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 신언필
“휴, 살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탄식과 함께 안도의 말이 절로 나왔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간 여러 번 비슷한 경험을 했으나 이번처럼 절박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산책을 나서기 전에 으레 들르는 곳이 있다. 화장실이다. 노화가 진행하면 신체 기능이 점점 쇠퇴하는데 그중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배설 기능이다. 괄약근을 조이는 힘이 약해지고 장운동이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미리 화장실에 들렀으나 여느 때처럼 간단히 소변만 보고 집을 나섰다.
산책 코스 중 반환점까지 가는 데에는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막 반환점을 돌아오는데 평소와는 달리 아랫배가 살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압박감이 점점 커지더니 가스가 나오고 시간이 감에 따라 그 횟수가 잦아졌다. 마음이 불안해지며 ‘혹시 중간에 낭패라도 보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내 눈은 화장실을 찾고 있었다.
다행히 산책길 중간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얼마 전 사용한 적이 있는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하지만 지저분하고 모기에 물렸던 기억이 떠올라 곧바로 단념하고 인적이 드문 풀숲을 찾았다. 그것 또한 혹시 그 속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을까, 지레 겁이 났다. 이미 해는 지고 사위가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결국 집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까지 좀 더 참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곳에는 깨끗하고 쾌적한 좌변기 화장실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지난한 고행길은 시작되었다. 아랫배의 압박감은 갈수록 심해지고 그렇다고 마음 놓고 방귀도 뀔 수 없었다. 행여나 그 사이를 비집고 무언가 새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입으로는 군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을 때 들었던 “참아라, 참아라, 또 참아라!”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불빛으로 보아서는 지척인 것 같았는데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마침내 입에서 “오 하느님, 제발…….”이라는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묵직했던 배를 비우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어느 TV 광고처럼 통쾌 상쾌 유쾌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일종의 행복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돌아보면 나는 늘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큰 꿈을 꿀 마음의 여유가 없어 불행했고, 젊은 시절엔 소박한 꿈마저 뒷받침해 줄 수 없는 현실에 우울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바라고 원하는 만큼 높은 지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지도 못해 아쉬웠고, 나이 들면서는 몸 여기저기서 이상 신호를 보내와 서글펐다.
하지만 내가 갈망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화장실 문을 나서면서 터득하였다. 행복은 세 잎 클로버처럼 일상 속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스로가 온갖 욕망에 눈멀어 있으니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는 욕심을 걷어내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족은 한자로 찰 만(滿) 자에 발 족(足) 자를 쓴다. 여기서 발 족(足)을 쓰는 이유가 가슴 높이가 아닌 발목 높이만큼 찼을 때 만족하라는 의미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고.
물론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많은 순간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행복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이제 깨달았고, 그 ‘보지 못한 작은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 파놓은 함정임을 그날 밤 나는 알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