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북경 천진 여행 ⑧팔달령 만리장성 –
騎馬로 몰아쳐 온 사나운 오랑캐들
막으려 남녀노소 모두들 벽돌들고
깨져도 한장 또 한장 쌓아올린 울타리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북경 천진 여행 ⑧팔달령 만리장성(1)
용경협에서 한적한 도로를 따라
30여분만에 도착한 팔달령 만리장성 케이블카 승탑장.
수많은 인파에 능선을 보니 어렴풋한 장성의 실루엣.
그렇게 10여분 케이블카로 도착한
하탑장을 나오는데 손에 휴대폰이 잡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케이블카에 앉을 때 주머니에서 빠진 듯...
밀려올라오는 인파를 뚫고 하탑장에 도착하여 직원에
손짓, 발짓으로 하소연해도 못알아듣는 눈치.
아니 수많은 인파 관리로 정신없었는지도 모르겠다.
(2)
그러더니 문득 아내에게 직원이 휴대폰 사진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잃어버린 내 휴대폰이 찍혀있었다.
아내는 좋아라고 깡총깡총.
이윽고 다른 직원이 달려와 전달받은 휴대폰.
수많은 인파 속의 기적이었다.
(3)
이번 중국 여행에 아내는 외투를 잃고
난 휴폰을 잃을 뻔했다.
중국신은 그래도 미안했는지 휴폰은 돌려주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인 팔달령 만리장성은
먼 발치에서 잠깐 본 정도에 그쳤지만
그래도 휴폰을 되찾은 기적을 맛보았으니 다시 한번 와야겠다.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팔달령 승차장 앞의 꽃사과, 이걸 찍고 휴폰을 잃다.
2) 케이블카 저 너머에 장성이 있겠지... 휴폰 분실로 장성까지는 가지 못했다.
3) 팔달령 만리장성
4) 팔달령 만리장성 그림보기(못 가본 아쉬움에...)
진산링(金山岭) 구간의 만리장성
* 만리장성(万里長城, The Great Wall, 1987 UNESCO World Heritage)
중국 허베이성, 베이징시, 톈진시, 산서성, 내몽골 자치구, 섬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간쑤성, 산
둥성, 허난성, 칭하이성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장성
1. 개요
2. 역사
2.1. 전국시대
2.2. 진-한 시대
2.3. 명-청 시대
2.4. 근현대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
4. 관광
5. 보존 상태
6. 축성법
7. 구간
7.1. 관문
7.2. 팔달령 (바다링) 장성
7.3. 고북구 (구베이커우) 장성
7.4. 가욕관 (자위관) 장성
7.5. 둔황의 한대장성
8. 논란
8.1.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포함 시도
8.2. 길이
8.3. 우주에서 보인다?
9. 여담
10. 대중문화에서
11. 같이보기
1. 개요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好漢)라 할 수 없다."
마오쩌둥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벽으로, 흉노족이나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전국시대 건설이 시작되어 후대 왕조에 의해 확장, 보수되어 온 인류 최대의 성곽 구조물이
다. 진시황의 집권기에는 가장 강했던 북방 이민족이 흉노족이었고, 지금의 만주 땅에 있었던 숙신이
나 고조선계 예맥인들은 그다지 남의 나라를 약탈하고 압박하지는 않았기에 궁극적 목표는 흉노족의
남침에 대한 예방차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후대 왕조들은 약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타
다른 민족들의 방어에도 아주 잘 써먹었다. 사실 이민족 침략 방지가 주목적이지만 이민족의 재산인
가축이 못 넘어오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경을 넘어선 가축을 핑계로 이민족이 넘어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의 남쪽 경계와 상당부분 일
치한다.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000리보다 조금 더 길다. 10,000리는 약 4,000km이고,
만리장성의 길이는 6,350km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0,000리의 약 1.5배가 된다. 중국 기준을 적용해
10,000리를 5,000km로 환산해도 12,700리 정도 된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그냥 장성(长城)이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장성'이라 발음되며, 중
국어로는 '창청'으로 발음된다. 이름을 본따서 만든 창청자동차(长城汽车) 라는 국유자동차회사도 있
다. 만리장성의 굽은 커브를 전부 펴면 그 길이는 무려 한반도를 감싸고도 남으며,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동쪽 끝은 허베이성의 산해관 산하 노룡두이며, 서쪽 끝은 간쑤성의 가욕관(자
위관) 제1돈이다.
2. 역사
만리장성의 위치
2.1. 전국시대
중국 최초의 장성은 초나라가 쌓은 장성이다. 초나라는 남방에서 광대한 영토를 영유하면서 그를 바
탕으로 중원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며 서서히 북진했다. 그렇게 얻은 영토 중에는 하남성 일대의 영
토도 있었는데, 중원이라 불리는 하남성 일대는 국경으로 삼을 만한 자연경계가 없었다. 초나라가 차
지한 이 영토는 삼면으로 다른 중원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초나라는 이 영토를 보호하기 위
해 300km가 넘는 장성으로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장성을 건설했다. 이것을 장성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장성 건설은 전국시대 강대국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전국시대 초기, 영역국가로서 재빠르게 변
법에 성공한 위나라는 서쪽의 강국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곡관보다 훨씬 서쪽에 있으며, 지금의 서안시 동쪽에 위치한 화산 북쪽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길
이는 대략 60km 정도로, 진령산맥과 진북산맥을 잇는 형태로 건설했다.
제나라는 남쪽에 장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오와 월, 그리고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
이었다.
한나라 또한 위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짧은 장성을 건설했다.
한편, 조나라는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는데, 그 영토 자체가 유목과 농경의 경계지를 대부분 포함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목민족과 접촉이 많았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
다. 이 지역 또한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을 만한 자연지형이 없었기에 장성 건설은 필수였다. 우리나
라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자연적 만리장성이 깔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역시 북방민족과 접해있던 연나라는 기동성이 우수한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진나라 역시 전국시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다. 건국 초
기 때부터 상대해온 오랑캐인 융적, 그리고 북방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장성 축조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자국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려던 것이다. 최초의 장성인 초나라 방성은 중원에서 획득한 영토
와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한 것이다. 전국시대가 되면 기술발달과 인구의 증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중국 내지가 충분히 개간되었기 때문에 이제 자국 영토를 개발하고 개척하는 것보다는 이미
개발된 상대국의 영토와 인구를 빼앗는 형태로 전쟁의 양상이 변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효과적인 영
토와 인구의 보호가 절실했는데, 전국시대 각 국가들이 행한 이른바 변법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상황
에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장성은 그 주요 방편 중 하나로 그 자체가 영토를 둘러싸 보호하기도 하지
만, 적의 침입과 기동로를 제한하고 아군의 빠른 대응을 가능케 해주어 영토와 인구 보호에 효과적이
었다. 이러한 목적의 장성 건설 사례는 최초의 장성 건설 국가인 초나라,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
제나라 등 중국 내지의 국가들에게서 두드러진다.
둘째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경계선 확립이다. 장성과 경보체제를 갖추면 아무래도 유목민족이 남하하
기 어려워진다. 그전에는 주요 감시망을 피해서 목축 동물들을 데리고 내려와 눌러 살면 그만이었지
만, 장성 축조 이후에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경계
가 부족한 지역에 장성을 건설함으로써 목축민들이 내려오는 한계를 설정하고 그를 통해서 수월하게
국경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장성 건설의 사례는 북방 유목민족과 접한 북쪽의 국가들, 즉,
진, 조, 연나라에서 두드러진다.
내지에 위치한 나라들은 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2.2. 진-한 시대
중국 서북 돈황의 고비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의 유적으로 한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중국에는 성벽을 쌓는 방법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벽돌을 쌓아 만드는 방법이 아
니었다. 흙과 건초 반죽을 번갈아가며 쌓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을 판축기법이라고 한다.]
전국시대에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이다. 당시 주관자는 몽염이었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
로 남게 되었다.
이후 한나라의 한무제가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
라 시절보다 길어진다. 그 이후 후한대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 사회 혼란과 분열로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진대와 명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이다. 오늘날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홀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부
수면서 박살 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전한 시기만 봐도 한 고조 유방부터 한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
노에게 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 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5호 등의 북방민족의 손
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등 숱하
게 황하 이북을 북방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이것의 효용성 자체에는 큰 의문
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정말 철옹성 같은 방어를 생각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면 손 안 쓰고 떡 먹으려는 놀부심보
나 다름없다. 해자, 창검벽, 외곽성벽, 이중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을 두루 갖춘 성일지라도 함락되
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달랑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래
서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만리장성의 용도가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역참과 내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선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
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으로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해냈다. 그 역할을 할 자연적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
이다. 즉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었다.
실제로 백등산 포위전 이후 한고조 유방과 흉노의 묵돌선우 간의 협상에서 만리장성을 흉노와 한나라
간의 국경으로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지
연하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를 위한 기동군을 편성하거나 거점의 요새화를 하는 등 실질적인 방어 준
비를 할 수 있지만, 장성이 없으면 그럴 시간조차 못 버는 것이다.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은 만리장성 외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
는 일이다. 가장 비슷한 사례로 이란의 사산 왕조가 중앙아시아의 훈족과 에프탈족,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북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쌓았던 '고르간 장성'이 있는데, 이는 만리
장성이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견고한 장성이었다. 이외에 픽트족을 막기 위해 로마인들이 쌓았
던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나 코린토스 지협에 쌓은 헥사밀리온 등이 있다.
중국은 의외로 평야인 지역이 아주 많다. 특정 방어 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만 뚫으면 중국은
영토 자체가 워낙 거대하여 허허벌판인 경우가 대다수다. 전체적으로는 산지여도 그 지역의 평야 면
적이 한반도 수준이거나 전국 팔도 중 하나랑 맞먹거나 하는 수준. 평야가 여간한 국가에 맞먹는 넓
이였다. 그래서 그런 산지에 사는 사람들조차 다수가 다 평지에 도시 건설을 해서 평지인이나 마찬가
지였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실제
로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주자 이후 수백년 동안 한족 국가들은 만주와 몽골의 이민족들
에게 크게 시달리게 되고 이민족들은 중원에 거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요, 금, 원이 이
런 나라들로 이런 이민족 국가들은 명나라게 세워지고 나서야 물러나게 되지만....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
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삼아서 유목 민족과 농경 민족을
구분해둔 것이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살았던 지역인데도 만리장성을 쌓은 다음에는 중국
의 영토가 되었다. 비록 마음만 먹으면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했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
정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강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작전 지역을 우
회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방어의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는 이미 만리장성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에는 보급선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침공하기가 어려웠다. 보급선이 끊기면 작전기한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
이다. 그래서 청나라의 침공은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오
삼계가 항복하여 산해관의 통제권을 청군에게 내어주었다.
2.3. 명-청 시대
명나라대에 이르러 제11대 세종 가정제 때 몽골족의 알탄 칸에게 베이징이 포위되는 사건(경술의 변)
이 일어난 후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12대 목종 융경제 때가 되어서야 현재와 같은 벽돌을 이
용한 장성의 형태로 굳어졌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이 기존 한나라의 영역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축
소되었으므로, 사실상 장성을 신축해야 하는 데다가 공법의 변화까지 겹쳐서 장성의 재건설은 장기간
에 걸쳐서 천천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수축은 베이징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
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판단으로 임의적으로 수축된 것이었고, 그래서 성벽의
재료도 지역마다 달랐다. 벽돌로 지은 곳도 있고, 바위로 쌓은 곳, 흙벽돌로 쌓은 곳 등등. 일부 구
간은 결국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멸망당하는 시점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완성되어서 상당한 방어력을 부여받았으며, 대표적인 곳이 장성 동쪽 끝의 산해
관이었다. 실제로 명대 만리장성은 만주족인 청군이 돌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
에게 멸망한 사실을 안 명장 오삼계가 반란군을 토벌할 때 지원군으로 도르곤의 청군을 사용하기 위
해 협약을 맺고, 그냥 문을 열어줘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대쯤 되면 공성기술이 상당히 발
달되었으므로 설령 만리장성이 석조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양상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해관 같은 강력한 점방어가 가능한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성벽 한 겹인
지라 대군으로 밀고오면 뚫렸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북방의 몽골까지 지배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만리장성의 효용가치가 없어서 베이징 근처의 일부 구간만 약간 보수하는 선에 그쳤다.
2.4. 근현대
1933년 열하사변 당시 만리장성에 배치된 국민혁명군.
20세기에도 만리장성은 중국 현대사에 계속 영향을 끼쳤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의 열하사변 때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국민혁명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인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산해관이 함락되었고, 만
리장성 산악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끝에 중국과 일본은 그해 5월 탕구 협정을 체결하여 휴전하였
다. 조약에 의거하여 만리장성 하북 구간은 일본군 관할이 되었고, 장성 남쪽 100km 지역은 비무장지
대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베이징 (당시 지명은 베이핑)은 일본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4년
후의 중일전쟁 당시 본격적인 교전 개시 후 불과 5일만에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
만 중일전쟁이 점차 중국 중남부로 확산되며 화북 지방의 일본 주둔군 수가 줄어든 틈을 타 팔로군이
만리장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기도 하였다.
국공내전초기에도 만리장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직 양당간 휴전협정(쌍십협정)이 맺어져 있던
1945년말 국민당과 공산당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만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국민당은
산해관을 장악하고 당연히 공산당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북에 있던 공산당의 병력은 장
성밖을 넘어가 내몽고를 통과해 만주로 가기보다는 산동반도까지 이동하여 뱃길로 요동반도로 건너가
만주로 내륙으로 들어갔다. 장제스는 해군사령관 천사오콴에게 이동하는 공산군이 탄 배를 격침시키
라고 명령했지만, 천사오콴은 휴전협정을 깰 수 없다며 불복종했고, 결국 해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
다. 결국 1946년 국민당이 선공함으로써 국공내전은 재개된다.
3. 시황제와 관련된 설
언급되었듯이 만리장성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건축 시
도 끝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진시황의 폭정을 언급할 때 '만리장성을 무리하게 축조
하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넣기 때문에 진시황에 의한 축조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나 그중에서
《초한지》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로 '망진자호'(亡秦者胡)와 관련된 설화가 있
다.
시황제는 말년에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만드는 불로장생초를 얻기 위해 온갖 미신을 믿고 다녔는데,
황해를 넘은 땅에는 삼신산이 있어 수많은 선인들이 칩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로장생의 영약이 숨겨
져있다는 방술사(方術士)들의 말을 들은 진시황은 그중 한 명인 서복(徐福)에게 그 영약을 찾아올 것
을 명령했다. 서복은 영약을 위해서는 남녀 동자 500명과 금은보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시황제는 흔
쾌히 수락했는데, 서복은 그 길로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시황제는 불안하여 노생(盧生)이라는 다른 방술사를
보내어 서복을 찾게 했는데, 노생은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에서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만나
'이 책에 담긴 뜻을 해석해내면 능히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천록비결》(天簏秘訣)이라는 책을 건네받았다. 노생은 《천록비결》을 진시황에게
바쳤으나 《천록비결》은 수많은 은어로 이루어져 도저히 읽을 수 없었고, 시황은 수많은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천록비결》을 해독하고자 했다. 그 뜻을 해독해내는 데는 결국 실패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한 글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오랑캐(胡)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만리장성으로 북방의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胡는 오랑캐가 아니
라 이세황제 호해(胡亥)를 뜻하는 것이었고, 진나라는 호해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야사이므로 실제로 이런 일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며 바리에이션도 꽤
있다. 신선이 건네준 책에서 비롯된 글귀가 아니라 단순히 점쟁이가 내려준 글귀였다는 설도 있으며,
정치적 문제를 덮을 목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다. 하지
만 이 이야기가 당시 진나라의 상황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4. 관광
장성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팔달령 장성의 비수기 & 성수기 풍경.
중국의 상징 중 하나로써 만리장성은 연간 셀 수 없는 숫자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여행 명소이다. 특
히 베이징시 근처 4개 구역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 중 서양 사람들은 주로 거용관 코스를 선호하고
한국인들은 팔달령(바다링) 코스를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인즉 서양 관광객들은 진짜로 등
산하듯 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며 즐기는 경우가 많고,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은 케이블카로 얼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사진 찍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등산하듯 올라가던
서양 관광객 중 몇 사람이 10월 말 불어닥친 이상한파와 폭설로 인해 장성 중간에서 발이 묶이는 바
람에 동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경우가 있다. 위에 써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도 무려 패키지 코스로 갔
으면서 발이 묶여 동사한 사례가 있다.
팔달령과 같은 인기 있는 구간을 탐방할 때에는 시기를 잘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춘절, 노동절, 국
경절, 중추절 연휴와 봄 & 가을의 주말 등의 성수기에 방문한다면 유적 구경이 아닌 사람 구경을 하
고 오게 될 수도 있다. 만리장성은 외국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인기 관광지이
다.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구간도 관광객들이 몰려 정체가 일어나면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릴 수 있
다. 하지만 비수기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방문한다면 항목 상단의 사진처럼 장성을 전세 낸 듯이 여
유롭게 둘러볼 수도 있다. 또한 슬라이딩카를 타게 된다면 성수기일 경우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
도 있으니 대기시간을 반드시 확인하자. 참고로 팔달령 밑에 고속철도(CRH)가 정차하는 역도 있으므
로 이를 활용하면 더욱 편하게 관광할수 있다.
만리장성은 인기 관광지이지만 여전히 2천년 이상 중화 문명의 북쪽 경계로써 중원을 수호하던 방어
시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철원 일대의 휴전선과 같은 군사 시설이었던 것이다. 즉, 단순히 누구나
방문하는, 편하고 친숙한 여행지로 생각하고 갔다가는 예상하지 못한 높이와 최대 40도에 육박하는
경사로 인해 고생할 수 있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 넘어질 듯 강
하게 부는 바람도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장성 구간은 산지에 형성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높은 능
선을 따라 지어졌기에 대기의 이동에 있어 가장 강한 저항력이 발생한다. 특히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바람이 제주도 이상으로 강력함을 느낄 수 있으니 옷을 두껍게 입고 가는 것이 좋다.
장성 종주를 시도 중인 서양 관광객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만리장성을 걸어서 완주하는 것은 중국 내에서도 대단하다고 보도되는 일이다.
일단 6,000km나 되는 성곽을 걷는 것이니 서너달 정도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하루종
일 약 60km 정도를 걷는다고 할 때, 만리장성은 험준한 산성을 걷는 것이니 만큼 보통 걷는 것보다
곱절로 힘들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관광구역이야 당연히 관리가 잘 되지만,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관리가 되지
않아 수풀이 우거지거나 무너진 부분이 중간중간 있는데다, 몇몇은 국군 제8보병여단의 네발계단처럼
가파르고, 또 몇몇은 그냥 암벽이라 등반을 해야 할수도 있다. 거기다 식수와 식량 문제, 배설 문제,
폭염 또는 혹한 대비 등등까지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등산보다 험난해서 조난 사고도 많다. 2012년에
는 폭설로 인해 만리장성 등산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 3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산악투어 상품
을 만든 일본 여행회사는 2009년 일본 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도 일어난 적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여행업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저 완성된 성을 따라 계속 걷는 일만도 이러한데 그 비탈지고 긴 거리
를 따라 성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해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노릇이다.
중국의 유명한 문화유산이자 상징적 아이콘이다 보니 해외 스타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이
기도 하다.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곧잘 방문하며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 가족들도 중국
방문 시 만리장성에 오른 적 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보디가드 어깨에 목마를 탄 채 등반해 논란
이 있기도 했다.
지금이야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건축물이지만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까
지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관리가 잘 안된 장성 구간
한국 관광객들은 잘 시도하지 않긴 하지만 혹여나 팔달령-모전욕-진산령처럼 복원이 이루어진 곳이
아닌 산시성 등의 비인기 구간을 방문하게 된다면 안전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기나긴 장성을 중국
정부가 전부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나 아예 끊겨 절벽처럼 되어버린
곳이 적지 않다. 그러한 구간을 만난다면 원래의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 더 자세한 내
용은 하단의 보존상태 문단 참조.
5. 보존 상태
미복원 상태의 만리장성 구간
현재 전체 장성 중, 50%는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유지보수의 중단 및 지역
주민들이 집 지을 돌을 마련하느라, 혹은 관광객에게 팔려고 만리장성의 돌을 빼갔기 때문이다. 거기
에 아직도 각종 개발사업으로 파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나 동남아
시아국가 역시 문화유산이니 보존하고 관광용으로 개발하자는 의식 자체가 생긴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재진행형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하지만 장성
관리하는데 군인이나 관리인을 각 구간마다 전부 두는 것이 효율성도 떨어지고, 돈이 한두푼 드는 일
도 아닌지라 관리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또한 현재 만리장성의 벽의 80% 정도가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름낙서. 만리장성의 벽은
기본이고 케이블카의 벽과 유리 부분에 낙서가 많이 되어있다고 한다. 케이블카의 색깔이 원래 하얀
색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낙서를 칼로 판 후에 판 곳을 화이트 등으로 채우는 짓을 해서 복
구도 힘들게 한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유산이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이어서 개인이 훼손 시 최
소 160만 원에서 최대 800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되어있다. 그러니 낙서하면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
라 망신에 집안 망신이므로 절대 하지 말자. 자기 나라의 유산에 누군가 낙서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알파벳에 히라가나&가타카나는 물론이고 한글 낙서들까지 알아본 중국인이 이를 인터넷에 올려
공론화해 중국 누리꾼 사이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게다가 안 그래도 전술된 낙서와 자연적인 풍화로 성벽이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는 상황인데 지역 주
민들이 집을 짓거나 묘지에 석재로 쓰려고 만리장성의 벽돌을 훔쳐가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념품으로
벽돌을 뽑아가는 관광객이나 작정하고 기념품으로 팔아먹을 목적으로 벽돌을 훔치는 장사꾼들까지 나
오는 막장화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기사 1(조선일보) 기사 2(SBS 뉴스 보도). 현지에서 만리장성 벽
돌이 하나당 한화 5천 원 선에서 팔리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만리장성의 일부 구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시멘트로 메우는 것에 대해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지역의 장성은 댐 공사 때문에 수몰된 장성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산맥을 따라 성곽을 쌓더라
도 강 주변이나 주요 평야지역을 지나가려면 장성의 위치도 낮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러니
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이를 수장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예전 명·청시기의 장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20%에 불과하다고 하며, 만리장성 중 관
광지가 된 구역은 상당수 마오쩌둥이 복구공사를 진두지휘한 곳이다. 그래서 일부 베이징에 가까워서
관광지로 개발된 '포인트' 부분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조금만 멀리 나가면 관리가 별로 안 되어 바스
러져 가는 구간이 많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리장성의 특성상 쭈욱 이어져 있기 때문
에 장성을 따라 수십 km를 걸어다니는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금지지만
만리장성 외곽지역의 인적이 드문 성벽 위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면서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
기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구간은 복구를 해도, 하필 시멘트로 복원하여 논란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만리장성 바로 밑에
고속철도 역을 건설하기로 해 논란이 예상된다.
6. 축성법
가장 유명한 팔달령 장성 구간. 바위를 자연 성벽으로 삼은 점이 인상적이다.
석축과 전돌이 혼합된 장성 구간
만리장성이 바다와 만나는 노룡두
만리장성이 하천을 지나는 구문구 구간의 수문
서부 간쑤성 구간의 장성
자위관 서남쪽으로 뻗은 끝자락의 장성
만리장성은 건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동서 6천 km에 이르는 구간을 지나는 동안 장성에는 각 지
형에 맞는 건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평지를 지날 경우 성벽은 방어력 강화를 위해 더 두껍
고 높아지게 되고, 산간 지방을 지날 때에는 낮아지는 대신 재해에 견디기 위해 더욱 견고해지며, 물
위를 지날 때에는 홍예 수문이 설치된다. 또한 기후적으로도 온대 기후에서는 일반 벽돌이나 돌을 사
용하지만, 건조 기후에서는 진흙을 덧바른 진흙 벽돌을 사용한다. 후자는 부하라, 히바와 같은 중앙
아시아의 성벽 혹은 사마라, 페스와 같은 중동 지역의 성벽과 유사한 공법이다.
7. 구간
중국 장성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만리장성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각각의 구간을 두어 관리한다. 그중에서도 관
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널리 알려진 곳들을 꼽으라면 베이징 근처의 바다링(八达岭), 구베이커우 (古北
口,), 스마타이 (司马台), 쥐융관(居庸关), 진산링(金山岭), 황화청 (黄花城), 젠커우(箭扣), 무톈위
(慕田峪) 장성 등이 유명하다. 그외에 수관장성이라고도 불리는 후루다오의 주먼커우(九门口), 친황
다오의 자오산(角山), 논란이 많은 후산 (虎山) 장성 등이 있다.
7.1. 관문
내성의 일부인 옌먼관(雁门关)
만리장성은 초원과 중원의 경계였지만 무조건 교류를 차단할 수는 없는법, 여러 개의 관문을 두어 상
호 소통하거나 군사 원정에 활용하였다. 가욕관, 거용관, 산해관의 3대 관문 외에도 안문관, 평형관
등이 있었다. 단절되어 있긴 하지만 돈황에는 옥문관, 양관도 있다.
7.2. 팔달령(바다링) 장성
흔히 만리장성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八达岭长城
베이징 옌칭구에 위치한 장성 구간으로, 명나라 홍치제 ~ 만력제 연간에 수도 방위를 위해 벽돌을 이
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20세기 말엽 대대적인 복원공사까지 이루어져 가장
완벽한 형태의 장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베이징 시내와 직결되는 바다링 고속도로와 철도 등이 있
어 교통이 용이하다. 따라서 베이징을 통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며, 특히 하늘이 맑은 가을철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베이징의 전문, 천안문 (역사박물관 앞), 숭문문로 입구에서 장성 전용 관광차를
이용하면 인당 왕복 36위안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 가장 저렴한 방법은 덕승문에서 5분 간격으로
있는 919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교통카드 사용시 40% 할인 적용된다. 철도 교통으로는 베이징 베이
역(북역)에서 교외 교외기차S2선을 타고 바다링창청역에 내리는 것이다.
바다링 관광 지도
팔달령 장성은 작은 관문성을 중심으로 협곡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관성(关城)이라 불렀
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남쪽으로 확 꺾어지는 곳의 동쪽으로도 성벽이 일부 연장되어 있으나 중간
에 바위가 있어 위험하니 가보지 않는 것이 좋다. 케이블카(왕복 60위안)가 양측 산 모두에 설치되어
있어 능선 위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20명 이상의 단체라면 야간 관람을 예
약하여 19-21시 동안 둘러볼 수도 있다.
연휴 기간에는 오전 10-11시와 오후 2-3시 경에 혼잡하여 그 시간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팔달령 구
간은 만리장성 중에서도 경사가 큰 편인 곳이라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성수기 (4월 ~
10월)에는 성인 기준 45위안(노인, 학생은 25위안. 장애인 무료)이고 비수기(11월 ~ 3월)에는 성인
기준 40위안(노인, 학생은 20위안, 군인 및 장애인 및 어린이 무료)이다.
7.3. 고북구 (구베이커우) 장성
구베이커우 장성의 장엄한 풍경
명나라 대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산세를 휘감는 모습이 용과 같다 하여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팔달령과 달리 관광지화는 되어 있지 않아 찾아
가려면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접근이 워낙 어렵다보니 현대에도 중장비 동원이 쉽지 않아 많은 구간이 방치된 상태이다. 따라
서 방문시 안전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7.4. 가욕관(자위관) 장성
가욕관에서 서쪽으로 약 6km 가량 더 뻗어 있는 명대의 장성. 다른 장성 부분들과 달리 진흙을 다지
는 중동-서역식 공법으로 지어졌다. 명대 장성의 서쪽 끝인 제1돈은 바이다 강의 절벽 위에 세워져
정말 끝자락임을 실감하게 한다.
7.5. 둔황의 한대장성
서역으로의 관문이던 옥문관 유적
양관 인근의 돈대 유적
명대의 장성보다 약 300km 가량 더 서쪽으로 뻗어 있던 한대 장성의 유적. 옥문관과 양관의 두 개의
끝 지점이 있다. 장건의 서역 원정이나 서유기의 모태가 된 현장법사의 서역행이 다 이곳에서 시작되
거나 끝난, 역사적인 명소이다. 실크로드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8. 논란
8.1.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반도 포함 시도
흉노족을 튀르크의 옛 조상들 중 하나라고 보는 튀르키예에서는 만리장성이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쌓
았다고 보고 있다. 이쪽에서는 만리장성을 뜻하는 Çin seddi를 상대방을 관광보냈다 혹은 따먹었다
정도의 은어로도 쓰인다. 몇몇 튀르키예의 극우 투란주의 성향의 사학자들은 흉노를 매우 강하게 과
장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의 위치나 길이를 왜곡하는데, 심할 경우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연해주로
왜곡하기도 한다.
몇몇 자료에서는 진-한대의 장성에 이어 고구려 성을 장성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박작
성 유적을 만리장성 동쪽 부분의 시작 지점으로 삼겠다는 몇몇 사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
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허베이성 끝에 위치한 산해관이었으며, 고
구려의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호산산성은 장성의 동단 기점이 아니었다. 물론 고지도에는 현 요동 반
도 지역에 벽돌로 쌓은 장성 대신 목책과 보를 표시하고 있어서 이를 장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
나, 중국에서 펴낸 장성에 관련된 연구 서적을 살펴 보면 '목책은 장성으로 볼 수 없다.'고 당당히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책과 보를 중심으로 쌓은 것을 장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다.
또한 장성의 정의를 방어 목적으로 길게 이어 쌓은 성이라 말하는데도 요동의 목책은 장성처럼 길게
이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요 군사 지역 주변에 드문드문 설치한 것이라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
을 잃는다. 이 주장의 요지는 여러 고지도에서도 표시되지 않는데도 '장성의 석축'의 존재를 확인했
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련 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보고서가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
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박작성이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은 한반도 북부(평양 지역)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영상에서도 나오
듯, 이는 북한을 합병하기 위해서 북한 유사시에 중국 인민해방군이 빠르게 밀고 내려와 북한을 점령
한 뒤, 한반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걸 주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뉴욕 메트뮤지엄 '중국관'
역사날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 지도' 오류 투성이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
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반크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뻗어 있는 지도를 두고 '만리장성이 고무줄인가
요?'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SNS에서 배포한다고 밝혔다. 그리
고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 행위를 바로 잡아줄 것을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에 요청한다고 밝혔다.
유네스코등재란에 만리장성에 지린성 및 랴오닝성도 포함되어 올라가있어 문제가 많다. 다만 현재도
변한게 없고 중뽕들이 이걸 이용해 조롱하기도 한다.
8.2. 길이
2012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기존의 두 배 이상 늘어난 21196.18km라고 발표했다. 그 길이는 서울
에서 토론토 까지의 거리의 두 배, 서울에서 지구 반대편의 우루과이까지의 거리보다도 길다는 것이
된다. 참고로 서울에서 토론토는 10700km,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는 19400km, 몬테비디오까지는
19600km다. 지구 한 바퀴가 40,075km이다. 기사를 살펴 보면 중국의 발표는 고구려나 발해 성을 장성
의 일부로 왜곡한 것도 있지만 주된 것은 진나라 및 한나라, 명나라의 장성 유적뿐만 아니라 그외 기
타 왕조에서 건설된 다양한 장성을 조사한 것으로 그것을 모두 합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가 연장되었
다는 내용이었다.
8.3. 우주에서 보인다?
위성으로 바라본 만리장성
이는 빌딩 꼭대기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인다고 하는 말과 같다. 만리장성은 사실 길이
는 길지만 폭이 좁으므로[만리장성의 전체적인 길이가 5,000~6,000km 정도 되는데 폭은 고작 10m도
안 된다.]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상식. 저 위의 사진도 줌기능으로 당겨서 본 거지, 본래 사진을
보면 그냥 안 보인다.
본래 이 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유명한 천문학 책인 《코스모스》에서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이 실은 오늘날(1980년) 지구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거대 (인공)지형지물이다.‘
라는 문구(한국어판에서는 151P.)가 달로 와전된 경우로 보인다.
실제로는 그 이전 문헌에도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20세기 초의 기록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발견되는 것을 볼때 우주시대 이전부터 떠돌던 관용구가 과학기술 발전으로 반박된 뒤에도 계속 남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중국인 최초로 유인 우주선에 탄 양 리웨이는 지구 바깥에선 그
어느 건물도, 그 어느 것도 안 보였다고 말하면서 칼 세이건의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에 널려있는 아파트들, 공원 운동장들조차도 만리장성보다는 폭이 넓다. 10m면 아파트 건물은 커
녕 집 1채의 길이/폭과 비슷하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파트나 운동장보다 더 안 보이는 게 만리장
성이다.
21세기 기준으로는 현재 나무위키를 읽고 있는 독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들은 사실상 100% 민간
위성지도에 기록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만리장성 같은 곳도 구글 지도 같은 서비스에서
얼마든지 위성 이미지를 찾아볼 수는 있다.
9. 여담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허베이성 친황다오시의 노룡두 (老龍頭)
▲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간쑤성 자위관시의 제1돈 (第一墩)
- 수나라의 대운하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2대 대공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대운하는
역대 중국 왕조 시절은 물론 현대에서도 경제력 향상에 기여했다면[정작 수나라는 기껏 만들어놓고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시 대운하 건설을 위해 수많은 인력이 희생됐으며 건설을 주도했던 수양제가
민생 대신 온갖 사치와 폭정, 무리한 원정 등에 집착하면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 만리장성은 청대
이후로는 원래 목적을 상실했다.
- 현재까지의 천문 관측에 의하면, 우주는 텅 빈 공간을 거대 은하단들이 마치 벽처럼 채워놓은 구조
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구조를 만리장성(great wall)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주 거대 구조 문서
로.
- 만리장성과 얽힌 중국의 유명한 설화로 열녀 맹강녀 설화가 있다. 진시황 때 만리장성 건설 인부로
끌려간 남편에게 겨울옷을 갖다주기 위해 옛 제나라 땅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온 맹강녀라는 여인이,
남편이 이미 죽고 시신은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구덩이에 쌓인 해골 무더기에 흘리자 피가 스며드는 해골이 있었고 맹강녀는 그 해골이 남편의
해골이라고 확신, 장례를 치른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는 것. 조금 각색된 설화로는 맹강녀의 남
편이 단순 인부가 아니라 인신공양 제물로 진시황에게 직접 살해되었고 맹강녀의 미모를 탐낸 진시황
이 맹강녀를 강간하려 하자 맹강녀가 자결하는 순간 만리장성에 벼락이 내려 무너졌다는 변형도 있
다. 맹강녀가 죽은 곳이 산해관 근처라 하여 지금도 그곳에 맹강녀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다른 버전
으로 공사 현장에 갔는데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맹강녀가 주저앉아 며칠을 통곡했는데, 하늘이
그 한을 알아봤는지 갑자기 그 근처의 만리장성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는 결말도 있다. 기껏 지어놓
은 성이 무너졌으니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뒷목을 잡았으리라. 수신기에는 후베이성의 모인이라는 괴
물이 있는데 어떤 무기로도 죽지않고 유일하게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여럿이 모여 손뼉을 치며 만리
장성을 쌓으라고 하는 것이고 이러면 도망간다고 한다.
- 한국에서는 남녀가 밤을 함께 보내는 것을 비유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만큼 둘 사이에 큰 일을 치렀다는 의미이지만, 사실 본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변형된 것이다. "하
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원래 민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줄거리는 "길가던 행인이 날이 저물어
어느 여염집에서 하룻밤 묵게 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날 밤 집 여주인이 행인과 밤을 함께 보내며
만리장성에 노역을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전해달라 부탁하였고 마침 행인이 그곳을 지나갈 참이라 부
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행인은 만리장성에 도착하여 그곳 감시관에게 편지를 전하였는데 편지의 내용
인 즉슨, 이 사람이 남편과 교대하기로 한 사람이오니 남편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하는 내용이었고 행
인은 노역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내용." 이것이 "하룻밤이면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의 어원이라
고 한다. 전승에 따라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남편 대신 하루만 일해달라고 해놓고는 부부가
야반도주해서 평생 돌 나르게 됐다는 내용도 있고, 지나가던 손님이 아니라 감시관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인이 워낙 절세미녀라 자발적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만리장성 쌓으러 갔다는 버전도 있다.]
여담이지만 위에 언급한 간쑤성 자위관에는 관광 온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열쇠를 걸어놓
는 곳도 있다. 중국에서도 만리장성의 의미는 비슷한 듯.
-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공약으로 내건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 만리장성과 비교되는데, 본인도 저
서에서 만리장성을 예시로 들며 장벽 건설을 주장했다.
- 2018년 현재, 중국 당국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 외곽에 장성을 쌓을 것이라 발표했는데, 이것이
실제 성벽을 둘러 쌓는다는 것[14]인지 보안 강화의 은유적인 표현[15]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만
리장성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은유적인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 중국의 핵전쟁용 지하 요새들을 가리켜 지하 만리장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6.25 전쟁 때도 지
하 만리장성이라 부르는 급조 지하 시설을 구축하여 미군 화력 방어용으로 써먹었다. 이게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화력으로 중공군을 쓸어버리던 UN군도 고전하고 전쟁을 휴전으로 끝냈다.
-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있는 화베이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후난성 난창시에서 현지 주민들이 (멀어서
가보기 힘든) 만리장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짝퉁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 내에서도 조롱의 대상이 되
기도 하였다.# 한편 같은 후난성 샹시 투자족 먀오족 자치주에는 진짜로 만리장성 버금가는, '남중국
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남방장성이 있다. 길이는 겨우? 190km 이지만 구조가 비슷하고, 역시 명대
에 세워졌다. 다만 북방 유목민 (북적)이 아닌 서남이인 묘족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같은 성
이라 해도 난창시에선 차로 최소 5시간이 걸린다.
남방장성 풍경
- 야오밍의 별명이며, 넘사벽급 기량을 자랑하는 중국 탁구 국가대표팀의 위세를 비유할 때에도 사용
한다. 비중국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을 때 '만리장성을 넘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반대로 지
면 '만리장성 높았다.'라고 한다.
- 2020년 1월 24일 일부 구간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 금융권에서는 만리장성에서 유래한 차이니즈 월(Chinese Wall)이란 용어를 흔히 사용하는데, 투자
은행이나 전략컨설팅에서 경쟁사간의 업무를 봐주는 경우도 있고 기업과 투자자간의 정보공유에 따른
이익이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차이니즈 월을 쳐서 업무간의 정보공유를 원천차단한다는 뜻이다. 물론
금융권 외에서도 사용하긴 하는데,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에서 스마트폰 부문에선 경쟁사지만 반도체
부문에선 고객사인 경우가 있다.
- 2021년 3월 24일에 방송된 MBC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황혜영이 중국의 전파공정을 언급하면서 '만
리장성은 우리집 뒷담이냐?'라고 일침을 놓은 적이 있다
- 동쪽 끝인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는 바다 위에 성이 뚝 끊겨 있다. 엄청 대단한 걸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허무하기도 하겠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바다 바로 앞까지 성벽을 쌓은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이색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다.
만리장성 팔달령 / 고봉산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