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국천주교 서울 순례길 3코스(1)
(서울역∼당고개성지, 2023년 2월 4일)
瓦也 정유순
3코스 출발지점은 약현성당이나 교통편의 상 서울 역부터 시작한다. 서울역은 서울시 중구 봉래동과 용산구 동자동에 있는 기차역 및 지하철역으로 1900년 경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 남대문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3년 다시 경성역으로 바뀌었고, 1925년 역사(驛舍)가 준공되었다. 1946년 광복 1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명칭인 경성부를 서울시라 칭하기로 한 서울시 헌장이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서울역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울역>
서울역 광장에는 왈우 강우규(曰愚 姜宇奎, 1859~1920) 의사 동상이 서 있다. 1859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한 강우규 의사께서는 일제가 3.1운동으로 고조된 조선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소위 문화정치를 내세워 총독을 교체할 때 새 총독인 사이토(齋藤)가 부임하는 날 행사장인 서울역에서 총독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여 현장에서 총독 폭살은 실패했지만, 그곳에 모인 일제 관리 등 37명을 사상케 하여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고,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왈우 강우교 의사 동상>
옛 서울역 위로 가로질렀던 고가도로는 <서울로 7017>로 바뀌었다. <서울로 7017>은 노후(老朽)된 옛 서울역 고가도로를 개·보수하여 만들었다. <서울로>는 서울을 대표하는 사람 길과 서울로 향하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7017의 ‘70’은 서울역 고가가 만들어진 1970년을, ‘17’은 공원화 사업이 완료될 2017년과 17개의 사람 길, 고가차도의 높이인 17m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서울로 7017>
서울역 청사를 건너 서울역(서부) 앞으로 하여 만리재로 발길을 옮긴다. 만리재는 중구 만리동2가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세종 때 학자 최만리(崔萬里)가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해마다 정월 보름에 이 고개에서 삼문 밖과 애오개 사람들이 돌팔매로 편쌈(석전)을 하는데 삼문 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애오개가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용산과 마포 사람들은 애오개 편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만리재>
조선 때 한양에는 동쪽의 왕십리와 서쪽의 삼개(마포)라는 성 밖의 마을이 있었는데, 왕십리사람들은 미나리 등 채소류를 재배하여 성 안에 팔았고, 삼개사람들은 소금과 젓갈류를 팔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포사람들은 젓갈이나 소금을 지고 동쪽의 아침 해를 보며 만리재를 넘었기 때문에 얼굴이 검었고, 왕십리 사람들은 해를 등지고 도성 안으로 들어와 뒷목이 검었다고 한다. 지금도 만리재는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이지만,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세곡(稅穀)이 들어오고 해양으로 통하는 요지였다.
<배문고등학교>
만리재 마루에서 좌측 효창원로를 따라 들어가 배문고등학교를 지나면 효창공원이 있다.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선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묘원이다. 원래 이곳은 조선조 정조(正祖)와 의빈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5세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무덤이 있던 효창원으로 수림이 울창하였던 곳을 일본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여 훼손하더니 급기야 1944년에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로 이장하고 효창공원으로 만들었다.
<효장공원 안내도>
해방 후 김구선생은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삼의사묘역을 만들고 안중근의사의 가묘(假墓)를 나란히 모셨다. 또한 임정요인인 이동녕·조성환·차리석선생의 유해를 모셔 임정요인묘역을 조성하였다. 백범 김구선생은 1949년 6월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하여 이곳에 묻힌 후 이 일대가 선열묘역이 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공원 안에는 이곳에 묻힌 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義烈祠)와 백범기념관 등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 묘>
<백범김구기념관>
특히 주검을 수습하지 못해 가묘를 한 안중근(安重根)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배와 가슴에 검은 점 7개가 있어 아명이 응칠(應七)이다. 안중근은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교의 진리는 믿되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면서 “외국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종놈이 된다.” “만일 우리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친다면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을 통용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서 날 것이며,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서 살 것인가?”라고 했다.
<삼의사 묘 *맨 좌측은 안중근의사 가묘>
<의열사>
효창공원에서 효창원로를 따라 효창공원앞역에서 백범로 큰 길을 건너면 ‘경의선 숲길’이다. 이 숲길은 경의선의 지하화에 따라 생긴 약8만여㎡의 부지를 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50년간 무상임대 받아 용산구 효창동에서 마포구 연남동까지 6.3㎞ 길이의 폐철 길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탈바꿈 시킨 서울의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일부 구간에서는 경의선 시절의 철길및 건널목을 재현해 놓았다.
<효창운동장>
경의선 숲길을 지나 용산구 신계동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당고개 순교성지’가 나온다. 당고개는 문배산(문평산) 기슭에 있던 고개로 옛날 고개마루턱에 당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당현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고개는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곳으로서 서소문 밖 네거리, 절두산, 새남터 등 서울의 4대 순교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일제 때는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신사를 지어 놓았는데 광복 후 없애버렸다.
<당고개성당>
기해박해 때인 1839년 12월 27∼28(음)일 이틀 동안 이인덕(마리아), 홍병주(베드로), 홍영주(바오로), 이경이(아가타), 권진이(아가타), 최영이(바르바라), 이문우(요한), 손소벽(막달레나), 박종원(아우구스티노), 이성례(마리아) 등 천주교 신자10명이 처형당한 곳이다. 이곳이 처형장이 된 이유는 본래 처형이 이루어지던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의 인근 상인들이 장사가 잘되는 설 대목에 처형장소를 옮겨달라고 요청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고개성당 내부>
그 중에 아홉 명이 천주교 성인으로 기려지고 있는데 최경환 성인(1839년 기해박해 시 순교)의 부인이며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는 마카오로 유학을 가 있던 맏아들 최양업을 제외한 다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결국 당시 세 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옥에서 굶어죽고 말자 이성례 마리아는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일시 배교하고 옥을 나간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동냥 나간 사이 스스로 다시 옥으로 돌아와 갇히게 된다.
<당고개성지 입구>
<당고개성지>
6세에서 15세까지의 네 형제는 부모들이 갇혀있는 옥에 찾아가면 자신들 때문에 부모들이 배교할 것을 우려해 동냥을 해가며 살아간다. 그 후, 어머니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희광이(사형 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순교한 이성례(마리아)는 일시적이나마 배교한 사실 때문에 성인으로 시성되지 못하였다.
<이성례(마리아)와 희광이>
이성례(마리아)는 어린자식들 때문에 한 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이유로 오랜 기간 시복시성에서 제외되었다가 2014년 8월 14일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복녀로 시복되었다. 한국교회는 1986년 문배산 마루에 순교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하였으나 2008년 주변 아파트건립공사로 철거되었고, 2011년 신계역사공원 안에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로 새로 조성하였다.
<최양업신부 가족>
당고개 성지는 용산전자상가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인 작은 언덕에 있다. 이러한 애절한 사연 때문에 당고개 성지는 많은 순례 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순교성지다. “이제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신부)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이성례복자의 유언이 매화꽃 향기처럼 당고개 순교성지를 환하게 밝힌다.
<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로...>
https://blog.naver.com/waya555/223008533153
첫댓글 찔레꽃 아픔과 매화꽃 향기로 가득 찬 어머니의 성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역으로 주변에 많은 유적지가 복원된다는 의미는 곧 미래가 밝다는 의미가 될 듯...
그렇죠.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며 내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도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