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리라" -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요?
성경은 신앙을 하는 사람 들을 항상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 왕의 잔치에서 예복을 입은 사람과 입지 않은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
두 부류는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부류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공처가와 애처가의 이야기만큼 적당한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처가와 애처가는 둘 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아내를 끔찍이 위하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둘 다 회사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를 도와주고 아내의 수고를 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기에는 둘 다 부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를 끔찍이 대하는 동기와 이유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애처가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를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모든 일을 하는 동기입니다.
그러나 공처가는 다릅니다. 공처가는 왜 아내를 끔찍이 위하느냐? 목적은 딱 한 가지입니다. 혼나지 않기 위해서 입이다.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혼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아내를 돌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애처가는 언제나 아내에게 더 잘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그러나 공처가는 언제나 혼나지 않을 만큼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들도 공처가의 신앙과 애처가의 신앙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들은 이미 주신 용서와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 들은 구원받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이 무엇인지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일만 하고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공처가의 신앙입니까? 애처가의 신앙입니까?
이 둘의 신앙은 예수님의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자신이 비록 그토록 배은망덕하였을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은 한 번도 아들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는 탕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공처가의 신앙이 아니라 애처가의 신앙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형의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형은 항상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형의 신앙은 애처가의 신앙이었을까요? 아니면 공처가의 신앙이었을까요?
공처가의 신앙과 애처가의 신앙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입니다. 죄를 범한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는 것을 단순히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깨달은 사람들, 그 사람 들은 비로소 애처가의 신앙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6장을 시작하면서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어떤 사람 들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쉽게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가 죄짓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계속 죄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그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깨달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울은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자비를 깨달은 사람 들이라면,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바울은 이제 로마서 6장에서 그 부분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위 본문을 읽고 잠시 아래의 질문들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1.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2.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무슨 말일까요?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우리가 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이 죄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죄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의 핵심은, 바로 이 구절에 있습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이 문장을 두 부분으로 나눠보면,
"여기라" - "너희 자신을 죽은 자가운데서 산자가 같이"
"드리라" - 하나님께
이 두 가지가 죄에 대한 승리를 끌어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키입니다.
"여기는" 것과 "드리는 것" - 이 두 가지를 알면 죄에 대한 승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는 것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면, 이미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여기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이처럼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1)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
(2) 예수 안에서 산자로 여기라.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우선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이미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는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여전히 숨 쉬며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지금의 "나"는 새로 태어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내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또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나" 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돌아가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예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나" 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몸이었던 예전의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위 에서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전 인류는 죄를 한번 도 짓지 않은 것과 같은 의를 소유한 백성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를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받아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그분의 죽음으로서 대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누구의 소유인가?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나" 이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는 내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예수님의 소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지금 우리의 "나"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스스로 져야 하므로, 영원한 멸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하는 사람 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 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새 생명 또한 예수님의 것을 인정하는 사람 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얻은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셨지만, 결코 강제로,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그분의 소유가 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누구를 섬길지를 선택하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의미는 누구를 우리의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 것인지를 선택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사단에 팔린 후에는 우리 선택권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단의 종으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진심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지시고, 이제 다시금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결정해다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선택하든 결정은 너의 몫이다."
인류의 모든 개인 들은 다시 한번 시험을 받는 것입니다. 누구를 섬기기로 선택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 에게 속아서 사단을 선택하였었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선택은 실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6000년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사단이 어떤 존재인지가 온 우주 만물 가운데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토록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시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이 이제 밝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인류는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셔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으니, 이제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로 결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뜻이 우리의 삶에 실현되도록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나눠봅시다.
1. 죄에 대하여 죽은자로 여기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 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5. 오늘 내가 그분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나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