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밤, 중공군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이 공격으로 인해 미국 제1해병사단 7연대 E중대와 중공군 제 79사단 235연대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47]
27일 밤 11시경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장진호 동안에 산재해 있던 연대 산하 3개대대는 유무선 통신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아 제각기 중공군과 맞서야 했으며 해병대와 서로 협조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공격으로 32연대 1대대[48],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49], 제31연대 3대대[50], 그리고 제57야전포병대대[51]가 큰 피해를 당했다.11월 28일[편집]
중공군은 27일 밤부터 28일까지 미 해병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많은 고지를 탈취하였다.[52]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은 3개 사단(79, 89, 59사단)이 미국 제1해병사단을 세 개의 조각으로 분산시켜 각 부대를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각각을 고립시겼으며 부대 간의 연결도로도 차단하였다.[53] 제5해병연대와 제7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해병 5연대 2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으나 중공군 제58사단[54]이 미 해병 1사단과 보병 7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해있고 주요 보급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고 유담리, 고토리와의 연결을 차단하여 포위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이틀에 걸친 공격으로 중공군 제79, 89사단은 전력을 재편성중이어서 미 해병 5, 7연대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에드워드 알몬드 미 제 10군단장은 이날 하갈우리의 미 사단사령부와 장진호 동안에 위치한 31연대전투단의 맥클린 대령을 방문하여 한반도 북부에 중공군 2개 사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공격한 부대는 패잔병들이므로 적에게 빼앗긴 고지를 탈환하고 북쪽을 향한 공격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55] 알몬드는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 동경에서 열리는 전쟁대책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회의에서도 10군단은 계속 진격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하였으나 다음날 새벽에 끝난 회의에서 10군단은 함흥-흥남지역으로 병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받았다.[56] 극동사령부도 중공군의 개입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워싱턴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려는 맥아더 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연합군 사령부 일부는 미 8군이 계속 후퇴함에 따라 흥남에서 미 10군단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57]11월 29일
11월 29일[편집]
27일부터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28일 자정무렵부터 중공군 80사단의 예하 부대로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연대장이 포로로 잡혀 전사[59]하였고 페이스 중령이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10군단은 이른 아침에 해병 1사단 스미스 소장에게 해병 1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 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오후 8시 27분 기준으로 장진호 지역의 모든 병력은 스미스 소장의 작전통제하에 두게 하였다. 미 7 보병사단 부사단장이 헨리 호즈 준장도 스미스 소장에게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제5, 제7 해병연대는 중공군 3개 사단에 의해 유담리에서 포위 고립되어 있었으며 하갈우리에는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은 물론 하갈우리 방어에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아직 장진호의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미스 소장은 호즈 준장에게 페이스 특수임부부대는 병력을 모아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하갈우리 방어작전[편집]11월 28일[편집]
하갈우리 방어는 제1해병연대 3대대가 맡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기 때문에 통합 지휘가 필요하여 이날 오후 3시 경에 3대대장이던 리지 중령이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하갈우리 방어 전면은 약 2,200m였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제11포병연대의 2대대 D포대가 지원하였다.
포병과 박격포를 동원한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었으며 이 전투 와중에도 방어진지 내에서는 활주로 공사가 계속되고 되었다.
11월 29일[편집]
하갈우리는 2개 중대 병력의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동부고지는 3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중공군과 대치중이었다.
하갈우리 방어를 위해 오전9시 45분, 전차 29대와 일반 차량 141대 등 다수의 차량[63]을 보유한 드라이스데일 특수임무부대[64]가 남쪽 고토리로부터 북쪽 하갈우리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매복 중인 중공군 제 58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부대는 공격개시 후 4시간 동안 겨우 4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오후 1시 50분, 눈보라와 강풍의 악천후 속에서 부대는 F4U 코르세어기 2대의 엄호 하에 전차부대를 선두[65]로 공격을 재개했다. 오후4시 15분, 부대는 고토리 북방 6.5km지점에서 도로 유실과 노면 상의 탄흔 등의 장애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66] 부대장은 스미드 사단장에게 보고하였으나 증원군없이는 하갈우리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스미스 사단장은 전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극심한 전투 속에 드라이스데일 중령과 부관이 부상을 당했고 종대 중반에 위치한 탄약차량[67]이 공격을 받았다. 이 화재로 인하여 도로가 폐쇄되었고 부대의 절반 가량이 후방에 고립되었다.[68] 고립된 후방부대는 영국 코만도부대원 일부, 제31연대 B중대의 대부분, 그리고 사단 사령부 및 보급정비부대의 주력이었다. 최고 선임자인 사단 군수참모 보좌관인 아더 챠이데스타 중령이 차량종대에게 고토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으나 고토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그룹의 전차와 트럭[69]을 제외하고는 4개의 그룹으로 분산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다행히 후방 2개 그룹은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에 고토리로 귀환하였으나 전방의 2개 그룹은 중공군에 항복하였다.[70] 선두 부대는 후속부대가 포위된 지 모르고 계속 전진하여 29일 저녁7시 15분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하갈우리에 약 300명의 보병과 100명의 전차병이 증강됨으로써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드라이스델 특수임무부대는 전투력의 3분의 1을 상실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71] 이날은 드라이스데일부대가 하갈우리 남쪽에서 교전한 것 외에 큰 전투는 없었으며 중공군 제58, 제59사단의 일부가 다음날인 30일의 하갈우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11월 30일[편집]
오전 8시에 미군이 소대와 배속된 공병 2개 소대로써 중공군이 점령한 동부고지를 공격했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밤 0시부터는 중공군이 전날보다 강력한 화력과 인원으로 남쪽의 I중대정면과 동부고지의 G중대 정면을 공격하였다. I중대는 비행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 구성으로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72] 동부고지에 위치한 G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중대장이 부상당하였으나 12월 1일 새벽에 영국 코만도부대를 동부고지에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 아침 9시경에는 전날의 진지를 회복하였다. 11월 28일부터 시작된 하갈우리 공격으로 양측은 미군 전사상자 315명, 중공군 전사상자 8,500여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장진호 서쪽의 160km 지점에서는 미 8군단 보병 제2 사단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하고 있었다.[73] 미 8군단의 퇴각과 미 해병사단의 위기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원자폭탄을 쓸 수 있게 허락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74] 새로운 전황보고를 받은 10군단[75]은 이날 오후 7시 30분 군단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하고 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사단은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를 담당하고 제7 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해병 7연대와 5연대는 하갈우리로의 철수를 위해 병력을 재 배치하였다.
12월 1일[편집]
이날 아침, 미 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 3대대를 전위부대로해서 제 5, 7 해병연대를 유담리-하갈우리 간의 도로[76]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하도록 명령하였다.[77] 오전 8시부터 해병 5연대 3대대를 시작으로 철수를 시작하였다.
오전 9시에는 해병 7 연대 3대대는 도로상의 주력부대가 1542고지의 동쪽을 통과할 때까지 엄호하기 위해 1419고지,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정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 동쪽 경사면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 제79사단 235연대의 4개 대대도 이날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에 걸쳐서 1542고지의 동쪽 경사면의 제7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G와I중대의 병력은 200명 남짓으로 줄어 들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심야부터 새벽까지 철수 부대와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연대에 대해서도 맹렬한 공격을 가해 I중대의 병력이 2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타격을 주었다.
제5 해병연대 1대대가 북쪽을 향해 진지를 점령하고 유담리분지와 장진호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밤 9시 경부터 중공군 소수병력에 의한 침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대대는 2일 정오가 지나서 진지를 철수하여 주력종대의 좌측방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영하 31도의 혹한과 적설을 뚫고 밤 9시에 1419고지로 출발했다. 이때, 1대대는 미군으로는 드물게 야간 산악행군을 감행하여 중공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78]제 1대대는 1520고지 동쪽 경사면에서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12월 2일 새벽 3시 경에 재편성을 완료하였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하여 장교와 부사관들은 이들을 깨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갈우리의 야전활주로가 완성되어 부상자에 대한 후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2월 1일 자정무렵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31연대 3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오전 9시 경에 가진 연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페이스 중령은 약 30대의 트럭과 3,000여 명의 병력을 하갈우리로 철수시키기로 결심하고 제 1해병단의 근접항공지원에 맞춰 오후 1시 경에 바탕으로 하갈우리로 출발하였다. 출발과 동시에 도로 양편에 위치한 중공군은 사격을 받았고 항공지원을 한 코르세어기가 네이팜탄을 너무 빨리 터트려 아군 행렬 내에서 폭발하였다. 이로 인해 부대의 전술적 통제가 무너졌고 퇴각 도중에 밤이 되어 항공지원이 끊기자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당했다. 육군이 아닌 해병 전방 항공통제관인 스탬포드 대위가 남은 병력 1000여 명[79]을 인솔하여 하갈우리에 간신히 도착하였다.12월 2일[편집]
새벽 6시경, 해병 7연대 1대대는 5일동안 고립되어 있던 F중대 구출을 위해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F중대와 합류에 성공하였다.[80] F중대는 5일동안 전사 26명, 실종 3명, 부상 89명의 총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대 장교의 7명 중 6명이 부상을 입었고 병 전원이 동상과 설사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해병 5연대 2대대는 1276고지를 중심으로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그 후위가 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날 0시경부터 중공군은 127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해병 좌측 1개 소대가 포위되기도 했으나 전투기의 야간 근접지원으로 정오까지 중공군과 능선 쟁탈전을 되풀이하면서 차량종대의 통과를 엄호했다. 이후 대대는 코르세어 전폭기의 엄호를 받으면서 후위로 출발했다.
도로를 통해 후퇴하는 부대는 해병포병은 3개 대대(제1, 3, 4대대)로서 합계 48문, 차량 400~500대였다. 중공군은 주요 고지를 점령한 미군과 미 항공단의 공중지원으로 도로 주변에서 소규모 공격에 주력하였다. 이날 밤에도 포병 제3대대를 공격하여 105mm포 1문과 차량 여러 대를 파괴했다.12월 3일[편집]
전선에 눈이 내려 약 13cm의 적설량을 기록하였다. 이날 아침 해병 7연대 1대대는 덕동고개의 동쪽 고지에 위치한 중공군 1개 대대를 공격하여 오전 10시 30분 경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오후1시, 해병 5연대 3대대는 덕동고개에 도착하여 해병 7연대 1대대와 합류했다. 11월 30일부터 시작된 작전으로 전위대대는 약 56%의 병력을 손실했다.[81] 덕동고개에서 하갈우리까지는 항공지원단의 엄호를 받으며 해병 7연대 1대대를 선두로 하여 철수하였다. 저녁 8시 경에 선두부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하였다.
12월 4일[편집]
맨 후위인 해병 7연대 3대대가 하갈우리진지에 도착 완료한 것은 이날 오후 2시 경이었다. 해병대가 유담리에서 하갈우리까지 약 22km를 돌파하는데 선두는 59시간, 최후미는 77시간이 소요되었다. 한 시간에 약 286m 내지 370m, 즉 1km를 전진하는데 평균 2시간 4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 셈이 된다. 부상자는 약 1500명(이중 약 600명은 들것에 실려야하는 중상자였다)이었는데 한명도 남기지 않고 전원 후송했으며 그 중 3분의 1은 비전투 손실로서 주로 동상환자였다. 155mm야포 9문과 골짜기에 굴러 떨어진 지프차 몇 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비를 철수 시킬 수 있었다. 한편, 같은 날인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실제 수도였던 평양에서 철수했다.
12월 5일[편집]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후퇴로
하갈우리에서는 1일부터 이날 밤까지 약 4,000여 명의 부상자가 일본으로 후송되었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평양-원산간의 방어선 형성이 불가능하여 이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82]
12월 6일[편집]
이날 오후 2시 40분 경 하갈우리 통신 중계설비가 해체되었다. 오후 6시에는 야전활주로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4,312명이 후송되었으며 시신 173구도 함께 후송되었다. 미 수송기를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은 미국 제1해병사단은 차량 1,000대를 이용해 중공군 9병단의 포위망을 뚫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12월 4일에 가장 마지막으로 후퇴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도 평양을 수복하였다.
12월 7일[편집]
자정 무렵에 1만여 명의 병력과 1천대 이상의 차량이 하갈우리를 빠져나와 약 40시간 만에 고토리에 모두 도착하였다.
12월 9일[편집]
미 10군단은 모든 유엔군은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83]
12월 10일[편집]
USS Begor호가 흥남부두 폭파를 지켜보고 있다.
오전 6시, 미국 제1해병사단의 행군 행렬이 함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12월 11일 저녁 최종부대가 함흥에 도착했다. 함흥의 흥남구역에 위치한 흥남항에서는 14일부터 24일까지 유엔군 12만명과 피난민 10만명이 해상으로 철수하였다.
피해 및 전투 환경[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