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6일차 코스
아시시
( Assisi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 Basilica di San Francesco )
산 프란체스코 성당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Francesco)은 프란치스코회로 불리는 작은 형제회의 모교회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출생지인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있는 로마 가톨릭 바실리카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묻힌 이 성당은 이탈리아의 중요한 로마 가톨릭 순례지이다.
https://youtu.be/OU1u8_5gmbo?si=jiOCS36EnwiSVy9W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한 성당
제2의 그리스도로 존경받는 성인 프란치스코(Francesco, 1181/1182-1226년). 그의 고향이며 주요 활동 무대였던 아시시(Assisi)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성인이 살았던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돼 있고 곳곳에 그의 흔적이 담긴 유적지와 수도원, 성당이 있다. 아시시에서 움브리아(Umbria) 지역을 내려다보면 작은 마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 성 프란치스코 성당 전경
프란치스코 성당 일부는 1997년 9월 26일에 발생한 두 번의 큰 지진으로 무너졌다. 또 성당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안타깝게도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상부 성당의 천장도 무너져 내리면서 그곳 프레스코화는 크게 파손됐고 벽을 장식했던 조토와 다른 화가들의 작품도 훼손됐다. 그러자 건축물의 복구와 예술품 복원을 위해 이탈리아와 세계 각국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2년간의 심혈을 기울여 이 사업을 마무리했다. |
아시시 서쪽은 원래 죄인들의 사형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옥의 언덕’이라고 불렸는데, 그곳에 성당과 수도원이 들어서면서 ‘천국의 언덕’으로 바뀌었다. 산 중턱 성당 건물과 맞닿은 곳에는 1474년에 완공된 로제(Loge) 광장이 있다. 열주로 둘러싸인 광장에선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 기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로마네스크와 이탈리아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프란치스코 성당(Basilica de San Francesco)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많은 사람을 반겨 준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지하 경당, 하부 성당(Basilica Inferiore), 상부 성당(Basilica Superiore)으로 구분된다. 이는 일반적인 고딕 양식에서 볼 수 없는 이 성당만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고, 이 특징 때문에 일반인들 눈에는 좀처럼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비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탈리아 고딕의 특징들은 이후 이탈리아 수도원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성당은 프란치스코가 시성되던 해인 1228년, 마에스트로 야코포 테데스코(Maestro Jacopo Tedesco)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했다. 하부 성당을 1230년에 완성해 이곳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지만 유해의 도굴이나 훼손을 우려해서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지 않았다. 성당 측면에 우뚝 솟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은 1239년에 완공됐다. 상부 성당은 1239년에 공사를 시작해 1253년에 완성했는데 길이는 80m이며 폭은 50m이다.
▲ 상부 성당의 내부 벽면과 천장에 장식된 프레스코화 |
▲ 지하 경당의 제단 벽감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는 1818년 하부성당의 바닥에서 재발견됐다. 수도회에서는 하부성당 아래에 작은 경당을 만들고 유해를 제단 벽감에 모셨다. 유해가 들어있는 석관은 벽감에 그대로 노출돼 있지만 도난이나 훼손을 우려해 쇠밧줄로 묶어 놓았다. 순례객들이 이 경당에서 성인의 무덤을 참배하며 기도하는 것은 허용된다.
유해가 안치된 경당의 아치형 천장은 조명 덕분에 밝게 빛나는데, 이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더는 어두운 무덤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빛 속에 머무는 것을 나타낸다.
성당 장식에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치마부에, 마르티니, 로렌체티, 지토 등이 참여했고, 건물은 독특하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성당의 아래층은 프란치스코 사후 4년 뒤인 1230년 지었는데, 스테인드글라스와 중세의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특히 시모네 마르티니의 〈산 마르티노의 생애〉와 치마부에의 〈성모자와 산 프란체스코〉 등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체는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그가 입던 낡은 수도복 등의 유물들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1818년 비오 7세 교황의 명에 따라 이곳에 모셔지게 되었는데, 지금의 무덤은 1932년 아르크의 설계로 만들어진 것이다. 1253년에 완성된 위층 교회는 지토의 프레스코화가 유명한 곳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28장면에 나눠 그린 프레스코화는 지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특히 〈작은 새에게 설교하는 산 프란체스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https://youtu.be/UwK44mWzZsQ?si=SqJCBLEqncUtOPgI
조토의 프란치스코 성인 생애 연작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는 미술사 안에서 비잔틴의 시대를 끝내고 르네상스의 시대를 이끈 최초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말은 곧 조토 이전과 이후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의 스승인 치마부에와의 공동 작품을 제외하고 그의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은 현재 보르고 산 로렌조에 소장되어 있는 ‘성모자’(1285~1290년 작) 템페라화다. 하지만 미술사 안에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남긴 곳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상부 성당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연작으로, 이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 연작은 총 28점으로 제작되지만, 전체를 조토가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술사 안에서 이 작품들의 작가명은 ‘Giotto e Bottega’로 표기된다. 말 그대로 조토와 공방이란 뜻이다. 또한, 미술사 안에서는 조테스키(Giotteschi)라고 구분하는데, 이 말은 조토의 스타일과 조토를 추종하는 화가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조토의 죽음 이후 약 1세기 동안 이탈리아 미술계는 이 조테스키들이 이끌어 나가게 된다. 조토가 오랜 시간 이러한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출발점이 바로 이곳,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성인 연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연작을 한 작품 한 작품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듯 새로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인 공간감이 살아나고 있다.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서 조토는 오랫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원근법과 어설프지만 투시법을 다시 시도한다. 조토는 원근법과 투시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인 배경들을 그려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배경들의 입체감이 살아나고 공간감은 더욱 깊이를 갖게 됐다. 거기에 명암까지 사용하면서 인물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적인 묘사들은 피렌체 산타 크로체 성당 안 프란치스코 성인의 죽음이란 작품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조토는 이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인간들의 감정까지 표현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실적이란 단어와 인간이란 단어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 단어들은 곧 르네상스를 의미한다. 이 단어들은 조토 이전에 그 누구에게도 붙일 수 없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그를 르네상스를 이끈 장본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https://youtu.be/aLh8LI9up7s?si=b68_MTAMFgaQcEGd
상·하부 제대와 지하 경당의 무덤
조토를 비롯한 당대의 걸출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하부 성당과 상부 성당을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중심은 ‘제대’이다. 하부와 상부의 제대들은 지하 경당의 성 프란치스코 무덤과 연결돼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존재 이유를 되새기게 한다.
성인의 무덤과 제대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순교자 공경에서 유래한다. 순교자(martyr)란 말의 뜻은 본래 ‘증인’ 또는 ‘증거자’이다. 첫 순교자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성실한 증인”(묵시 1,5)이시다. 묵시록은 신앙 때문에 베르가모에서 죽은 안티파스에게도 같은 칭호를 내리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순교자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이와 함께 하는 이로,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실성의 증거를 하느님께 바친다.
이러한 이유로 신자 공동체인 지역 교회는 순교자에게 특별한 공경을 표하는 기념을 바치고자 그의 무덤에 모여서 공경하는 예배를 드렸다. 박해 시기가 지나고 순교자 공경은 성인 공경으로 확대됐고, 순교자 무덤 위에 기념성당을 지었던 관습이 성인 무덤에도 적용되었음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3세기의 제단 공간에 감실이 있지 않음도 주의 깊은 신자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실이 제단의 중심이 된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5) 하셨지, ‘나를 잘 보존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곧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건이 지금도 이루어지는 ‘제대’가 성체를 보존하는 ‘감실’보다 전례 공간에서 중심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공간 배치를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잘 보여주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가치는 교회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유네스코(UNESCO)는 2000년 대희년에 이 성당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관리하고 있다. 이탈리아 초기 고딕 양식의 건축으로 원형이 잘 보존돼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https://maps.app.goo.gl/14j5Zc6VtaiJsVX8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천주교 광주대교구
남동 5.18 기념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