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에 묻는다. 그리고, 바란다.
- 『추사명작전』을 보고
김 병 기 (전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서예가, 서예평론가)
올해는 다른 해에 비해 추사선생에 대한 담론과 행사가 많이 있었던 해이다. 3월 초 미
술사학자인 유홍준 교수가 추사의 일생을 엮은 《완당평전》이라는 大著를 세상에 내놓
음으로써 추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완당평전》의 출간을 기념이
라도 하듯 學古齋 화랑과 東山房 화랑이 공동으로 《완당과 완당 바람》이라는 제목아
래 추사 서예 특별전을 3월 22일부터 4월 11일까지 열고 이어서 대구, 제주, 광주 등
전국 순회전을 가짐으로써 전국에 완당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10월에는 우리나라에
서 추사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간송미술관에서 《추사 명
작전》을 열음으로써 추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자료를 공개해 주었으며 이와 비슷한 시
기에 정병삼 등이 지은 《추사와 그의 시대》라는 책이 출간되어 추사의 면모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다양한 행사를 통하여 우리는 추사 선생의 서예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게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를 통해서 약간의 문제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예
컨대, 〈완당과 완당바람전〉에 출품된 한 작품과 관련하여서는 필자가 월간 《까마》
2002년 9월호에 글을 발표하여 추사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
고, 지난 10월 간송미술관이 개최한 《추사명작전》에 대해서는 전시된 작품의 진위 문
제를 놓고 일각에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는 점을 국민일보가 2002년 10월 29일자 신문에
서 〈유통 秋史작품 상당수가 가짜다〉라는 기사를 통하여 알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
제들이 제기된 것을 계기로 삼아, 앞으로 추사 서예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연구를 위해
서는 추사 작품 세계에 대해서 보다 활발하게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또 그
러한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학계가 앞장서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작
품을 소장하고 있는 所藏者들 또한 연구자들에 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아야 하리라고 생
각한다.
해마다 한 차례씩만 열리는 간송미술관(이하 ‘간송’으로 칭함) 특별전은 소장품이 갖
고 있는 중량감과 중요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년의
추사 명작전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시장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으며 현관 로비에
서는 그간에 간송이 출간해 온 《간송문화》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전시장에
사람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자료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선다는 것
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일은 전시를 주관한 미
술관 측이 전시작품의 내용에 대한 안내와 설명을 보다 친절하게 하고, 관람객은 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관람하고 연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간송의 이번 전시는 사람은 많
이 찾아 왔으나 전시 내용에 대한 안내와 설명은 별로 친절하지 못했다. 작품을 관람하
는 과정에서 잘 모르는 점과 의문점이 있어도 물을 곳이 없었고 설령 물어도 답이 시원
치 않았으며 더욱이 자료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는 요구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
이나 다름없이 ‘안 된다’는 답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람 당시에 필자가 가졌던
몇 가지 궁금한 점은 풀 길이 없었다. 이에, 생각 끝에 찾아낸 방법이 지면을 통해서
묻는 것이었다. 이제, 간송 측의 친절한 답을 기대하면서 몇 가지 필자의 견해를 밝히
고자 한다.
질문1
이번에 전시된 추사 작품 중에는 「秋水 深四五尺, 綠陰相間兩三家」(도1 : 《간송문
화》 63집 12쪽. 이하 쪽수만 표시한다.)이라는 대련 작품과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
章不染塵 」(도2 : 13쪽)이라는 대련 작품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의 두번 째 句에
는 도1과 도2에 표시한 바와 같이 도장이 찍혔던 자국과 도장을 지웠던 자국이 있다.
다시 부연 설명하자면, 도1의 경우 「兩三家」의 「三」字 왼편에 위 아래로 도장 두
개를 찍었다가 지운 자리가 역력하게 남아 있고, 도2의 경우에는 「不染塵」의 「染」
字 왼편에 도장을 두 方 찍었다가 지운 자리가 불그스름하게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다. 여기에 찍혀 있다가 지움을 당하게 된 본래의 도장은 과연 누구의 도장일까? 추사
의 낙관인일까? 추사의 낙관인이었다면 왜 그것을 지우고 그 위쪽에 오늘날 볼 수 있
는 도장 즉 「김정희인」이라고 새긴 도장과 「완당」이라고 새긴 도장(도3)을 다시 찍
었을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점에 대해서 前人들의 지적이나 연구가 있
었는가 하고 자료들을 뒤적여 보았으나 과문한 탓인지 아직 해답이 될 만한 답을 얻지
못했다. 이점에 대해서 소장자인 간송 측에서 시원한 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질문2
이번의 추사 명작전에 전시된 추사의 작품 중에는 위에서 언급한 도1과 도2의 대련 작
품 외에도 상당수의 대련 작품이 있었다. 「唯愛圖書兼古器, 且將文字入菩提」(도4:
14쪽)와 「芳草桃花四五里, 白雲流水兩三峰」(도5: 18쪽), 「踐碧新瓷烹玉茗, 硬黃佳
帖寫銀鉤」(도6: 20쪽), 「句曲水通多 外, 敬亭山見石 西」(도7: 21쪽), 「閒撫靑李
來禽字, 宛在天池石壁圖」(도8: 25쪽) 등의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
에는 對句 문장을 쓴 본 작품 외에 어떤 脇書도 없고 글씨를 쓴 당사자인 추사의 호나
이름이 단 한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다. 다만 추사의 이름과 호를 새긴 도장만 두 방
씩 찍혀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들 두 개의 도장은 다른 도장이 아니라 앞서 도장을 지
운 흔적이 있는 작품(도1과 도2)에 찍힌 도장 즉 도3으로 제시한 그 도장이다. 예시한
여섯 작품에 모두 다 그 도장이 찍혀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위 ‘對聯’이라는 형식의 작품은 桃符板이나 立春帖 등에 기원을 두
고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唐宋시대에는 대련 형식의 작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명
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예작품으로서의 對聯이라는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
다. 명나라 때의 서예가들인 祝允明, 文徵明, 徐渭, 董其昌, 米萬鐘 등의 작품에서 그
러한 대련 형식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서예 작품은 역시 長軸 즉,
길이로 길게 쓴 족자 형식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었고 아직 대련 형식의 작품이 일반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 대련 형식의 작품이 완벽하게 완성되
어 크게 유행하게 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서 대련형식의 작품이 그처럼 유행하게 된 까
닭은 표구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명나라 때까지는 작품을 표구하여 벽에다 걸어두고 감상하는 풍조가 성하
지 않았는데 청나라 때에 이르러서 표구기술의 발달로 대련 형식의 작품을 표구하여 벽
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대련 형식의 작품은 청나라 초기의 작가
들의 작품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처럼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게 되면서부터 서
예가들은 대련 작품의 양편에 脇書로 그 작품을 제작하게 된 동기나 작품의 증여 대상
인물 등을 밝히는 跋文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풍조가 유행하면서 대련작품의 형식
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대련작품에 본격적으로 跋文형식의 脇書를 쓰
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중기의 서예가인 高士奇(도9), 鄧石如(도10), 伊秉綬(도11), 阮
元(도 12) 등이다. 그런데, 추사는 바로 이들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새로운 대련
형식의 서예작품을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그 새로운 작품을 우리나라에 보급시키면서 청
나라 작가들이 했던 대로 작품에 脇書로 題跋文을 많이 썼다. 다시 말하자면, 추사는
당시 조선 서단의 서예가들이 아직 접해보지 못한 대련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조
선 서단에 선진적으로 보급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청나라 작가들이 사용했던 형식 그
대로를 우리나라에 보급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추사의 명작으로 알려
진 대부분의 작품, 예를 들자면 「直聲留闕下 秀句滿天東」(도13: 31쪽)이나, 「松窓
露 端溪潤, 石鼎雲 願渚香」(도14),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도15: 16
쪽) 등의 작품에는 모두 발문이 협서로 쓰여있다. 이처럼 발문을 협서로 쓰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 추사시대부터 조선 서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그러한 형식의 보급에
자부심을 가지고 앞장선 사람이 바로 추사인데 왜 위에서 열거한 다섯 작품 즉 도4로부
터 도8까지의 작품에는 협서는커녕 書者의 호나 이름 한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은지 모
르겠다.
물론 협서를 반드시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안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청나라의 신진
문화를 조선에 자부심을 가지고 들여온 추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청나라 서예가들이 하
던 대로 협서를 쓰는 것이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터이고 또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많았을 텐데 위에서 열거한 다섯 작품에는 전혀 협서를 쓰지 않았으니 그 점이
다소 의외라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질문3
주지하다시피 추사는 호가 많기로 유명하다. 菁南 吳濟峰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추사
의 호는 모두 503개라고 한다.(조선일보 1989년 3월 26일 참조) 이렇게 즉흥적으로 호
를 많이 지은 추사는 작품을 할 때마다 당시의 심정과 처지에 맞는 호를 골라서 작품
에 쓰곤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추사의 작품에는 다양한 호들이 쓰여져
있다. 추사가 이처럼 호를 많이 지은 까닭은 그때그때 작품에 사용하기 위해서인데 왜
위에서 열거한 다섯 작품(도4∼도8)까지의 작품에는 호나 이름이 단 한 글자도 쓰여져
있지 않고 도장만 찍혀 있는가? 이점 또한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점에 대
해서도 시원한 답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질문4
이번의 추사 명작전에 출품된 작품 중에는 「행서첩」이라는 이름 붙여진 折帖이 있었
다.(도16, 17: 56, 57쪽) 그런데 이 작품은 1995년 간송의 특별전인 《추사를 통해본
한중묵연전》에도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두 14면으로 되어있다는데, 《추
사를 통해본 한중묵연전》때에는 14면 중 2, 3, 13, 14면이 펼쳐진 채로 전시되었고
당시에 작품명은 〈東坡山谷像記〉로 표시되었었다. 그리고, 1995년의 《추사를 통해
본 한중묵연전》에는 〈東坡像〉(도18: 《간송문화》48집 7쪽)이라는 작품도 전시되었
었다. 그런데, 도18의 동파상에 제화시로 쓰여진 翁方綱의 詩가 〈동파산곡상기〉의 제
2면에도 그대로 쓰여져 있었다(도19 비교표 참고).
그런데 두 작품상의 글씨는 각 글자가 결구 면에서 너무나도 흡사하다. 변화가 많은
「怪」한 글씨를 쓰기로 유명한 추사 선생이 이 작은 細筆의 글씨를 쓰면서 왜 그처럼
똑같은 결구로 글씨를 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다. 이에, 필자는 《까마》
2002년 9월호를 통해서 이들 두 작품과 또 다른 작품 하나가 지나치게 많이 닮아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파산곡상기〉의 전모를 살펴보면 이 두 작품이 그처럼 닮게 된 이
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송 측에 全貌에 대한 열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이야기를 발표하였었다. 그런데 이번 추사명작전에는 1995년에 〈동파산곡상
기〉라는 이름으로 출품된 작품이 「행서첩」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다시 전시되었
다. 그리고, 이번의 추사 명작전에서도 역시 지난 1995년 《추사를 통해본 한중묵연
전》 때에 공개했던 부분과 같은 부분인 13면과 14면 만을 공개하였을 뿐 전모는 공개
하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 작품의 이름을 〈동파산곡상기〉에서 〈행서첩〉으로 바
꾼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 작품의 전모는 공개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알
고 싶다.
질문5
이번의 추사 명작전에 출품된 작품중에는 「松風吹解帶 山月照彈琴」(도20: 29쪽)이라
는 대련 작품이 있다. 이 작품 역시 아무런 脇書도 없고 호나 이름도 쓰여져 있지 않
다. 그런데 필자는 이 작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다. 추사의 여느 글
씨와도 다른 낯선 풍격의 글씨이며, 필획 또한 추사의 어떤 글씨에서도 볼 수 없는 매
우 유약한 필획이기 때문이다. 추사의 글씨라고 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의 글씨였다
면 한마디로 ‘못쓴 글씨’로 평하고 싶은 그런 글씨이다. 그만큼 작품성이 떨어지는
글씨인 것이다. 추사의 서예 일생 중 이런 풍격의 작품을 한 것은 대개 어느 때쯤일
까? 그동안 추사의 작품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해온 간송 측의 시원한 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과 같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아울러 필자는 간송 측에 바라는 바가 있다. 이
제, 그 바라는 바를 전달하고자 한다. 추사선생은 결코 간송만의 추사선생이 아니다.
우리민족 모두가 이해하고 연구하여 높이 추앙해야할 인물이다. 우리가 추사선생의 작
품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추사선생은 서양의 고호나 마네, 모
네, 또는 피카소보다도 위대한 예술가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고 단지 우리만
의 추사로 남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추사선생에 대해서 정말 깊
이 있게 추사 예술의 실체를 연구해야 한다. 그러한 연구를 위해서는 자료에 대한 구체
적인 점검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실정으로 보아 연구자가 추사선생의 진적
작품을 직접 대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간송 측은 우리의 추사선생을 세계적인 예술
가로 부각시키기 위해 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공개하여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추사선생에 대한 추앙만 일삼는다면 그것은 추앙이 아니라 자칫 모독이
될 수 있다. 물론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 너무나도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함부로 공
개할 수 없다는 간송 측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발달된 시대이니 만큼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眞蹟은 제대로 잘 보관하고 마이크로 필름
이나 기타 발달된 영상기술을 이용하여 연구자들에게 연구용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중국의 고서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으
로 유명한 대만 고궁박물원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싸움에서 국민당의 蔣介石이 공산당의
毛澤東에게 밀리자 장개석은 국민당 정부를 이끌고 대만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장
개석은 북경의 고궁에 소장되어 있던 많은 유물들을 대만으로 가져왔는데 그 유물들이
지금 세계적인 박물관이 된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다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물들의 양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당,송,원,명,청대의 고서화 작품은 거의 다 대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작품들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의 고서화를 보기 위해
서는 대만의 고궁박물원에 가야한다. 그러므로 대만의 고궁박물원은 중국의 고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항상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연구자들을 위해 고궁박물관 측
은 연구자가 직접 眞蹟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이라도 사전에 열람하고자 하는 자료 목록을 통보하고 연구자의 신분을 밝히면 정해진
날 연구자가 박물관을 찾아갔을 때 박물관 측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자료를 공개해 준
다. 이러한 자료 공개를 위해서 방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 방안에는 대형 책상
이 길게 놓여 있고 그 책상 위에 목록으로 신청한 작품을 미리 펼쳐놓고서 연구자를 기
다린다. 연구자가 들어오면 연구자가 가지고 있던 만년필이나 볼펜 등 일체의 필기도구
를 따로 보관하게 하고 대신 연필과 종이를 주며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게 한다. 만년
필이나 볼펜을 빼앗아 두는 까닭은 작품에 혹시 잉크를 떨어뜨릴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
고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는 까닭은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환경을 조성
한 후 박물관측은 연구자가 필요로 하는 시간만큼 충분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온
갖 편의를 다 제공한다. 대만 고궁박물관의 이러한 지원으로 인하여 중국의 고서화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활발하게 진행되어 세계의 문화시장에 유력한 컨텐츠
로 등장하고 있다. 대만 고궁박물원의 이러한 적극적인 지원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의 고서화 연구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선생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간송측이 선구적으로 그리고 모
범적으로 연구자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한다면 우리나라의 고서화 연구 분위기
도 크게 바뀔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해 그 동안에 많은 노력
을 해온 간송 측이 결단을 내려 우리나라 고서화 연구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주기를 간
절히 바라는 바이다.
- 월간서예 2002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