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산문집.
겉표지에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의 여행, 그리고 당신을 매혹할 아홉개의 이야기로 구성됨. *추방과 멀미 *상처를 몽떵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 *여행하느 ㄴ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 |
<추방과 멀미>
줄거리: 작가는 비자없이 중국에 들어갔다 비행장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이 일로 중국을 몇번 왕복할 항공권값을 추가로 지불했고, 선불로 송금해버린 숙박비와 식비도 날리고, 난생처음으로 추방자가 되어 대합실에서 머문 경험을 소설로 쓰게 될 것을 예감.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핮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것이 없어진다.
이 파트에서는, 여행은 목적한 것과는 다른 것을 안겨주는 경향이 많음을 알려주고 있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살다, 어느 공모에 낼 시나리오를 쓰게 되지만 어떤 일에 휘말리며 제때 발송을 못해 직접 제출하러 LA로 가게된다. 여러 시련을 만ㄴ났고, 시나리오공모에 당선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 세상으로 나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추구의 플롯'- 주인공이 드러내놓고 추구하는 것과 주인공 자신도 잘 모르느 채 추구하는 것으로 나나루 수 있다. '추구의 플롯'에 따라 잘 쓰인 이야기는 주인공이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달성하도록 하고, 그런 이야기가 관객에게도 깊은 만족감을 준다.
*여행은 영어로 'travel'. 이 말은 14세기 무렵, 고대 프랑스 단어인 'traail'에서 파생한 것으로 추정. '노동''수고''고통'의 의미.영어로 travail은 고생, 고역으로 번역되며, ㅈ자지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이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면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에서 데이비드 실즈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거서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잇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오직 현재>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 의미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꾸어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 다시 어딘가로 떠나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인류는 대형 유인원과 97%이상 유전자를 공유하지만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등은 활동랴이 인간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가만히 있는다. 10시간 정도를 털을 고르거나 쉬고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를 잔다. 유인원을 연구한 학자들은 궁금했다. 어째서 이들은 운동이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데 인간과 같은 대사증후군이나 심혈관 질환이 없을까? 동물원의 침팬지조차도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매일같이 엄청난 활동을 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가? 유인원과 달리 초기 인류는 나무에서 내려와 걷고 뛰었다. 탄자니아의 하드자족은 하루 평균 9 ~12km를 잉동하는데, 이는 평균적인 미국인이 일주일동안 걷거나 뛰는 거리와 비슷.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없다. 대신 무시무시한 이동능력과 지구력이 있다. 칼라하리사막의 한 부족은 집단으로 쿠두영양 사냥을 하는데, 사냥감의 냄새와 흔적을 따라 뛰고 또 뛴다. 목표를 무리에서 고립시키면서 추적을 계속. 때볕아래서 그들은 무려 8시간이나 영양을 쫓는다. 기력이 쇠진하여 영양은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면 창으로 찔러 죽인 뒤, 흙을 뿌려 8시간 동안 자신의 추적을 따돌린 영야에게 존중으로 표하고 머리와 몸을 정성스레 쓰다듬는다.
원시 인류가 사냥감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뛰어서 쫓아가도록 진화했다는 것을 밝혀낸 2007년 하버드대 고고학과와 유타대 생물학과 합동 연구팀.
<알쓸신.여행> 카프카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누구도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 아니 그 목적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지조차 모른다고 보았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것, 많은 것들이 그저 우연으로 결정된다는 것. 이런 태도로는 불가능한 것을 통제하려는 충동은 줄일 수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상황에 처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형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고가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금강산 유람을 떠난 조선시대의 양반이 높은 봉우리는 하인을 시켜 다녀오게 한 것.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20세기 이전에는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지체가 높은 이들은 유람의 범위를 벗어나는 모험을 하지 않음. 21세기의 우리는 남을 시켜 좋은 구경을 하고 오게 하고 나중에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유럽의 귀족이나 조선의 양반을 비웃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를까?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곤 필리어스 포그는 80일간 세계를 여행하지만 배에서 내리지는 않는다. 그는 여행지에 최소한의 시간만 머문다. 그가 자신이 통과한 지점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며 지리학에 통달한 사람. 그의 이런 태도는 여행지의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 시각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성찰이다. 자신이 통과하는 나라들에 대히 포그는 그곳을 방문하여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력하게 바로 그런 활동들에 완전히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다른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발로 한 여행만이 진자 여행이 아닌 이유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이다. 주인공 슐레밀은 우연히 어떤 파티에 참석해 신비한 인물(악마)을 만나 그림자를 팔라는 제안을 받고, 대신 무엇이든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행운의 자루'를 받는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않던 그림자를 팔고 엄청난 부를 얻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림자가 인간에게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뒤 악마가 다시 나타나 그림자를 줄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거절한다. 주인공은 돈이 아니라 그림자가 없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사람은 사회적동물로 주위의 성원이 없으면 외롭고 쓸쓸하다. 그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충성스런 하인도 잃고 홀로 우연히 장터에서 산 낡은 장화(마법의 장화)를 신고 여행자/탐험가/방랑자/로 살아가면서 만족한다.
->이 이야기는 만약 사회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그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 그림자를 소중히 여겨라. 하지만 만약 그것을 이렇었다면,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면, 남은 운명은 방랑자가 되는 것 뿐이다. 어디에소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
*오디세우스의 귀향도, 그림자가 없는 상태, 걸인의 모습으로 이타케로 돌아온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미천한 신분들이 그를 받아주거나 알아본다. 그들 덕분에 아내를 괴롭히는 구혼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왕국의 질서를 바로잡고 아내와 재결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영우너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침대에서 매일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며 행복한 여행자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헤의 여신이 그를 다시 고난의 여행길로 이끌고 그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기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으로 돌아갔다.
<노바디의 여행>
*어떤 주목이라도 갈망하던 시절, 여행자라도 된다는 것은 그런 용막을 어느 정도 해갈시켜 주었다. 관광개으로 들끓는 유명관광지가 아니라면, 여행자는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지루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침입한 낯선 이를 눈여겨 본다.
*여행지에서 두명의 젊은 백인 여성 백패커가 다가와, 목적지가 같으니 함께 가면 안되겠냐고 물어왔다. 유럽의 밤기차는 컴파트먼트 구조로 되어 있어, 낮에는 양족에 세명씩 여섯명까지 마주보며 앉아서 가지만 밤에는 의자를 앞으로 당겨 간이침대처럼 만들어 3명까지 누워갈 수 있다. 그들 제안은 날더러 자신들과 한 컴파트먼트에서 자면서 가자는 것. 나는 승낙했다. ... 그들이 날 선택한 것은 나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면 밤새 같이 있기 안전해서 였다. 서구에서 동아시아 남자들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따른 것 뿐이었다.
그들은 과하게 예의바르거나(일본인), 부모의 열렬한 교육열에 힘입어 공부만 죽어라 하고 운동은 못하는 공부벌레(한국인, 중국인)인데,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는 백인 여성을 공격하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그냥 그들만의 세상에서 소심하게 제 할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드라마에서 그려진다. ...나는 내가 백인 여성들이 아무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자신들 옆에 재울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뱅 테송은 '여행의 기쁨'에서 괴테를 인용하면서 '여행을 할 때 나는 언제나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낚아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여행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감행하는 습격이며, 여행자는 언젠가 노회굼릉ㄹ 잔뜩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약탈자다'라고 덧붙인다.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어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꾀많은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의 동굴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는 '오디세이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 오디세우스와 12명의 부하는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거대바위로 입구를 막아 출구는 없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의 귀한 포도주를 선물한다. 포두주에 기부좋아진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그리스어로는 우티스Outis, 영어로는 노바디 Nobody, 우리말로는 '아무도안'이라고 한다. 기분이 좋아진 키클롭스는 포두주에 대한 답례를 한다면서 가장 마지막에, '아무도안'인 놈을 잡아먹겠다고 한다. 생명을 연장한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은 부하들과 함께 술에 취대 잠든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눈을 찌른다. 비명을 듣고 동굴 밖으로 몰려온 다른 키클롭스들은 누가 그를 괴롭히느냐고 묻는다. 키클롭스는 '나를 죽이려는 놈은 아무도안이야!.'라고 한다. 영어로 "Nobody is killing me'로, 자신을 죽이려는 놈은 아무도 없다는 뜻. 다른 키클롭스들은 아무도 죽이려는 이가 없는데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미쳤나보다 생각하고 돌아가버린다. 여행자 오디세우스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그의 허영심이었다. 그를 위험에서 구한 것은 스스로를 노바디로 낮춘 덕분. 숫양의 배 아래에 몸을 숨겨 동굴에서 탈출한다. 살아남은 부하들과 정박해둔 배로 섬을 떠난다. 그러나 성공적인 탈출에 흥분한 그의 내면에서 다시 허영과 자만이 고개를 쳐들어 '사람의 고함소리가 들릴 만큼 섬에서 멀어지자' 키클롭스를 조롱하기 시작. 화가난 키클롭스는 큰 산 봉우리를 뜯어내 그들 쪽으로 던져 재가 다시 섬족으로 밀려가고 그의 부하들은 키클롭스를 자극하지 말라고 말리지만 오디세우스는 더욱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른다. 누가 눈을 멀게 했나고 묻거든 '이타케에 있는 집에서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디세우스라고 말하라'고 한다. 이름에 주소까지 공개. 그는 노바디에서 섬바디로 돌아왔고, 키클롭스는 바다의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기원해 오디세우스가 비참해지기를 바란다. 포세이돈은 눈을 잃은 아들의 청들 들어주어 오만한 오디세우스에게 10년에 걸친 끝없는 고난을 부과한다. 이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의 영리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로 알려졌으나,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후로 오디세우스는 신중해진다. 고향으로 갈 때도 누더기를 입고 간다. 좋은 잠자리를 제공받아도 사양하고 소가죽과 양피를 깔고 바깥채에서 잔다. 그는 섬바디로 여행을 시작했으나 허영과 자만으로 화를 자초한 이후 노바디로 스스로를 낮추었고 그 덕분에 고난의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여행으로 돌아가다>
'빅누드'시리즈로 유명한 사진가 헬무트뉴튼은 어린 시절 여름이면 가족과 함게 가던 호텔의 풀을 자기 예술의 원천으로 기억한다. 어린 뉴턴에게 수영복을 입고 풀 주변으로 오가던 게르만 여성들이 실제 이상으로 거대해 보였을 것이고 그런 이미지는 그대로 그의 내면에 남아 훗날 그가 찍게 될 인상적인 패션 사진들로 다시 탄생했다.
2004년 우리나라에서도 전시되었던 작품들...
여행에 대한 박학다식한 이야기들이 도움이 되었다. 여행은 섬바디의 느낌이 아닌 노바디의 느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로 하자.
내발로 다녀온 여행이 미처 정리되지 않은 느낌... 늘 내가 느끼던 것. 훌쩍 떠나 정신없이 지내다 다시 훌쩍 내 자리로 돌아오면 혼돈에 빠진 일주일을 보내게 된다. 나는 그게 견디기 힘들었다. 미리 남의 경험을 충분히 살펴보면 정리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