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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맷길 3-2코스는 부산의 속살을 보며 걷는 도심 산복도로 길로서 부산포의 역사와 근현대사의 흔적이 녹아 있는 사람의 길이기도 하다. 출발에 앞서 자성대 자락에 복원한 영가대(永嘉臺)를 본다. 원래 터는 이곳이 아니라 부산진성 남문 터인 지금의 성남초등학교 뒤편 주택가와 경부선 철로변 사이에 위치했다. 1910년 경부선 철도 부설과 부산진 매축 때 사라졌다. 더욱이 건물의 일부는 일제 강점기 ‘부산 3대 부자’ 중의 한 명인 오이케 타다스케가 그의 별장 능풍장으로 옮겨가버렸다.
1614년 광해군 때 경상도 순찰사였던 권반(權盼)이 부산진 지성(자성대)의 성 밖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낸 토사가 언덕처럼 쌓이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었다. 대 위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뛰어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1617년 조선통신사 오윤겸이 처음 이곳에서 일본으로 출발한 이후 1811년까지 200여 년간 통신사가 출발, 귀환하는 장소로서, 안전한 항해와 무사귀환의 해신제가 치러지기도 했다.
1624년(인조2) 선위사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 안동의 옛 지명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이름 붙였다. 옛 그림 속 영가대는 주변 풍경과 어울려 본디 거기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한때 부산의 랜드마크였던 영가대는 그렇게 사라졌다. 좀더 멀리 조망하고 싶어 자성대 정상으로 오른다.
1592년 4월 새까맣게 몰려든 700여 척의 왜선이 부산 앞바다를 메웠다. 첨사 정발이 절영도 사냥을 나갔다 황망히 성으로 돌아왔다. 4월 14일 왜군의 선봉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명나라를 치고자 하니 길을 열어 달라”고 했다. 임진년의 왜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만8,700명의 왜군이 성을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최초의 전투가 반나절 동안 격렬히 벌어졌다. 장군은 그때 전사했다. 중과부족이었다. 부산진성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교두보가 되면서 진성의 자성이던 자성대는 소서성(小西城)이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불리다 명의 장수 만세덕이 진주한 적이 있어 만공대(萬公臺)라고도 불렸다.
부산장터는 한눈을 팔게 만드는 묘한 마력 지녀
왜군이 물러간 뒤 조선은 성을 수리했다. 자성대를 중심으로 새로 성을 쌓고 사대문인 진동문(鎭東門:동문)·금루관(金壘關:서문)·종남문(鐘南門:남문)·구장루(龜藏樓:북문)를 세워 관아를 정비한 후 부산진첨사영으로 사용했다. 서문 양측 성곽에 끼여 있던 우주석(隅柱石)에는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글이 새겨져 있지만, 자성대는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채 도심 한가운데 쓸쓸히 묻혀 있다.
골목을 빠져 나와 진시장으로 향한다. 육교 건너에는 2002년 리모델링을 통해 현대식으로 바뀐 진시장이 우뚝하니 서 있다. 그 곁에 남문시장이 골목 하나를 경계로 소란하다. 진시장은 부산진성의 남문 앞에 섰던 부산 최대의 장으로 부산장으로 불렸다. 옛 사진 한 장이 오버랩된다. 황령산을 배경으로 왁자지껄한 부산장의 한때를 찍었던 기록사진이다. 담벼락에 팔짱을 낀 떠꺼머리총각과 삿갓 쓰고 갓 쓴 흰옷 입은 사람들이 초가집 사이 장터 골목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장면이다. 당시에도 북적이는 시장통이지만 장터는 늘 한눈을 팔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백화점과는 달리 흥정과 에누리가 있는 곳이 재래시장이다. 사람 사는 냄새와 악다구니에 귀가 열린다. 질척임이 흥건하다. 그렇지만 푸근한 정경이다.
좌천동 가구 거리 골목을 지나 일신기독병원으로 향한다. 경부선 철로 육교를 건너 좌천삼거리에서 범곡교차로 사이 도로의 육교를 건너야 한다. 도로에서 한 블록 뒷길에 매켄지가(家)의 사연이 기다리고 있다. 영가대로부터 1.2km에 불과한 거리지만 행보는 더디다. 매씨 사람들은 평생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곳 부산과 부산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를 어루만지다 떠난 사람들이다.
아버지 매견시(梅見施·1865~1956)와 매혜란(1913~2009), 매혜영(1915~2005) 자매의 삶은 헌신과 생명사랑의 메시지였다. 매견시 목사는 한국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로 용호농장과 상애원의 핵심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두 딸은 한국에서 나고 성장해 한국의 모자보건사업을 위해 일했다. 늘그막에 그녀가 조국 호주로 귀국할 때 가져 간 것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골목 하나를 두고 이웃한 정공단(鄭公壇)으로 간다. 그리고 그 너머 골목길에는 부산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인 일신여학교와 부산진교회가 있다. 정공단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서 임진왜란 때 나라의 관문인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군민을 이끌고 궐기해 장렬히 싸우다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한 정발 장군과 휘하의 이정헌(李庭), 첩 애향(愛香), 노복 용월(龍月) 등을 모시고 있다.
최후의 순간, 이렇듯 죽음으로써 의로운 길을 간 사람도 있지만 동래 좌수영의 박홍은 모든 전투함을 스스로 부수고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수영을 버리고 퇴각했다. 그는 멀리서 부산진성에 불길이 치솟는 광경을 보고 부산진성 함락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고는 경주로 도주했다. 정발의 죽음이 돋보이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정공단을 나와 오르막길에 일신(日新)여학교와 부산진교회를 찾았다. 오늘날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학교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5년 지어졌다. 그 시초는 호주선교사들이 닦았고, 내걸었던 슬로건이 ‛날마다 새롭게 살자’ 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경남지역 최초로 3·1운동의 불씨를 당겨 주동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전력은 박차정 등의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길은 증산공원이 있는 산복도로를 따라 걷다 금성고 뒤편 제일아파트 계단을 따라 오른다. 무수히 많은 골목과 계단은 산복도로의 상징이요, 한국 근현대사의 현장이다. 그리고 증산은 부산이란 지명이 유래한 산으로 부산의 정신이 발현되는 곳이다. 그 정신의 핵은 ‛저항’이다. 그런데 그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증산에도 왜성이 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만큼 부산에서 일본은 무시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줄기다. 그 줄기는 가끔 심사를 뒤틀리게 하지만 우리가 풀어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진열된 액자 속의 빛바랜 청춘 부부 사진
좌천4동 상아약국에서 주도로인 망양로를 탄다. 사실 이곳에서의 주도로는 의미가 없다. 어디든 골목이다. 다만 교통량이 제일 많은 망양로가 산복도로를 대표할 뿐이다. 제일 위쪽이 수정산길, 두 번째 길이 수성길이다. 그리고 그 아래 수정중복길과 무궁화길, 꿈나무길이 차례차례 내려가면서 고관길이 정발로와 이어지며 중앙로와 만난다. 이렇듯 무수히 많은 길은 이 공간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이 택시기사와 더 가니 못 가니 악다구니를 벌이며 산동네 사는 서러움을 곱씹는 현장이기도 하다.
2012년 들어 부산시는 시정의 중요 과제로서 산복도로 르네상스를 추진 중이다. 산복도로에 큰 변화가 예고된 셈이다. 수성초등학교로 방향을 잡는다. 500m 남짓한 거리에 구세약국 삼거리가 나오고 좌회전해 내쳐 걷는다. 수성초등학교 담장이 끝난 직후 어린 고객들로 붐비는 문방구가 두 곳 있다. 문방구에는 문방구 특유의 냄새가 있다. 크레파스와 잉크, 지우개, 연필, 공책 등이 만들어 낸 조합된 냄새로 40년 전 어린 날의 나를 불러내었다. 문방구는 보물창고였다. 장난감을 비롯해 소위 불량식품에 가지고 싶은 문구류에 늘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늘 만지작거리다 눈요기만 하고 돌아서야 했다. 보통 4남매 이상의 자녀를 두었던 당시 부모들로서는 육성회비조차 버거운 세월이었다.
문방구 바로 옆에는 산복사진관이 있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사진관이다. 산복도로는 아날로그 시대를 담고 있다. 마침 진열된 액자 속의 흑백사진에는 빛바랜 청춘의 한 부부가 다정히 앉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머리는 산동네 계단을 오르내리는 세월 속에 하마 삭았다. 일가족이 찍었던 기념사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사거리에서 억수탕으로 직진해야 한다. 186번 버스가 스친다. 망양로는 수정5동 산모퉁이를 휘감는다. 하늘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달리 주차할 공간이 없는 이곳 특유의 토지이용에 대한 산물이다. 주차장은 대부분 전망대의 역할을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집집마다 옥상에 세워 둔 노랗고 파란 물통이다. 고지대라 물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절, 비상시기를 대비한 방책인데, 시나브로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 너머 부산항이 내려다보인다. 산복도로는 부산항의 들고 남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사실 이 산자락은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었다.
나라를 잃고 징용으로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이들이 천신만고 끝에 귀국한 현장이다. 또 동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통에 목숨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나섰던 길의 끝이 부산이었다. 열차의 마지막 역이 부산이었다. 계획되지 못한 세상으로 그들은 문을 열었다. 때문에 산복도로에 서면 계획도시와 비계획도시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광복동을 중심으로 남포동, 중앙동이 근대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일본인이 밀집한 지역인 반면 남부민, 초장동, 아미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좌천동은 그들을 뒷바라지했던 조선인 신흥 주거주지인 셈이다. 그 시기는 대략 1920년대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 부산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던 것은 일본의 대륙침략 병참기지로서 부산이 기능했기 때문이고, 조선인 대부분은 하역과 날품, 일용 건설직으로 연명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고 갑자기 몰려든 해외 귀환동포의 유입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민의 유입은 거대한 산동네를 형성했다. 더하여 1960년대 경제개발기에 또 한 무리의 이주민들이 산동네에 편입되면서 오늘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부산인구의 3분의 1인 약 130만 명이 산복도로에 거주한다. 사람들은 산 아래서 일하고 산 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비록 좁은 골목과 가파른 계단이 이들의 생활 통로이긴 하지만, 부산시가 내건 시정의 슬로건인 ‘다이나믹 부산’과는 동떨어진 ‘슬로시티’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수정4동 주민센터 뒤편 낡은 아파트들이 도열해 있다. 구봉산을 배경으로 수정도시아파트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맞은편 묘심사가 있다. 초량4동 새마을금고 삼거리를 빠져 나와 다시 한 굽이를 돈다. 하늘주차장이 많다. 조망점이 뛰어난 곳이다. 영도 봉래산과 신선대 사이 북항의 수역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충혼탑이 보인다. 도로표지판에도 정권의 이해가 반영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중앙공원 대신 민주공원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또 바뀔지도 모른다. 금수사를 스친다. 얼마 전 산동네의 일상이 삼거리 옹벽에 그려졌다. 회색 옹벽에 생명이 부여돼 주민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벽화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1895년 선각자 박기정 선생이 설립한 봉래초등교
삼거리에서 초량시장 방향으로 크게 방향을 튼다. 1km가량 곧장 내리막을 걷다 초량아파트에서 좌회전해 초량시장통으로 들어선다. 200m 정도 형성된 시장을 벗어나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선창고 터가 있다. 초량객주 사람들이 원산에서 온 명태며 수산물을 부려 삼남지방 일대에까지 공급하던 물류창고였다. 1900년대에 지어진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창고건물이었으나,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대형마트로 변했다. 한 블록을 넘어서면 초량 외국인상가가 국적불명의 얼굴로 서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이 낳은 부산의 이방인지대였다. 전쟁으로 중앙동 뒷골목에 미군 상대 홍등가가 생기고, 권총을 차고 몰려드는 미군들은 서부 활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여 언제부터인가 텍사스촌으로 불리게 되었다. 원래는 중국 조계지가 있어서 청관(淸館)으로 불렸던 곳이다. 198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 선원과 상인이 즐겨 찾는 것으로 변모했지만 한 번씩 미군함정이 입항할 때면 그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나붙고, 도깨비 시장이 형성되기도 한다.
골목어귀에서 러시아 여성이 말을 건네지만 미소만 짓는다. 상해문을 돌아 골목 네거리에 자리한 중국집 홍성방 앞 사거리는 일대의 이정표다. 홍성방은 예전 초량왜관의 설문(設門) 터로서 문 안쪽인 옛 초량지역(용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왜관의 왜인(倭人)들이 조선인 부락으로 무단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래부에서 마련한 군관들의 기찰(譏察) 터였다. 왜관은 일본인을 위한 객관으로 조선 근해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에 대한 회유책으로 설치된 대일외교의 관문이자 실제적 교류의 현장이다.
홍성방에서 청관길을 따라 봉래초등학교로 이동한다. 골목을 따라 좌우에 늘어선 중국집과 그들이 주고받는 중국말은 이 동네의 성격을 규정한다. 새영주시장을 지나 영주삼거리앞 육교를 건너 봉래초등학교로 내려선다. 봉래초등학교 주변은 옛 객사가 있던 곳으로 성신당, 빈일헌, 통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 사신이 머물던 서울의 동평관이 폐쇄되면서 일본 사신은 초량객사를 이용해야 했다. 왜국의 사신은 이곳에서 조선국왕의 전패(殿牌)에 숙배(肅拜)를 올리고 예물을 올리던 숙배식을 올렸다.
한편 봉래초등학교는 선각자였던 박기정 선생이 1895년 설립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다. 설립 당시 교명은 개성학교였지만 1909년 한국정부에 헌납되었다.
정문에서 직진하다 좌회전해 초량객관길을 따라 약 150m 이동하면 주선약국이 있고, 거기서부터 영선고개길이 시작된다. 당시 동래부에서 용두산이나 사하, 다대 방면으로 오가던 유일한 통로이다.
동남장 여관 옆 붉은 벽돌로 쌓은 낡은 한옥이 있다. 전형적인 ㅁ자 형 한옥으로 1924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뒤 당시 공무로 도청을 찾던 고위 관리들이 묵던 장춘여관이다. 집은 퇴락해 을씨년스럽다. 문득 영화 ‘서편제’에 등장했던 해남의 ‘유선관(遊仙館)’을 떠올렸다. 명소가 되어 예약도 어려운 유선관의 오늘과 장춘여관의 명암은 너무도 뚜렷하다. 초량시장통 남선창고의 아픔이 도진다. 복원이 필요한 곳이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마저 고갯길을 오른다. 염광교회 주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일제시대 조선 최대의 수산자본가이던 카시이의 별장이 있던 터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 있던 수천 평 규모의 대저택은 1953년 역전대화재로 사라졌다. 그 시절 영선고개는 부산항을 훤히 조망할 수 있었다. 부원맨션이 자리한 곳은 영선산의 다른 이름인 쌍산의 한 봉우리가 있던 곳으로 1910년 이전만 하더라도 관해루(觀海樓)라는 누정(樓亭)이 있었고, 일제시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던 이들을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배웅하던 곳이다.
바다는 지척에 있었다. 고개에서 직선거리 50~60m에 불과했다. 일제는 북빈매축을 통해 지금의 중앙동 일대의 수면을 매립했다. ‘새마당’이란 지명은 이때 생겨난 것이다. 바다는 지금의 북항 제1부두며 2부두까지 밀려났다. 매립되기 전 이 바다에서는 청어며 정어리가 많이 잡혔다. 영선고개길 골목 이름표로 달려 있는 논치길의 유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논치길을 따라 오르면 대동아파트가 있다. 옛 해관장(관사 터)이었다. 아파트 정문 앞 중국집 한성각 자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인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이지만 흔적을 기념할 만한 어떤 표식도 없다.
40계단으로 향한다. 먼저 동광동 주민센터로 들어선다. 3, 4층 전시관에는 6·25 전쟁으로 정처 없이 흘러들었던 피란민들의 애환이 칸칸이 배어 있다. 모질게도 살았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40계단에는 아코디언을 켜는 사람이 돌계단 중간에 앉아 그 시절을 상징하는 ‘경상도아가씨’를 연주하고 있다. 현재 일대는 부산의 인쇄골목으로 유명하다.
사람살이의 최전방에서 던져지는 육두문자들
40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좌측으로 제일은행 건너편 산업은행 쪽으로 이동한다. 이 길은 옛 해안선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부터 옛 초량왜관 터다. 조선 속 일본인 마을로서 200년 가까운 세월 조선과 일본 간의 무역과 문화, 외교가 이루어진 장이다. 크게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 있다. 동관은 관수(館守)와 무역 업무를 담당한 장기체류자들이 거주했던 동광동과 광복동 일대를 말하고, 서관은 신창동 대각사 일대를 지칭한다.
선린우호를 표방했던 왜관의 기능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조선침략교두보가 되고 1910년 이후에는 전관거류지로 되면서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들은 부산의 행정구역을 식민통치에 유리하도록 개편하면서 도시를 계획했다. 그 중심인 용두산에는 신사를 세우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타워호텔과 부산호텔을 지나 광복로에 들어서면 어느 곳보다 일본인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다. 한때 그들은 이 거리를 보무당당히 걸었다. 그리고 갓길에는 움츠린 채 주눅 든 조선인의 처량한 걸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억압의 중심부에는 독립운동의 거점인 백산상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직도 많은 시민들은 일제의 잔악한 통치와 수탈을 통해 생겨난 상처로써 일본을 인식한다. 그것은 직접 그 세월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도 학습되어 날카롭게 표출되지만 무딘 칼이다. 한류가 일본 안방을 넘나들고 일본 문화는 오래전서부터 뒷골목을 장악했다. 좀더 큰 시선이 필요하다. 왜관은 조일합작 건축지대이며, 조선이 만들어 준 것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일대를 재조명하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들어야 한다.
광복동으로 들어선다. 광복 후, 동명 개칭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 광복을 기린다는 뜻에서 이 지역을 광복동이라 이름 지었다. 이런 광복동은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리에 다방이 하나 둘씩 들어서고 자연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다방들은 9·28 서울 수복 후 서울로 옮기거나 사라졌지만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부산 젊은이들의 문화공간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심은 옛 미화당이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광복동 그리고 남포동의 PIFF 거리를 지나 자갈치로 향한다. 부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 기억되고 회자되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먹는 재미와 보는 재미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좌판 가득한 어패류와 꼼장어구이집의 호객행위는 자갈치를 잠시도 심심하게 만들지 않는다. 또 사람살이의 가장 최전방에서 막무가내로 던져지는 육두문자의 팍팍함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자갈치는 그런 곳이다. 날이 저물었다. 고추장 범벅에 꼬물거리던 꼼장어가 알맞게 익었다.
길잡이 자성대(영가대)-진시장-남문시장 철길육교- 좌천동가구거리 육교-일신기독병원 1.2km-정공단- 제일아파트-증산공원 1.7km-동구도서관-상아약국 2.5km-수성초등학교-수정도시아파트-금수사삼거리 5.8km-초량시장 6.9km-홍성방-봉래초등학교 8.1km-동광동주민센터 9km-백산기념관-타워호텔- 용두산공원 9.6km-부산근대역사관-국제시장- 자갈치시장 12km
대중교통 부산역 -도시철도 1호선 -범일역(하차)
부산역 -2번, 27번, 41번, 101번, 103번, 167번, 좌석 1003번 버스(진시장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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