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의 세계 ⑲
제3장 불교 교단의 확립 – 불교 상가와 교법의 전수
제3절 아쇼카왕과 불교[다르마(法의) 정치와 불교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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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장 마애법칙(磨崖法勅)
지금의 파키스탄 북쪽에 있는 샤바즈가리, 만셀라, 웃탈 푸라데슈 주의 야무나 강 상류에서 히말라야 산맥의 최선단 가까이에 있는 카루시, 아라비아 해에 임해 있는 카티아와르 반도의 기르나르, 서인도의 마하라쉬트라 주에 있는 소팔라, 벵갈만에 면해 있는 오릿사 주의 다우리와 자우가다, 남인도의 안드라푸라데슈 주에 있는 에라구디, 그리고 아프카니스탄의 칸다하르 등, 9개 장소에 아쇼카왕의 14장 법칙이라 불리는 비문이 남아 있다. 이 지역들은 인도 최초의 통일 대제국인 마우리야 왕조가 그의 전성기 때 이룩했던 판도의 동서남북 각 방향의 대략적인 경계를 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지역마다 암괴나 커다란 표석(漂石)의 일부를 평평하게 갈아서 그 위에 비문을 새겨 놓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가운데는 그 일부가 없어진 것도 있어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전부 14장으로 된 법칙이므로 보통 ‘14장 마애 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1) 칼링가 전쟁과 다르마(담마, 法)의 정치
이 마애법칙(磨崖法勅)은 다르마에 근거한 시정 방침을 나타낸 것으로서, 그 가운데 13장은 아쇼카왕이 힘의 정치로부터 다르마의 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칼링가 전쟁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치세 8년이 되는 해에 아쇼카왕은 지금의 오릿사 주에 위치한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다. 이때 “15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그곳에서(다른곳으로 이송되어 10만 명이) 살해되었으며. 그 몇 배가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이제 칼링가는 정복되었으나 그 이후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자(아쇼카왕)는 열심히 다르마를 공경하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칼링가를 정복했을 때 느낀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자’의 뉘우침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아쇼카왕은 당시에 목격했던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슬퍼하여 이때까지의 무력에 의한 정치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참된 정복과 정치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르마에 의한 정복(다르마 비자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자신의 모든 영토에서 다르마가 잘 준수되어 현세에는 기쁨을, 그리고 내세에는 안락을 가져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하며, “나는 여러 왕자와 여러 손자들이 또다시 무력에 의한 정복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르마에 의한 정복만이 진정한 정복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이 법칙을 새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대수롭지 않은 표현이지만, 이 법칙(法勅)에 담겨진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아쇼카왕과 불교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아쇼카왕의 다르마란 불교에 고무되어 그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틀을 넘어서 만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정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르마의 선포는 반드시 불교 자체의 선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법의 존재를 구체적인 정치의 장에서 처음으로 인도에 가르치는 계기가 된 것은 역시 불교였다. 또 스스로 열렬한 불교도가 된 아쇼카왕의 불교 보호는 중앙집권적인 통일 대제국의 성립과 아울러 이후의 불교 교단 발전에 직접적인 큰 힘이 되고 있다. 한편 칼링가 정복은 바야흐로 2백 년에 걸쳐 그 힘을 발휘해 온 동인도의 마가다 세력이 인도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통일 대제국의 영역에는 북서 인도도 포함되는데 이 지방은 이미 알렉산더왕의 인도 침공 이래로 인도와 서방 세계 사이에 개설된 문화교류의 통로가 되어 있었다. 이 같은 사실도 최후의 불교 교단의 신장과 불교 문화의 발전에 무한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2. 마우리야 왕조의 성립
세존과 같은 시대 사람인 빔비사라왕 시대부터 마가다의 정치 세력이 시슈나가 왕조와 난다 왕조를 거쳐 점차로 다른 군주국가나 부족국가를 병합해 나갔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를 이어받아 통일의 위업을 완성한 것이 마우리야 왕조로서 그 시조는 아쇼카왕의 조부인 찬드라 굽타이다. 경전에서는 그가 마가 지방의 크샤트리야라고 말하는데, 힌두 문헌이나 그리이스 자료에서는 그를 비천한 계급의 출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는 4바르나 제도를 확립해 나가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바라문들은 그를 정통 크샤트리야라고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는 마우리야 부족 출신이었다. 그는 기원전 321년에 난다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앞서 펀잡 지방이나 북서인도의 캐시미르 및 간다라 지방에는 수많은 소군주국과 공화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까지는 난다 왕조의 세력이 채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난다 왕조의 제4대 크세르크세스왕(재위 기원전 486~464년) 때에는 간다라인에 의해서 편성된 부대가 이 지역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타크샤쉴라(타키실라)에서는 기원전 4세기 초반의 아람어 비문이 출토되고 있다. 아람어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였다. 또 기원전 5세기경부터 4세기 사이에는 페르시아 화폐가 펀잡 지방에서 유통되는 등, 페르시아 문화는 갖가지 형태로 이 지역에 정착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에서 군사를 일으킨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기원전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계속해서 인더스강을 건너 그 지방의 여러 왕들과 싸운 끝에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그러나 무기력한 페르시아군과는 달리 인도군의 저항은 매우 완강했었던 것 같다.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은 오랜 원정으로 인하여 이미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으며, 더욱이 동방의 난다 왕조가 매우 강력하다는 소문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기가 몹시 떨어져 있었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은 베아즈 강을 건저니 않은 채 군대를 되돌렸으며, 그 2년 후에 바빌론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기원전 323년의 일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영토는 2차례의 회의(기원전 323년과 321년)를 거쳐 휘하의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는데, 펀잡 지방은 알렉산더 대왕이 임명했던 태수의 손에 위임되었다. 이 태수가 필립포스왕인데, 그는 한 용병에게 시해당하고, 그의 뒤를 이은 에우데모스는 기원전 317년에 서방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윽고 이 지역에 대한 그리이스인의 지배는 그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이스인들은 계속해서 이 지방에 거주하면서 인도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인도 역사에 요나(야바나)로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편 알렉산더 대왕의 한 장군이었던 세레우코스는 2차 회의에서 바빌론의 태수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2년간의 이집트 망명 등을 거친 그는 바빌론을 수복하여 거기에 세레우코스 왕조를 수립한다. 그는 박트리아를 공경한 후, 이어서 알렉산더 대왕이 성취하지 못했던 인도 정복을 꿈꾸며 인더스강을 도하했다. 이때, 이들의 앞을 막고 나선 것이 찬드라 굽타의 강력한 군대였던 것이다.
세레우코스왕은 마우리야군을 격파하지 못하고 결국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기원전 300년의 일이다. 이로써 세레우코스왕은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에서 파키스탄 남부에 이르는 4주를 양도하게 되는데, 그 대가로 얻은 것은 500두의 코끼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찬드라 굽타는 세레우코스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양세력은 우호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세레우코스왕의 대사로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주재하던 사람이 메가스테네스인데, 그는 당시 인도의 상황을 잘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렇게 해서 찬드라 굽타는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남쪽으로는 빈댜 산맥을 넘어 남인도 북부의 니르마다 강까지, 동서로는 벵갈만에서부터 아라비아해, 북서로는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찬드라 굽타의 재상은 카우틸랴라고 전해지는데 그는 바로 「아르타샤스트라(實利論)」의 저자이다. 그는 권모술수에 능해서 찬드라 굽타왕이 마가다로부터 점차 세력을 늘려나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인도의 마키야벨리즘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아르타샤트라」에는 정치, 군사, 행정 등의 실제적인 정책 방침이 종횡으로 설파되어 있다.
찬드라 굽타왕은 종교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만년에는 자이나교의 신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자이나교의 전승일 뿐이며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찬드라 굽타왕의 뒤를 이은 것은 빈두사라왕(재위 기원전 297~268년)인데, 그는 내란을 평정하고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가 바로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232년)이었던 것이다.
3. 아쇼카왕과 다르마(法)
1) 아쇼카왕의 판도와 그 사회
아쇼카왕은 조부와 부왕의 뒤를 이어 그때까지도 정복되지 않은 지방들을 공략했다. 그 중에서도 당시의 칼링가는 그리이스 문헌에 의할 것 같으면 매우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립 왕국이었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동남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서 많은 부도 축적했던 모양인데, 따라서 아쇼카왕으로서는 전인도의 통일을 위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공략을 해야 할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발생한 것이 즉위 후 8년째 되던 해에 있었던 칼링가 전쟁이었으며, 이 전쟁에 이김으로써 통일의 대업은 끝이 났던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 마우리야 왕조의 판도는 동쪽으로는 벵갈에서 오릿사(칼링가), 남쪽으로는 마이소르 북부,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해안에 임한 소팔라와 카티아와르 반도, 북서쪽으로는 페샤워르 부근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 되었다.
앞서 말한 바 있는 ‘14장 마애법칙’의 제5, 제13장은 영내에 여러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임주족(林住族)’은 산간 지역의 소종족 집단이었을 것이다. 한편 북서 인도에는 요나(그리이스) 사람들이 있었으며, 캄보쟈(캐시미르의 라자우르와 카피리스탄 지방)와 간다라에 거주하는 종족들도 있었다. 북인도에는 히말라야 산맥 남방의 나타카, 나바판티 지방, 남인도에는 보쟈(빈댜 산맥의 산간 지역), 파린다(마디아 푸라데슈 주의 비루야 근방), 피티니카(마하라쉬트라 주의 파이탄), 랏티카(마하라쉬트라 주의 서부), 안드라 등의 지역과 그 거주민을 포함하고 있다. 법칙문에 기재된 사실만으로도 아쇼카왕이 언어와 문화를 달리 하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더욱이 현재 인도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도, 이 광대한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다종다양함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회적 측면에서 본다면, 이 시대에는 카스트적인 사회 구조가 점차 확립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메가스테네스에 의하면, 이 시대에는 7가지의 계급이 존재했다고 한다. 철인(哲人), 농부, 목인(牧人), 공인(工人), 상인, 군인, 감찰관, 고문관의 7가지가 그 계층인데, 이들은 모두 세습적이었으며 상호간의 혼인이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바라문이 주장하는 4바르나 제도라는 명목상의 틀이 아니라, 메가스테네스의 눈에 비친 카스트(자티)적 사회의 실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통일 대제국의 결과로서 교통망이 정비되고 기술의 진보와 함께 각종 생산이 증대되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이 번영했으며, 상공업자의 길드 조직도 강력해져서 각기 독자적인 관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화폐 경제도 역시 더욱 진전되었다. 예로부터의 부족 사회는 해체되었으며, 쿠라(가정) 단위가 이를 대신하여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농촌에서도 카스트적 계층 질서가 정비되었으며 바라문들은 제례의식을 통해서 질서유지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처럼 놀랄 만큼 다양하고 이질적인 인종과 사회적 계층을 통일 제국 안에 두고서 질서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이 왕조는 중앙집권적인 행정 조직을 갖추고 각 지방에 부속 주를 두었다. 가장 중요한 4개 지역은 북서 인도의 타크샤쉴라, 서인도의 웃자이니, 동인도(칼링가)의 토살리, 남인도의 데칸 남부에 위치한 스바르나 기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정치, 산업, 군사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2) 다르마(法의) 내용
그러나 정비된 관료 조직과 강력한 군대만으로 이 광대한 영토의 참다운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종과 언어, 또 생활문화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정치 이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만인에게 타당한 것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바로 아쇼카왕의 다르마(法)였던 것이다.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귀의에 의한 정치도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아르타 샤스트라」가 기술해 놓고 있다. 이 책은 정복에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탐욕스러운 정복자’, ‘흉폭한 정복자’와 함께 ‘다르마에 의한 정복자’를 말하고서, 마지막 것이야말로 만인이 마음으로부터 귀의할 수 있는 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아르타 샤스트라」에서 말하는 다르마와 아쇼카왕의 다르마가 그 내용에 있어서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법칙문에 새겨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쇼카왕의 다르마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 상처를 입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사상의 근본정신은 일반 생물에 대한 자비심으로서 아쇼카왕의 무력 부정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시에 바라문들이 행하는 공희 의례에 대한 비판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한 개의 법칙에는 종래 식용으로 무수한 조수가 살육되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루에 3마리로 제한하고, 장차는 이것도 못 죽이게 한다는 것을 왕이 친히 말하고 있다.
둘째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내용으로서 양친, 장로, 스승에 대한 순종과 종교인에 대한 보시와 존경, 그리고 친구와의 바른 관계 및 극빈자와 하인에 대한 바른 대우 등이 그것이다.
셋째는 국민 개개인의 자기 규제 윤리로서 자비, 유화, 자제, 보은, 분에 맞는 생활, 신앙과 다르마에 대한 존경 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아쇼카왕의 다르마가 왕 자신의 불교 신앙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르마의 선포가 불교 자체의 선포로 이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아쇼카왕의 다르마는 불교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느 특정 종파의 틀을 넘어선 이념인 것이며, 따라서 만인에게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실과 인간의 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도뿐만 아니라 힌두교나 자이나교교, 또 그 밖의 다른 교도들도 이에 따라야 했으며, 사실상 쉽게 따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현대 인도 공화국의 문장(紋章)은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녹야원)에 세워진 아쇼카 석주의 윗부분에 있는 기둥머리에서 본딴 것으로서, 대좌에는 법륜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등을 서로 맞대고 앉은 4마리의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법륜은 결코 불교의 법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종파나 인종을 초월한 보편적인 법(진실)이 아쇼카왕에 의하여 발견되어, 현대 인도에 이르기까지 정치 이념으로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
3) 아쇼카왕의 석주
그리하여 아쇼카왕은 다르마를 정치 이념으로 삼아 그 실행을 꾀했다. 그 때문에 영내의 주요한 지역에 마애나 석주로 된 법칙문을 새기게 했다.
암괴와 표석에 새겨진 14장으로 된 ‘14장 마애법칙’ 이외에 ‘소마애법칙’이라 불리는 4장의 법칙문이 있다. 그리고 석주에 새겨진 7장의 법칙(7자 석주법칙)은 델리 북방의 토플라와 미라트(모두 1356년 필로즈샤 왕이 델리로 이전시켰음), 비하르 주 북방에 세 곳(라우랴 아라라지, 라우랴 난단가르, 람푸르바), 웃탈 푸라데슈 주에 있는 지금의 알라하바드 부근에 위치한 옛도시 캬우삼비(알라하받로 이전되었음), 아프카니스탄의 칸다하르 등에 있는데, 거기에는 7장으로 된 법칙의 일부 또는 전부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 사르나트와 산치에는 불교 상가에 대한 파괴 행위를 경고하는 법칙이 있으며, 카우샴비의 석주에서도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세존의 탄생지인 룸민 데이(룸비니)와 그 서북쪽 20km 지점에 있는 나가리 사가르, 타키실라, 람파가, 그리고 남인도의 아마라바티에는 각각 별개의 법칙을 새긴 석주가 남아 있는데, 이들은 7장으로 된 석주법칙에 댛서 소석주법칙이라고 불린다.
야쇼카왕의 법칙 비문이 세워진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요 도시에 인접해 있는 교통의 요지나 종교상의 성지 등인데, 비문의 내용은 시정 방침을 국민에게 알리고, 또 고급관리나 지도층 사람들에게 다르마의 준수를 명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법칙문은 백성들이 읽기 쉽게 각 지방의 문자와 언어 습관에 따라 쓰여져 있다. 북서인도의 샤바즈가리나 만셀라에 있는 법칙문은 카로슈티 문자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쓰이던 아람문자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이 지역에는 아람어나 그리이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프카니스탄의 칸다하르, 간다라의 타크샤쉴라, 그리고 람파카의 법칙문은 아람어로 쓰여져 있는데 특히 칸다하르의 법칙문은 아람어와 그리이스어 문장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그 밖의 지방에서는 브라흐미 문자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 지방의 언어는 프라크리트어이다. 그러나 그 음운이나 문법 형태에 있어서는 서로 간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으며, 따라서 이들 지역의 법칙문은 각지의 언어 습관에 따라서 기록되엉 있는 것이다.
아쇼카왕은 다르마의 이념에 따라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각지를 방문하여, 종교인에게 보시를 하고, 백성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고서 다르마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도 ‘법대관(法大官)’을 임명하여 다르마의 정치를 촉진시키고, 나아가서 각 종교 제파와의 관련 문제들까지도 깨끗이 처리해내고 있다.
4. 아쇼카왕과 불교
1) 제종교의 보호
아쇼카왕이 불교도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마애법칙 제1장은, “나는 2년여에 걸쳐 우바새(남자 재가신도)였지만, 처음 1년 반 동안은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의 1년 반 동안 나는 상가에 가서 열심히 노력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쇼카왕이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억압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인도의 여러 왕들은 스스로 특정 종교를 믿고 있어도, 다른 종교를 보호하고 후원하는 것이 통례였다. 아쇼카왕도 이러한 전통에 따라 각 종파를 평등하게 취급하고, 모든 종파의 건전한 육성과 발전을 기원했다. 아쇼카왕은 마땅히 그래야만 다르마 정치가 보다 완전하게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각 종파마다 법대관을 임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은 널리 바라문의 사문을 공경하며, 그들을 방문하고 보시를 했다. 또 아지비카 교도에게 굴원(窟院)을 기증한 사실도 알려져 있다.
고대 인도에는 매우 일찍부터 왕들이 자주 종교교단이나 집단에 토지와 촌락을 기증하여 그 수익을 교단의 유지 비용으로 충당시키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다. 비문에는 그 촌락의 세금 징수 내지 관리의 개입을 배척하는 규정이 자주 나타나는데, 아쇼카왕을 비롯한 마우리야 왕조의 왕들도 바라문의 사문에 대하여 같은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아쇼카왕은 우선 룸비니와 보드가야를 순례하고 있다. 과거불인 카나카무니불(Ⓟ 꼬나가마나불 / 구나함무니불)의 탑을 다시 찾았다는 기록도 비문에 보인다. 또 예전부터 불타 입멸시에 8개소에 분산, 탑에 안치했던 불사리(佛舍利)를 다시 모아서 8만4천 개의 탑에 봉안하고 공양했다고 한다. 스투파 숭배는 이후 급격히 일반화되어 불교 문화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바, 아쇼카왕의 탑 건조는 역사적 사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쇼카왕은 또 캘커타 파이라트 법칙(앞서 말한 소마애법칙의 제3장)에서 “불, 법, 승에 대한 존경과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정법이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7가지 법문을 듣고 염불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7가지 법문을 현존하는 경전과 비교해 보면, 비교적 고대에 속하는 정리된 경전의 1절이나 1장을 구성하는 것이 많다. 따라서 이 법문은 경전의 정비와 편찬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당시에 중시되던 가르침을 열거한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약간의 이설도 있지만, 현재의 경전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은 주로 비구와 비구니의 바람직한 자세, 실천, 수도, 그리고 재가신자의 윤리적 생활방식이 중심이 된 평이한 가르침이 대부분이며 교리학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다.
2) 상가의 보호
사르나트, 캬우삼비, 산치 등의 세 석주에는 상가 파괴에 대한 아쇼카왕의 경고가 새겨져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상가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만일 상가를 파괴하면 승복을 벗기고 속인의 옷을 입혀 정사에서 내쫓는다고 말한다. 또 왕은 화합 상가가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화합’이란 동일 계(界)안에 사는 상가 전원이 동일 정사에서 함께 거주하고, 함께 포살에 참석하며, 전원의 의결로써 제반 사항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규칙을 문란하게 만드는 것이 곧 상가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이 새겨졌다는 사실은 뒤집어 말해서 그 당시 이러한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이른바 근본 2부의 분열이나 그로부터 야기된 부파의 세세한 분열들이 아쇼카왕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부파 분열은 아쇼카왕 시대의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이 법칙이 말하고자 한 것은 개개의 상가가 바르게 운영되기를 기원한 것일 뿐 그때까지는 하나였던 교단이 여럿으로 분열하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3) 아쇼카왕에 관한 남전과 북전의 차이
그러나 부파 분열이 아쇼카왕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문헌 자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아쇼카왕에 관한 사적에 대해서는 수많은 불교 문헌들이 그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것을 대별해 보면 대략 2가지 계통이 된다. 하나는 남전이라 통칭되는 것으로서, 현대의 남방 불교에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팔리어 문헌이다. 따라서 부파로서는 ‘분열 상좌부’(또는 ‘분별부’)가 되는 것으로, 이 전승에는 스리랑카로 전해진 자료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다른 말로는 스리랑카의 전승이라고도 부른다. 이 계통의 불교는 불교가 일어난 마가다로부터 웃자이니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도로, 또 거기서 스리랑카로 전승된 것이다.
이에 반해서 북전은 마투라 및 캐시미르의 전승이다. 같은 상좌부 계통이지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부파가 있어서 주로 마가다에서 중부 인도의 마투라, 그리고 북서 인도의 캐시미르에서 간다라에 걸친 전파의 통로를 따라 정착되어 있다. 이 계통은 일찍부터 산스크리트어 문헌을 남기고 있는데, 중국에 건너간 ‘정통 보수 불교’ - 대승불교가 소승이라 부른 것 –의 문헌은 대부분 이 계통의 전승이다. 현존해 있는 인도어 원전의 문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시에 다량의 문헌이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이들을 원본으로 하는 티베트어역 및 한역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 남전과 북전의 기술은 상호간에 많은 차이점이 있다. 또 같은 계통에 있어서도 내용상 여러 가지 상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소한 차이는 무시하고 큰 차이점만을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쇼카왕의 즉위 시기를 남전에서는 불타 입멸 후 218년이라 하는 데 반해서, 북전에서는 100년이라고 하는 기술일 것이다. 전자는 아쇼카왕이 태자 시절에 웃자이니를 다스렸다고 하고 후자는 간다라 지방의 타크샤쉴라에 가서 반란을 진압했다고 한다. 또, 남전에서는 아쇼카왕을 불교에 인도한 스승이 목갈리풋타 팃사라고 하며, 율이 전해진 계보를 말하는 데 있어서 세존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지계 제일’ 우팔리에서 다사카와 소나카를 거쳐 싯카바의 차례로 해서 목갈리풋타 팃사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북전에 나타난 법의 전승은 세존 – 마하카샤파(대가섭) - 아난다 – 샤나바시(상나화수, 商那和修) - 우파굽타(우파급타, 優波笈多) - 디티카(제다가, 提多迦)의 순서로 이어진다. 중국이나 한국 등 선종 계통에서 후에 일반화된 법의 전승 계보는 바로 이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어느 계통이든지 아쇼카왕의 스승인 자기 파의 장로가 세존 이래로 법의 정통 계승자라고 말하고 상대파의 장로는 그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쇼카 왕의 사적과 나아가서는 아쇼카왕의 즉위에 관한 연대론마저 혼란에 빠진 것은, 이 같은 남북 양전의 기록의 차이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한 견해차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교의 역사 문제보다도 무엇 때문에 이처럼 다른 전승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사실을 문화사적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이와 관련된 아쇼카왕의 전법사 파견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5. 전법사 파견의 전설
아쇼카왕이 불교의 발전에 이바지한 지대한 공적 가운데 하나로서 영내 각지에 전법사(傳法師)를 파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주로 남전의 기록으로서, 종래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것이다. 남전의 각 사전(史傳)이나 자료 가운데서도 약간의 차이나 증감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쇼카왕의 전법사 파견과 그 경위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는 서인도 사람인데, 야쇼카왕의 왕사(王師)가 된 다음, 왕에게 권하여 8만 4천 개의 탑을 건조하게 했다. 또 왕자 마힌다와 왕녀 상가밋타를 득도시켜 교법의 교법의 상속자로 삼았다. 당시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의 쿡쿠타 아라마(계원, 鷄園) 상가에는 수많은 외도 이단자가 들어와서 법을 손상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천 명의 비구를 모아서 이설을 배척하고 정법(vibhhajjavāda : 분별부의 설)을 바로 세웠다. 이것이 제3차 결집이며, 이때 저술된 것이 ‘논사(論 事, kathāvatthu)’라고 한다. 그리하여 정법을 회복시킨 목갈리풋타 팃사는 아쇼카왕엑 권하여 9개 지방에 전법사를 파견했다.
캐시미르와 간다라 지방(북서 인도)에는 맛잔티카,
요나(그리이스인이 거주하는 지방)에는 마하락키타.
히말라야 지방에는 캇사파고타와 맛자마 등 5명
싱할라(스리랑카)에는 마힌다와 그 밖의 4명
마히사랏타(마히사만다라)에는 마하데바.
바나바사에는 락키타.
아파란타카에는 그리이스인인 담마락키타.
마하랏타에는 마하담마락키타.
스반나부미에는 소나와 웃타라의 두 사람.
이상이 아쇼카왕의 전법사 파견 명단인데, 마침 왕은 ‘다르마(法)의 선포’를 위하여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여, 바야흐로 ‘다르마의 승리’가 성취되고 있음을 법칙문에 소리 높여 구가하고 있었다. 또 스리랑카의 전승은 불교를 스리랑카에 도입한 데바낭피야 팃사왕에게 아쇼카왕이 서신을 보내서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기술은 아쇼카왕의 전법사 파견 전설과 관련시켜 이해될 수 있는 것들로서, 그 전설이 사실(史實)이라는 강력한 증거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일본의 야마자끼 겐이찌 교수의 설에 의할 것 같으면, 우선 아쇼카왕의 ‘다르마의 선포’는 불교의 선포와 구별지어서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는 앞서 밝힌 바와 같다. 또 전승 중에서 아쇼카왕이 스리랑카왕에게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했다는 부분에는 목갈리풋타 팃사 장로의 지도 아래 여러 지방의 교화가 이루어졌다는 내용만이 있을 뿐, 아쇼카왕과의 관련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북전의 자료에는 아쇼카왕의 탑 조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야샤스와 우파쿠푸타 장로의 권유라고 하여 목갈리풋타 팃사는 이름조차 나와 있지 않다 여기에는 또 마힌다, 상가밋타와 아쇼카왕과의 관계도 없으며, 제3차 결집도 없다. 그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겨우 계원(쿡쿠타 아라마)에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상좌부는 캐시미르에 퍼졌고, 대중부는 파탈리푸트라에 남아 있었다는 기록뿐이다. 이것은 같은 상좌부 계통에서도 ‘설일체유부’가 캐시미르 지방에 세력을 신장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북전에는 처음부터 전법사 파견 전설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갈리풋타 팃사는 산치의 제2탑에서 사리가 발견되 모갈리푸타(Mogaliputa)와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바, 그가 실재했던 인물이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이 없다. 마힌다 등에 의한 스리랑카 개교의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들과 아쇼카왕가의 관계는 확실치 않은 것이다. 야마자키 교수는 각지에 파견되었다는 전법사 개개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검토를 마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전법사의 파견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인도 교단에서 오랫동안에 걸쳐 행해진 포교활동이었는데, 이것이 불교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아쇼카왕 및 파탈리푸트라와 의도적으로 결부된 흔적이 있으며, 이대 캐시미르 지방의 개교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맛잔티카 등은 분별부가 아닌 다른 부파(여기서는 설일체유부)였지만 워낙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경전에 집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아쇼카왕의 전법사 파견은 아쇼카왕의 사업이 아니고, 서인도 교단의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법의 전승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한편 북전도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서 결국 양파가 각각 자파의 전승을 아쇼카왕에게 결부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상호간에 커다란 차이가 발생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파탈리푸트라의 제3차 결집은 상좌부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가볍게 일축해 버릴 수만도 없는 문제이므로, 아쇼카왕과 전법사의 문제는 – 일전에 부지르스키 교수의 학설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지만 – 새로운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시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 사실성(史實性)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쇼카왕이 불교도가 되어 불교에 근거를 둔 보편적인 다르마를 선포한 것과 불교가 국가의 상류 계급 사람들이 신봉하는 종교로서 평가를 받은 사실은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는 데 있어서 지대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첫댓글 ... 게시판에서 "불타의 세계" 글이 단.... 현... 시러..
마돈나 란제리 룩과... 누나의 기둥서방 사이에 끼였네...
떠그랄, 우째 이런 일이...
왜 그런현상이 일까?
단현님 혹시 진짜 야동 중독자 아닐까?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