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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압축이 안 되서 그냥 부쳤 습니다.
전축
`19.11.22 김 난 희
2019년 9월 내 생일 선물로 아들이 중국산 턴테이블을 선사했다.
보통은 저희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선물이든 뭐든 사양을 하는 편이지만 내가 이렇게 좋아 할 선물을 보낸 아들 며느리가 센스 있게 보였다. 값으로 따지면 큰 부담은 아니지만 갖고 싶던 것이기에 반색을 하고 받았다. 턴테이블이 영영 사라지지 않고 중국산이지만 인터넷에 라도 판매 된다는 것 만도 기뻤다.
내게는 100장 좀 넘는 LP음반이 있다. 거의 20대인 70년대부터 사서 듣던 것 들이다. 투영, 모나리자의 낫킹콜. 써니, 문 리버의 엔디 윌리암스. 톰존스 .철새는 나라 가고, 눈물 속에 피는 꽃, 등의 팝송, 칸소네, 샹송등 다양하다.
한국 가곡집 씨리즈, 페티 김, 톤이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한상일의 노래도 있다. ‘당신의 웨딩드레스 는~ ’ 하는 노래가 나오면 몸이 사르르 감동으로 빠졌던 웨딩드레스, 박인희의 차분하면서도 정감 있는 노래들, 뚜와에무아의 아름다운 번안 곡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멋지다.
클래식도 정겹다. 차이콥스키,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 정 경화, 전집으로 샀던 세계명곡 대 전집,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교회음악 전집도 사서 모았다. 무용곡도 백조의 호수며, 초등 어린이 무용곡 집 등을 보면서 어린 꼬마들과 마스게임 연습을 하던 생각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턴테이블에 대해 한 마디 나눈 이야기도 없었는데 그야말로 깜짝 선물이다.
아들은 아름다운 곡들을 감상 할 때의 행복을 나에게 선사한 것이다.
내가지금 이처럼 흥분하며 가슴깊이 감회를 느끼는 것은 그 오래된 음반으로 추억의 노래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턴테이블이 조그맣고 스피커도 CD를 듣고 있던 크지 않은 컴포넌트에 같이 연결해 듣기 때문에 음질이나 소리는 별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옛날을 새롭게 회상 할 수 있고 즐기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는 것 만 으로도 행복했다.
30년 전 내가 퇴직한 후 수성구 사월동에서 남편이 담배 한 가치 태울 시간이면 출근 할 수 있다는 북구 침산동으로 이사를 갔다.
짐을 꾸리면서 좀 오래된 케누드 전축과 커다란 스피커를 버렸다.
새로 좀 더 좋은 것을 살참이었다. 이사 짐 정리도 끝나고 어느 날 남편과 같이 백화점에 전축을 보러 갔다.
판매원이 언젠가부터 전축은 나오지 않는 다는 이야기에 내가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요즘은 시중에 음반도 없고 CD만 있으며, 기계는 라디오나 테이프 그리고 CD를 한 기계로 들을 수 있는 콤퍼넌트 밖에 없다고 해서 어찌나 낭패한 생각이 들었던지,
그렇게 해서 전축으로 듣는 나의 음악 감상은 세대를 마감 했었다.
그날 전축대신 콤퍼넌트를 구입해서 딸의 방에 넣어주었다. 그 후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이 CD나 테이프를 듣고 또 사서 모으는듯했다.
이런 저런 바쁜 일상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것은 일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도 그렇게 불편 하지는 않았다. TV가 커다랗게 거실에 버티고 있는 세월이 됐기 때문이다.
얼마가 지난 뒤 유통단지 몇 층이었던지 중고 전축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사고 싶었는데 남편의 호응이 없어 그만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아쉽다.
다시 그 가게에 가봤어야 했지만 그것도 마음만 있고 행동이 앞서지 못했다. 나의 실천력의 한계였다.
그래도 이사할 때마다 음반을 버리지 않고 챙겨 갖고 다녔다. 아끼는 소장품이 그런 것 같다. 생활에 별로 쓰이지는 않아도 올려놓고 한 번씩 쓰다듬는 수석, 읽지도 않고 혹은 다 읽은 책도 버리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다.
어떤 의학 박사는 세계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종을 만개나 모았다고 했다. 그 소리나 모양은 물론 그 종의 쓰임새, 예술성, 시대적 배경까지 생각하면서, 또 혼신의 힘으로 만든 장인 정신까지 느끼며 종을 수집 한다는 그분의 글을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음반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것도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그냥 마음에 드는 노래나 음악을 하나씩 사서 들었을 뿐이다.
전축을 버리기 전 어느 날, 밤이 깊은데 남편은 거나하게 술을 한잔한 회사 후배 두 분과 같이 와서 톰존스의 음반을 올려놓고 그린그린 그래스와 딜라일라를 톰존스 보다 더 멋지게 불러대며 한밤에 팝송 파티를 한 것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남편과는 대학원도 같이했던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그분은, 아름답고 글도 잘 쓰고 연주도 잘 하는 아내와 판사아들, 의사아들만 남겨두고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훨훨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수년전 그분의 유작전이 가창의 한 겔러리에서 있었는데 아리랑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있다는 것을 평생 처음 느꼈다. 그 연주는 톱으로 연주 했었다.
새로 선물 받은 전축으로 그 70년대의 음악들을 틀어놓고 한번 씩 회상에 젖는다. 전축 음반은 CD에 비해 뒤집고, 새로 올리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러나 즐거운 회상을 하는 데는 그 불편도 좋다.
지난 9월 말 쯤에 남편 친구 일곱 분이 우리 집 잔디밭에서 저녁 식사를 했었다. 나는 더 멋진 가든파티를 위해 추억의 음반을 틀었다. 그 아름다운 피아노의 전주가 흐르며 시작되는 러브스토리, 마음은 집시, 그리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하이든의 종달새, 모차르트의 수렵 등으로 분위기를 돋우려고 했다. 모두들 한 번씩은 추억 할 만 한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더 신이 나서 틀었다.
조용할 때는 밖에서도 좀 크게 들렸었는데, 그날은 밖에 나가서 들으니 이야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좀 실망 했지만 음식 내가기 가 바빠서 그만 창문도 닫고 전축도 껐다.
그렇지만 나 혼자라도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지금이라도 중고 가게에서 좀 좋은 전축이 있으면 사고 싶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CD플레이어나 핸드폰으로도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고 TV로도 양방향 통신이 되고, 머지않아 5G 가 상용화 되면 더 좋은 음악 감상이나 연주의 실황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전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없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좀 아쉽다.
추수
2019 . 10 31 김 난 희
나에게 “추수” 라는 단어는 넉넉하고 풍성한 들판을 생각나게 한다.
벼가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소슬바람에 일렁이는 들길을 걷거나, 지금은 기계화된 농사가 되어 잘 볼 수 없는 풍경인지도 모르지만 벼 베는 날 일꾼들의 점심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들을 보는 것만 으로도 마음이 넉넉했었다.
벼의 추수를 하려면 몇 고비의 큰 수고를 해야만 한다.
못자리에 볍씨를 뿌려서 한 뼘 쯤 자라면 모내기를 하고 몇 차례의 논매기를 한다. 벼가 자라 이삭이 패면 피를 뽑아야하고 가뭄이면 물대기 장마에는 물 빼기를 한다.
벼가 고개를 숙이면 허수아비를 세우고 빈 깡통을 줄에 매어 달고 참새가 날아들면 ‘쩡그렁 쩡그렁’ 줄을 흔든다.
이렇게 새보는 일은 주로 아이들이 맡았다. 아주 낭만적인 듯하지 만 그늘에 앉아 좀 노닥거리거나 한 눈 팔면 영락없이 새와의 전쟁에서 밀려서 먹이를 내어주고 만다. 아주 민첩하고 격정적인 씨름이다. 그 수십 혹은 수 백 마리의 참새 떼가 후두 둑 거리며 벼를 쪼아 먹지 못 하도록 뺏고 뺏기지 않기의 작전이 새보기이다. 그런 과정들을 지나야 벼를 벤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 갔다 집에 오면 조용하고 한적한 집이 온통 시끄럽고, 먼지투성이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으면 말 도 들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요즘과 달리 탈곡기를 돌려서 추수한 벼를 탈곡하는 날이었다.
굵은 철사를 구부려서 툭툭 밖은 둥근 회전판에, 발로 발판을 밟으면서 수확해서 말린 벼를 두 주먹쯤을 두 손으로 잡고 탈곡기에 갖다 대면 ‘와릉와릉’ 소리를 내면서 곡식을 털어내는 것이다.
넓은 마당 양 사방에 멍석으로 둘러치고 벼를 쌓아둔 낟가리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위에서 볏단을 던져내려 놓으면 네 명이 한조로 일을 한다. 벼를 나누어서 대 위에 올려 주는 사람, 1차 탈곡기에서 털어내고 2차 탈곡기에 마무리 터는 사람 마지막에 나오는 볏짚을 단으로 묶는 사람이 나란히 서서 일을 한다. 탈곡기를 돌리는 발동작과 논 놀림의 장단이랄까 템포 랄까 그런 속도가 잘 맞아야 한다.
한참 탈곡을 하다가 떨어져 나온 벼이삭은 빗자루로 슬쩍슬쩍 쓸어서 한쪽에선 털어낸 벼를 풍구로 먼지를 날리고 두지 창고로 넣는다. 창고에 두었다가 필요할 때 정미소에서 도정해서 쓰기 위해서다.
볏짚은 마당 옆 채마 밭에 다시 짚가리로 높이 쌓아 올린다. 땔감도 되고 소들의 먹이도 된다. 이런 날은 일꾼들은 물론 농감을 하시는 아버지께서도 수건을 동여맨 머리가 허옇게 먼지를 써야 했다. 먼지 쓴 얼굴에도 표정만큼은 수확의 즐거움으로 풍요하고 넉넉한 표정들이었다.
옛날 탈곡기로 추수 하던 시절에는, 과일도 집 담 안에 있는 고목 배나무와 대추나무, 밤나무 정도 밖에 없었다. 밤나무는 골의 밭가로 심은 것이 제법 많았다. 할머니께서 아침에 “벌써 동네 아이들이 밤 주우러 왔다. 이제 일어나 거라.” 하시면서 깨우시곤 했다. 자주색 선명한 알밤이 밤새 떨어져 이슬을 맞고 송글송글 땀을 흘리며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을 추수 할 때는 한 사람이 나무위에 올라가 장대로 밤송이를 때려서 떨어뜨리면 알밤은 따로 줍고 덜 벌어진 밤송이는 뒤뜰에 모아 덮고 밤송이가 쉬 문드러질 때까지 그냥 둔다.
잘못해서 머리에 밤송이가 떨어지거나 몸에 맞아도 엄청 혼이 난다. 밤 가시가 박힐 수도 있기 때문 이다.
배는 서리 내릴 때 추수하는데 나무 아래에 홑이불을 펴서 들고 나무 위에서 장대로 꼭지를 꺾어 내렸다. 빈방에 배가 수북키 쌓이면 동네에도 한 바가지씩 돌리고 일 한 사람들도 한 보따리씩 나누어주시던 할머니의 정이 생각난다.
콩이나 팥은 뿌리 채 뽑아 말린 후 마당에서 도리깨로 탁탁 두들겨서 껍질속의 알갱이를 빼내서 수확한다. 들깨나 참깨는 말린 후 홑이불을 펴놓고 왼손으로 줄기를 들고 오른손에 막대를 들고 툭툭 치면 ‘싸르르 싸르르’ 작은 알갱이가 떨어져 나온다.
어떤 친구는 들깨를 씻다가 물에 뜨는 들깨를 버리고 나니 한바가지가 한줌 밖에 안 되더라고 했었다. 들깨는 콩이나 팥처럼 뜨는 것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씻다가 저지를 실수였다.
최근에 아주 조금이지만 내가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험한 추수의 기쁨은 고구마의 수확 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는 것 같다.
서리가 내릴 무렵 무성한 줄기를 들추고 쇠스랑의 삼지창 같은 날을 수직으로 가장자리 땅속에 푹 꽂아 발로 꽉 눌러 뒤로 제키면 땅속에서 굵고 긴 것, 둥근 것, 좀 작은 것 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 정말 그 환희는 감격 그 차체이다.
이런 기쁨이 있어 농사를 짓는 구나한다.
제 작년에는 고구마 잎이 무성해서 잔디밭까지 넘쳐 나와서 고구마 줄기를 볼 때 마다 그 땅 속에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 굵어지고 있을까를 생각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남편이 누구한데 들었는지 줄기를 좀 따 줘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 했지만 탄소 동화작용을 해서 뿌리에 저장 하는 식물의 생리를 들어 아닐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줄기를 한줌 따서 나물해 먹는 것도 아까워하며 길렀다. 추수 때가 되어 줄기를 걷고 아무리 땅을 파헤쳐도 주렁주렁 달린 고구마는 없었다. 한 포기에 겨우 한 개 아니면 없거나 있어도 조그만 것 밖에 없어서 너무 허탈한 때도 있었다. 땅이 나쁜지 잘 못 심었거나 잘 못 가꾼 탓이겠지만 그 뒤로는 어찌나 실망 했던지 고구마 추수의 별난 기쁨은 포기하고 사서 먹기로 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싱싱한 풋고추나 상추, 깻잎 오이를 따서 먹는 재미도 큰 기쁨이다.
추수의 계절에는 뭐니 뭐니 해도 높이 쌓여진 낱 가리는 없어도 하얗고 파르스름하고, 입에 착착 붙는 햅쌀밥을 먹을 생각으로 입에 침을 삼킨다.
추수는 고단해도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일이다.
첫댓글 상록 수필 원고 올려주심을 환영합니다.
그와 함께 화가에서 수필가로 삶의 영역을 확장해 가심을 축하드립니다.
껴안고 샆도록 부드러운 봄밤, 한잔의 에피타이저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전원 풍경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