가 덜 되었거나 아니면 적절하게 짜인 무늬들과 야물스런 마무리들이 다시 부드럽게 연결된다면 작품은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리라.
압박하는 돌의 무게에 버겁게 눌러서 고유의 특성과 향기를 잃어버리고 무색 무미 무취의 흐릿하고 밋밋한 무늬를 성기게 짜며 지내온 지난 날들... 그러나 전체 무늬를 완성시킬 때 앞의 무늬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후반부의 무늬들이 조화로운 균형미를 보인다 할지라도 반쪽짜리 완성품에 불과할 것이다.
큰 관점에서 바라보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사필귀정’, ‘모든 것이 연합하여 선을 이루기 위하여’의 용트림 과정 중이라는 표징이지 않을까. 인생의 무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진행 과정 중에 실수가 반복되고 경험들을 통해 배우야 하는 단계라는 표시이다. 경험이 적으면 실수는 덜하겠지만 제때에 배워야 될 것을 배우지 못하거나 때 늦게 동일하거나 유사한 뼈 아픈 경험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바꿀 수 없는 남에 대하여 상관하고 길게 참견하거나 너저분한 불평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인도의 서커스단에서는 아기 코끼리를 작은 말뚝에 묶어 키운단다. 실패의 좌절감에 길들여진 코끼리는 성장한 후에도 그 작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도망치지 못한다고 한다. 내 맘 속에도 아기 코끼리 말뚝이 여러 개 있었다.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닫고 지낸 세월들이 길었다. 늦게나마 잘못된 두려움의 말뚝을 뽑아내고 필요한 시도와 실수를 통하여 배우며 그려나갈 새로운 무늬들은 어떤 것일지 자못 궁금하다.
저 벽면의 작품들처럼 내 삶이 그려 낸 무늬들을 문득문득 보게 될 것이다. 수저를 놓고 흙으로 먼지 되어 돌아가야 할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파노라마로 짜악 펼치질 무늬들… 먼저 간 아들이 마중 나올 때 보여 줄, 중년의 고개를 넘으면서 고르고 다양하게 독특한 색상과 무늬들이 조화롭게 들어간 완성품이라면… 얼마나 뿌듯한 해후가 될 것인지… 생이 짜낸 무늬들을 바라보면서 흐뭇하고 평온하게 숨을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