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픈 부활의 연가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조대형입니다.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장!
근대화 물결 속에 새롭게 성장된 근대역사 도시!
서남권 다도해를 비롯 천혜의 관광자원과 문화유적을 자랑하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수탈의 기점 역할을 했던 눈물의 도시, 목포.
국민의 고달픈 삶과 애환을 달래준 우리민족의 망향가 불멸의 가수 고 이난영 여사의 “목포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 후, 강산이 한번 바뀐 십 여년 뒤 일반인이 거의 알지 못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부용산”입니다.
예향 목포의 향토적 기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민중가요. 한국 전쟁 전부터 목포를 비롯한 남도지역에 한때 크게 유행했던 노래. 부용산!유난히도 가슴을 저미게 하는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애절한 노래의 사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상 조대형 해설사의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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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연꽃 모양을 닮은 ‘부용’이라는 산 이름은 전국에 걸쳐서 여러 군데 있다. 《부용산》이라는 작품의 부용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해발 95m 조그마한 산의 이름이다.
“부용산” 시를 쓴 주인공 박기동(1917-2004)은 여수 돌산 태생으로 그의 나이 10세 때 벌교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다. 본디 박기동 시인은 순천 사범학교에 재직 중이던 1947년에, 친누이 박영애가 24살의 꽃다운 아까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 시댁 식구 몇 명과 함께 친정 부모님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보기 어려워 참석 못하고 부용산 중턱에 그를 묻고 유난히 푸
른 하늘색 부용산 오리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인생 무상함에 휘청거리며 가슴 저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왜 푸른 잔디처럼 푸르게 살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너는 가고 말았구나!’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골수 깊이 파고 들어가는 비통한 상처 오빠의 애절한 심정을 시로 만든 제망매가! <祭亡妹歌>
빼어난 미모 그리고 착하기 그지없는데다 아이마저 갖지 못하고 떠나버린 누이의 가슴에 저며드는 애닯은 시가 노래로 탄생된 것은 이듬해(1948) 목포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 신) 국어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인은 운명적으로 음악교사인 안성현을 만나게 된다.
안성현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작사)》 만든 작곡가로 나주 남평 태생이다. 동경 음악학교 나온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다.
서랍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품에다 곡을 지어 붙여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기구한 운명 속에 탄생되었던 것이다.
점입가경이라 할까! 남도 정서 발상지 예술의 고장 목포는 문학의 산실이다 할만하다.
문단 최초 여성 작가로 한국 최초 여성 장편 소설가요, 개화기에 태어난 한국문학의 선구자 박화성, 우리 언어 최초로 희곡을 쓴 근대 극작가 김우진, 사실주의 연극의 완성자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차범석 등 기라성 같은 문단거목들이 탄생한다. 예술 향기가 느껴지는 곳 그 영향을 받아 항도여중은 한글문예 사랑에 각별했던 조희관 교장선생님의 지도 아래 예향 목포의 정체성을 일구어 가는 텃밭이 된다.
항도여중으로 부임한 시인은 누이를 잃은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또 다른 애제자 문학소녀 김정희를 만나게 된다.
경성 사범학교를 입학했던 수재 김정희는 상경하여 유학하다가 건강문제로 항도여중으로 전학해와 학교생활중 폐결핵으로 열일곱 나이로 요절했다(1948. 10. 1).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 글짓기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수재이며 미모를 가진 학생이다.
우리나라에 감화원이 제일 처음 설립된 시기는 1923년 12월 5일 함경남도 원산 송전만 지역에 조선최초의 사회시설 그 후 20여 년 동안 원산의 감화원이 국내 유일의 소년 범죄자들의 재활교육시설이었고 1937년 전남도서 연안 중에 최종적으로 감화원 부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현재 감화원 터는 공생 재활원(1984년 생긴 사회복지 법인) 재활 위한 복지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미소녀 김정희는 노령산맥 마지막 봉우리 호남의 명산 목포의 한과 꿈이 어우러진 유달산에 자주 올라갔다. 다도해의 전경 해안의 풍경 멀리 오가는 선박들을 바라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자신의 건강과 운명을 생각했을까?
저 유달산 앞바다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한 고하도를 바라보며 그 고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감화원에 수용되어 있는 감화원생들을 생각하면서 감화원 설계라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누이의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 설상가상 또 다른 애제자가 요절하게 되자, 본인은 물론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그 슬픔의 작품에 음악교사 안성현 곡으로 세상에 탄생한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1절 전문)
낮고 느리되 그윽하게 시작된 이 노래는 중간의 ‘너만 가고 말았구나’에서 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너무나 아리따운 나이에 결핵으로 이승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누이와 애제자에 대한 사랑을 표출한 시적 가사라!
김정희 학생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리어진 이 가슴 저미는 노래 《부용산》은 1948년 10월 목포극장에서 열린 항도여중 예술제 배금순 학생의 노래 발표로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 인근 지역 남도에 들불처럼 빠르게 전파되어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다.
젊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한 시가 애제자이던 소녀의 죽음을 추모한 곡으로 변한 이 노래 《부용산》은 그동안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로 알려지다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어지러운 시절 지은이마저 모르고 가사와 곡이 제각각 입을 따라 유행했다. 과거 빨치산들, 운동권 계층에서 즐겨 부르던 인기곡.
최근 몇 년 사이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 박기동 선생의 소식이 알려지게 되어 부활의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1998년 봄 한국일보 김성우 칼럼 등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하기까지 아픈 사연이 많았었다.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에 매몰돼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어두어야만 했던 노래. 애절한 사연만큼 구구절절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산으로 간 빨치산들,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던 불안한 생활을 하면서 떠나온 고향마을 가족 생각, 애절한 마음으로 부용산을 불렀던 빨치산 주제가?
실제로 남부군 일원이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고 비참하게 죽어간 동지들이 불쌍해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노래 불렀다는 증언이 있다
그 후 80년대는 운동권 학생들 민주투사들의 비밀스런 애창곡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작곡가 안성현 선생님은 육이오 동란에 스스로 월북해 버려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문제로 동료 박기동 교사,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퇴직시키고 말았다. 작사자는 한의사였던 부친 덕으로 일본유학 관서대학 영문학 수학 청소년기 장년기 교편생활 중 발표한 부용산이 영욕을 겪으며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용산 계기로 박기동 선생님의 외롭고 고단한 삶이 노년기까지 이어지는 쓸쓸한 인생 여정의 서막이 예고되었던 것이다.
순수한 누이에 대한 정을 읊은 부용산으로 인하여 좌경으로 의심받은 나머지 50년대 말 교직을 물러나 직업 없이 국내를 전전하였으며, 1980년 부인(문행자 여사)마저 잃고 낭인의 나날을 보내게 됐다.
1967년 목포 사범 국어교사 교직을 떠나 1961년 서울로 이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가시밭길 걸어야 했고 80년대에도 늘 감시받고 가택수색, 연행, 구금당한 세월, 좌경 시인으로 몰려 한평생 떠돌아야 했던 것이다.
결국 혈혈단신 이역만리 호주(1993년)로 떠나 시드니 근교 난민촌 마운틴산에 정부 보조금으로 비좁은 7평 아파트를 보금자리 삼아 살다가 수년 전 서울로 돌아와서 병원에 몸져누운 채 88세 미수로 한 서린 육신의 삶,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 아내 옆에 오랜 유랑을 마치고 심신을 쉬고 안식하고 있다. 중앙 문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한반도 한 자락에서 반세기 넘게 시단 활동 해온 남도의 불행한 서정시인 박기동!
연극인 김성옥씨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랄까.
어쨌든 오랜 세월 이 노래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고 호주로 건너가 박기동 시인을 만났다. 그리고 2절을 부탁했다.
세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1절 나온 지 53년 만에 2절이 태어났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은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2절 전문)
이전의 가사가 누이에 대한 애달픔을 읊은데 비해 새 가사는 자신의 초연한 서글픔을 드러낸 요소가 물씬 풍긴다. 해외에 나가 살면서 더욱 간절해진 조국의 하늘과 땅에 맺힌 남매의 애틋한 마음의 절정이라 할까!
고독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생의 한 자락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강산이 다섯 번 바뀐 세월 동안 그늘에 숨겨져 오던 부용산!
지난 세기 말 새롭게 부활되었다.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작가 박기동 시인은 2절 작품을 만들고, 지난 날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참을 수 없어 30분가량 그냥 엎드려 울었다 한다.
“부용산” 몇 몇 뜻있는 분들은 목포에서 태어나 명맥을 이어온 이 노래의 한을 풀어 주기로 했다.
96년 5월 29일 목포 부용산 음악제! 소프라노 송광선(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 부르고 2절 가사가 처음 공개되었다. 2절 역시 가사만큼 가슴 저미게 불러 청중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2002년에는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산문집을 발간, 박기동 선생님은 5월 20일 잠시 귀국하여 목포에서 조촐한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 낭독을 하기도 하였다.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안타까운 70년 동안 시만 생각하고 살았으면서도 번번이 원고 압수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함은 실로 안타까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작 시구가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 살고 싶다” 유언으로 다가와 심금을 울린다. 그는 이 노래를 지켜왔고 부활시켰던 목포, 벌교 사람들 것이라 했다.
월북 작곡가 안성현(安成絃 1920. 7. 13 - 2006. 4. 25)은 목포 항도 여중 사택에서 혼자 하숙하며 그 집 피아노로 작곡했다는 그는 무용가 최승희 남편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으며, 아내를 홀로 두고 끝내 월북하였다. 우리나라 근대 음악사에 선구적 업적을 남긴 월북 작곡가라는 비운의 삶을 살다간 안타까운 음악가로서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해방과 평화를 갈망한 노래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2006년 4월 86세로 타계 했으며, 유족으로는 성동월(86) 미망인과 딸이 살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로 60년 전부터 목포지역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
요즘도 호남 남도 지역 출신 노년층 동창생들 회식자리 추억의 향토노래로 합창되고 있으며 이는 서편제의 가락에서처럼 원초적인 남도의 사랑과 정한의 강물이 여울져 흐른다. 가수 안치환, 이동원에 의해 무대에서 새롭게 불려지고 음반도 출판되었다.
부용산 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 벌교, 목포는 부용산 음악회를 개최 하는 등 노력으로 대중 곁으로 새롭게 부활의 노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부활의 노래 부용산의 진원지였던 목포여고는 1949년 안성현 곡, “봄바람”으로 합창 경연대회 전국 최고상 수상 경력이라는 전통의 맥이 흘러와 지금도 합창대회 전국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화려한 경력이 증명해주고 있지 않는가!
또한 현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특히 항도여중 맥 찾기 운동을 추진하여 당시 전국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조희관 교장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본보기 삼아 64년 전통 찾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교내에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산실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 학교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어 지역에 그리고 교육계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작사자 고향 1999년 가을 벌교 현지 부용산에 < 부용산 > 시비가 건립되었고, 2002년 봄에는 작곡의 본산지 목포여고 교정에 ( 부용산 ) 노래비가 세워져 무상한 세월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한 월북 작곡가 안성현의 고향 나주 남평 드들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2009년 5월 22일 “그들은 누구인가?” 라는 주제로 안성현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가 처음으로 나주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노래가 탄생된 배경의 중심에 섰던 학교 사랑에 각별했다던 당시 항도여중 조희관 교장 선생님을 기념하는 “문학비”가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이기봉 교장 선생님의 관심과 노력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갓바위 문화타운 목포 문학관 앞에 세워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될뿐더러 목포를 빛낸 100名중 한 사람으로 남도 문학의 숨은 별로 한글사랑과 수필가로 지역교육에 헌신한 교육자로 선정되어 유달산 예술 공원에 공적이 새겨져 있다. 실로 관심 있는 분들로 인하여 수난과 역사 속에 잊혀졌던 부용산 노래는 시인의 끈끈한 삶과 시 그리고 음악이 어우러진 삼위일체 작품으로 되살아난 부활의 작품, 부활의 노래로 역사성 있고 의미 짙은 국민가요로 아픔의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통일을 염원한 노래가 새롭게 또 다른 부활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