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하나가 되어 가는 천하(天下)
1
새벽이 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만독마가 천약선자를 대동하기로 했다
. 그는 늘그막에 거둬들인 제자를 못마땅해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흐뭇해하는 눈치였다.
무천룡은 강남미연과 함께 금시단정학을 타고 한 발 앞서 모산으로 가기로 했다.
천약선자는 무천룡의 진실한 정체에 알고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그녀는 그를 맹주(盟主)라 칭했고 말투도 공손해졌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강호가 평정된 후
대무신국의 신민이 되어 여생을 속죄하며 지내기를 간청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원래 자비로운 성격이었다.
그녀가 악독한 천약선자로 불리게 된 것은 십검에 대한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독마의 독경이 그 주된 요인이었다.
독경을 익히게 되면 마음이 흉악해지기 마련인 법이다.
만독마도 과거 그랬었다.
하지만 그것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 만독마가 무저갱 안에서 깨달은 새로운 구결을 이용해 독공을 익힌다면
마성에 젖을 폐단은 사라지게 된다.
만독마는 그것을 알았기에
강호의 큰 죄인 천약선자를 죽이기보다 살려 회개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무천룡은 망신단의 기운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강남이연을 안고
금시단정학 위에 올라 새벽 하늘 멀리 날아 올라갔다.
"허허…!"
만독마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뒤쫓아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모산에서의 일이 다 끝난 이후에나 당도할 테니까."
"제자 때문에 방해가 된다면 제자는 혼자 가겠습니다."
천약선자가 공손히 아뢰자 마독마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지 않느냐?"
그는 천약선자의 손목을 쥐고 훌쩍 날아올랐다.
"어쨌거나 만독문을 잇겠다면 노부와 떨어질 수 없다."
무천룡은 금시단정학을 타고 날아오른 지 세 시진 만에 모산 근거에 이르게 되었다.
강남미연은 그 사이 정신을 차려 무천룡의 품안에 꼬옥 안겼다.
무천룡이 죽지 않고 살아나 자신을 구했다는 기분이 그녀를 황홀하게만 하는지
그녀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게만 보였다.
하지만 무천룡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검선자에 관한 일 때문이었다.
'검선자가 독낭자 낙유향에게 끌려 갔다면 위험하다.
낙유향은 석진영을 죽인 원한 때문에 날 죽이지 못해 한을 품고 있는 여인이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무천룡은 그리 밝지 않은 기분으로 모산 땅을 밟게 되었다.
막상 내려서자 칠마령의 마지막 한 조각을 지킨다는 사명을 안고
모산을 찾았던 때의 기억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호호… 참 아름답군요?"
강남미연은 흰 이빨을 드러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무천룡은 신인이자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한쪽 가슴에 안긴 채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흥에 젖었다
. 무천룡은 그녀를 실망시킬 수 없어 그저 미소로만 답했다.
잠시 후,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기이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새 울음소리 같은 휘파람 소리는 아주 오랜 메아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무천룡이 취마와 정한 신호성이었다.
'취마 사숙이 곧 오시겠지.'
무천룡은 검보가 있는 곳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검보 안에 못된 무리가 있다는 것이 그의 부화를 끓어오르게 했다.
'세상의 마를 없애리라!
그것이 할아버지 정의무성의 유지이고
, 내가 신공을 지니고 있는 한 계속해야 할 숙명적인 일이다.'
무천룡이 마음을 다지며 취마가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무천룡 바로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궁색한 옷차림의 백발노인 하나가 있었다.
취마는 아니었다.
얼른 보아서는 취마보다도 훨씬 더 늙어 보이는 사람이고,
얼굴이 주름살로 인해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흉칙했다.
"흠…!"
노인이 불쑥 나타나 신음성은 내자 무천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뉘시오?"
무천룡의 목소리는 무언중 사람을 위압하는 바 있었다.
"무림맹주(武林盟主)를 찾아왔소."
백발노인은 신비하게 말한 후 금시단정학 쪽으로 다가갔다.
끄르르― 릉―!
금시단정학은 노인을 보고 아주 기쁘게 울부짖었다.
"허허… 꽤 오랜만이구나. 네녀석이 여기 날아들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한 모습을 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노인과 금시단정학은 아주 오랜 동안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금시단정학이 노인을 보고 그렇게 기뻐 울부짖은 것이다.
"아…이제 보니 금시단정학의 주인이신 개방의 태상방주 천결신개(千結神 )이시군요?"
무천룡은 그제서야 노인의 정체를 간파하고는 반색을 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모았다.
"그렇소, 맹주. 노부는 지금 청의병선자(靑衣病仙子)의 명에 따르고 있소.
청의병선자께서 지금 맹주를 뵙고자 하오."
"그럼 나를 기다린 것이오?"
"허허… 놀랄 일이 아니오
. 맹주가 언제고 여기 오시리라 믿고 모두들 이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었소."
"아…!"
무천룡은 탄성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무사하다니 하늘의 도움이오."
"노부는 연락책을 맡고 있소. 경신술이 빠르기 때문이오.
허허… 하여간 맹주를 뵙게 되어 다행이오.
맹주가 여기 내리지 않고 검보에 좀더 접근했다면 길이 엇갈렸을 것이오, 허허…"
천결신개의 웃음은 그리 자상하지만은 못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군.'
무천룡은 천결신개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간파하고는 다소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무림맹이 황폐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칠마령을 찾아 중원으로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서
오히려 죽었다는 소문을 무림맹 사람들을 실망케해서도 아니었다.
'검선자는 붙잡혔지만 그래도 병선자가 무사하다니 힘이 될 수 있겠다.'
그는 애써 불길한 생각을 지우고는 천결신개를 따라 가기로 했다.
그는 강남미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취마란 어른이 올 것이오.
그 분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곧 돌아올 것이라 대신 전해 주시오."
"괜찮으시겠어요?"
"하하…물론이오."
무천룡은 밝은 미소를 강남미연의 우려를 안심시키고는 천결신개의 뒤를 따랐다.
"갑시다."
천결신개는 무천룡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훌쩍 날아올랐다.
그는 풍운신법(風雲身法)이라는 개방 비전신법을 구사하며 이내 점으로 화했다.
'나의 경공을 시험하는군.'
무천룡은 천결신개가 혼신 공력을 다해 달린다는데 실소를 흘리며
이 성 공력을 일으켜 그 뒤를 따라 갔다.
두 사람 사이는 곧 일 장 이내로 접근했다.
천결신개는 무천룡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으나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승부욕이었다.
백도 최고의 경공을 자랑하는 그였지만 무천룡에 비한다면 달빛과 반딧불이 대결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무천룡은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모산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숲이 펼쳐져 있는데 그 안에서 끔찍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군.'
무천룡은 숲속이 용담호혈임을 대번에 간파했다.
"거의 다 왔소."
천결신개가 땀방울을 가득한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숲 한가운데를 향해졌다.
"청의병선자는 안에 계시오!"
"알겠소."
무천룡은 병약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여인 중 가장 현명한
청의병선자의 모습을 그리며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속에는 넓은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 술상을 차려놓고 무천룡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청의미녀가 보였다.
은은히 비치는 몽면 한 장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여인은
바로 청의병선자 이옥란(李玉蘭)이었다.
"소저!"
무천룡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외쳤다.
청의병선자 이옥란의 가는 어깨가 전율했다.
"오…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맹주께서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한동안 귀를 의심했습니다."
"하하…어찌 사마외도 따위에게 죽을 수 있겠소?"
무천룡이 당당히 말하며 다가가자 청의병선자가 다소곳이 앉으며 술병 하나를 쳐들었다.
"쾌거에 대한 축하주이오니, 소녀의 정성으로 아시고 드십시오."
"이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있나 모르겠소."
"맹주는 중원불사신으로 칠마전의 마도천하를 분쇄하셨습니다
. 모두가 맹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의병선자는 섬섬옥수를 움직여 홍옥같이 붉은 술로 잔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었다.
몽면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면 그녀의 안색 역시 긴장에 젖어 보였을 것이다
. 사내에게 술을 바치는 수줍은 때문은 아니었다.
무천룡은 그녀가 두 손으로 받쳐 내미는 술잔을 건네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카아… 좋은 술이요."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았다.
향기 짙은 술이 목구멍에 닿자 열기가 느껴졌다.
식도를 태울 듯한 아주 강한 열기였다.
'독주(毒酒)로군!'
무천룡은 술에 맹독(猛毒)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만독불침지체가 어떤 독에도 당하지 않는다.
정작 두려운 것은 청의병선자가 극독을 써 가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려 한 이유였다.
"으음…!"
무천룡은 괴로운 마음에 신음성을 발했다.
"죽엇!"
청의병선자의 오른손이 소매 속에서 나와 무천룡의 가슴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허억…?"
무천룡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청의병선자의 예리한 비수가 정확히 그의 심장에 박힌 것이다.
"나… 나를 암살(暗殺)하려고 불렀단 말이오?"
"너… 너는 죽어야 한다. 너는 무림맹주가 아니다. 네놈이 나의 아버지를 죽인 원흉이다!"
청의병선자의 눈에서 새파란 원광이 일어났다.
"그렇소?"
무천룡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네놈은 우리를 철저히 속였다.
칠마전 도배들보다 더 악한 놈이 바로 너 낙헌지다.
너를 암살하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청의병선자가 싸늘히 말하며 비수를 빼냈다.
"아앗, 이… 이럴 수가?"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휘청거렸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 분명 그의 심장을 찔렀건만 비수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소저가 어찌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나 모두 사실이오. 백의검제는 나에 의해 죽었소.
그러나 나는 그 일로 인해 죽을 만한 처지가 아니오."
무천룡이 무거운 표정으로 옷을 툭툭 털었다.
병선자는 비틀비틀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과연… 불사신(不死神)답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
"화영공(化影功)이라는 것이오.
원래 비마의 수법인데 하도 신기한 수법이라 연구해 익히게 된 것이오.
낭자는 허공을 찔렀을 뿐이오."
"으으…사악한 놈! 죽여야 한다!"
청의병선자가 악을 쓰며 뒷걸음질치자 사방에서 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와아―!"
"저 가증스러운 놈을 죽여라―!"
공터를 포위하고 있는 숲속에서 수십 명의 검사들이 속속 뛰쳐나왔다.
그 중 가장 앞장선 사람은 초로의 흑의인이었다.
바로 흑의검왕(黑衣劍王)이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 중 태반은 과거 정검수(正劍手)에 속하던 사람들이었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모두 나타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결신개도 끼어 있었다.
"낙헌지, 백의검제를 죽인 다음 맹주령부를 훔쳤겠지?"
"간악한 놈! 남천관의 하인 주제에 천하를 희롱하려 하다니!"
"네놈이 오마의 전인이라는 것을 안다."
"낙헌지, 네놈이 오마의 전인으로 칠마를 몰아내고
오마전(五魔殿)을 세우려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모두 흥분해 이성을 잃고 있었다.
'기가 막히군.'
무천룡은 씁쓸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아픔 어린 눈빛으로 청의병선자를 응시했다.
백의검제가 어떻게 죽었는가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실을 말할 경우 검보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청의병선자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 틀림없어서였다.
'아…차마 말할 수가 없구나.
하지만 병선자가 어떻게 내가 백의검제를 죽인 장본인임을 알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무천룡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백의검제를 죽였다는 것을 어찌 알았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청의병선자는 고질병의 발작에 의해 심한 고통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말해 준 사람이 있었을 텐데?"
"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무천룡은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나는 다 알고 있소."
"뭐… 뭐라고?"
"술 속에 있던 독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오. 그 독은 백독마부에만 있는 화독이오."
청의병선자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시 휘청였다.
"으음…!"
"백독마부 사람 하나가 그 사실을 말하고 독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하는 말이니 어서 사실을 밝히시오."
청의병선자는 괴로운 표정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요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십 장 위 나무 위에서 사뿐히 떨어져 내리는
상복 차림의 소부 하나가 있었다.
"호호…내가 말해 주었다!"
그녀는 사람 하나를 들쳐업고 있었는데 바로 독낭자 낙유향이었다.
"낙유향, 너였군. 너리라 짐작했다."
무천룡은 나직이 탄식하며 그녀를 직시했다.
"흥, 너는 다가설 수 없다. 너는 그곳에서 죽어야만 한다."
독낭자가 이를 갈며 업고 있던 여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무천룡은 흠칫하며 손을 내렸다.
인질로 잡혀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금의검선자 이약란이었던 것이다.
독낭자는 청의병선자를 향해 외쳤다.
"호호… 이 계집을 구하는 길은 단 하나 낙헌지의 목을 내게 갖다 주는 길뿐이다.
어서 놈을 쳐라! 내가 만들어 준 독검(毒劍)을 쓴다면 저 놈을 쉽게 죽일 수 있다. 어서!"
무천룡은 착잡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랬군. 낙유향이 병선자를 찾아와 내가 백의검제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죽여야 검선자를 풀어 주겠다고 위협한 것이로군.'
우선 걱정되는 것은 금의검선자의 안위였다.
석진영의 복수를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그녀라면
무슨 흉악한 짓이라도 저지를 기세였다.
이때 흑의검왕이 보검을 빼드는 것을 시발로
정검수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낙헌지를 죽여야 한다!"
"무림맹의 최고 적은 바로 저 놈이다."
무천룡은 어처구니없어 하다가 흑의검왕을 쏘아봤다
. 흑의검왕은 그의 위압적인 눈빛을 받고 움찔했다.
무천룡은 위엄에 찬 태도로 말했다.
"검왕, 나를 치겠는가?"
"물론이다. 치지 못할 줄 아느냐?"
"내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알면서도 나를 칠 수 있단 말이냐?"
흑의검왕은 그의 정의로운 협행을 상기하며 잠시 주저했다.
"정… 정검령주의 지위는 이미 이름뿐인 지위다."
"정검령주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뭐냐?"
무천룡은 더욱 강렬한 정광을 발했다.
"말해 봐라. 내가 사도인가, 정도인가?"
"으음, 말할 필요도 없다. 네 행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까!"
"나는 칠마령 한 조각을 찾아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서장으로 떠나갔다.
아쉽게도 실패해 칠마전을 중원으로 나오게 했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것이냐?"
흑의검왕은 변명이 다소 궁색했다.
"그…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너는 죄인이다!"
무천룡은 아랫사람을 대하듯 꾸짖었다.
"너희는 내가 내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말만 했어도 나는 칠마령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다. 나는 그 일로 너희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그는 정검수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다만 너희들이 나를 정파로 보느냐 사파로 보느냐만 묻겠다!"
"……."
"굳이 나를 치겠다면 막지 않겠다!"
무천룡이 두 손을 늘어뜨리자 흑의검왕은 탄식을 하며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아…!"
그는 처음과는 달리 아무런 살기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청의병선자를 향해 말했다.
"나는 낙헌지를 잘 알고 있소. 그가 백의검제를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오."
"예에?"
"그는 누구보다 칠마전의 칠마를 괴멸하는데 앞장서서 싸웠소.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오. 나는 지금부터 중원불사신 낙헌지 편이오."
그는 무천룡을 향했던 검을 내리며 바닥에 떨구었다.
"아… 어쩜 검왕 마저…?"
청의병선자는 좌절하고 말았다.
무림맹 최강의 고수인 흑의검왕 마저 원수와 한통속이 되겠다면
그녀의 복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순간 멀리 서 있던 독낭자의 비명소리가 중인을 놀라게 했다.
"아악…!"
털털한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허허… 천룡아! 이 요사한 계집은 사숙이 잡아 두었다.
네 아내 되는 여인도 구했으니 이제 안심해라."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취마였다.
취마는 감쪽같이 독낭자 곁으로 가 그녀를 제압하고 검선자를 무사히 구한 것이다.
무천룡은 가장 위험스런 일이 원만히 해결되자 크게 안도했다.
"아…고맙습니다, 취사숙!"
무천룡을 낙헌지로만 알고 있던 흑의검왕은 천룡이라는 호칭에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천… 천룡…? 그러면 혹… 혹시…?"
흑의검왕은 무천룡의 위아래를 다시 살피다
무천룡 눈에서 흐르는 금빛 광채를 보고 전신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과 격동에 젖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크으…속하를 죽여 주십시오. 태자(太子)이신 줄 이제야 알았나이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펑펑 쏟아지자 모두 아연실색했다.
정검수들은 흑의검왕의 부복하며 감읍하자 검을 내던지고는 일제히 오체복지 했다.
"태자, 죽여 주십시오!"
"속하들의 어리석음을 죽음으로 꾸짖어 주십시오!"
"태자이심을 이제야 알았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림 안은 삽시간에 감회에 젖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무천룡은 그들을 쓸어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일어들 서시오. 여러분들이 이십 년 전 천일개정대법(千日開頂大法)으로
내게 힘을 불어넣어 준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모두들 용서하겠소."
흑의검왕과 정검수들은 더욱 감격해 했다.
무천룡은 한달음에 취마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하…취사숙. 정말이지 적시에 오셨습니다."
취마는 술병을 쥐고 연신 들이켰다.
그의 좌측에는 강남미연이 있고, 우측에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검선자가 있었다.
그리고 발 아래는 독랑자가 밟혀 있었다.
"흐흐…세 명의 미인과 더불어 술을 마실 수 있으니 신선도 부럽지 않다.
카하하… 대무신국의 태자라도 부럽지 않단 말이다."
"하하…어련하시겠습니까?"
무천룡은 흡인력을 발휘해 독랑자를 일으켰다.
취마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은은한 살기를 발했다.
"고운 얼굴이나 심보가 흉악하니 죽여야 하느니라!"
"용서하십시오. 죽일 수 없습니다."
무천룡이 웃으며 독랑자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독낭자는 혈도가 풀리자 퉁겨지듯 뒤로 미끄러졌다.
"크으, 네… 네놈이…?"
그녀는 몸은 제압되었어도 신지는 멀쩡했기에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원수가 낙헌지이기 이전에 대무신국의 태자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살기를 단념했다
. 복수 또한 꿈이었다.
그녀는 처연하게 외쳤다.
"죽여라! 살고 싶지 않다."
"낙낭자, 낭자는 나를 원수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말이오."
무천룡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독낭자는 핏빛 눈알을 굴렸다.
"개소리 마라!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는다. 어서 죽여라!"
"석진영을 죽여서 그렇게 한스러워하는 것이오?"
"몰라서 묻느냐?"
무천룡은 다가서며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낭자는 나를 원수로 여겨서는 안 되오. 차라리 나를 오라버니라 부르시오."
"미… 미친 놈!"
"미처 말하는 것아 아니오.
나는 낭자의 남편 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낭자의 아버지를 죽인 자를 죽였소.
그것을 아셔야 하오."
"뭐… 뭐라고?"
독낭자는 숨을 급히 멈췄다. 그녀는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무천룡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석진영의 하수인이었던 독목수라(獨目修羅)가 낙검엽 노인을 죽였소.
나의 양부이자 낭자의 친아버지인 그 어르신을 말이오.
내가 독목수라와 석진영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오."
"내… 내 아버지를 그들이 죽였다고?"
"낙검엽 노인은 낭자가 실종된 후 남천관의 총관이 되었소."
"거… 거짓이다!"
독낭자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애써 부인했다.
무천룡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모두 사실이오. 낭자의 사부도 이미 알고 있소."
"사부님께서도?"
"천약선자도 이미 내 편이 되었소.
낭자가 사도를 버리기만 한다면… 나는 낭자를 나의 누이로 삼겠소."
무천룡의 눈빛은 아주 맑고 정직했다.
그것은 독낭자의 한스러운 마음을 녹여 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아…아버님!"
낙유향은 자신의 아버지가 낙검엽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헤어졌을 때가 열 살이었으니 어찌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낙노인은 나의 은인이고 양아버지였소
. 나는 그 분을 양아버지로 여기기에
얼마 전 남천관 안에서 석진영을 악독히 죽인 것이고 낭자를 살려 주었소.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오."
"흐흐흑…!"
낙유향은 푹 쓰러져 오열을 터뜨렸다.
지아비 석진영이 아버지를 죽게 한 원흉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원수로만 알고 있던 무천룡이 자신의 친아버지를 위해 복수를 했으니
그것을 어찌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 아버님! 못난 소녀를 용서해 주십시오!"
독낭자의 울음소리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눈알이 새빨개지도록 울다가 무천룡을 올려다봤다.
"공자를…오라버니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하… 쾌히 받아들이지!"
무천룡은 아주 편한 마음이 되어 그녀를 일으켰다.
"유향, 이제부터 너는 내 동생이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낙유향은 소매로 눈물을 닦은 후 청의병선자가 경악해 주저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청의병선자는 놀라 혼절 직전이었다.
그녀는 낙헌지를 천박한 하인이었다가 운이 좋아 고수가 된 사람으로만 알았다
. 그러한 그가 전설적인 대무신국의 태자라니 놀라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상한 일이었다.
독낭자는 얼이 빠져 멍하니 있는 청의병선자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병선자, 백의검제를 죽인 사람은…사실 무천룡 오라버니가 아니고 접니다."
"예에…?"
"그 분은 망신단(忘神丹)의 노예였습니다.
망신단을 만든 사람은 저였습니다.
저는 칠마전에 들기 위해 그 분을…"
낙유향은 무엇인가 한참 동안 전음으로 말했다.
그 비밀은 무천룡이 공개할 수 없었듯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될 검보의 수치였다.
낙유향이 굳이 전음으로 진실을 전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낙유향의 말을 들으면서 청의병선자의 얼굴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진한 슬픔과 괴로움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본래 병약하기 이를 데 없는 병선자였지만
계속되는 경악과 충격은 오히려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낙유향은 이야기를 맺어 갔다.
"천룡태자를 원수로 여기시면 안 됩니다.
저 분은 백의검제가 후계자로 인정하신 분이십니다.
저 분이 죽인 사람은 백의검제가 아니고 그의 헛개비였을 뿐이지요.
백의검제의 영혼을 죽인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
낙유향은 거기까지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윽!"
갑자기 그녀가 피를 쏟으며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낙낭자!"
병선자는 놀라 그녀를 부축해 안았다
. 이미 혀가 두 치 가량 잘린 낙유향은 엄청난 피를 뿜어 냈다.
무천룡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어엇?"
"자… 자결을 하다니!"
낙유향은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모두… 제 탓… 용서해 주십… 시오…!"
낙유향은 그렇게 말하며 죽음으로 빠져들었다.
"으흐흑…!"
몸이 약한 병선자는 그녀의 식어 가는 시체를 안고 같이 쓰러졌다.
백의검제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백독마부의 십 년 노예가 되는 대가로
인형설삼을 받았다는 비밀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후우… 왜 이런 비극이 생겨야만 하는가?"
무천룡은 길게 탄식하며 힘없이 다가섰다.
그는 낙유향의 시체를 바르게 뉘여 놓고 깊은 애도를 표했다.
낙유향은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어 주었고, 죽음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녀의 자결로 청의병선자는 더 이상 무천룡을 증오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천룡은 혼절한 청의병선자의 혈도를 짚어 기혈이 엉키는 것을 막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연민의 정을 떨칠 수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다.
버려서는 안 될 여인이다.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욕을 듣더라도…
저 여인을 나의 아낙으로 삼아 백의검제께 진 죄를 모두 갚으리라.
이로써 은원(恩怨)은 해결될 수 있겠지.'
무천룡은 병선자의 여린 손을 쥐고는 굳은 결심을 했다.
무천룡은 중인을 이끌고 과거의 검보(劍堡)로 들어섰다.
〈 太陽魔宮(태양마궁) 〉
현판은 바뀌어 있었다.
그곳의 주인이 된 자는 태양마(太陽魔)였으나 그의 모습은 검보 안팎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태양마궁 안도 텅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무천룡이 금시단정학을 타고 내린 것을 어찌 알고 놀라 혼비백산에 도망가 버린 것이다.
'가면 어디를 가겠느냐?'
무천룡은 그들이 도망갔다는데 조금도 초조해 하지 않았다.
'후후…분명 심마를 찾아갔겠지.
하지만 심마가 지금 혈발마 사부를 비롯한 삼마왕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가지 않은 것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나의 손이 혈발마 사부의 손보다 부드럽다 여기고 내 손 아래 죽었을 테지.'
무천룡은 이제 최후의 결전을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태양마궁의 흔적이 지워지고 몇 달간 사라졌던 검보가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검보가 재건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것은 무림맹이 당당히 일어나는 것이고,
사마외도가 정도 세력에 의해 괴멸되었다는 것을 천명하는 순간이었다.
계 속
첫댓글 즐감 ~~~~~~~~
흐~ㅁ 전설의 자매덮밥이 재현될 조짐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즐감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