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단풍 속으로
김규련
가을이 깊어 간다. 단풍을 보러 가고 싶은 친구들이 모였다. 코로나로 답답했던 친구들은 기차를 타고 떠나자고 환호 송을 울렸다. 그리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가까우면서도 늦가을 단풍이 고운 그리고 산이 많아 공기가 좋은 시애틀을 가기로 정했다.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세우는 과정도 신이 났다. 여행사를 통해 가는 것이 아니기에 기차표부터 알아보았다. 얼바인에서 시작하는 기차를 타고 가다 버스로 갈아타고 또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새크라멘토에 도착한다. 힘들고 번거운 길인 줄 알았지만, 모두는 기꺼이 동의했다. 기차여행의 추억을 만들자는 맘이 더 컸었고 즐거움이 배가 될 것 같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엠트렛( Amtrak) 이 기차가 없는 곳은 버스로 연결해 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온라인에서 보니 버스는 그레이하운드처럼 크고 편한 버스여서 다행이었다.
실행에 옮긴 친구들은 시애틀에 가는 길은 기차와 버스로, 돌아올 때는 항공편 완행의 예약을 시작했다. 모두 같이 한꺼번에 표를 사니 기찻값도, 비행깃값도 매분 몇 불씩 오른다. 다 같이 살 때 생기는 부작용이다. 그러나 또 그것을 안 사면 같이 갈 수 없으므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돈을 조금씩 더 갹출해야 했다. 호텔 예약도 내친김에 하고 예약 취소가 안 되는 거로 했다. 마음의 동요를 없애고 꼭 어떤 일이 있어도 갈 것 이란 각오로 예약을 마쳤다. 우리는 모두 여행을 떠날 생각에 행복했다. 몇 명의 친구들은 기차를 처음 타 본다는 기차여행에 단풍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것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기차를 타고 가며 볼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으로 이미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정에 힘든 시간이 숨어 있음을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는 걸까?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 드디어 떠나는 날 각자가 얼바인 엠트렛 기차역으로 모였다. 길 건너에 있는 트렙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차여행이 시작되었다. 칠순이 넘은 네 명의 할아버지와 네 명의 할머니들이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다. 이 기차는 완행으로 샌디에이고 (Sandiego) 에서부터 떠나 엘에이, 유니언 정거장이 종착역이다. 유니언 역은 오래된 건물이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고풍을 지니고 있었다. 가끔 노숙자들이 샤워도 하고 화장실도 같이 쓰는 것 같기는 했다. 그곳에서 2시간 여 기다리면서 각자가 싸 온 떡이며 땅콩 과자 등을 나눠서 먹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베이커스필드로 2시간 반 정도 가야 한다. 우리는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두 명씩 네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반가운 소낙비가 그날 그 시간에 내려오는 데 너무 낭만적이었다. 엘에이에 모처럼 오는 비를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떠나는 버스 여행도 신선하다고 느꼈다. 세상이 비로 씻기어져서 깨끗하여지고 먼지로 가득했던 나무들이 빤짝빤짝 빛난다. 싱그러운 11월 가을 여행이었다. 마음이 편해지면서 여행 오길 잘 했다 싶었다.
베이커스필드에 도착하니 굵게 내리던 비가 가랑비로 바뀌면서 차츰 멈추었다. 이곳에선 내리자마자 기차를 다시 타야 한다. 우리 팀은 재빨리 가방들을 끌고 기차역으로 몰려갔다. 마침 기차역과 버스정거장이 가까운 곳이라 다행이었다. 이곳에서 기차를 타면 4시간가량 타고 스톡턴 역에 내릴 예정이다. 스톡턴( Stockton)은 간이역으로 지나가는 곳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도시이지만 이곳에 패시픽(Pacific) 이란 이름의 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이 있는 곳이라 한국 교포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도시로도 유명하다. 나지막한 빌딩에 넓은 잔디와 느티나무들이 열병처럼 서 있는 시골 경치의 아름다운 도시를 보니 이곳도 가을이 깊숙이 찾아 들었음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된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만끽하고 있었다.
스톡턴에서 새크라멘토까지는 1시간 반 버스 길이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벌써 밤 8시 45분이다. 컴컴한데 달려가는 길은 보이지도 않고 피곤이 몰려온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8시 30분까지 얼바인 기차역에 도착한 생각을 하니 벌써 12시간을 길에서 헤매고 다녔구나 싶다. 그러다 밤 10시가 되어 새크라멘토 역에 도착하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짐을 내려놓고 이제 마지막 밤 침대칸으로 20시간을 더 달리면 시에 틀이라고 생각하니 피곤도 견딜만 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안내방송은 우리가 타려는 기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떠나는 시간이 늦어질 거란다.
새크라멘토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 청사가 있는 수도이다. 정거장 대기실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박한 건물에 오래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늦은 밤 이어서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도 몇 명 없었다. 우리는 저녁도 못 먹고 지친 몸을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긴 나무 벤치에 각자 눕거나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물이라도 사러 간다던 리더가 좋은 방이 있다고 우리를 안내해 데려갔다. 그곳은 침대칸에 가는 사람만 쓸 수 있다는 대기실이었는데 여러 개의 기다란 소파와 의자가 몇 개 있었다. 아늑하고 덜 추웠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잠바랑 셔터를 한 벌씩 더 껴입어야 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우리가 탈 기차가 언제 고쳐져서 언제 떠날 줄은 모른다고 했다. 다만 30분 간격으로 텍스 문자가 올 뿐이었다. 텍스에는 매시간 시간 늦어진다는 문자만 보내 왔다. 12시를 지나 1시, 2시, 3시, 4시 매시간 누웠다 앉기를 반복하며 노숙자가 따로 없다고 넉살을 떨고 그 우울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와 보려고 들 노력했다.
집 떠나오면 고생이라고 하더니 집 떠난 지 12시간도 안 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우린 이것을 자처하고 나온 여행 아니던가. 아무도 괜히 여행 왔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름 잘려고 노력 하지만 막상 잠을 자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기차가 떠날 줄 몰라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대기실에도 몇십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미국 사람들은 인내심이 참 많은 것 같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 아침 5시가 되니 방송이 나온다. 기차 앞부분이 부서졌는데 새 엔진을 바꾸고 고쳤으니 떠날 수 있단다. 모두 기지개를 켜고 이만하길 다행이란 생각 했다. 충돌사고가 먼저 난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할 일 인가 싶다. 나쁜 상황에서도 감사 할 조건을 찾으라고 배웠던 게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모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침대칸에 탔는데 모두가 너무 실망이다. 침대칸까지 가는 층계가 너무 좁고 가팔라서 나같이 왜소한 사람도 겨우 올라갈 정도의 스페이스뿐이다. 이 층에 있는 내 침대 방으로 가니 침대칸, 칸을 커튼으로 휘장을 해서 곁에 침대방과 사이를 두었고 키가 5피트 정도 되는 사람이 누우면 될 정도의 침대가 벙커 침대로 놓여있다. 체격이 큰 남편들은 이 층에 여자가 올라가고 남자는 올라갈 생각조차도 하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이층 침대는 아이들 자동차 시트 벨트를 잘 때 떨어지지 말라고 준비되어있었다. 모두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어떤 친구는 남자가 아래층에서 자고 여자가 올라갔고 어떤 친구는 둘 다 아래층 침대에서 칼잠을 잤다고 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6시 아침밥을 먹으로 식당으로 갔다. 커피에 달걀부침에 베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맛있게 먹었다. 침대칸 운임료가 비행기 표값의 4배가 넘었다. 아침, 점심, 저녁값이 포함되었고 양식으로 고기에 생선에 맘껏 원하는 것으로 먹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식사 후 라운지로 옮겼다. 큰 유리창 문이 사방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그 앞으로 의자들이 한일자로 놓여있다. 곁에 사람과 소곤거리며 얘기도 하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라운지는 우리에게 관광 코스 중 일등 좌석이다. 밖이 안과 같이 밝아 내가 마치 밖에 앉아 있는 착각마저 든다. 북가주 새크라멘토에서 오리건을 지나기 전까지 기차는 푸르디푸른 크라 메스(Klamath Lake) 호수를 끼고 맑고 맑은 물과 협곡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또 졸졸 흐르는 산골짝 계곡물과 자연 그대로 민낯의 단풍이 가득 찬 나무 사이를 몇 시간이 지나간다. 어떤 곳은 해가 돋는가 싶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엉성한 가을 단풍 사이를 촉촉하게 내려앉는다. 아름다운 단풍의 경치가 순간순간 지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장관을 보여준다. 곁에 있는 친구의 얼굴이 노랑 단풍으로 변했다, 주황 낙엽으로 변했다 하는 모습이 창가에 어린다. (아주 좋아요.) 이곳 가을 단풍은 노란색의 나뭇잎들이 주로 많다. 메인주나 벌몬 같은 데서 보던 붉고 정열적인 단풍과는 또 다른 은은함과 소박한 느낌이다. 마운튼 셔츠타 (SHASTA)를 지날 때는 안개가 짙어서 산 윗동이 만 보였다. 만년설에 쌓인 산은 동양화 풍경인 양 마치 한 장의 그림 이다다. 기차가 사고가 나지 않고 예정된 시간에 떠났다면 이곳을 밤 자정에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쁜 풍경을 다 놓치고 잠을 자고 갔을 장소였다. 그렇다고 생각하니 인생의 반전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찾아오는 듯싶다. 아침에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 여행이 되었다. 세상은 내가 계획 했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고 불평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이 여행의 시작은 어려웠으나 예상치 못한 일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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