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질투는 나의 것
술기운 키스의 말로는 참혹했다. 진환과 민정의 묘한 기류를 파악한 정자의 중매 본능이 깨어났기 때문이었다. 박정자 여사의 인연 만들기 프로젝트의 서막이 올랐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정이 든다는 박정자 프로젝트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됐다. 어젯밤 기억에 진환의 눈길을 피하던 민정은 아침부터 꼼짝없이 포도밭으로 향했다.
포도의 잎사귀 사이로 여름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잎사귀를 솎아 내던 민정이 하늘을 봤다. 얼굴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가웠다. 속을 풀어주는 북엇국의 힘도 시들해지는 것 같았다. 민정은 포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진환을 찾았다. 포도 잎사귀를 솎아 내고 있던 진환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민정은 포도 뒤로 얼굴을 숨겼다.
‘완전 덤덤하네. 술버릇이 키스하기인가. 정말 그런 거야?’
진환이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민정은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내심 아쉽기도 했다. 술버릇이 키스하기라면……아! 서운해 미칠 것 같았다. 누구는 설레서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일해라.”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진환의 모습에 민정이 화들짝 놀랐다.
“엄맛! 놀랐잖아요.”
“허튼 생각하고 있으니 놀랐겠지.”
“사장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거죠.”
여름의 햇발이 민정의 눈에 스몄다. 사방에 번진 햇살에 진환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실눈을 뜨고 진환을 보고 있던 민정의 시선이 불그스레한 진환의 입술에서 멈췄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탐하던 진환의 입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민정은 진환의 숨이 남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진환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봄이 와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속은?”
“괜찮아요. 아! 일이나 해야겠다. 빨리 일해야 점심도 빨리 먹죠. 그럼 저는 저쪽가서 일할게요.”
민정은 포도밭 입구로 걸어갔다. 힐끔 뒤를 돌아보다가 진환과 눈이 마주친 민정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진환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는 거칠게 잎사귀를 땄다. 진환은 자신의 이상형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자상함이라고는 코빼기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오히려 여자 여럿 울리는 천하의 죽을 놈이 진환과는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꿈에 그리던 남자와 하나도 맞는 것이 없는데도 민정은 진환을 마음에 담아버렸다. 이제는 진환이 내뱉는 가벼운 말에도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될 것이었다. 작은 행동에도 갖가지 의미로 포장을 하겠지. 그것도 마왕한테! 대마왕한테! 평탄하지 않은 미래가 자꾸만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민정은 시무룩해졌다.
“덥냐.”
“또 여기는,”
진환은 뙤약볕에 삐질삐질 땀을 흘리는 민정에게 밀짚모자를 씌워 주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주웠는데 잘 어울리네. 모자 하나 썼는데 천생 일꾼처럼 보여.”
“사장님도 꽃무늬 바지 입으니까 천생 일꾼 같거든요! 일꾼답게 열심히 일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죠.”
진환의 놀림에 설렜던 마음이 투덜거림으로 바뀌었다.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천생 일꾼? 부드러운 말이라도 기대했던 민정이 입을 쌜쭉거렸다. 진환의 말에 괜스레 마음이 상해 거칠게 잎사귀를 따면서도 민정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시원한 부채라도 빌릴 걸 그랬나. 진환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면서도 민정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포도밭에서 일을 하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해가 움직였다. 해는 최고의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에 따라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민정은 부엌으로 들어가 점심거리를 찾았다. 전기밥솥을 연 민정의 표정이 굳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은 물론이거니와 국도 갈비찜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밥이 없어요.”
부엌으로 나온 민정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냉장고에도 아무것도 없구.”
“그게 무슨……아무래도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으라는 계시인 것 같다.”
민정과 부엌으로 들어간 진환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요리프로그램을 방불케 할 만큼 식재료부터 행주까지 말끔하게 세팅이 되어 있었다.
“진짜아! 할머니!”
정자의 중매 본능을 그제야 파악한 민정이 빽 소리를 질렀다. 마을 회관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던 정자가 민정의 목소리라도 들은 듯 창밖을 힐끔 쳐다봤다.
“친해지는데 요리만한 것이 없지.”
정자가 고스톱 패를 세차게 내려치면서 말했다. 민정의 요리 실력을 검증해본 적은 없었지만 며느리를 닮아 꽤 솜씨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정자의 얼굴에는 여유가 감돌지만 민정은 눈앞에 캄캄했다.
요리라닛!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탄맛이 나는 제육복음을 만들어 내는 이 손으로 요리를? 절대 안 돼! 진환에게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당할 것이 빤했다. 아름다움과 요리로 모두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민정은 무조건 내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무조건 내빼는 것이 상책이다.
“요리는 할 줄 아냐.”
“당연히! 잘하죠. 프랑스 요리부터 궁중요리까지 다 할 줄은 아는데……이거 뭐 재료도 없구. 일사병이라도 걸렸나. 머리도 어질어질하기도 하구.”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
“허! 자신이 없기는요. 해요. 해! 먹어보고 감동 받았다고 울지나 마세요.”
진환이 던진 미끼를 민정은 덥썩 물었다. 민정은 입이 방정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무슨 재주로 감동의 요리를 만들어내나. 완벽하지 않은 솜씨가 들키지 않을 정도의 쉬운 요리를 생각하기 위해 민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계란말이가 좋을 것 같았다. 된장찌개도 된장을 풀고 야채만 썰면 되겠지. 민정은 인터넷의 힘을 믿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렇게 되면 소원이 없겠네.”
“걱정 말고 앉아 계세요. 산책도 좀 하구.”
민정은 진환의 등을 떠밀었다. 진돗개가 마당으로 나온 진환을 격하게 반겼다. 진환이 진돗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째 볼수록 정감가는 녀석이었다. 진돗개가 부드럽게 진환의 손을 핥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에 진환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진환을 따르는 진돗개가 기분이 좋아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진환을 힐끔 보고 있던 민정이 팔을 걷어붙였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인터넷에서 된장찌개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친절한 설명에 자신감이 솟았다.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민정이 칼을 들었다. 감자의 껍질만큼 속살이 떨어졌다. 정신을 집중하면서 칼질을 하고 있는 민정은 진환이 부엌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민정의 칼질에 불안한 것은 오히려 진환이었다. 민정이 껍질을 벗기는 감자마다 급격하게 크기가 작아졌다. 손이라도 베일 것 같은 폼에 진환은 민정이 걱정됐다. 손이라도 다치려면 어쩌려고.
“줘.”
결국 진환이 민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편하게 앉아있으셔도 돼요.”
“칼질은 내가 할 테니까 가서 육수나 내고 있어.”
“제가 할 수 있기는 한데……지금은 일손이 워낙에 부족하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민정이 선심 쓰듯 진환에게 칼을 건넸다. 말이라도 못하면……진환은 고개를 저으면서 능숙하게 야채를 썰었다. 도마를 스치면서 울리는 명랑한 소리에 다시마를 팔팔 끓이고 있던 민정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입이 벌어지는 솜씨였다. 여름에 제철이라는 풋고추도 진환의 손끝에서 정갈하게 썰렸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칼질만 하겠다고 나선 진환은 어느새 부엌의 일을 진두지휘했다. 계란말이를 스크럼블로 만드는 신비로운 재주를 가진 민정의 솜씨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일정한 크기로 썰린 애호박과 감자를 접시에 담는 진환의 눈치를 보면서 인터넷 레시피를 보던 민정은 진환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칼질이……어후! 무슨 자격증 있으신 건 아니죠?”
“있는데.”
“무슨 자격증이요?”
“한식조리기능사.”
인터넷 레시피에 의존하던 민정은 한껏 긴장을 했다. 요리프로그램에서 심사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암기력과 감각만을 믿고 민정은 간을 맞추었다. 된장이 풀린 국물에 야채를 투하하니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연경의 어깨너머로 봤던 된장찌개 조리법을 떠올리면서 민정은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솔솔 뿌렸다.
“냄새 죽이죠.”
“음식을 냄새로 먹냐.”
“그래도 대충 감이 오잖아요. 맛이 있을 거라는……아! 상 좀 펴야겠다.”
자신감이 넘치는 민정이 부엌을 나갔다. 민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진환은 숟가락을 들고 된장찌개 국물을 맛봤다.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칼칼한 된장찌개의 맛에 진환은 흠칫 놀랐다. 빠르고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설령 일주일을 굶고 굶어 당장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 있어도 절대로 먹고 싶지 않은 된장찌개였다.
진환은 민정이 돌아오기 전에 바글바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맛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시작해볼까. 진환이 다시 된장찌개의 맛을 봤다. 일단은 뭐라도 건드려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탈바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수합병을 위해 피인수기업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심도 깊게 된장찌개를 분석했다.
빠르게 마늘을 다졌다. 불을 세기를 조절하고 꿀을 살짝 넣어 된장의 맛을 살렸다. 처음부터 된장을 풀면서 된장의 텁텁함이 남아 있었지만 이것저것 손을 본 덕분에 전보다 훨씬 맛이 살아났다. 해맑게 민정이 부엌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된장찌개 응급 처치가 끝났다.
“거기 계란말이 들고 나와.”
진환은 된장찌개에 손조차 대지 않은 것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부엌을 나갔다. 민정이 숟가락을 들어 된장찌개의 맛을 봤다.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식당이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는 된장찌개에 민정은 와인이 아니라 요리로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연신 국물을 들이킨 민정의 얼굴이 빙긋이 미소가 번졌다. 이정도면 마왕도 깜짝 놀라겠지.
“뭐하고 있어.”
“이제 들고 나가려구요.”
“계란말이하고 나물이나 들고 나와.”
“왜요. 된장을 제가 들게요. 요리사 분위기 좀 내게.”
“사고칠 것 같아서 그런다. 얼른 들고 나와.”
진환이 능숙하게 행주로 뚝배기의 손잡이를 잡았다. 민정은 계란말이와 나물을 들고 잰걸음으로 진환의 뒤를 따랐다. 바글바글 끓고 있던 된장찌개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참기름을 솔솔 뿌려 무친 나물과 예쁘게 잘 말린 계란말이까지 상에 올라왔다.
“된장 되게 맛있죠?”
“괜찮네.”
“그죠? 제 솜씨가 좀 끝내주죠. 많이 드세요. 이것두 좀 드시구.”
민정이 진환의 숟가락 위에 계란말이를 올려주었다. 진환은 민정이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어깨춤까지 추는 민정이 마냥 귀엽게 보였다. 오물오물 두부를 먹고 있는 민정을 보면서 진환은 된장찌개에 대한 진실을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후에 민정은 진환과 함께 산책에 나섰다. 진돗개를 끌고 마을을 누비는 두 사람의 모습에 마을에는 박정자 여사의 손녀가 곧 결혼에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박정자 여사의 손녀와 서울에서 온 키가 크고 잘생긴 서울양반의 결혼이라는 이야기에 마을은 큰 잔치라도 벌어진 것처럼 활기찼다.
“청포도다! 저기 청포도 보이시죠.”
“보여.”
“청포도로도 화이트와인을 만들 수 있는데 적포도로도 화이트와인을 만들 수 있어요. 껍질하고 포도즙하고 나머지 부분을 분리하면 레드와인이 가지고 있는 떫은 맛이 안나거든요. 색도 붉은 색도 아니구.”
와인에 대해 설명하는 민정의 말에 진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당초 모두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그래도 민정의 목소리로 들으니 기분이 남달랐다. 모든 것들이 처음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말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생 민정을 옆에 두고 재잘재잘 말을 하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겠다 싶었다.
“신기……어? 장현우!”
민정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부드러운 눈길로 민정을 보던 진환의 눈빛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민정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통화의 주인공을 이토록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반갑게 현우를 안는 민정을 보면서 진환은 화가 났다. 불쑥 마음에서 고개를 든 질투를 달래면서 진환은 현우에게 걸어갔다.
“손님인가 보군.”
진환이 민정에게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이쪽은 우리 사장님이시구. 이쪽은 제 친구예요. 소꿉친구.”
민정이 진환과 현우를 소개했다. 진환과 현우는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진환과 현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묘하게 흐르는 기류에 민정은 진환과 현우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 만난 남자들의 기싸움인가 싶었다. 어차피 만나지도 않을 남남인데 무슨 기싸움이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장현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강진환입니다.”
“우리 민정이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사이가 꽤 가깝군요. 부탁이라……직원관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우가 내뱉는 모든 말이 진환의 귀에 거슬렸다. 우리라니……확실히 경계를 해야 할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진환은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눈빛부터가 단순한 소꿉친구의 수준을 이미 넘었다. 현우는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반차를 내고 회사에서 바로 영동으로 달려온 내내 진환에 대한 경계는 이미 최고수준에 달해있었다.
현우도 진환이 민정을 단순히 직원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마냥 아무르에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다면 이토록 자신을 탐색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현우를 보고 있던 진돗개가 목이 쉬어라 짖어대기 시작했다. 녀석 잘하네. 진환은 진돗개가 든든한 지원군처럼 느껴졌다.
“진환아. 어구. 착하지.”
“무슨 개야?”
“할머니가 데려오셔서.”
민정이 진돗개를 달랬지만 역부족이었다. 목이 쉬도록 짖는 진돗개를 보면서 민정은 진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진환의 손길이면 만사가 해결될 것 같았지만 진환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안되겠다. 저요. 현우하고 집에 좀 다녀올게요.”
“왜.”
“짐도 있구 진환이도 너무 짖어대고. 산책 좀 하고 계시면 금방 올게요.”
민정은 진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현우와 함께 길을 나섰다. 진환을 지나가는 현우의 얼굴에 승리자의 여유가 넘쳤다. 민정의 선택에 진환은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 같았다. 달콤했던 포도의 향기가 그 힘을 잃어갔다. 진환은 멀어지는 민정을 봤다. 현우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자의 집으로 가는 민정의 모습에 질투가 났다.
민정이 자신만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도 마음이 허전해졌다. 점처럼 변한 민정과 현우의 모습에 진돗개도 잠잠해졌다. 소꿉친구……웃기고 있네. 진환은 불끈 솟는 화를 참으면서 정자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민정과 현우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민정과 현우가 단둘이 정자의 집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늑대같은 놈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정자의 집으로 가는 진환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현관문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진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긴급] 사장님! 회장님 돌아오셨습니다!
종구의 문자였다. 스파이로서의 임무에 충실한 종구였다. 성과급 제안에 종구는 철저하게 진환의 편이 됐다. 진환은 서울로 올라가는 것과 영동에 남는 것에서 고민을 했다. 자신을 피하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잡기에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사장의 권한을 모두 박탈한 것과 민정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현우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꼴이었다. 현우와 민정이 함께 있을 수 없도록 방해하고 싶었다. 진환은 영동에 남는 것을 택했다. 박탈된 권한은 나중에 이야기를 해도 무방할 것이었다. 현우에게 타이밍을 주는 일보다 지금 이 순간 진환에게 두려운 것은 없었다.
“그래서 저녁은 잘 먹었어?”
“그 팀장이 와인을 좋아더라고.”
“센스있는 분이네. 이러다 둘이 정분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정분은 무슨.”
“오느라 배고프겠다. 일단은 밥 좀 차려줄게. 내가 낮에 기막히게 된장찌개도 끓였다니까. 기다려봐.”
민정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열을 올렸다. 진환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민정과 현우를 봤다.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엄지를 세우는 현우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 치밀었다. 민정과 현우를 방해하는 불청객이 된 것 같았다. 현우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미소를 짓는 민정의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진환은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묵직한 눈빛으로 진환은 현우와 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자코 열린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진환의 존재를 알린 것은 진돗개였다. 세차게 짖는 진돗개의 소리에 민정이 냉큼 신발을 신고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벌써 왔나. 반가움에 한걸음에 달려간 현관문에는 전처럼 차가운 진환만이 서 있었다.
“벌써 오셨어요?”
“늦게 오기라도 바랐나보네.”
“아뇨. 밥 좀 차려주느라구. 아구! 우리 진환이도 왔네.”
“데려가라.”
진환이 진돗개의 개줄을 넘겼다. 얼결에 개줄을 받은 민정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것을 얼릴 것처럼 변한 진환의 모습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없었어.”
“와서 현우하고 수박이라도,”
“할아버지 오셨다.”
진환은 민정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현우에 대한 질투가 애꿎은 민정에게로 향했다. 진환의 팔을 잡고 있던 민정의 손이 떨어졌다.
“오셨으니 가봐야지. 서로 할 말도 있고.”
“언질 좀 주시지. 내일 주말이라 서울로 올라가는 표가 있으려나. 일단은 아침 일찍 출발하는 표로 구해볼게요.”
“사람 불렀어.”
“그럼 저도 짐 챙겨야겠네요. 빨리 챙겨야겠다.”
“아니.”
진환의 단호한 목소리에 민정이 멈췄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 화가 났을까. 왜 달라졌을까. 술기운에 벌어진 어젯밤 일을 완전하게 잊고 싶기 때문일까.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에 벌어진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계약직에 잘난 것 하나 없는 여자하고 키스라니. 그래. 끔찍했을 수도 있었겠지.
“언제 가는데요.”
“내일.”
“그럼 저는 언제?”
“내가 결정할 사안은 아닌 것 같은데.”
진환은 민정을 스치면서 지나갔다. 현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진환은 방으로 들어갔다. 종구에게 오전에 차를 몰고 오라고 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영동을 벗어날 것이었다. 진환은 짐을 챙기면서도 바깥에 있는 현우와 민정에게 신경이 쓰였다. 진환이 묵직한 숨을 내뱉었다.
갑갑한 마음에 감정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이성적으로 계산된 말만 내뱉던 진환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갑갑해 미칠 것 같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민정의 눈에 담긴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민정을 웃음 짓게 만드는 사람이 자신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완전……포도냄새에 미쳐 버렸구나. 강진환.”
진환이 탄식하듯 말했다. 차갑게 민정을 몰아부쳤던 자신의 모습이 후회됐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진환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민정이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민정을 두고 영동을 두고 갈 자신이 없는 것은 잠시 포도냄새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졌기 때문일 거라고 진환은 생각하기로 했다.
질투심이 아니다. 마음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냥……사방에서 풍기는 포도냄새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질투라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진환은 어서 영동을 서둘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 전에 더 빨리. 서둘러 짐을 챙기는 진환의 귀에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와 민정이 나가면서 정자의 집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멀리 나가버린 민정과 현우를 외면하려 애를 쓰면서 진환은 방에 있던 물건을 거칠게 가방에 밀어 넣었다. 민정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굳게 닫힌 진환의 방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여기는 여전히 좋네.”
현우의 말에도 민정은 진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늘밤에 집으로 돌아가면 진환이 같이 서울로 올라가자고 말을 할 수도 있었다. 민정은 작은 희망이라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물밀듯 쳐들어오는 나쁜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영원히 아무르에 오지 말라고 하면? 불길한 생각들에 민정의 발걸음이 밍그적거렸다.
“예전에는 많이 놀러왔는데.”
“…….”
“같이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도 먹고. 주말에 너하고 같이 있으면서 푸욱 놀고 가야겠다. 김민정이 좋아하는 치킨도 좀 실컷 사주고.”
우울한 민정의 표정을 보던 현우는 민정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여름밤 공기를 가르면서 현우의 말이 물들었다. 현우의 밝은 목소리에도 민정은 오직 진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김민정?”
“어……어?”
우울한 얼굴로 걷던 민정이 그제야 현우를 봤다.
“무슨 생각해?”
“무슨 생각은 무슨! 여기는 여전하지? 공기도 좋은데……매미는 왜 슬프게 우냐.”
매미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민정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민정의 얼굴을 살피던 현우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민정의 미묘한 마음의 움직임을 단번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민정의 마음이 진환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현우를 불안하고 조급하게 만들었다.
널 내 옆에 둘 수 있을까. 널 맘껏 사랑할 수 있을까. 현우는 애틋한 눈으로 민정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민정이 현우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현우와 민정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뚜벅뚜벅. 걸음마다 불어오는 바람이 공허한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사랑하고 싶다. 마왕과.
사랑하고 싶다. 김민정……너와.
***
영동의 새벽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집마다 밥 짓는 냄새가 났다. 마을 사람들은 새벽부터 분주하게 일을 시작했다. 무거운 새벽 공기를 가르면서 검은색 차량이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검은색 차량은 꾸역꾸역 외길을 따라 마을로 진입했다. 힘겹게 외길을 지난 종구의 차는 정자의 집앞에 멈췄다. 종구가 대문을 두드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쉬워서 어쩌나.”
“덕분에 잘 있었습니다.”
“민정이라도 깨워야지. 이건 사장님이 가신다는데도 잠이나 자고.”
“괜찮습니다. 나중에 가게에서 보면 되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종구는 정자에게 인사를 마친 진환의 짐가방을 들었다. 박정자 프로젝트의 끝을 보지 못한 것에 정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정자는 합방만 완수하면 진환이 손주사위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진환은 민정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종구의 차에 탔다. 검은색 차는 빠른 속도로 마을을 벗어났다.
“인사도 없이 가네. 사람이 정도 없어. 정말 마왕 맞네.”
민정이 몸을 돌려 방문을 봤다. 인사도 없이 떠난 진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간만에 늦잠이나 자보자고 눈을 감아봤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민정은 이불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진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당을 보던 민정이 진환이 묵었던 방문을 열었다. 방은 깔끔했다. 진환의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민정이 정자의 집을 둘러봤다. 같은 집이었다. 마당에 있는 꽃이나 평상도 모두 같았다. 낯익던 곳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어딘가에 블랙홀만큼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은데 도무지 그 구멍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야속한 진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맘껏 영동에 있다가 올라갈 생각이었다.
“좋은 아침!”
민정이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현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진환이 영동에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을 후회하도록 즐겁게 있다가 올라가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는?”
“마을 회관 가셨나. 모르겠네. 우리 할머니가 워낙에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시잖아.”
“홍길동이시네.”
“이러다가 일감 막 던져준다니까. 요새 포도밭이 좀 바쁘잖아.”
민정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는 진환이 가는 순간까지도 얼굴 한번 내밀지 않은 민정에게 혀를 찼다. 민정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주말에는 현우와 포도밭 일손을 돕는데 보냈다. 간간히 밤에 현우와 시내에 나가 맥주도 마시고 치킨도 먹었다.
바삭한 치킨을 물면서도 진환 생각이 났다. 치킨이라도 먹여서 보낼걸. 말도 안 되는 후회였다. 주말이 끝나고 현우는 서울로 올라갔다. 정자의 일손을 돕다가 여유가 생기면 민정은 진돗개를 산책시켰다.
“진환아. 진환이. 강진환……문자도 하나 없네. 그래! 가라! 가. 가!”
진환에게서는 카톡도 하나 없었다.
“가지 말지. 가지……말지.”
민정은 간식을 먹고 있는 진돗개를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연락이 없는 진환에게 화가 나는 날에는 핸드폰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진돗개를 보던 민정이 평상으로 걸음을 돌렸다. 평상에 있는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민정의 핸드폰을 조용했다. 민정이 평상에 누워 하늘을 봤다.
별들이 밤하늘에 빛을 흩뿌렸다. 진환이라면 이제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는데……민정은 영동의 밤하늘을 볼 때마다 진환이 생각났다. 힘겹게 와인을 마시다가 평상에 누운 진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밤하늘을 보던 민정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을 포근하게 적시는 진환의 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들 자기가 세상에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
‘평생 착각하면서 살아갈 생각하니까 갑자기 완전 슬프네요.’
‘슬플 것도 많네. 누가 아냐. 착각하면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정말 주인공이 될지.’
자신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진환의 잔상이 또렷해졌다.
“자기가 좀 도와주지. 죽도록 혼자만 사랑하는 조연말고 주인공이 될 수 있게. 좀 도와주지.”
간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진돗개가 평상에 다리를 올리고 아등바등했다. 진환의 잔상을 보던 민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진환의 잔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돗개와 자신만이 있는 평상을 번갈아 보던 민정이 진돗개를 안았다. 진돗개는 온순하게 민정의 품에 안겨 있었다.
“됐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거야. 그깟 주인공 혼자 되고 말지! 아이 캔 두잇! 아이 캔 두잇이다. 진환아!”
민정은 진돗개의 앞발을 잡고는 다짐을 했다. 진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진환에 대한 마음은 지나가다가 맞은 소나기처럼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소나기에 젖은 마음이야……언젠가는 마르겠지. 소나기를 만난 줄도 모르게 금방 마를 거야. 민정은 진돗개를 꽉 안고는 다시 평상에 누웠다. 열심히 외면하고 있었지만 민정은 눈을 감으면서도 핸드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
서울로 올라온 진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의영의 전화였다. 신의영. 의영은 진환의 대학 동기였고 유일한 친구였다. 과대표였던 의영은 신입생 환영회에 나오라면서 끈질기게 진환에게 연락을 했다. 동기애를 드높이고 겸사겸사 진환과의 관계도 친밀하게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의영이 진환을 설득한 이유의 전부였다.
시덥잖은 진실게임에서 누군가 의영에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 의영은 단번에 강진환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의영과 사귀라는 사람들의 놀림에 진환은 별로라는 두 글자만을 내뱉었다. 거나하게 술을 먹고 난 의영은 진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의영아 괜찮아?”
“괜찮아요. 어차피 세상에 남자가 절반인데요.”
의영은 덤덤하게 차임에 대처했다. 짚신도 제짝이 있다는데 50억이 넘는 인구 중에 인연이 될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싶었다. 다만 의영은 진환에 대한 오기가 생겼다. 별로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고 싶었다.
“강진환.”
“왜.”
“그럼 우리 친구나 하자.”
“별로.”
“인간적으로 친구는 해주라.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도 당했는데.”
의영의 끈질긴 노력 끝에 진환은 첫번째 친구를 얻었다. 의영은 홍콩에서 돌아와서도 연락을 하지 않은 진환에게 불만을 터뜨리면서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오전 내내 할아버지와의 대화에 지친 진환은 의영의 제안을 수락했다. 진환은 오후에 사장실에서 업무를 보는데 집중했다.
가까스로 사장으로서의 권한은 회복했지만 민정이 문제였다. 진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석만을 해고하기 전까지는 와인과 거리를 두겠다고 할아버지에게 선포했던 진환이었다. 민정을 받아들이면 석만을 해고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질 것이었다. 처음에는 민정을 포기하자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락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 얼굴까지 보지 못한다면……상상으로도 숨이 막혔다. 민정에 대한 결정을 보류하고 진환은 다시금 업무를 봤다. 의영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하고 아무르로 들어왔다.
“어서오세요. 아무르입니다.”
수경이 의영을 반겼다. 값이 좀 나가는 핸드백과 구두가 수경의 눈에 들어왔다. 신상 구두우! 백화점에서 눈독을 들였던 구두를 실제로 신고 있을 사람을 볼 줄이야. 의영을 보는 수경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몇 분이신가요.”
“사장님하고 약속이 됐는데 불러주실 수 있나요.”
마왕이라는 소리에 수경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왕의 여자친구인가 싶었다. 수경은 의영을 재빨리 스캔했다. 겉모습만 봐도 귀티가 났다. 예쁘장한 얼굴에 패션에 대한 센스도 있는 것 같았다. 구두나 명품백에서 수경은 슬며시 의영의 재력을 엿볼 수 있었다. 수경을 의영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수경은 민정을 견제했던 시간들이 허망했다. 민정에 대한 미안함도 샘솟았다. 결국 민정과 자신이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경은 의영을 창가에 있는 자리로 안내하고는 진환을 불렀다. 수경은 의영과 식사를 하는 진환을 보면서 혼자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안녕. 우리 마왕.
“배신자.”
“오자마자 심술이네.”
“그럼. 홍콩에서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그럼 내가 당장에 달려왔을 거 아니야.”
“달려와서 뭐하게.”
“공항에서 플랜카드라도 들고 있었겠지.”
플랜카드라는 말에 진환은 민정을 떠올렸다.
‘강진환씨! 웰 컴 투 코리아♥’
옆구리에 플랜카드를 끼고 땀을 흘리던 민정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진즉에 공항에 나오는 줄 알고 있었다면 공항에서 열심히 플랜트드를 흔들고 있었을 모습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민정을 생각하던 진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멀리서 진환과 의영의 식사모습을 보던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마왕이 저토록 달라질 수 있다닛! 보살같은 미소라니!
“이미 환영은 받았다.”
“누구한테?”
“있어.”
진환은 덤덤하게 대답을 하면서 테이블에 둔 핸드폰을 봤다. 의영은 수상하다는 얼굴로 진환을 봤다. 탐정처럼 의영은 진환의 행동을 주시했다.
“너 설마 여자라고 생겼니.”
“여자는 무슨.”
“수상해서 그래.”
“뭐가.”
“갑자기 이게 여기 올라와서.”
의영은 테이블에 있던 진환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중국이나 홍콩에 있는 지점과 주요 고객들과의 통화에 지친 진환은 식사를 할 때만큼은 핸드폰을 멀리했다. 진환 나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그런 진환이 목이 빠져라 핸드폰을 보는 것을 보면서 의영은 수상한 기운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강진환. 솔직히 말해봐. 누구야.”
“말하고 싶어도 없다. 됐냐.”
진환은 괜스레 핸드폰을 멀찍이 밀었다.
“아주 목이 빠질 것 같은데 무슨 소리래.”
“누가 목이 빠졌다고. 그냥 누가 좀 갑갑하게 만들어서……신경이 좀 쓰일 뿐이지.”
핸드폰을 보고 있던 진환의 입에서 진심이 나왔다. 종구의 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는 동안에도 진환의 마음은 영동에 있었다. 현우에게 기회를 준 것은 아닐까. 잔뜩 후회가 됐다. 종구에게 차를 돌리라고 할까. 고민이 됐지만 진환은 영동을 벗어나면 복작거렸던 감정들이 모조리 소멸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도 끝나는 것은 없었다. 도리어 후회는 짙어지고 불안감을 커졌다. 업무를 하면서도 핸드폰을 가시거리에 두고 있었다. 이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정체를 진환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갑갑하고 답답하고 가끔은 우울하기도 하고.”
“…….”
“연락이 안오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연락을 해볼까. 달려가서 얼굴이라도 좀 보면 안심이 될 것 같고. 밥맛도 얻고 가끔 희망에서 신나다가도 우울해서 미칠 것만 같은 거.”
“심리학이라도 공부하냐.”
의영의 말이 전부 맞았다. 종구의 차에서부터 사장실에서까지 진환은 민정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정에게 연락을 해볼까도 생각하고 차를 끌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영동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밥은 먹었을까. 일을 하고 있을까. 땀이 나서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있을까. 온갖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 감정 내가 잘 알지.”
“뭔데.”
“진실게임에서 누구한테 차이기 직전까지 들었던 감정. 일명 짝사랑.”
의영이 딱부러지게 말했다. 진환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의영을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김민정을? 짝사랑이라고?
“돌팔이가 따로 없네.”
“누가 우리 강진환의 마음에 불을 지폈을까. 이 죽이게 매력적인 나도 실패한 걸!”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라.”
“나중에 신의영이 참 명의였구나 생각할 걸. 그 가슴앓이……그거 더 심해진다.”
의영의 목소리에 확신이 찼다. 천하의 강진환이 짝사랑을 시작할 줄이야! 의영은 진환을 바꾼 사람에게 박수갈채라도 보내고 싶었다. 의영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진환은 의영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었다. 여기는 영동이 아니라 서울이고 포도냄새는 일체 맡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술을 먹을 일도 없었다. 그러니 갑갑했던 마음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진환은 생각했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녁을 먹는 의영의 예언은 그대로 맞았다. 민정의 연락이 없는 날이 길어질수록 진환의 시름은 깊어갔다. 실수로 문자를 보낸 척이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진환은 난생처음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직원들 뒤에 섰다.
“같이 점심 먹읍시다.”
진환의 목소리에 직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불편한 식사자리가 되겠구나 싶었던 것이었다. 혹여 진환에게 꼬투리라도 잡힐까 모두들 점심을 먹으면서도 말을 아꼈다. 침묵의 식사가 이어졌다.
“본래 이렇게 조용합니까.”
“오늘은 날이 꾸물꾸물해서 그런가. 자앗! 도란도란 얘기 좀 하고 먹고 오후에도 일을 해야죠.”
종구가 열심히 직원들을 독려했다. 직원들이 어색하게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진환은 밥을 뒤적거렸다. 치자꽃의 향기가 밥에 녹아 있었다. 손수 노오란 치자밥을 만들었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만든다는 어머니의 말이 진환의 귀를 간질였다. 한참 밥을 보던 진환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드라마나 연예인에 관한 이야기.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에 대한 불만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 수십 가지의 주제들이 식탁을 물들였다. 진환은 사람들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앉아있었지만 민정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오늘 점심도 맛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직원들은 석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진환은 기태가 민정과 친하다는 소식만을 건지고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사장실로 돌아갔다. 진환의 상태는 점차 심해졌다. 사장실 바깥으로 나와 출입문을 서성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뭐……필요하신 거라도.”
“아닙니다.”
“기다리시는 분이라도?”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하세요.”
진환의 등장에 종구나 아무르 직원들은 불편한 눈치였다. 편하게 일을 하라는 진환의 말에도 직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나 해가 쨍쨍하게 고개를 내민 날에도 민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르의 간판에 불이 꺼지고 켜지기를 며칠이 지났다. 진환은 할아버지와의 냉랭한 분위기보다 가게에 민정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
짝사랑.
그 작은 단어가 철옹성같던 진환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진환은 급격하게 입맛이 떨어졌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민정과 현우가 다정하게 있는 모습이 계속 진환을 괴롭혔다. 현우에 대한 질투에 이불을 차고 일어나는 일이 많아졌고 냉장고에서 물을 마시면서도 민정이 떠올랐다.
‘사장님.’
‘…….’
‘정말 자는 거예요?’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해도 민정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천정을 보면서 눈을 껌뻑거리던 진환은 그야말로 이대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결국 진환은 밤늦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거. 어떻게 고치냐.”
-야밤에 전화해서는 뭘 고치냐니.
“짝사랑.”
진환의 심각한 목소리에 의영이 깔깔 웃었다.
“왜 웃냐.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천하의 강진환이 정말 완전 빠졌네.
“됐고. 해결법이나 알려줘라.”
-고백!
의영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백이 최선이지.
“다른 방법은.”
-잊으려고 노력하는 거겠지만……그건 아마 꽤 걸릴 걸. 마음 접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다.
진환은 침대에 걸터앉아 의영의 말을 곱씹었다. 고백. 고백이라……. 처음 의영의 말을 흘려듣다가 큰코다쳤던 진환은 의영의 말을 그대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숨을 막히게 만들 정도로 답답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진환은 아침 일찍 아무르로 출근했다.
사장실에 박혀 업무를 보던 진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진환은 거칠게 문을 열고 사장실을 나와 회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자존심은 버릴 수 있었다. 김민정……그 여자를 옆에 둘 수 있다면. 너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몰라. 요새 그 불여우가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벌써 유리 구두라도 신은 거 아니야? 단둘이서 포도밭도 갔다며.
“미쳤냐! 마왕이 눈이 있지.”
-연애를 눈으로만 하냐. 매력으로 하지.
“걔는 매력도 없어. 어디 해고라도 됐을 걸. 걔 학교도 완전 별로더라. 지방에 무슨 대학이라고 했더라…….”
기억을 더듬고 있던 수경이 진환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크게 한소리를 들을 것이 빤했다. 진환의 호된 질책을 예상하면서 수경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받아들이리. 겸허하게 질타를 기다리던 수경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진환은 수경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진환의 머릿속은 온통 민정의 정식채용에 관한 건으로 가득했다. 김민정 사수. 그 뚜렷한 목적만이 진환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실눈을 뜬 수경은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었다. 수경은 날름 진환을 미행했다. 회장실로 들어간 진환의 뒤를 캐기 위해 수경은 회장실 문에 귀를 바짝 댔다.
“무슨 일로 왔냐.”
“…….”
“또 그 얘기라면 내 대답은 같다.”
묵직한 자존심이 진환의 입을 막았다.
“나가봐라.”
“졌습니다.”
민정을 위해 진환은 패배를 선언했다. 내뱉은 말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날이 쉽게 오지 않을 거라고 진환은 믿었다.
“제가……졌어요.”
“그 말은 와인을 다시 배우겠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배우죠. 할아버지가 원하시는대로.”
진환이 단호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장의 권한을 박탈한 것이 진환에게 크게 작용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었다. 진환의 할아버지는 진환에게 아무르의 전반적인 경영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 고생한 민정에게는 적당한 급여를 주고 다른 곳에 적당한 자리나 물색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김민정을 정식 소믈리에로 채용하시면 그때 원하시는대로 하겠습니다.”
진환의 할아버지 표정이 굳었다. 할아버지는 민정을 소믈리에로 채용할 계획이 없었다. 학벌부터 경력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민정을 채용하는 것은 아무르의 가치를 낮추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진환의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런데 민정을 정식 소믈리에로 채용하라니!
“우선 진지하게 와인을,”
“협상은 없습니다.”
“강진환.”
“거절하시면 모든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나겠습니다.”
진환의 이름을 부르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할아버지의 호통에도 진환은 흔들림이 없었다. 진환은 민정을 자신의 옆에 둘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했다. 모든 아픔을 잊게 만드는……매캐한 연기의 냄새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민정이 간절했다.
“권한을 포기해?”
“예.”
“사업확장에 주주총회까지 수차례 감당하면서 어렵게 얻은 자리다.”
“압니다.”
“그런데 포기를 해?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포도밭에 같이 가더니 정분이라도 난 게냐!”
진환의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제 아버지와 참 똑같다고 생각했다.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에도 진환은 현우와 다정하게 앉아있던 민정의 모습이 생각났다. 권한을 포기하겠다는 말보다 민정을 영동에 두고 혼자 올라온 것이 후회가 됐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후회되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예.”
진환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기껏 와인을 배우라고……방금 뭐라고. 정분이 났다고?”
진환의 할아버지가 반문했다. 진환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진환의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영동으로 올라오는 길에. 아니 그 보다 더 전에 진환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니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난 것 같습니다. 그 정분이라는 거.”
민정에게 완전히 푹 빠졌다는 걸.
“강진환!”
“그래서 협상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선택하세요. 채용입니까. 아닙니까.”
진환의 할아버지는 난감해졌다. 적당하게 떠나보낼 민정과 진환이 정분이 났을 줄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대로 결혼이라도 하겠다고 밀어부치는 것은 아닌지까지 걱정됐다. 제 어미의 고집을 지독하게도 빼닮은 것 같아 정이 떨어지다가도 진환에게서 죽은 아들이 생각나 미워할 수가 없었다.
진환의 할아버지는 진환을 봤다. 진환과 할아버지를 감도는 공기가 무거워졌다. 결혼문제는 나중에 생각해도 문제가 없었다. 차근차근 진환과 민정의 사이를 가르면 되겠지. 진환의 할아버지는 진환의 고질적인 문제를 우선 해결하기로 했다.
“채용하도록 하마.”
진환의 할아버지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일단은. 채용이라는 단어의 말미에 붙은 말을 진환의 할아버지는 꿀꺽 삼켰다. 뒤에 단서를 달아봤자 진환의 신경만 건드릴 것이 빤했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차후에 민정을 만나 진환과의 관계정리를 요구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분이 났다고? 마왕하고 그 불여우하고? 헐!’
진환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엿듣던 수경의 눈이 커졌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마왕을 차지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는 허탈함이 수경을 맴돌았다. 매력도 없던 민정과 여자에는 관심도 없던 마왕의 스캔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대체 무슨 수로 마왕의 마음을 차지한 거야? 대체 뭔데! 수경은 직원들 사이로 걸어가면서 뜨거운 콧김을 뱉어냈다.
“허! 대박 사건!”
“무슨 일인데요.”
“마왕이 연애한다고 합니다.”
“그때 그 여자하고 한다면서요.”
“제 생각에 그거는 계약연애인 것 같고……진짜가 있대요.”
수경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마왕과 연애라는 단어가 이질적이게 보였다. 그러다가 마왕과 자신이 연애를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마왕이 연애를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수경의 기준에서 마왕은 연애를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오롯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수경은 민정을 떠올렸다. 얼굴도 성격도……모든 것을 생각해도 수경은 자신이 민정에게 뒤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왕을 빼앗기다니! 불여우. 완전 불여우다. 고단수! 수경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상대가 누군데요.”
“들으면 다들 놀랄 걸요.”
수경의 주변에 직원들이 전부 모였다. 모두들 마왕과 연애를 하는 상대가 궁금한 눈치였다.
“누군데요.”
“궁금해서 죽겠네.”
종구까지 고개를 빠끔 내밀고 수경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혀 수경의 입술이 절로 씰룩거렸다. 대체 무슨 수로 마왕을 꼬신 거냐고! 수경은 민정이 포도밭에서 올라오면 당장 비법을 캐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민정씨요.”
수경의 말에 일순간 아무르에 정적이 감돌았다.
“설마.”
“정말이에욧! 방금 마왕이 회장님한테 말했다니까요. 이제 곧 정직원도 될 걸요.”
“정식 소믈리에로 고용한다고?”
“그렇다니까요.”
수경이 전달한 소식에 소믈리에들이 술렁거렸다. 숱한 경력과 혹독한 수습 기간까지 거쳐야 아무르의 소믈리에가 될 수 있었다. 정식으로 채용된 소믈리에들은 그랬다. 그런데 마왕을 통해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정식 소믈리에가 된다? 기존의 소믈리에들은 수경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잘못 들었겠지. 수습도 거치지 않았는데 정식 채용은,”
“마왕의 총애를 받는데 수습이고 절차고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설마요.”
“설마가 사람잡죠. 누가 알아요. 김민정씨가 아무르의 제2의 장희빈이라도 될지.”
수경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는 석만을 봤다. 석만에 민정까지 총애를 받다니……절차를 무너뜨리는 총애라는 그림자에 직원들의 불만이 커졌다. 한숨을 내뱉는 수경은 승은을 입은 장희빈의 얼굴에서 민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표독스러운 얼굴로 아무르를 지배할 민정의 모습에 수경은 배가 아팠다. 사촌이 땅을 사도 이만큼 배가 아프지는 않을 것이었다.
“자아! 소문이예요. 소문.”
종구가 술렁이는 직원들을 비집고 중앙에 섰다.
“아직 채용한다는 이야기도 없었고. 예에. 앞으로도 없을 거고. 그러니까 걱정들 말고 돌아가서 업무들 보세요. 업무시간이예요.”
종구는 직원들을 헤쳤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겠지. 직원들은 개운하지 않았지만 종구의 손짓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아침에 돌던 마왕의 연애소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혼 임박소식으로 변질됐다. 가게에 도는 묘한 기운에 진환의 할아버지는 민정이 올라오면 담판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환의 할아버지는 이 관계를 진환이 끝낼 수 없다면 민정이 끝나게 만드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진환과 진환의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던 종구는 퇴근을 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튼튼한 줄은 빨리 타는 것이 중요했다. 종구는 열심히 민정의 전화번호를 찾아댔다.
-잘 지내봅시다. 김민정씨.
민정은 종구의 문자를 받고 당황했다. 인사를 해도 무시로 일관하던 종구가 무슨 바람이 불어 먼저 문자를 했나 싶었던 것이었다. 민정은 종구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답장을 보냈다. 민정은 다음날 마왕과 자신이 사귀고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있다는 이야기를 기태에게 전해듣고는 종구가 문자를 보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별 소문이 다 도네.”
민정은 깊이 숨을 내쉬면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샀다. 진환의 카드로 결제를 하면서 결제내역이 진환의 핸드폰으로 넘어왔다. 진환은 냉큼 기태를 불렀다. 서울로 오는 기차표 시간을 정확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셔요.”
진환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기태는 얼어있었다. 아침에 사온 커피에 문제라도 있었나. 기태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덤덤한 얼굴로 기태를 보던 진환의 목을 타고 커피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진환을 보는 기태의 목젖도 꿀떡 움직였다. 뭣이여! 뭣 때문에 부른 것이여! 긴장감에 기태는 숨겨왔던 사투리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커피에 무슨 문제,”
“김민정씨하고 연락 됩니까.”
진환이 기태의 말을 자르면서 말했다. 꽤 덤덤한 말투였지만 민정의 이름을 부른 순간 진환의 마음이 일렁였다. 이름 부르니까 더 보고 싶네.
“예? 민정이……아니. 김민정씨요?”
진환의 질문에 기태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민정과 진환의 관계를 의심하는 수경의 말을 가벼운 루머로 넘겼었다. 기태는 민정에게 문자를 보낼 때까지도 모든 것을 질투에 눈이 먼 수경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심으로 민정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진환의 모습을 보고 기태는 단순히 이 스캔들이 루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더 잘 파악하는 법이었다. 소문의 절반은 맞았다. 민정은 몰라도 기태는 진환의 마음만은 확실하게 눈치챘다. 기태의 대답을 기다리는 진환의 눈빛이 간절했다.
“오전에도 연락을 했는데. 무슨 일로?”
“정확히 언제 올라온답니까.”
“자세히는 모르겠는데……한번 물어볼까요?”
기태가 뒤적뒤적 핸드폰을 꺼냈다. 고개를 빼고 기태의 핸드폰을 보던 진환과 기태의 눈이 마주쳤다. 진환은 민정을 기다리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서둘러 관심이 없는 척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 길을 잃은 진환의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푸른 나무부터 꽃잎에 물든 햇볕까지 보면서도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민정이 있었다.
“대답 오면 보고하세요.”
“넵! 그럼 답장 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기태가 꾸벅 인사를 했다.
“보냈습니까.”
“아뇨. 아직……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내가 물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아! 당연하죠. 비밀로 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기태가 문고리를 잡았다. 마왕과 조금만 더 있다면 질식해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숨막히는 분위기에 기태는 마른 침만을 꼴깍 삼켰다. 마왕의 다른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마왕의 본모습을 보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침묵! 침묵만이 살 길이다.
“나가보세요.”
진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태는 사장실을 나왔다. 숨통이 이제야 트였다. 진환의 불호령을 받지 않기 위해 기태는 서둘러 민정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수선한 가게의 분위기도 함께 전했다. 마왕이 민정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그래서 수경의 말대로 민정이 정말 정직원이 된다면 아무르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었다. 기태는 민정이 단단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민정.
-응?
-화이팅. Fighting!
가시밭길에 도착할 민정에게 기태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기태의 깊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민정은 단순하게 기태의 문자를 넘겼다. 민정의 도착시간을 알리고 기태는 퇴근을 했다. 아무르의 간판에 불이 꺼졌다. 사화가 따로 없겠네. 아무르의 사화……기태는 한숨을 쉬면서 오늘만이라도 맘 편하게 퇴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댓글 재밌게보구있어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ㅎㅎ
할아버지가 너무 나쁘네
진환이 민정이를 많이 좋아하나봐요ㅎㅎ 그나저나 채용되었다고 끝난게 아니네요....;; 가시밭길이 예상됩니다. 이번편도 잘봤어요~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