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장례식 대신 승리의 음악회를 열어 주세요.
이화학당을 다니던 그녀는 방학을 이용해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예수님처럼 민족을 위해 필요한 때에는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민족의 건강, 교육, 사회, 경제를 개선시키는 것입니다." 그녀의 간절한 호소에 여섯 사람(홍에스터, 김 함나, 윤성덕, 김보린, 김애은, 김신도)이 함께 동참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인 그녀를 포함한 7인 전도대는 YMCA 강당에서 전도비용을 위한 모금 구령회를 엽니다. 그러자 거기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의연금을 모읍니다. 이에 힘입어 평양, 신의주, 선천, 안주, 곽산, 정주, 북진, 양시, 차령관, 강서 등지를 돌며 그들은 복음전도와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들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전도대가 거쳐 가는 마을마다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리더는 바로 대한민국 여자 박사 1호로 후일 이화여자 전문학교의 제 7대 교장이 된 김활란박사입니다. 그녀가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써 힘든 환경과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전도활동을 하면서 경험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녀는 인천 베다니(배다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내리교회 전도부인 헬렌에게 전도 받고 믿음을 갖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온 가족에게 권유하여 모두를 기독교신자가 되게 합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믿음생활을 시작했고, 7세 때 세례을 받아 헬렌(Hellen)이라는 세례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가 자꾸 활란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름으로 개명 하게 됩니다.
인천 영화학교를 다니던 영특한 딸을 보면서 부모는 서울로 이사를 합니다. 이후 이화학당에 진학한 그녀는 고등과를 거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사로 헌신합니다. 이런 그녀를 유심히 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펜젤러 선교사입니다.
당시 이화학당의 아펜젤러 교장과 월터, 모리스, 칸로 등 여러 선교사들은 그녀를 한국여성을 위한 차세대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1922년 7월 그녀는 미국의 명문 감리교 대학인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풍토병과 장티푸스로 고생하는 등, 고난이 끊이지 않았지만 오로지 조국을 생각하면서 공부에만 전념합니다.
그 결과 보스턴 대학교대학원 철학과에 진학 1년 만에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고,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한국최초의 여성박사가 된 그녀는 귀국하여 국내에서 대대적인 찬사와 경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항상 남자들의 그늘 속에서 눌려 살아야만 했던 여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학생을 가르치고 학교의 어려운 사무를 처리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주일이 되면 하루 종일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회학교 교사로 성실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1936년 일제의 신사참배와 기독교 탄압으로 핍박을 당하면서 이화학당은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스파이 행위를 한다는 명분으로 감시를 당하게 되고 결국 추방령이 떨어지자 아펜젤러는 교장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위기의 때에 김활란 박사는 제 7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장에 취임합니다. 그녀의 나이 40세 때입니다.
매우 어려운 시기에 커다란 책임을 지게 된 그녀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힘과 능력을 다해 학교를 섬기며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자 일을 수행하는데 있어 그녀가 여자인 것은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이화는 이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심하고 뜨거운 기도로 어려운 이 시기를 헤쳐 나갈 것이다.” 그녀의 각오 앞에 일제도 이화학당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8월15일 드디어 해방이 되었습니다. 모두 기쁨에 겨워 즐거워할 때, 그녀는 이화전문 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등의 3개 단과대학으로 나눠 종합대학교가 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 1일 드디어 신촌에 자리한 이화학교 정문에 "이화여자대학교"라는 새 간판이 걸렸습니다.
근대사는 그녀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비난합니다. 한때, 일제의 협박과 위협 앞에 죄 없는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강연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으로 그렇게 학교를 지켜내야 했던 최선은 아니었을까요? 본의 아니게 일제에 대한 협조를 감수해야 했던 그 모멸감은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큰 회한이 되었습니다.
이 연약함은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전도의 사명감을 갖게 합니다. 1961년에 조직된 ‘금란전도대’는 충주 부여 인천 원주 전주 포천 대전 신탄진 등 전국을 돌며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합니다. 그렇게 밤낮 없이 전도사업에 매진하던 김박사는 결국 신경염으로 몸져눕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됩니다.
너무 많은 나이와 병이 겹쳐 결국 의식을 잃은 채 여러 날 병석에 누워 많은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나의 죽음이 오면 슬픈 장례식 대신 더욱 화려한 승리의 길로 환송하는 음악회를 열어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20년 2월 10일 저녁 여덟시 주님의 품에 안기었습니다. 깨끗하고 헌신적인 일생을 살았던 김박사의 소천 소식이 뉴스로 전국에 방송되자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물결을 이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헌신과 눈물은 그렇게 열매를 맺어 계속해서 또 다른 김활란들이 신촌 거리를 가득 메우게 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