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다크투어리즘 시나리오~윤태영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여행, 사회적 참사나 역사적 비극이 벌어졌던 장소나 재난 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다크투어라고합니다.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중국난징대학살기념관, 중국하얼빈 일제의 731부대생체실험실, 대표적인 다크투어의 현장입니다. 이런 역사의 비극은 절대로 잊혀져서도 안되고 지워져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여수는 어떤다크투어의 현장이 있을까요?
바로 여순사건입니다. 여순사건의 왜곡된 진실과 아픔을 알리고 패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역사를 바로보자는 인식확산을 위해서 여수시에서 만든 다크투어 프로그램.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가슴아픈 역사속으로 들어가보고자합니다.
코스는 14연대주둔지~인민대회장 ~서초등하교~종산초등하교~ 위형비 ~형제묘 순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그렇게 갈망하던 해방이 됩니다.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우리손으로 정부를 만들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옵니다. 미국의 군인들이 정치를 하게되는 것이지요 3년동안 정치를 하면서 전국에 국방경비대를 창설을 하게되는데 , 1연대부터 시작을 해서 15연대까지 창설을 합니다. 그중에 14연대가 여수의 신월리로 오게 되지요. 1948년 5월4일 창설이 되어서 5개월정도된 10월19일 저녁 명령을 하나 받게됩니다. 제주도로 가서 4,3을 진압해라 이것이 바로 14연대에 하달된 명령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을 해야하지요 하지만 14연대는 같은 동포를 죽일수 없다고 하면서 명령에 불응하고 봉기를 하게됩니다. 봉산지서를 지나 서정지서를 지나 여수경찰서에서 교전을 벌이고 여수역으로 가게되지요. 그당시 여수역에는 14연대의 군인들을 제주도로 싣고가기위해서 해군함정이 도착해 있었다고합니다. 그대로 제주도로 갔더라면 여수는 안전했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됩니다. 역으로 오기는 오는데 배를 타지 않고 순천으로 넘어갑니다. 순천 보성 구례 광양 백운산을 거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투쟁을 할려고했다고합니다.
자 그러면 14연대가 지나간 여수시내는 어떠했을까요? 남아있는 14연대군인들과 지방좌익이 합세를 하게되면서 인민대회를 진남관앞에서 열게됩니다 인민이라는 말 좀 생소하시지요 하지만 그 시대에는 인민 동무 이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사용이 되었던 말입니다. 지금말로 고치면 시민대회라고 하면 되겠지요
시민대회에서는 이용기 박채영 문성휘 유목윤 김귀영 등 5명이 의장이 되어 대회를 진행하였고 대회를 끝낸 오후5시경부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고합니다. 그리고 은행을 접수해서 돈을 대출해주고, 영단창고를 열어서 쌀을 나눠주고, 천일고무에서 고무신을 나누어주면서 세상이 바뀐걸 축하하면서 들떠있었다고합니다. 토지개혁도 하루빨리 이루어져서 논을 나누어받을 날을 손꼽아기다렸겠지요. 20부터 진압이되기전날 26일까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나라에서는 복종을 해야될 군인이 봉기를 하였으니 가만히두지 않겠지요 광주에다가 진압토벌군 사령부를 만들어 여수로 보냅니다. 전국 15개의 연대중에 7개의 연대가 여수를 향해서 옵니다. 시내로 들어오려다가 시민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송호성 장군이 부상을 입게되고 후퇴를 하게됩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길이 아닌 산을 넘어서 여수로 진격을 합니다. 구봉산, 장군산, 종고산, 마래산을 넘어서 들어오면서 무차별하게 학살을 하면서 여수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서교동 중앙동이 진압군으로 인해 불바다가 되면서 여수시내가 초토화가 되지요 27일 완전히 진압이 되고 여수시민들을 5군데로 모이게 합니다. 서초등학교, 진남관, 공설운동장, 동초등학교, 종산초등학교, 그리고 협력자 색출이 시작이 됩니다. 그 현장으로 떠나볼까요.
서초등학교~진압군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수사건 협력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 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고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따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이를 일명 손가락총이라고 부르는데 일부는 학교뒤의 도랑으로 끌려가 즉결처형되었습니다.
심사방법~교전중인자, 총을 가지고 있는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자 지까다비(일할때신는 일본식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깍은 자. 이렇게 협력자를 가려 내었다고합니다. 여기에서 협력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었는데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형무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학살되기도 하였습니다.
종산초등학교~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와 가까워서 수도경찰과 전남경찰 및 여수경찰서 특수대가 군인들과 함께 이 학교에 주둔하였습니다. 10월 28일 부터는 가담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수와 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혐의자를 팬티만 입힌채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949년 1월 중순까지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부산의 5연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재판없이 즉결 처분을 자행하였는데 일본도로 목을 치는 학살 만행을 자행하여 백두산호랑이 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재판을 받고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곳이 형제묘와 위령비가 세워져있는 곳이 되겠습니다.
그곳으로 가기전에 여순사건 군법회의터를 잠깐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군법회의는 여수여자중학교의 교실을 징발하여 진행하였으며 민간인 희생자의 즉결처분을 진행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군사재판은 군인과 군속에게 적용되는 단심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치국가에서 3심제도를 적용받아야하는 민간인을 단심제도인 군사재판을 적용하여 수많은 시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사형수 통계에도 빠져있어 죽음조차 죽인사회 에 죽어서도 구성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이 묻힌 형제묘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묘~학살후 시신을 찾을길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 이름붙인곳입니다. 여순사건 협력자로 지목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사람중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습니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한후에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모두 125명이 매장되었다라는 이야기를 지역사회연구소의 실태조사때 증언하였습니다. 처형은 군인이 주도하였고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불을 태웠고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 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습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불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달이 넘도록 계속되었다고합니다. 가족이 저기 있는줄 알면서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불도 끌수 없었던 애통한 가족들의 심정이 느껴지시지요. 바로 옆 위령비로 가시겠습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만성리 용골)~만성리 학살지는 협력자로 잡혀있던 종산초등학교 수용자 중 수백여명의 민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와 집단 학살한곳입니다. 1948년 11월 초순경부터 협력자들 일부를 이곳에서 학살하고 협곡과 같은 골짜기 속으로 던져 넣은 후 흙, 모래와 돌로 암매장하였습니다. 여수를 진압한 진압군은 경찰과 함께 종산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공포의 협력자색출을 진행하였습니다. 사건 당시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록을 보면 1948년 11월 13~14 양일간 제5차 고등군법회의가 열려 재판 회부자 506명중 사형언도자가 280명이나 되었는데 실제 사형집행은 88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종산초등학교에서 포승줄에 끌려온 사람들을 이 골짜기에서 계속 학살하여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였다 합니다 그래서 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 오천 주민들은 공포의 땅이 된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마래산을 타는 먼 거리를 돌아다니기까지 했다는 증언들이 이어졌습니다. 사건이 지난후 이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작은 돌을 계곡에 던져 넣거나 돌탑을 쌓아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속이 한동안 오래 지속되어 돌탑이 솟아오르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2009년에 건립된 여순사건 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러분 투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었일까요?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결합하고 있어서 딱히 어느 하나하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해방이후 좌우익의 대립이라는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 친일세력이 이승만 정부의 비호아래 다시 활개를 치는 상황, 군인과 경찰의 대립, 군대 내부에서 시작된 숙군작업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발생한것입니다.
1949년 전남도에서 집계한 희생자수가 11131명이라고 합니다. 21년 73년만에 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여수 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 법령으로 인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빠른시일내에 되기를 바라며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