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道魔의 秘密
네 사람.
천수여래(千手如來) 보법대사(普法大師).
그는 천축제일(天竺第一)의 암기달인(暗器達人)이다.
그의 일수(一手)가 뻗으면 그 기묘한 암기행공에 지옥의 염라도 울고 간다 했다.
일전에는 천축의 대도적떼인 천축사자단(天竺獅子團) 오백 명을 단 한 번의 암기수법으로 몰살시켜 오백살공(五百殺功)이라 불리기도 했던 희대의 고수.
그는 제세생불(齊世生佛)의 첫째 제자였다.
자전신도(紫電神刀).
동영제일(東瀛第一)의 쾌도수(快刀手).
그는 일생에 세 번 도(刀)를 휘둘렀다.
한 번은 영주(瀛州) 최고의 쾌검수라는 검쾌인(劍快人)에게, 두 번째는 동영 경도(京都)의 검의 대명가(大名家) 영목태랑(永木太郞)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하늘의 번개를 향해…….
결과 그는 그 셋 모두를 베어낼 수 있었다.
일진풍(一陣風).
요동제일(遼東第一)의 신법자(身法者).
안시성(安市城)은 요동에 있고 장백산(長白山)은 길림(吉林)에 있다.
대륙의 동북과 서북으로 도합 만리 길.
십 년 전, 안시성주가 중환을 앓고 있을 때 오직 장백파의 백호환(白虎丸)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안시성의 군사들은 가장 빠른 말로 갈아타며 장백산을 향해 달렸다.
한데 일진풍은 두 다리로 달려 그들보다 먼저 장백파의 백호환을 얻었다.
그리고 안시성의 군사들이 여정의 반쯤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미 되돌아오고 있다가 그들과 마주쳤다.
혈살추혼(血殺追魂).
남만제일(南蠻第一)의 독행가(毒行家).
그는 독(毒)의 마술사다.
멀쩡하던 물체가 그의 시선만 닿으면 독물로 변했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퉁겨 강을 독강(毒江)으로 만들 수도 있었으며 소리없는 웃음으로도 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탓인지, 그는 혈살추혼이란 호를 얻은 이래 어느 누구하고도 같이 식사를 해보지 못했다.
* * *
다가닥다가닥―
돌연 새벽의 정적을 찢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주성(銀州城)의 수문지기는 눈앞을 번쩍 하고 스쳐 지나가는 한 필의 말에 졸린 눈을 껌벅거렸다.
그는 자기가 꿈결에 잘못 들은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
세상에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말이란 아무 데도 없을 테니까.
다가닥다가닥―
미친 듯이 치달리던 한 필의 말은 한 주루(酒樓) 앞에서 급히 멈추어 섰다.
이히힝!
이어 말 위의 기사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상아선녀 진진.
새북 관산장의 종주인 그녀는 주루의 현판을 한차례 힐끗 올려다보고는 급히 주루의 계단을 올랐다.
주렴을 들치기 무섭게 돌연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술! 술을 가지고 오란 말이다! 이 개새끼들아!"
상아선녀 진진은 아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사람.
승인(僧人)도 있고 속인(俗人)도 있다.
하나 그들은 지금 승속을 막론하고 고주망태가 된 채 고래고래 고함들을 질러대고 있었다.
진진은 조용히 그쪽을 향해 다가선 후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응? 으음…… 웬놈이야……?"
"야! 술 가지고 와!"
진진은 감정없는 시선으로 네 사람을 휘둘러본 후 우수를 가볍게 쳐들었다.
순간 그녀의 우수에서 몽롱한 백기(白氣)가 스며 나오더니 그것은 곧 네 갈래로 갈라져 사 인(四人)의 머리를 휘감았다.
그러자 돌연 사 인의 머리 위로 회백색 주기(酒氣)가 둥실둥실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취정신공(聚精神功)은 확실히 보는 이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약 반각의 시간이 지난 후, 사 인은 취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에 있는 진진을 발견하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계주(戒主)!"
진진은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진진이에요. 네 분의 일은 어찌 되었는지?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약주를 자시고 계시니…… 이미 여러 날이 지났는지라 저는 궁금증을 이길 길이 없어 이곳까지 왔어요."
순간 보법대사, 자전신도, 일진풍, 혈살추혼의 네 고수는 몸을 가늘게 떨며 고개를 툭 떨구었다.
"면목이…… 없소, 계주……."
돌연 보법대사가 자신의 가슴자락을 홱 펴보였다.
진진은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담담한 얼굴에 한줄기 경악지색을 떠올렸다.
보법대사, 그의 가슴에는 일천여 개의 가시가 수도 없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손을 뿌려 암기를 던졌을 때 그는 땅에 있던 모래로 그것을 모조리 떨구었소. 그리고 이 가시를 박았소. 자그마치 일천
개요……."
자전신도가 자신의 우측 소맷자락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우측 팔은 손목부터 싹독 잘려나가 있었다.
"만약 내가 도를 좀더 쳐냈더라면 잘린 것은 팔이 아니라 목이었을 게요. 내 도가 반도 뻗기 전에 그의 검은 이 팔을 자르고 있었소."
이번엔 일진풍이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과 함께 장포자락을 위로 걷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의 두 발은 발목부터 싹독 잘려나가 있었다.
"내가 한 걸음 걸으면 그는 두 걸음…… 내가 일 장을 날면 그는 이 장을 날았소. 그는 무서운 인물이오."
일진풍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때 혈살추혼이 고소(苦笑)를 지으며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독을…… 뿌릴 사이도 없었소. 내 독이 채 뻗어나가기도 전에 나는 내가 이미 중독(中毒)된 몸임을 알았으니까…… 그는 독의 종주이오."
진진의 두 눈에서 한 줄기 기광(奇光)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라니, 그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에요? 설마……."
사 인은 일제히 얼굴에 공포의 빛을 떠올렸다.
"운룡!"
진진은 이 사 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극도의 놀라움과 공포!
그것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리라.
"운룡…… 과연 그가 정말 운룡일까? 한 사람이 일 년 만에 그런 가공할 무예를 성취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바로 그때였다. 홀연 한소리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온 것은…….
"그 해답은 내가 대신 말씀드려도 되겠소?"
마치 종탑 속에 들어가 앉은 듯 사방에서 메아리쳐 오는 굉렬한 목소리!
순간 진진의 안색이 싹 변했다.
육합전성(六合傳聲)!
울려온 목소리는 바로 그녀조차 엄두도 못 내는 천리전성(千里傳聲)의 신공, 육합전성이었던 것이다.
사 인은 이 목소리를 듣자 유령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라더니 미친 듯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진진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좋아!"
무엇이 좋다는 건지…….
이어 희디흰 옥수(玉手)에 살포시 들리는 것은 한 개의 투명한 옥금(玉琴)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무릎 위에 얹고는 가볍고 우아하게 줄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유령처럼 객점의 주렴 앞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운룡!
일신에는 남의를 걸치고 그윽한 단향냄새를 풍기는 그는 바로 운룡이었다.
운룡이 천천히 자신과 삼 장여 떨어진 곳으로 다가오자 진진은 사르르 눈을 들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시선으로 그의 모습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정제된 기품…… 불가사의한 흡인력…… 과연 불패의 승부사요, 중원 최고의 고수라는 당신의 이름에 어울리는군요."
"과찬의 말씀……."
상아선녀 진진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구슬이 굴러가듯 투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 탄금곡조(彈琴曲調)를 한번 들어보겠어요?"
운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털썩 그 자리에 정좌했다.
진진은 화사한 얼굴에 달콤한 웃음을 지으며 안고 있던 옥금(玉琴)을 고쳐 잡았다.
"제 금은 혈무(血舞), 혈우(血雨), 혈폭(血暴)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혈연금살(血然琴殺).
진진의 혈연금살은 새북의 무림인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안색이 변하는 음공(音功)이었다.
실로 이 음공으로 하여 죽은 사람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듣는 이를 몽롱한 환각에 빠뜨려 백치로 만드는 혈무.
거듭되는 충격으로 아예 광란지경(狂亂之境)에 빠뜨리는 혈우.
혈관이 터지고 살이 갈라져 죽게 하는 혈폭.
그러나 운룡은 이 살공(殺功)의 이름을 듣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윽고 진진은 가늘고 긴 섬섬옥수로 옥금의 현(絃)을 뜯기 시작했다.
곡조는 귀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 만큼 가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운룡의 고요한 눈이 진진의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깊은 심산유곡 담청빛 계수(溪水)가 흘러내리듯, 대면 피라도 밸 듯한 파란 하늘에 점점이 편운(片雲)이 떠가듯 진진의 손가락은 차츰 빨라졌다.
봄날 싹이 돋기 시작하는 언덕에 누워 춘풍(春風)을 쐬는 듯 싶던 곡조는 차츰 변하더니, 돌연 삭막하고 황량한 겨울풍경을 묘사해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순백색 설원(雪原)과 쌓인 눈을 휘말아가며 몰아치는 삭풍, 쉴새없이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허공을 떠도는 처절한 추위.
그러나 운룡은 여전히 무심했다.
듣는 이를 몽롱한 환각에 빠뜨리는 혈무도 그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진진의 시선이 힐끗 운룡을 향했다.
순간 나직한 외침과 함께 곡조는 다시 일변했다.
"혈우!"
그것은 실로 거대한 굉음이었다.
인간이 어찌 그런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천군만마가 한꺼번에 대평원을 내달리듯, 메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고 대해가 한꺼번에 뒤집히듯 상상도 할 수 없는 굉렬한 소리가 옥음으로부터 터져나왔다.
혈우!
인간을 광란지경에 빠뜨리는 혈우였다.
진진은 혈우를 탄주하며 회심의 미소를 띠고 다시 운룡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옥용이 새하얗게 질렸다.
운룡은 한 올의 동요도 없는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당신은 좋은 재주를 가졌구려."
운룡의 담담한 말에 진진은 지그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삼변(第三變) 혈폭!"
순간 천붕지괴(天崩地壞)의 굉렬한 소리가 뚝 그쳤다.
이어 진진은 옥금의 제일현(第一絃)을 세차게 한 번 퉁겨냈다.
뚱!
몹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그녀의 옥금에서 튀어나왔다.
순간 그녀가 기대어 앉아 있던 주루의 회벽이 진동을 못이겨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운룡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대신 진진의 꽃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실같이 가는 선혈이 주르르 새어나왔다.
무릇 이와 같은 음공의 겨룸에서는 내력의 겨룸같이 공력이 약한 자가 손해보는 것이다.
진진은 전신의 내력을 모두 끌어올려 다시 비파의 현을 퉁겨냈다.
순간 따당! 하고 마치 폭음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다.
다음 순간 사방의 벽이 일제히 우수수 떨리고 혹은 지붕까지 들썩거리며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다.
실로 가공할 위력!
음공이 터지는 순간 운룡의 몸이 한차례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이내 원래의 담담한 표정을 되찾았다.
반면에 진진은 음공을 펼쳐낸 후 쉴새없이 몸이 흔들거리더니 왈칵 한 모금의 선혈을 쏟아냈다.
그녀의 발그레한 뺨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운룡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간신히 지념경(止念境)에 이른 무예…… 뿐인가? 내가 강기막을 펼쳐 이곳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사방 방원 백 장은 아예 초토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일반 백성은 생각지도 않는 이러한 한심한 수양…… 진진, 당신은 아직 멀었소. 집에 가서 어린 동생하고나 노시오."
말은 아직도 장내를 맴도는데 사람은 이미 간곳없다.
진진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녀의 평생에 언제 이러한 수치를 당해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생각할수록 분하여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개새……."
끼! 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는 말 대신 다시 한 줌의 핏덩이가 터져나왔으며, 그 자세 그대로 그녀는 썩은 고목처럼 그 자리를 나뒹굴고 말았다.
쿵!
그제서야 주루 주인의 놀람으로 희번뜩이는 시선이 조심스럽게 장내에 나타났다.
그런 것이다.
얻어맞은 통증은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치욕의 말은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 * *
"엽산, 내가 말한 대로 다리를 놀리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 넘어지기만 해도 뼈가 부러져."
"염려 말아요, 아저씨. 아아…… 그런데 이건 너무 신나는군요?"
슈슉!
쐐액!
일진광풍!
아니, 그저 바람인가?
무심히 관도를 걷고 있던 두 사람이 서로 의아한 시선을 나누었다.
"지금 뭐가 지나갔나?"
"글쎄, 바람이겠지. 거참, 이상한 바람이로군."
"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 바람이었어."
쐐애액!
엽산은 신이 났다.
가로수와 산, 들 등의 경치가 휙휙 그의 눈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축지둔형(縮地遁形)이라고 했다.
그는 운룡이 일러준 대로 발을 놀리고 있었고, 마주잡은 손에 의해 몸이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앞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 거죠? 어디쯤 왔어요?"
말을 하는 데도 숨이 턱턱 막혀올 정도의 빠른 속도.
운룡이 아니라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운룡은 진기의 운행을 조금 늦추며 말했다.
"청해(靑海)의 청호(靑湖)를 지나고 있다."
"청해? 와아…… 그럼 우리는 반나절 동안 천 리를 온 셈 아니에요?"
"앞으로도 천 리를 더 가야 한다."
호수.
그들의 옆으로는 장대한 호수가 무변의 기세로 펼쳐져 있었다.
청호(靑湖).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호수와 들판뿐인 청해에서도 손꼽히는 대호(大湖)였다.
길가엔 철이른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춘삼월(春三月)이 바로 내일이었다.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깨끗하고 맑았고 그 위로 팔뚝만한 잉어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르고 있었다.
"와아! 저 잉어 좀 봐!"
이때 엽산을 위해 일부러 경치 좋은 호변을 택해 달리고 있던 운룡은 문득 두 눈에 한줄기 특이한 광채를 떠올렸다.
저기 앞쪽.
파란 수면 한구석에 둥실 뜬 배 한 척.
호수에 배가 떠 있는 것이 뭐 그리 기이할까마는 운룡의 절정에 달한 시력은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중원인이란 것을 이내 꿰뚫어본 것이다.
'청해의 호수에 중원인이라…… 드문 일이로군. 게다가 저들은 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아닌가?'
이때, 배의 우현에 있던 사내가 이쪽을 힐끗 바라보더니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운룡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축지둔형으로 달리고 있는 우리를 알아본다? 이것은 저자가 지념경에 이른 고수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의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사내는 배 위에서 이쪽을 향해 정중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거기 오시는 분은 혹시 운룡, 운대협이 아니시오?"
거기다 이미 이쪽의 정체까지 꿰뚫어보고 있을 줄이야…….
"정지!"
운룡은 급히 진기를 거두고 그 자리에 우뚝 몸을 세웠다.
급정거하느라 비틀거리는 엽산을 잡아준 후 그는 힐끗 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남일녀.
한쪽은 백의(白衣), 다른 쪽은 홍의(紅衣).
백의의 사내는 햇살처럼 맑고 단아한 용모요, 홍의의 소녀는 우아하고 귀품이 있어 보였다.
둘 다 나무랄 데 없는 미모들이었다.
여인이 사르르 몸을 일으키자 사내는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원의 풍운아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오. 가시는 길이 바쁜 줄은 아오만 소제는 한 잔의 술을 대협에게 바치고자 하오……."
사내의 탈속어린 기품과 이들의 정체에 지극히 호기심이 인 운룡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삐그덕―삐걱!
네 사람이 각기 좌정하여 앉자 작은 배가 기분좋게 흔들렸다.
먼저 사내가 정중히 한 잔의 술을 부어왔다.
술은 연엽청(燕葉淸)이요, 잔은 투명한 옥배(玉杯)였다.
운룡은 즉시 호쾌하게 한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킨 후 사내를 향해 잔을 건네려고 했다.
한데 그때 돌연 뜻밖에도 홍의미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또다시 술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운룡은 얼떨결에 잔을 받기는 받았지만 몹시 의아해졌다.
'노류장화(路柳墻花)가 아닌 다음에야 정숙한 여인은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술을 따르지 않는 법…… 한데 이들은 부부처럼 보이거늘 어찌 지아비를 둔 여인의 몸으로서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일까?'
운룡은 고지식한 성격이라 이런 것들을 오래 참고 넘기지 않았다.
그는 잔을 놓자마자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두 분께선 하나같이 눈의 정기를 안으로 갈무리하고 계시니 이는 반박귀진(返撲歸眞), 지념경의 경지이오. 나는 중원인으로서 이러한 공력을 지닌 두 분이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구려."
순간 사내가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과연 운대협의 눈은 도저히 속일 수 없소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무엇을 더 숨기리까. 여기 이 사람은 이옥군이라 하고 소제는 사문공이오이다."
순간 운룡의 고요한 두 눈에 한줄기 놀람의 파랑이 일었다.
이옥군과 사문공.
이들은 바로 이번 천하검회에 참가하는 십사연방 중 한북 용권풍과 화남 광무천의 대표고수들이 아닌가?
운룡이 놀람의 빛을 보이자 사내 사문공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운대협을 이렇게 만났으니 소제 등은 허심탄회한 말씀을 드리겠소이다. 사실 이소저와 소제는 이미 약혼을 한 몸이오.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소만 중원인인 이상 결혼만큼은 천하검회 이후로 미루고 싶소."
"흐흠……."
"그리고 이제 막 우리 두 사람은 이번 검회를 포기하였소이다."
운룡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중원에 이승(二勝)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인데……?"
"헛허…… 하나 우리는 그러한 승부보다는 우리의 사랑을 더 소중히 여기기로 한 것이지요."
"……!"
"부끄러운 말씀이오만…… 운대협,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명리(名利)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겠소? 우리의 선조들은 한낱 뜬구름 같은 명예에 목을 매어 오늘과 같은 이런 일들을 만드셨소이다. 무예를 익히는 자로서 일견 솔깃해지는 것이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이지만 그러한 길을 걷다 보면 사실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단 말씀이오. 부단없는 싸움, 또 도전, 다시 싸움…… 인간으로 태어나 다른 한 인간을 만나 다시 인간을 낳고 웃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죽는…… 그러한 삶 앞에 명예라는 것은 가장 큰 짐이 되오."
문득 이옥군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한 결심을 굳힌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해대검회에서 당신을 눈여겨보았고 거기서 운대협을 중원의 운명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점찍게 된 것이에요."
"핫하…… 이건 돼지 얼굴에 금칠이구려."
사문공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진심이오. 운대협, 오늘 소제 등이 운대협에게 드린 일배(一杯)는 부디 소제 등의 뜻까지 모아 중원을 일으켜 달라는 부탁의 뜻이오. 운대협이 아니면 이 땅에 그 일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소."
운룡은 싱긋 웃었다.
"그래서 내게만 그런 골치아픈 일을 맡기고 두 분은 어디 무릉도원에라도 들어가 틀어박히겠다는 얘기가 아니오? 이거야, 어디 불공평해서……."
말은 투박하지만 웃음은 햇살 같다.
운룡이 진심으로 기분이 좋다는 것을 눈치챈 사문공 등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이해해 주시니 삼가 문파를 대표하여 감사드리오이다."
이옥군이 말을 이었다.
"저희들은 세외(世外)로 은거할 생각이지만 만약 운대협이 오신다면 대문을 활짝 열고 환영하겠어요. 또한 저희들의 혼례에도 부디 참석해 주세요."
"핫하…… 싫소. 난 도인이지만 도가의 경문에 대해서는 아예 백지상태란 말이오. 한데 혼례에 갔다가 느닷없이 경문이라도 읽으라면 어찌하오?"
순간 세 사람은 흰 이를 드러내며 대소를 터뜨렸다.
호면에 떠오르는 잉어와 장난을 치고 있던 엽산이 화들짝 놀라 그들을 향해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져왔다.
운룡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다시 길을 가는 도중에도 그가 끊임없이 싱글벙글하자 엽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으세요? 그분들을 만난 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에요?"
"암……."
운룡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것은 늘 기분좋은 일이다. 산아, 쥐꼬리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높은 곳을 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면 높은 것을 가지고도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답다 할 수 있는 것이다……."
* * *
"내일…… 바로 내일인가?"
동혈(洞穴).
이곳은 한 곳의 동혈이었다.
바로 밖이 극천(極天)의 설지(雪地)였지만 특별하게 고안한 짐승가죽이 입구에 둘려 있고 사방에 불을 밝혀 놓은 탓으로 안은 훈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들.
언뜻 보기에도 도남강, 용헌위, 연비, 두자상, 운연, 예소벽, 백리천 등이 보였다.
도남강의 심복인 천룡대라마도 있었다.
탄식을 터뜨린 사람은 도남강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원에 화남 광무천과 한북 용권풍이 불참통고를 해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만룡가와 신선도뿐……."
연비가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낮에 잠깐 보았지만 새외십파는 모조리 지념경에 이른 고수들이오. 도저히 승산이 없소."
용헌위가 말을 받아 탄식을 터뜨렸다.
"도대체 금악으로 들어간 세 아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들어가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참으로 암담하구나……."
도남강이 무거운 어조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이 혹시 안에 들어가서 서로 죽고 죽이는 잔살극(殘殺劇)을 벌인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무공으로 본다면 운룡, 난난이 이환명보다 우위지만 심기는 이환명이 낫거든? 서로 싸웠다면 필시 양패구상(兩敗俱像)을 했을 것이다."
그는 긴 탄식을 뿜어냈다.
"필부의 한순간 잘못으로 젊은 영재들을 그렇게 파묻고 말았으니…… 나는 도저히 만룡가의 선조와 중원을 볼 면목이 없구나……."
그때 두자상이 검미를 찡그리며 말했다.
"도천주는 너무 자학하지 마시오. 그 동안 도천주가 보여준 무예에 대한 열성과 마음가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도천주를 이해하고 있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최선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오. 연형은 내일 비무에서 가장 힘겨운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연비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축의 제세생불이 제일 힘겨운 적수이고 그 다음으로는 서장 호리대법왕과 동영 가등옥을 꼽을 수 있소. 요동의 혼제와 대막의 사군도 무시할 수 없지……."
"소제가 보기에는 이미 화남과 한북은 기권을 했고, 남해의 옥검후와 열하의 철패왕은 오긴 왔으나 참가의 뜻이 없는 것 같았소. 그렇게 된다면 결국 중원의 이 개 파와 천축, 서장, 새북, 동영 남만, 요동, 대막, 서촉의, 총 십 개 파의 대결이 아니오?"
"천축, 서장의 내가기공과 동영의 검술, 그리고 남만의 독술은 이미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기타고수들의 무예는 사실 아는 바가 없소. 듣자하니 요동의 혼제 최재봉은 본시 고려(高麗) 사람으로서 고려 특유의 음자(陰者)들을 이끌고 문파를 세웠다 하오. 그들은 음양파형검(陰陽派形劍)을 쓰며 멸절음린(滅絶陰燐)이란 무서운 암기가 있다 하오. 그밖에 기타문파에 대해서 아는 분은 말씀해 보시지요?"
백리천이 입을 열었다.
"대막(大漠) 광풍사는 만승은광정자팔(萬勝銀光正字八)이란 특이한 무기를 쓴다 하오. 특히 그들의 단혼사(斷魂砂)는 요주의 암기이오."
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서촉 파산파는 예로부터 편(鞭)의 기예에 달통해 있어요. 그들의 천왕편(天王鞭)은 천하삼대기병(天下三大奇兵)의 하나예요."
운연의 말을 끝으로 장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더 이상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때 돌연 한소리 낭랑한 목소리가 바람결처럼 들려왔다.
"당신들이 열거하고 있는 그들은 사실 하류(下流)요. 당신들은 천축, 서장, 동영, 남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알고 있소? 남만에는 비단 독(毒)뿐만 아니라 사두일우전(蛇頭一羽箭)이란 무서운 암기가 있소. 그것은 한 번 날게 되면 소리없이 상대의 혀에 날아가 박히오. 즉, 그들과 겨룰 땐 절대로 입을 열어선 안 되오."
나직하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
요동, 서촉, 대막 등을 하류라고 단언한 이 목소리는 이어 각국 제파의 장단점들을 상세하게 열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천축은 자고로 천룡계(天龍界)의 내공장법이 유명하지만 사실은 용봉쌍패(龍鳳雙牌)라는 무서운 무기를 숨기고 있다.
그것은 도박의 패장만큼 얇은 암기로써 한 번 날리면 피를 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하여 일비혈견휴(一飛血見休)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서장 밀종의 음흉한 돌머리들은 마음이련(魔音異聯)이란 괴상한 음공(音功)을 개발해냈다.
그것은 얇게 입을 오므려 혀끝으로 내는 소리에 불과하지만 내공을 주입시키면 인간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로 변한다.
만약 지념경 정도에 이른 고수가 그 마음이련을 전개하면 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살상할 수 있게 된다.
그밖에도 새북, 동영의 숨겨진 비예가 마치 청산유수처럼 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그가 바로 그 문파 출신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윽고 근 반 시진에 걸친 설명이 끝나고 나자 사람들은 어리벙벙하여 서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목소리로 보아 중원인이요, 젊은 사람인 것 같지만 중원에 이런 청년고수가 있었던가 하는 의구심이 그들의 눈빛에는 담겨 있었다.
문득 도남강이 연장자답게 침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귀 공은 누구요?"
"나요."
순간 짤막한 대답과 더불어 장내에 마치 유령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좌중의 절정고수들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절묘한 신법.
청년.
나이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까?
한데 그는 실로 지독하게 못생겼다.
얼마나 못생겼는지 원숭이라도 이 청년을 보면 만족하여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볼 정도의 추상(醜相)이었다.
먼저 그의 눈은 양옆으로 일제히 뻗었고, 눈동자는 각기 초점이 틀린 사팔뜨기였다.
게다가 코는 돼지가 시샘할 정도의 완벽한 들창코요, 입은 하마처럼 큰데다 입술마저 둥글넓적했으며 얼굴표면은 거친 자갈밭인 양 얼기설기했다.
그러나 장내의 그 누구도 그의 이러한 모습을 대하고서도 웃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가 보여준 신법과 말들이 너무 경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추면청년은 옆에 선 십여 세 가량의 소년에게 옆으로 가라고 이른 후, 큰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어험, 제현들은 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시오."
물어보지 않으면 말도 않겠다는 듯한 거만한 태도.
연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귀하의 신분내력은 무엇이오?"
"흘흘…… 나는 운추(雲醜)라 하오. 출신은 금악이며 신분은 악주(嶽主)이오. 내력은 만룡가이며, 저기 앉은 도남강은 따지고 보면 내 이대 사질뻘이 된다 할 것이오."
순간 금악이라는 말에 중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운연이 퉁기듯 일어났다.
"당신은 혹시 운룡이라는 사람을 아나요?"
"으음?"
운추는 그녀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았다.
"소저는 누구요?"
"운연, 곤륜의 운연이에요."
"흐흠! 운룡은 내 사질이지. 지금은 목하 폐관수련중이오."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여인들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채워 흘렸다.
'살아 있었다! 우리의 운룡이…….'
그때 도남강이 침중한 어조를 터뜨렸다.
"아까 운공은 나를 이대 사질뻘이라 하였는데 그에 대한 정확한 근거라도 있소?"
"의심스러운 모양이군. 그럼 잘 들어 보시게."
운추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이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 그의 입에선 만룡가의 천 년 전 조사부터 최근의 조사까지 그 이름, 용모, 특징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은 만룡가 제구십팔대 조사의 의발제자로서 나이 삼 세에 금악에 입문하였으니 곧 진천우도의 사숙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남강은 자신의 증사질뻘이 된다는 얘기였다.
도남강은 적이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으나 가문의 천 년 전 조사부터 줄줄 외워대는 그의 기세에 눌려 할 수 없이 큰절을 올리고 말았다.
"삼가 도남강이 사숙조(師叔祖)를 뵈오."
"으험!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라. 그건 그렇고 내일 검회에는 내가 참가하겠으니 그리 알아라. 이는 운룡의 부탁이 있었기에 내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여 주신다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오소이다."
"불감증이고 뭐고, 저기 저 친구."
두자상은 해연히 놀란 시선을 던져왔다.
"소생 말씀이오이까?"
"그래, 나는 자네의 의문을 좀 풀어주어야겠어."
"그게 무슨……."
"자네는 도마(道魔)를 찾고 있지 않나? 그 진범을 말해 주겠다는 얘기네."
도마.
백 년 전 도가혈사를 일으킨 대살성!
사람들은 전 무림이 나섰어도 오리무중이었던 도마의 정체를 말해 주겠다는 운추에 대해 경이로움을 넘어서 신비로움마저 느꼈다.
순간 두자상은 상기된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게 누구이오이까?"
"허어! 서두르긴, 내 말을 들어 보라."
생긴 건 젊은데 말투는 영락없는 노인네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범인은 바로 제세생불이야."
짤막한 말!
그러나 순간 중인들은 다급한 신음을 들이키고 말았다.
'제세생불! 제세생불이라니?'
'천축은 말할 것도 없고 중원에까지 그 인자함이 널리 알려진 제세생불이 어찌 도마란 말인가?'
"흐흠! 못 믿겠나? 그러나 이건 확실해. 제세생불의 나이 올해 백 하고도 사십이다. 즉, 이 일은 그가 나이 사십에 저지른 일이야. 그 이유가 뭔고 하니……."
"뭔고 하니?"
"그는 우연히 만룡가가 대대로 마공을 익히다 마인이 되곤 하는 것을 알고는 이 음모를 꾸몄지. 즉, 스스로 변용하여 도가에 대한 대혈겁을 저지르고는 그 죄를 만룡가에 덮어씌우기로 한 거야."
"왜요?"
"만룡가는 대대로 그의 가장 큰 호적수였다. 만약 이번 검회에서 만룡가가 우승하면 그는 도마의 비밀을 멋지게 폭로할 생각이었던 거지. 즉, 만룡가의 마인들이 그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야. 당시의 마인들은 이미 죽고 없으니 그의 말은 큰 효력이 있다. 게다가 그 영악한 놈은 또 몇 가지의 위증(僞證)을 준비하여 멋진 함정을 만들어 놓았지. 그 중 하나가 바로 저놈이야."
운추의 손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천룡대라마.
순간 그는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여 황급히 밖을 향해 몸을 퉁겼다.
그의 이 동작은 너무 순간적이었으므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때 운추가 씩 웃었다.
"엽산!"
순간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소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데 없이 재빠르게 메고 있던 화살에 촉을 매겨선 시위를 당겼다.
번갯불에 콩 구어먹는 듯한 놀라운 빠르기!
"욱!"
다음 순간 한소리 둔탁한 신음과 함께 막 동혈 밖으로 몸을 퉁기려던 천룡대라마의 몸이 푹 쓰러졌다.
그의 양 허벅지에는 어느새 두 개의 하얀 화살이 박혀 있었다.
두자상 등은 소년의 궁술에 혀를 내두르며 재빨리 천룡대라마를 잡아들였다.
"저놈은 제세생불의 제자야. 오십 년 전 만룡가에 투신한 것도 위장이지. 그의 임무는 제세생불이 도마의 일을 폭로할 때 가장 훌륭한 증인이 되어주는 거다. 즉, 마인의 증세에 대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말이야."
그때 도남강이 형언할 수 없이 정중한 표정으로 천룡대라마에게 물었다.
"천룡! 사숙조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인가?"
천룡대라마는 체념한 듯 힘없이 웃더니 고개를 푹 떨구었다.
"저런 괴물 같은 자를 만났으니 무엇을 더 숨기랴…… 그의 말은 다 사실이오."
아아…… 백 년을 이어오던 비밀, 도마!
드디어 그 비밀의 내막이 백일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사대도가의 공동전인인 백리천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운노사(雲老師), 제세생불이 유독 도가를 그렇게 참살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렇다. 제세생불이 만룡가의 마인의 만행으로 덮어씌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다른 대상이 있었을 것이다.
한데 하필이면 왜 도가였을까?
운추는 그의 말에 씩 웃어 보였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사실은 그것이 가장 큰 단서였는데 말이야. 제세는 어릴 때 푸른 옷을 입은 사람한테 죽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푸른색에 대해 일종의 보복심리를 무의식중에 지니게 된 것이지. 그것이 생불이 아닌 도마의 신분으로 피의 태풍을 일으킬 때 무심결에 폭로된 거야. 즉, 도가는 재수없게도 푸른 도복을 전문적으로 입는 바람에 그 살인마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운이 없었다고나 할까?"&
26.
그건 春風花雨였다니까
대풍운!
대격돌!
지켜보는 이라고는 관계고수 오십여 명에 불과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이 절산설지(絶山雪地)를 오를 생각도 못하고 산아래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십사연방천하검회!
이 미증유의 일대검회는 처음부터 파란의 연속이었다.
우선 중원의 화남, 한북에 이어 신선도의 연비도 스스로 비무를 포기했으므로 중원에선 만룡가만이 단독으로 출전했고, 새외쪽은 예상대로 남해 십검지, 열하 철혈문, 새북 관산장을 제외한 천축, 서장, 동영, 남만, 요동, 대막, 서촉 등의 칠 개 파가 참가를 했다.
천축, 서장, 중원의 대표들이 선포한 대진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천축 유가법종(瑜伽法宗)의 제세생불(齊世生佛) 대(對) 요동 음자촌(陰者村)의 혼제(混帝) 최재봉(崔宰鳳).
서장 밀종(密宗)의 호리대법왕(狐里大法王) 대 대막 광풍사(狂風砂)의 사군(沙君) 향동래(香東來).
동영 일월이도류(日月二刀流)의 검귀(劍鬼) 가등옥(加藤玉) 대 남만 만독성(萬毒城)의 일우독군(一羽毒君).
그리고 화북 만룡가(萬龍家)의 운추(雲醜) 대 서촉 파산파(巴山派)의 수왕조왕(獸王鳥王).
맨 첫번째 대결에서 제세생불은 과연 새외제일인(塞外第一人)다운 눈부신 면모를 과시했다.
그는 천룡신장(天龍神掌), 서천불수인(西天佛手印), 보리옥폭참(菩提玉暴斬) 등의 유가법종 특유의 기예를 발휘하여 요동의 혼제 최재봉을 마음껏 몰아부쳤다.
최재봉은 특유의 음양파형검(陰陽派形劍)에서 비롯되는 순양십이검(純陽十二劍)과 파란 인광이 번뜩이는 멸절음린(滅絶陰燐) 등으로 사력을 다해 항거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이십오초수 만에 서천불수인에 격중당하여 대 아래로 나가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두 번째 대결은 장중한 밀종의 무예와 괴이난해한 대막의 무예가 어울린 한판 승부였다.
결과는 호리대법왕의 아슬아슬한 반초승(半招勝).
대막 사군의 저돌적인 공세에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호리대법왕은 승포자락을 길게 찢기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세 번째 대결은 동영 가등옥의 검예(劍藝)가 단연 돋보인 대결이었다.
검귀(劍鬼), 또는 검마(劍魔)라고도 불리는 희대의 검도절인 가등옥.
그의 일월쌍검(日月雙劍)에서 펼쳐지는 사일(射日), 요월(遙月)의 두 검식은 마치 태양과 달빛이 어우러진 듯한 한바탕 거센 춤사위였다.
남만의 일우독군은 그의 검세에 밀려 주특기인 독술을 전개할 엄두도 못 냈으며, 결국 십일초 만에 팔 하나가 달아나는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한데 문제는 네 번째 대결에 있었다.
만룡가의 운추.
그는 도대체 무인(武人)일까, 희극배우일까?
이 믿을 수 없도록 못생긴 추남은 서촉 수왕조왕의 천왕편(天王鞭)이 대 위를 난무하기 시작하자 사람 살리라며 연신 대 위를 빙글빙글 맴돌아 중인들은 한바탕 배꼽을 뺐다.
그런가 하면 화가 난 수왕조왕이 그의 주특기인 수조공(獸鳥功)을 펼쳐 수십 마리의 무시무시한 독문괴조들을 불러들이자, 이번엔 또 오십여 마리의 독수리들에게 달려들어 그 털을 뽑고 올라타며 난리를 쳐댄 것이다.
"산아, 여기 한 마리 간다. 이따 통구이 해먹자!"
"이랴! 끼랴!"
그러던 어느 한순간 운추의 개산배월(開山拜月) 일초에 의해 일장을 두들겨 맞고 대 아래로 굴러 떨어진 수왕조왕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실력으로 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화병으로 울화통이 터진 게 주된 원인일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어쨌든 이리하여 일회전은 천축, 서장, 동영, 중원이 각기 귀중한 일승씩을 올리게 되었다.
* * *
"오후의 비무상대는 동영의 가등옥이오, 사숙조. 제발 그 기행(奇行)으로 사람 가슴 좀 철렁하게 하지 마십시오."
도남강의 말에 운추는 씩 웃었다.
"봤나? 내 개산배월 일초가 어땠나?"
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했소. 시간, 각도, 위치 다 좋았소."
"역시 자네는 보는 눈이 좀 있군."
"그러나 오후의 가등옥과는 전법을 다르게 구사하셔야 할 것이오."
연비는 침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후 비무부터는 장소가 부용지(芙蓉池)로 옮겨지오이다. 즉, 물 위에 뜬 연꽃 위에서 대결을 하셔야 하오. 이는 공력이 배로 들 뿐 아니라 두 개의 무기를 사용하는 가등옥에게 열 배는 더 유리한 것이오."
"흐음, 자네 검(劍) 가진 것 있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묻는 운추의 말에 연비는 무심히 자신의 검을 내밀었다.
운추는 검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너무 가볍군."
그리고는 운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낭자의 것도 줘보게."
운연이 자신의 검을 내밀자 운추는 두 개의 검을 한 손에 들었다.
"괜찮군, 이걸로 하지."
순간 중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라! 운추가 두 자루의 검 중 하나의 검자루를 두부 자르듯 뚝 떼내고는, 이어 두 개의 검날을 한데 모아 쥐자 피시식 하는 기음과 함께 두 검이 하나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흐음…… 역시 괜찮아……."
쉴새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어나가는 운추의 모습을 보며 중인들은 입을 쩍 벌렸다.
검을 통째로 달구어 버리다니!
그러한 순양기공(純陽氣功)이란 보기는커녕 상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운추, 아니 운룡은 검을 허리에 꿰차고는 느릿하게 밖으로 걸어나왔다.
하늘은 가볍게 흐렸다.
흐린 산야(山野)가 주는 시원한 바람이 운룡의 눈을 적셔왔다.
그가 천천히 걸어 한 곳의 칼끝 같은 벼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나직한 교갈이 그의 귓전을 울렸다.
"잠깐만요."
힐끗 돌린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섬세한 인영 하나.
문득 운룡의 무심한 동공에 가벼운 출렁거림이 일었다.
'옥수……!'
옥수.
그렇다. 하얀 입김을 훅훅 내뿜으며 빨간 볼을 한 채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남해 십검지의 옥수령이 아닌가!
"무슨…… 일이신가?"
옥수령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곧 입을 열었다.
"저…… 귀공께서는 운룡의 사숙조가 되신다고……."
정인(情人)의 안부를 묻기 위함이어선지 그녀의 볼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순간 운룡은 가슴이 뭉클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높은 신분.
일국 일계파의 종주라는 높은 신분의 그녀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 이러한 부끄러움까지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는 짐짓 퉁명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렇긴 하오만…… 소저는 어인 일로 그 아이를 찾으시오?"
옥수령은 이제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고 말았다.
"저는…… 그를 한 번 만나고자……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지……."
"아녀자가 수업중인 남자를 만나서 무엇하려고?"
거듭되는 퉁명함에 옥수령의 눈가가 붉게 물들고 말았다.
그냥 놔두었다간 눈물이라도 쏟고 말 것 같았다.
운룡은 짐짓 헛기침을 한차례 한 후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소저의 사정이 딱한 것 같으니 청을 안 들어줄 수 없겠구려."
순간 옥수령의 얼굴에 기쁨의 물결이 보석처럼 스쳐 지났다.
"그게 정말이신가요?"
"흐음…… 그놈은 사실 이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소. 그렇다고 사람의 이목이 많은 곳도 이상하니…… 그렇지, 저기 저 산봉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곳에 괜찮은 동굴 하나가 있는 것을 내 봐두었소. 그놈이 오면 그곳으로 보내지."
순간 옥수령은 그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소리를 순식간에 열 번도 더했다.
이어 그녀는 한 마리 놀란 토끼처럼 폴딱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운룡은 착잡함이 감도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힐끗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운룡아…… 운룡…… 너는 도대체 이러한 여업(女業)들을 어찌할 생각인가?"
하계(下界)는 춘삼월이지만 이곳은 아직 겨울이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 * *
연(蓮).
부용(芙蓉)이라고도 한다.
하늘하늘 물 속을 뻗어 올라온 가는 줄기 위로 싱그러울 정도로 소담스러운 꽃을 피워 올리는 강한 생명의 꽃.
"해발 이십칠만 척의 연못에 연꽃이라…… 아마도 이것은 지상최고의 높이에서 피는 연꽃이 되겠군."
운룡은 무심히 중얼거리며 연잎에 둥실 몸을 실었다.
이어 그는 아까부터 벌써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동영의 가등옥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등옥.
그는 흑발을 어깨 어림까지 치렁치렁하게 길렀고, 회색장포를 걸쳤는데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시선만은 독수리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검귀 가등옥의 얄팍한 입술이 열렸다.
"중원에 대단한 고수가 있었소. 아까의 개산배월의 초식에는 정말 감복했소. 그 위치와 각도였다면 나라 해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오."
운룡은 씩 웃었다.
"옳은 말이오. 하나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오."
"그 말은 본인의 심기를 흐리고자 하는 말이신가?"
"아니, 그저 나는 당신이 일초를 펼친 후엔 다시는 검초라는 것을 펼칠 기회가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이것은 진심이오."
검귀 가등옥의 시선이 무표정해졌다.
그는 쌍수쌍검(雙手雙劍)을 비스듬히 들어 보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줄기 폭죽 같은 살기가 그의 전신으로부터 폭사되어 왔다.
오후의 첫번째 비무에서는 제세생불이 호리대법왕을 오십초 만에 이겼다.
따라서 이것은 두 번째 겨룸이었다.
운룡은 천천히 급조하여 팔십 근의 무게를 맞춘 검자루를 꼬옥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검자루의 감촉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금악을 나온 이후 운룡은 지금까지 누구하고든 건성으로 싸워왔다.
승부에 크게 집착한다는 것, 명리나 명예나 권력 따위의 풋내나는 것들은 공심경에 이른 그가 보기에는 모두 한 잎 풀조각 같은 것이었다.
하나 검귀 가등옥의 검기(劍氣)가 싸늘하게 피부에 닿아오자
팽만하는 몸 속의 혈관…….
운룡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얼마 만인가…… 가볍게 피부를 찔러오는 살기의 통증, 약간의 두려움이 내포된 혈관의 팽창, 검자루의 두툼한 감촉, 머리 속으로는 초식…… 이것이 겨룸의 느낌이다. 아아…… 나는 이런 것이 좋다…….'
흐린 하늘 한구석으로 그의 고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타앗!"
공간을 자르듯 무서운 검기가 쏘아져 오고 있었다.
운룡의 손목 힘줄이 불끈 일어났다.
그의 손이 춤추듯 검로(劍路)를 치닫기 시작했다.
검은 그대로 광채로 빛나고…….
초식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劍
劍劍活躍
具其所處
於基行焉
刺之絶局
검.
검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
반드시 가고 싶어하는 길을 가지고 있다.
그 검의 마음을 헤아려 그대로 가주었을 때, 검은 절대로 인간의 재주로는 피해낼 수 없는 사각(死角)을 찌르는 것이다.
"아아악!"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제세생불이 놀라움에 가득찬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연비도, 두자상도, 운연도, 예소벽도…….
아니 단 한 초식이라도 무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 솟구치는 피를 부여잡고 쓰러져 가는 검귀 가등옥의 몸 위로 번뜩인 이 한 자루 검의 마력을 알 것이다.
한 마디로 그 검은 완벽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검귀 가등옥이 아닌 자신이 찔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연비가 넋을 잃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것은 운룡이다. 운룡만이 할 수 있는 운룡의 무예다……."
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연꽃 위의 운룡은 스스로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가면을 벗고 있었다.
즉시 드러나는 투명하도록 해맑은 얼굴!
"운룡!"
"도마(道魔)! 사라져간 일천 도가를 대신하여 말하노니 내려와서 검을 받으라!"
운연 등의 소녀들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의 이름을 외친 것과, 운룡의 손이 저만큼 위의 제세생불을 가르킨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온 산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굉렬한 외침.
제세생불은 부르르 몸을 떨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하나 이때 백리천 등에 의해 끌려 나오고 있는 천룡대라마의 모습이 그의 시선 속으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왔다.
순간 그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는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고소(苦笑).
그 웃음은 이내 엉뚱하게도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대소로 변했다.
"핫하하하…… 대단하구나, 운룡! 내 너를 과소평가한 것이 실책이었다! 네가 올라오라!"
운룡의 두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팍!
그는 수중의 인피가면을 내팽개치기 무섭게 제세생불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갔다.
"원수야!"
제세생불은 그런 그를 힐끗 보더니 한서린 광소를 터뜨리며 마주 덮쳐들었다.
"핫하…… 네놈이 모든 걸 깨뜨리고 마는구나!"
드디어 용호상박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한쪽은 백사십 세의 새외제일인이요, 다른 한쪽은 중원이 키워낸 풍운의 영웅!
일찍이 이렇듯 거대한 두 거인(巨人)의 싸움이 있었을까? 한 손을 휘저으니 십여 개의 절학이 난무하고, 일보에 십여 장을 평지처럼 걷는다.
펼쳐지느니 희대의 기공(奇功)이요, 뻗어 나오느니 실전된 기학(奇學)이 아닌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인들은 또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심지어는 각 계파의 종주들조차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오오…… 저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의 무예로구나."
"도대체 무예의 길이란 어디가 끝인지……."
두 사람.
이 희대의 고수들은 싸움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기류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현상.
조금씩 높아지던 두 사람의 몸은 이내 아득한 흑점으로까지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순간 가슴을 조이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철렁하게 할 만큼 쩌렁한 외침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천룡대라만겁인(天龍大羅萬劫印)!"
"춘풍화우(春風花雨)!"
빛!
희고 검으며, 투명하고 혼탁한 두 개의 빛이 마치 태양이 폭발하듯 허공의 한구석에서 작렬했다.
파아악!
그리고 다음 순간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람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으아아아악!"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일까?
잠시 후, 빗발치는 피보라와 함께 한 사람이 느릿하게 허공으로부터 하강하고 있었다.
후두둑!
한 사람.
오오…… 그는 바로 운룡이 아닌가!
순간 연비를 비롯한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기쁨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만세!"
"운룡 만세!"
"와아아……."
승리.
이것은 진정한 인간승리였다.
십사계파의 고수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 청년의 눈은 맑디맑소."
"그 무예는 이미 하늘에 닿았소."
"패망한 문파를 홀로 일으켜 세운 의지인이오."
"이제야 천하는 진정한 제일인(第一人)을 맞이하였구려……."
* * *
연비가 씩 웃었다.
"저 미친놈…… 저놈이 마지막 순간에 펼친 초식이 무엇인지 아나? 바로 춘풍화우야. 무림의 원숭이도 아는 그 검식을 새외제일인에게 썼단 말이야. 그 배짱하며…… 그 우직함…… 그는 늘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운연이 웃으며 말을 뱉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매력이 아닌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말하잖아요. 불패의 승부사라고 말예요."
도남강이 조용히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익주(翼州)에 땅을 좀 사놓은 것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나무나 길러보는 것이 어떨까?"
용헌위가 놀람에 찬 어조로 말했다.
"성은 어떡하고요, 형님?"
"운룡이 있잖은가?"
"그는 도인이오. 속인이 아니외다, 형님."
"도인?"
도남강은 피식 웃었다.
웃으며 그는 말했다.
"물론 무당파는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겠지만 그놈은 천생 도인이 될 팔자가 아닐세. 저 야생마처럼 날뛰는 계집애들을 보게나. 환호하는 군웅들을 봐. 나의 조카지만 그는 이 시대가 만들어낸 영웅이다. 사람들이 영웅을 도포나 입고 염불이나 외우게 놔둘 것 같은가? 자자…… 이제 무림은 젊은 아이들에게 맡기면 돼. 골치아픈 얘기는 그만두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구."
운룡이 옥수령의 젖무덤을 꼬집으면서 말했다.
"이 동굴이 어때? 높긴 하지만 경치는 그만이거든."
옥수령은 그의 품안에 나른한 고양이처럼 안겨 있다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알고 보니 엉큼한 사람이야."
"어어…… 무서운 모함이로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않으면? 아까 제세생불과 싸울 때 춘풍화우 초식 속에 엉큼하게도 슬쩍 횡소천군을 갈무리하지 않았단 말인가요?"
"아니, 그건 선인지로였소."
"핏! 횡소천군이에요."
"선인지로라니까."
참으로 한심한 남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동굴에 들어와선 미친 듯이 옷까지 벗어놓고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횡소천군에다 춘풍화우 어쩌구란 말인가?
투닥투닥 말싸움, 몸싸움을 이어가는 이 한심한 동굴 밖으로는 소담스러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해 마지막 눈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최후의 무예 공령(空靈)까지 익힐 건가요?"
"공령? 웃기지 마시오. 옥수, 그럼 나보고 신이 되라는 얘긴가?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르오. 그리고 나는 신보다는 인간쪽이 좋단 말이오."
<끝> 완결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