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장미 필 무렵
장미가 꽃의 여왕女王이 된 건 다종多種, 다형多形, 다향多香, 다계多季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또한 전설과 역사가 깊어서이기도 하다. 특히 장미는 종교와도 인연이 있다. 올해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렇게 많고 많은 장미꽃 중에 덩굴장미는 해마다 나에게 가슴 아린 추억으로 다가온다. 덩굴장미가 필 때면, 슬그머니 우울의 늪에 빠져 아련한 추억 속으로 달려간다.
나는 일찍이 ‘알비나’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문했다. 당시엔 한국전쟁으로 인해 피란민들이 많아 일명 ‘하꼬방’이라는 데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도, 먹을 것도 허술하다 보니 폐결핵이란 불치병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고, 굶주리는 사람도 많았다. 아침 8시가 되면 성당으로 주전자를 들고 옥수수죽을 타러 오는 사람들의 줄이 까마득히 늘어섰었다. 그렇게 피난민들은 옥수수죽으로 겨우 연명하며 살았다.
나는 신앙의 열정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외국 신부님과 수녀님들과 함께 그들을 도왔다. 독일에서 수입한 폐결핵약을 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방문했다. 깡마른 체격에 창백한 얼굴로, 색색 숨소리를 내며 눈도 간신히 뜨던 결핵 환자들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결핵이 대부분 완치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들에게서 전염될까 두려워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 말도 건네지 않았다.
피부병 환자도 많았다. 나는 그들이 두렵지 않았고 환자들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피해도 감내하겠다며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나는 고열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침내 실신하여 동네 청년의 등에 업혀 천주교 재단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다. 내가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혼절한 후 삼 일째 되는 날이라 하였다.
결국, 장질부사(염병)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사흘 동안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신부님, 의사, 수녀님 모두 마스크를 한 채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죽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미 한고비를 넘기고 다시 회복되는 순간이라 일러 주었다. 난생처음,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독방에 격리되어 치료받던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을 때, 창밖을 내다보니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덩굴장미는 다시 살아난 나를 환영하듯 앙증맞은 꽃송이를 흔들며 환하게 웃어주었고, 누군가 천상의 목소리로 들려주던 ‘성모성월’ 성가에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생명의 부활로 환희에 벅찬 내게 덩굴장미는 소생甦生이요, 희망이었다.
조선 시대에 염병이라고 불리던 장티푸스는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혹독한 전염병이었다. 나는 거의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내고 퇴원했다. 후유증으로 온몸에 각질이 일어나 피부도 다시 형성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지더니 다시 나서 머리칼이 더욱더 많아졌다. 연약했던 내 체력이 전보다 더욱 강인해져 있음에 나 자신도 가족들도 놀라워했다.
면역력이 생긴 걸까. 그 후엔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여간해서 체하지도 않았다. 내 몸의 전체가 다시 만들어짐에 놀랍기만 했다. 나중에 의사에게서 장티푸스를 앓고 나면 모든 체질이 개선되어 건강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독한 코로나19로 전 세계 사람들이 마스크와 거리 두기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도 79세를 무사히 넘기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연이어 더욱 전파가 빠른 델타 변이바이러스, 오미크론이 세계를 침범하니 끊임없는 기도로 주님과 성모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제쯤 기적 같은 평화로움으로 마스크도 벗고 마냥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을까?
소생의 기쁨으로 눈물짓던 덩굴장미가 활짝 피는 5월, 나는 환희에 벅차 두 손 모으고 기도에 든다. 오래전 그날처럼 다시 나를 살리신 주님을 뵙듯 덩굴장미를 바라본다.
성모 마리아님, 감사합니다.
반짇고리
나란히 놓인 반짇고리 두 개가 정답다. 그중 하나의 뚜껑을 열었다. 맨 위 칸엔 어머님께서 쓰시던 투박하게 생긴 돋보기, 아버님 어머님의 젊은 시절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과 손자들 삼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어머님의 첫 번째 반짇고리는 시집올 때 혼수품으로 가져오신 것이다. 종이를 여러 번 발라 만든, 지함紙函으로 된 정사각형 상자이다. 겉에는 색종이로 꽃과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네 면에는 각각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지장첩화紙粧貼花라고 쓰여 있었다. 안팎으로 색종이를 붙인 다음 기름을 먹여 만든 정성이 가득 담긴 반짇고리, 몇 개의 칸막이 중 아주 작은 칸은 가죽과 헝겊으로 만든 골무, 직사각형으로 된 칸에는 돋보기와 바늘꽂이, 커다란 네모공간에는 여러 색깔의 옷감 조각들, 가위, 칼, 인두, 줄을 치는 헤라, 단추 곽, 심지어 줄자까지 바느질에 필요한 것들이 빼곡히 들어있다.
어머님은 실을 풀어 큰 바늘에 꿰실 때면 돋보기를 꺼내 쓰시고 한 땀 뜨기 전에 아버님과 다정하게 찍은 해인사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신다. 그럴 때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곤 하셨다. 어머님은 자식들에게는 엄하셨지만, 나에게만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었다. 부부싸움을 해도 늘 내 손을 들어주시곤 하시던 분이시다.
내가 새댁 시절 가끔 이불 홑청을 시칠 때면 혹여 굵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기라도 할까 봐 “너는 보기만 하고 재미있는 얘기나 해 주렴.” 하시며 직접 꿰매주시곤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장 담그기, 김장, 메주 쑤는 일 등, 온갖 가정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해주셔서 힘든 줄을 모르고 살았다.
나무로 된 검정 실패에 실을 감을 때면 실타래를 나의 양 손아귀에 걸쳐주고 어머니는 실패에 실을 감기 시작한다. 이쪽저쪽 양쪽 손을 공중에서 춤을 추듯 손놀림 하며 실 감기를 할 때는 내 손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민첩했다. 그럴 땐 꼭 친정어머니처럼 느껴져 뿌듯한 행복감에 젖기도 했었다. 한 타래를 다 감을 동안 어머니는 연방 손자들 자랑으로 미소를 지으시며 누가 낳았는지 명물들을 낳았다고 은근히 나의 기를 살려주시곤 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어찌 그리 마음에 드시기만 했을까만 어머님께서 주시는 애정이 자식에 대한 조건 없는 내리사랑임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거의 30여 년을 쓰신 반짇고리는 군데군데 오려 붙인 꽃 모양의 색종이들이 떨어지고 낡아서 보기가 좋지 않았다. 내 혼수품인 반짇고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어머님의 반짇고리를 사드린다는 핑계로 고급 수예점으로 가서 똑같은 모양을 한 지금의 반짇고리를 산 것이다.
당신께서 옆에 두고 쓰시던 투박한 안경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넣어두셨다. 그 반짇고리를 마주하고 앉으면 꼭 어머님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한쪽은 주황색, 한쪽은 검은색 가죽에 주황색 색실로 곱게 기운 골무가 보인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 골무를 끼우고 어머니의 체취가 남아있을까 싶어 코끝에 대어본다. 어머니처럼 흉내도 내어보고 돋보기도 써본다. 어느새 내 눈에 맞는 돋보기가 되어 있으니 세월은 그렇게 흘렀나 보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실패의 실 한 가닥을 쥐고는 데굴데굴 굴려 본다. “달그락달그락.” 그때 들었던 그 소리 그대로 내 귓가에 머문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니의 손때 묻은 반짇고리는 그대로인데 다정했던 어머님의 미소는 대할 길이 없다.
젊은 시절 두 분은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유명 사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정갈하게 분 세수를 하시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단아한 모습으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셨다. 그것은 오로지 자손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며 기도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는 여든넷에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을 뜨시던 날 어머니의 손끝에서 성장한 손孫 삼 남매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몸부림쳤다. 그 애들이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잃어버린 슬픔을 진실로 애달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문상객들도 덩달아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손자들에게 어머니처럼 다정하고 자애로운 할머니였는가 돌아본다. 또한 어떤 추억의 할머니로 비칠 것인가를 생각하니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어머니의 반짇고리를 다시금 매만진다. 저세상에서 어머님을 다시 만난다면 무슨 염치로 고개를 들까. 어머니처럼 손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주지 못하고 살아온 나에게 살아계실 때처럼,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려는지 궁금하다. 오늘따라 어머님의 따뜻하고 다정했던 목소리가 그립다.
2000년 4월 한국수필로 등단
저서
세월속에 묻어난 향기
어느해 겨울
오늘은 뭐 하시나
첫댓글 진심으로 부끄럽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