图1
예율배(899년937년 1월 11일) 즉, 요의 종 문헌인 흠의 황제, 성 예율, 한성 유, 한문명배, 거란문명도욕(혹은 작욕)
서기 916년 예율아보기는 황제를 칭하고, 대계단국(후에 랴오나라로 개칭), 개원신책(。神册)을 짓고, 17세의 장남 예율배를 황태자로 세웠다.서기 926년 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를 동단국으로 개명하여 예율배(王)를 황제로 책봉하고, 그에게 동단왕국의 왕을 맡기고, 926~930년에 재위하였다.정치적으로 예율배의 경력은 비극적이었고, 태자였던 그는 동생 예율데광에게 황위를 내준 뒤 번번이 질투를 받아 고향을 떠나야 했다.후당에 투신한 후, 당명종 이사원은 일찍이 이름 이찬화를 하사했다가 후당 리종커에게 죽임을 당했고, 38세의 나이로 죽었다.죽은 후 석경조는 그를 연왕으로 추서하였다.의무여산(현릉)에 개장할 때 요태종 예율덕광은 시호를 문무원 황왕으로 봉하였다.그 아들 예율 응우옌(랴오辽) 주정(() 이후 '양국황제'로 추앙했고, 봉묘호(封)는 랴오이종(辽義义), 가시호는 문헌흠의 황제(。義皇帝)였다.그는 다치단국의 황태자로 생전에 황제로 즉위하지 못했지만 그 아들 예율응온(랴오세종)을 시작으로 이후의 랴오대제제는 료무종예율경을 제외하고 모두 그의 자손이다.
예율배가 사후에 황제로 추앙되기 때문에 사서에서는 그를 태자배, 인황왕 또는 동단왕 외에 의종, 양국황제와 문헌황제 등으로 자주 부른다.
예율배는 어느 한쪽을 통할하는 군주로서 그 치적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있는데, 그는 일신의 전장과 군사 모략가는 물론, 장서가, 음양학자, 의학가, 음악가를 집대하였다.
일찍이
당소종 광화 2년(899년) 예율아보기의 장남 예율투가 태어나려 할 당시 아보기는 거란 부족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끄는 예율씨 부족은 거란다
거란노코한이 죽은 후, 아보기는 이듬해 봄 정월 십삼경인일(907년 2월 27일)에 거란 코한의 자리를 물려받았다.아보기는 한족의 문화를 흠모하여 억이라는 이름을 따서 예율억이라고도 불리고, 장남의 도욕도 한의 이름을 따서 배라 하며, 아보기는 특히 한고조 유방을 흠모한다.
정적과 황제의 벽을 제거한 후 칸을 맡은 제10년 춘이월 초하루에 병술일(916년 3월 7일)에 아보기가 황제로 자립하여 큰 거란국(후에 랴오나라로 개칭)을 세웠다.같은 해 3월 초 이병진일(916년 4월 6일)에 열여덟 살의 예율배가 황태자로 세워져 대계단국 황위의 계승자가 되었다.
숭한
부황의 영향으로 예율배는 한족 문화에도 상당한 존경을 받았고, 그에 못지 않게 그 당시 한화의 정도가 가장 높았던 거란 황실의 구성원으로 중원의 문화 특히 유학에 대해 추앙하고 있다.한번은 아보기가 자기를 섬기는 신하에게 물었습니다. "수명하는 임금은 하늘을 섬기고 신을 공경해야 합니다.큰 공을 세우고 숭고한 도덕을 가진 사람, 제사를 지내고 싶은데 누가 제일 먼저야?"다들 부처를 제일 먼저 모셔야 한다고 했어요."불교는 중국 본토의 종교가 아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예율배는 공자는 만세에 존경받는 성인으로 가장 먼저라고 부황에게 조언했다.아보기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조서를 내려 공자묘를 짓고, 황태자 예율배를 매년 봄, 가을 두 계절에 백관제를 이끌고 공자를 제사 지내게 하였다.예율배는 도교에도 관심이 많고 특히 음양학을 좋아한다.공묘가 잘 지은 후, 신책 4년 추팔월 초삼정유일(919년 8월 30일)에 아보기가 직접 공묘를 참배하고, 왕인 술율평과 황태자 예율배가 각각 절을 참배하였다.
징전
예율배는 한족 문화수양이 높을 뿐만 아니라 통병의 전장과 군사모략가이기도 하다.신책 4년 동 10월 병오일(919년 11월 7일)에 그는 부황을 따라 북으로 오고부를 징구하고 선봉도통을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길을 열었다.아보의 기명 예율배는 선봉 부대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오구부를 격파하고 가축을 잡아 만 사천이백 마리를 잡고, 소와 마차를 타고, 여장 기물을 이십여 만 개나 탔다.그래서 우구부는 모두 거란에게 항복하였다.
신책 5년 추팔월 초하루(920년 9월 15일)에 당항 각부가 반란을 일으켰다.신미일, 아보기 어가가 친정하고 예율배가 따라갔다.9월 14임인일(10월 28일)에 예율배율 디라베 이이리제비여율 오리진 등이 운중현(금산서성 대동시) 천덕군(현 네이멍구 울라트)을 공략했다.동십월 십이신위(11월 27일)에 예율배율군이 천덕군을 침공했다.10월 14 계유일(11월 29일) 천덕군 절도는 송요를 항복시키고 천덕군을 응천군으로 개종시켰다.
신책 6년 12월 초 구경신(922년 1월 9일), 예율배율 왕울 등 경략연지(춘추, 전국시 연나라 때 연나라의 옛 땅을 일컫는 말)
천찬 3년(924년) 춘정월, 발해가 거란을 죽인 요주자사(治州刺, 치소현 랴오닝성 신민시 동북요하 서안 요빈탑) 장수실(。)이 주민을 약탈했다.6월 18을유일(7월 22일)에, 아보기는 황후 술율평, 황태자 예율배, 천하병마대원수 예율덕광과 두 재상, 서부 두 영위를 소집하여 선포하였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조서를 보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발해가 거란 뜻은 거란다, 왜냐하면 발해는 거란다 단둥면에 있는데, 아보기가 복수를 서두르지 않고 서면을 공격했기 때문이다.이날 아보기는 토혼, 당항, 압제 등을 대거 징구하고 황태자 예율배감국을 명해 수도 상경림황부(지금의 몽골 바레인 좌기 동남쪽)에 남아 그를 지켰다.그러나 예율배는 부황의 성동격서(이번에는 성서격동)의 진의를 알고 부황에게 발해를 공격하는 계책을 바쳤다.
아보기가 서정하여 귀국한 후, 천찬 4년 12월 16을해일(925년 1월 3일)에 발해에 대한 원한을 진술하고 거병으로 발해 국왕을 징집하는 조서를 보냈다.황후인 술율평, 황태자 예율배, 천하병마 대원수 예율덕광이 수행했다.
천찬 5년 봄 정월 초 삼경 신일(926년 2월 17일)에 이르러 발해 중진 부여성(현 지린 성 농안현)을 함락시켰다.이후 아보기가 한동안 진취적이지 않고 먼저 성 안의 호적과 인구를 정리하려 하자 예율배는 지금 여성을 얻고 보니 백성이 편할 리 없다.지금 우리 군의 파죽지세를 타고 발해의 수도 호한성(上京龍泉城, 지금의 흑룡강성 닝안시 도쿄성)을 직접 공격한다면 반드시 함락시킬 것이다."아보기는 맏아들의 조언을 받아 그와 예율덕광을 최전방 공격수로 내세우고, 남부 재상 예율수와 함께 북원대왕 예율사네손을 치고, 남원대왕 예율적은 정월 구병 인일(2월 구병)을 포위한다.정월 12기 사일(2월 26일) 발해(末國)의 마지막 왕인 대작(大諲)이 기단(大。)이 세가 세가 세가 세지고, 스스로 대세가 기울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단인황왕칭제
천찬 5년 정월 이십정축일(926년 3월 6일)에 대저찬은 거란에 반역해 독립을 선언하고 호한성을 차지했다.이날 다시 아보기가 그를 격파하고 호한성 안으로 들어가자 발해는 끝내 멸망했다.2월 초 오임진일(3월 21일)에 아보기는 발해가 평정된 관계로 청우백마로 천지를 제사하고 천하를 대사면하여 천현을 개원하였다.이월 십구병오일(4월 4일)에, 아보기는 발해를 동단국으로, 또는 동단왕국으로 칭하여 '동치단국'이라는 뜻으로 수도인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명하였다.아보기는 여율배천자의 면류관과 복을 주고, 건년호는 감로, 제(황제 권력 행사)라 하여, 네 개의 정승을 두고, 아보기의 동생 예율데라를 좌대승으로 삼았다.동단국은 매년 종주국 대계단국에 포목 15만 단, 말 천 필을 상납한다.
图2
그림 2 예율배의 동단국 유적.
아보기는 예율배에게 '인간의 왕'으로 불리며 삼재 '하늘과 땅과 사람'의 전고를 사용하였는데, 아보기는 자기의 존호가 '천황제'이고, 황후는 율평을 '완전황후'로 정했다.그러나 당당한 황태자를 번외의 나라에 봉하여, 아보기가 예율배가 계승되어야 하는지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자, 아마 그는 황후의 율평의 말을 듣고, 이미 맏아들 예율의 배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요사·후비열전•순흠황후술율평전》에 따르면, 아보기는 차남 예율덕광이 예율 가문을 번성하게 할 것이며, 황후도 차남을 선호하여 황태자예율을 계승하려 하였다고 한다.그 후 아보기가 죽은 후의 제위 다툼은 아보기의 이런 행태가 사실상 장남 예율배를 황위를 차지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책봉 후, 아보기는 3월 11정묘일(4월 25일)에 사람 황왕 예율배의 궁전을 방문했다.이후에 이익을 지키기기 아 고 어명(바다에 인접해 있다 이곳 : "의 발해이다.g와 일본해 바다)차례 신속하게 됩니다, 내가 아닌 곳에 거주할 수 있고 오래 남아, 네가 여기에 시민들을 안정시키기로 강토를 다스리는 애민을 과시하는 마음. 짐이라고 말했다.3월 29을유일(5월 13일)에 아보기반사단이 황도로 돌아가자, 사람 황왕 예율배가 동단국 관료를 이끌고 배웅하였다.하사월 초하루인 신묘일(5월 15일)에 예율배는 별부황을 그만두고 부황에게 바치는 노래 한 곡을 썼다."네가 동방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 있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고 아보기가 말했다.예율배는 다시는 부황을 만나지 못할까 봐 울부짖으며 헤어졌다.동단으로 돌아가면 예율배는 중원의 의례와 제도로 나라를 다스린다.
아보기의 성가가 아직 황도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추칠월 이십갑술일(8월 30일)에 부여성에 도착하여 아보기가 병이 나기 시작했다.7월 27일 신사일(9월 6일)에 아보기가 승하하였다.이튿날인 7월 28일 임오일(9월 7일)에 아보기의 황후 술율이 조칭제에 올라 군국 대사를 판결했다.
아보기가 승하한 후, 거란톤 때는 무리가 우두머리가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에 귀순했던 여러 부족들은 대부분 반란을 일으켰다.제정한 술율황후는 아보기의 재궁(영구)을 계속 부축하여 서귀황도(西都)병권을 쥔 천하병마 대원수 예율덕 광정은 반란을 평정했다.아보기의 부고가 동단국에 도착하자, 예율배는 당일, 아보기 재궁 소재지로 달려갔다.8월 21을사일(9월 30일)에 예율배는 부황재궁이 있는 곳에 도착해 황후와 대원수와 함께 황도로 돌아간다.
양국
제위는 원래 황태자였던 예율배에게 계승되어야 하지만, 어머니 후술 율평은 그를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차남 예율덕광이다.근소한 친애 관계 이외에, 율평은 예율배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치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한 문화를 흠모하며 공자의 유가 사상을 치국술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과 거란 노예제 전통을 옹호하는 모후예율덕광은 천하의 병마대원수로서 중병을 손에 쥐고, 모후는 조칭제에 임하여 두 사람이 군정 대권을 쥐고 있다.예율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를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후에 둘째 아우 예율데광을 황제로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하늘은 2년 가을을 나타내며,아보기는 주릉에 묻혔다.요사에 따르면 동11월 임술일(927년 12월 11일)에 예율배는 백관공경들에게 대원수공덕은 천신과 견줄 만하고 국내외 민심은 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바로 군신들과 함께 율황후를 불러 자신이 계승해야 할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였다.술율황후는 당연히 동의하였고, 그 날, 예율덕광은 곧 황제 자리를 차지하였고, 요태종을 위하여, 존술율황후는 천황 태후를 따르기 위하여 연호가 여전히 천현불변하였다.
덕광계위 제의는 예율배가 군신들과 함께 한 것으로 보이며, 술율황후는 민의를 따를 뿐이다.그렇지 않아도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번 권력승계는 당시 거란 지배집단 내의 투쟁은 물론 이후 거란 황실 내부의 일련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졌다.이번 권력 이양에서의 투쟁인 요사(明确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고, 평온하고 정상적인 가운데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그렇지 않으면, 술율황후의 의견은 전체 거란 귀족들에게 인정되지 않으며, 반대자들이 많이 있다.다른 의견을 가진 자에 대하여, 술율황후는 그 일관된 작법을 채택하여 간교한 술책을 꾸며 잔혹하게 처벌하고 진압하였다.예율배와 예율덕광은 거란의 귀족들 가운데 한 무리의 옹호자들이 있었는데, 그 율황후는 자기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하여, 거란의 사람을 구속에 순사시키고, 잔혹한 방법으로 예율배의 지지자들을 쳐부수하여, 그들을 장사하게 하였다.
쯔치통감은 또 반대파가 살육된 후, 皇后황후가 귀족대회를 주재하고, 두 아들에게 모두 말을 타고 성막 앞에 세우라고 명하여, 잘 아는 척하여 여러 부족장에게 "두 아들은 내가 다 좋아하고, 어느 것을 세울 수 없다.여러 추장들이 황후의 뜻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예율배를 지지하던 사람이 피살되자 앞 다퉈 덕광의 말머리를 잡고 우리는 대원수를 모시겠다며 환호했다.황후는 "여러분의 의견을 제가 어떻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마침내 덕광을 황제로 세웠다.요사(辽)에 이번 대회에 은거한 실상은 원자료가 부실하거나 존귀한 자를 위한 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은 요 태종의 계위 후 예율이 진노하여 수백 기병을 이끌고 후당에 투항하려다 순찰 중이던 병사들에게 가로막혔다고 기록돼 있다.태후도 그를 탓하지 않고 동단국으로 돌려보냈다.그만큼 예율배의 '양국(让國)' 움직임도 전적으로 내키지 않는 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거국
태종 예율 덕광이 모후의 진행으로 형 황태자 예율배를 대신해 황위를 계승한 데 대한 불만도 있었고, 거란제 귀족들의 의견도 엇갈렸다.태종은 계승된 뒤에도 형님이 자신과 제위를 다툴 것을 우려해 즉위한 뒤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형치하의 동단국은 더욱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예율배는 옛 발해의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북에서 쑹화강 유역, 남에서 압록강 유역까지 물산이 풍부하고 주민 문화의 소질도 높다.예율배 관할 하에 그것의 발전은 태종의 거란 정권에 위협이 될 것이다.그래서 천현 3년(928년)에 태종은 예율배를 타고 동단국을 떠나 황도에 머무르는 동안, 동단국 승상 예율우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단국의 신민을 충실하게 하였다.태종은 또 몰래 호위병을 보내 형을 감시하고 움직임을 관찰했다.발해를 난시(。)에 대비하려는 의도도 있고, 동단국 규모를 축소하고 근방으로 옮겨 견제가 용이한 개인적인 요소도 있다.
태종은 4년(929년) 8월과 10월 두 차례 난징(南京)과 황도(王都)에서 형의 거처를 지켰는데, 형을 달래거나 그의 상황을 파악해 필요한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서다.어쨌든 형제간 친밀함의 반영이 아니라면 갈등이 깊어진 표현일 것이다.형이 황도에 머무르는 동안 태종이 남경으로 발길을 돌린 것도 형의 치국권을 박탈하고 봉국(。國) 관계를 끊으려는 포석일 가능성이 크다.천현 5년, 동생 예율 리후를 황태제, 즉 동생을 후계자로 낙점한 것은 율태후라는 뜻이지만 형 예율배에게 또 한 번 큰 타격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예율배가 귀국하기 전, 태종이 변전에서 형의 관리들을 초대한 것도 그의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천현 5년(930년)에 예율배가 동단봉국으로 돌아오자, 태종은 또 "이사리보령이 인황왕을 위로하라", "인황왕의 위위를 다스리라"고 조서를 내려 태종의 강화했음이 드러났다.
图3
그림 3만년송은 높이 20여m, 줄기 둘레 4m로 예율배가 여산에 거주할 때 심었다고 하여 일명 태자송이라고도 한다.
예율배는 난징에 있는 동안, 왕계원에게 '난징비' 비문을 쓰라고 명했고, 서궁에 서루를 짓고 '락전원시'를 지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그 후 당 명종 이사원은 예율배의 조우를 듣고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 바다를 건너게 한 뒤 편지를 들고 예율배를 후당이 있는 중원 지역으로 초대했다.예율배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척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예율배가 봉국에 돌아온 후, 천현이 5년11월, 그 뒤에 당사절이 다시 동단국에 가서 예율배를 청하니, 예율배는 좌우의 시종에게 `내가 천하를 주께 넘겨 주겠다.'하고,떠날 때에 여율배는 바닷가에 나무 패를 세워 놓고, 그 위에 시를 새겼다.고향 사람을 부끄럽게 여겨 외국으로 건너갔다고 말했다.이것은 요나라 때 본 최초의 오언시로, 물적으로는 사람을, 큰 산은 예율배 자신을, 작은 산은 둘째 동생 랴오타이종을 비유하여 가혹한 기단 황실 투쟁의 내부를 그려냈다.그 후 예율배는 에베 고미인을 데리고 모든 책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후당으로 도주했다.예율배 부해투당은, 그가 권력을 잃은 후에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조치
图4
그림 4 거북등석에 16각 정자를 지었는데, 그 해에 예율배의 독서 수신소가 되었다.
图5
그림 5 동단왕 자화상.
후당좌 상빈
후당용 천자의 의례와 호위대가 예율배를 환영하고, 예율배가 물 위에 있는 선형 궁전에 앉자, 모든 관리들이 그의 좌우를 따라다니며 그에게 일일이 술을 대접하였다.도착 후 당나라의 중진인 허저우(현 허난성 개봉시)에서 만난 당명종.명종은 후당 장종인 리춘위(李勖)의 후궁인 궁녀 하씨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예율배 성을 동단(東东, 東丹, 東东, 東丹華, 中華中华)이라고 하였다.명종은 또 서주를 회화군으로, 배동단 모화(즉 예율배)는 회화군 절도사, 서, 신 등의 주 관찰사로 바꾸었다.이후 이찬화(李,華), 이찬화("華, '중화 찬미'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리잔화(李。華)로 불리기도 했다.주를 이동하여 경건한 주의 절도사를 멀리 받다.이찬화(즉 예율배)는 이국땅에 있으면서도 늘 조국의 친족을 그리워하며, 그가 보낸 모후와 황제에게 문안하는 사절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요사》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