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균역법을 시행한 영조의 업적 답⑤
대화 내용은 '양역(군역)의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백성들이 납부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주도록 하는 개혁을 실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균역법 실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균역법은 영조 때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이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어요(완론 탕평). 이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각 붕당의 인물들을 고르게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내세운 탕평 정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또한, 각 붕당의 사상적 지주였던 산림의 존재를 부정하고, 붕당의 지지 기반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어요. 또한,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고자 이들이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이른바 청요직)의 관리를 추천하던 관행을 없앴습니다.
민생 안정에도 힘을 기울여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지나친 형벌을 금지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자 신문고를 부활하였으며,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무원록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어요.
①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1455) 성종 때 완성하였습니다(1484).
② 대동법은 광해군이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처음 실시하였습니다(1608).
③ 나선 정벌을 위한 조총 부대 파견은 효종 때 두 차례(1654, 1658) 이루어졌습니다.
④ 금위영은 숙종 때 설치되었습니다(1682).
⑤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성균관 앞에 "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당하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는 내용을 새긴 탕평비를 세웠습니다(1742).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영조, 정조의 개혁 정책
개혁 정책 | |
영조 | ○ 탕평책(완론 탕평) ◦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세우려 함 → 탕평파 중심의 정국 운영◦ 산림 존재 부정, 서원 대폭 정리,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폐지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정조 때 완전히 폐지) ◦ 결과: 국왕의 영향력 확대, 붕당의 정치적 의미 퇴색 ○ 사회 개혁 추진 ◦ 목적: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 ◦ 균역법 시행(1750): 백성의 군역 부담 완화(1년에 군포 1필만 납부) ◦ 가혹한 형벌 폐지,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 시행 ◦ 한계: 강력한 왕권에 의한 일시적 탕평에 그침 ○ 문물 정비 ◦ 법전 체계 정리: 속대전 편찬 ◦ 속오례의, 속병장도설(무예, 병법 정리), 여지도서(지리 지식), 해동지도, 동국여지도(지도집), 동국문헌비고 (백과사전), 무원록(법의학 서적) ○ 기타 ◦ 이인좌의 난(1728), 나주 괘서 사건(1755), 사도세자 죽음(1762) |
정조 | ○ 적극적 탕평(준론 탕평): 영조 때의 척신·환관 제거, 소론과 남인 계열 중용 ○ 왕권 강화책 ◦ 초계문신제 시행: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 유능한 인사 재교육 규장각 육성 ◦ 장용영 설치: 친위 부대,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 ◦ 화성 축조: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 정치․군사적 기능 부여, 상공인 유치 ◦ 지방 통치 체제의 개편: 수령의 향약 주관 →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 약화,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 강화 ○ 문물 정비 ◦ 법전: 대전통편 편찬 ◦ 추관지(형조 판례집), 탁지지(호조의 기능 정리), 동문휘고(조선의 외교 문서 정리), 홍문관지, 규장각지, 태학지, 내각일력, 규장전운(음운서), 무예도보통지(병법서) ○ 경제 개혁 ◦ 목적: 재정 수입 확대, 상공업 진흥 ◦ 신해통공(1791):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 폐지 ◦ 광산 개발 장려 ○ 기타 ◦ 영남만인소 사건(1792), 문체 반정 운동(1792) |
유사 기출문제
영조의 개혁 정치
20회 고급 20번 문제
20. 영조의 정책 답①
제시된 건물은 생소하죠?
연호궁(延祜宮)이라는 신궁인데 카페지기도 보지 못한 건물입니다.
제시된 건물은 경복궁 뒷편, 현대 청와대 내에 위치하고 있는 칠궁 중의 하나인 연호궁입니다.
칠궁은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죠.
이 중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드라마 동이의 주인공)를 모신 곳은 육상궁(毓祥宮)이고,
제시된 사진의 연호궁(延祜宮)은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 영조의 첫번째 아들로 10살에 죽었는데, 그후 진종으로 추존됨)의 생모인 정빈 이씨를 모신 신궁입니다.
연호궁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육상궁과 한집에 같이 모시기 시작하였답니다.
즉 한 건물에 두분의 신주를 같이 모시고 있는 것이죠.
사진에 보이는 연호궁 현판 안쪽에 육상궁 현판이 있는 것이 보이죠?
그러나 제시된 설명에 '생모가 숙빈 최씨(무술이 출신)이고 자신의 출신이 갖고 있는 약점(어머니가 무술이 출신) 극복, 강력한 왕권에 기초한 탕평 정치 추구'를 통해 영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출신이 갖는 약점이라는 부분을 아버지 사도세자가 폐서인이 되어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을 생각해 정조와 헛갈리 수도 있으나, 정조는 이후 어린 나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 세자(후에 진종으로 추존)의 아들로 입적되었고, 어머니는 폐서인되지 않았으니 자신의 출신이 갖는 신분적 약점은 없죠.
따라서 영조의 정책을 파악하면 되겠네요.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여 정쟁을 억제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특히,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권을 지녔던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이는 정조 때 완전 폐지됨).
경제, 사회쪽에서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였으며, 형벌 제도를 개선하여 가혹한 악형을 개선하고, 신문고 부활, 상언, 격쟁 등을 통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토사가 쌓여 청계천의 하천 바닥이 높아져 홍수가 자주 일어나자 이를 준설하기도 하였어요.
또한, <속대전>, <속오례의>,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도 힘써 동국여지도, 해동지도 등의 지도를 제작하였어요.
① 영조는 민생 안정책의 하나로 균역법을 실시해(1750)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었습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기존에 2필)만 부담하면 되었습니다.
② 정조(1776~1800)에 대한 설명이죠.
서인들이 장악한 5군영 대신 친위 부대인 장용영(1785)을 설치해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③ 6조 직계제는 왕권 강화책으로 조선 초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가 실시하였어요.
이는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였어요.
이와 달리 의정부 서사제는 6조에서 올라오는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었습니다.
④ 북벌 운동을 추진한 것은 효종(1649~1659)과 숙종(1674~1720)입니다.
⑤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은 숙종(1674~1720) 때의 일입니다.
숙종은 탕평론을 제시하였으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세 번 있었어요.
경신환국(1680) 후에는 서인, 기사환국(1689) 후에는 남인, 갑술환국(1694) 후에는 다시 서인이 정권을 독점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5회 고급 32번 문제
32. 영조의 정책 답③
제시된 자료에 '이인좌의 난(1728) 진압', '성균관에 탕평비 건립'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으니, 밑줄 친 '이 왕'은 영조입니다.
따라서 영조 때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영조는 이인좌의 난 진압 후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사림들의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강하게 밀어부쳤지요.
그리고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1750),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어요.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으며, 백과사전적인 동국문헌비고 등의 펴내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ㄱ, ㄹ -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1761)은 정조 때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14회 고급 25번 문제
25. 영조 시기의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왕은 파악해볼까요?
'경종이 죽고 다음 왕으로 즉위한 연잉군', '즉위 후 이인좌의 난(1728) 발생'이라는 사실을 통해
자료의 밑줄 친 '왕'이 영조(1724~1776)임을 알 수 있어요.
국사 시간에 조선 왕들을 외웠던 거 기억하시죠?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이거만 기억하셔도 알 수 있겠네요...^^
영조는 많은 치적을 남긴 왕입니다.
정치쪽에서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여 정쟁을 억제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특히,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사권을 지녔던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정조 때 완전 폐지됨).
경제, 사회쪽에서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였으며, 형벌 제도를 개선하여 가혹한 악형을 개선하고, 신문고 부활, 상언, 격쟁 등을 통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였습니다.
청계천을 준설하여 홍수를 방지하였어요.
또한, <속대전>, <속오례의>, <여지도서>,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도 힘써 동국여지도, 해동지도 등의 지도를 제작하였어요.
이 밖에도 많으니 굉장하죠.....^^
① 신유박해(1801)는 순조 때 일어난 천주교 탄압 사건입니다.
② 대동법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이후 1708년 들어 잉류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죠.
③ 규장각을 설립하여(1776) 왕권 강화 기구로 육성한 것은 정조입니다.
④ 영조는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원록을 편찬하여 형벌 제도를 완화하였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토록 하였습니다.
⑤ 5군영 중 제일 마지막으로 설치된 금위영은 숙종 때인 1682년에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3회 고급 19번 문제
19.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④
제시된 자료는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문제는 밑줄 친 각각의 정책과 그 결과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해설하겠습니다.
① 탕평 정치는 숙종 때 처음 실시되었으나, 영조 때 자리잡았습니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육성하고 이들을 중
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
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습니다.
② 균역법은 농민들의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시행되었습니다(1750).
균역법의 시행 이전에는 농민은 군포로 1년에 2필씩을 납부해야 했습니다만, 이 법의 시행으로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
하면 되었습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염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
하였습니다.
③ 정조는 병권 장악을 위해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④ 정조는 지방 사림 세력이 주관하던 군현 단위의 향약을 수령이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재지 사족)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시켰습니다.
⑤ 격쟁(擊錚)은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
상언(上言)은 관원으로부터 천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임금에게 올릴 수 있는 문서를 의미합니다.
정조 때에는 상언(上言)·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
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성록>과 <조선왕조실록>
에 실린 상언·격쟁의 건수만도 5,000건을 넘는다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8회 고급 25번 문제
25. 영조의 개혁 정치 답①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붕당의 폐해에 대해 언급하며,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나에게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 보내어'라는 내용이 나오죠?
이를 통해 붕당의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어요.
이는 영조의 탕평책과 관련된 사료입니다.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여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스스로가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을 중용하다가, 곧이어 노론을 내몰고 소론을 기용하는 등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붕당의 세력이 커진 상황 속에서 약해진 왕권을 가지고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지요.
이때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영조의 정통을 부정하고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1728)을 일으킵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확립,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합니다.
이에 붕당을 타파하고 각 당파 안의 인재를 함께 쓰겠다는 선언(기유처분, 1729)을 합니다.
영조는 붕당 사이의 균형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노론과 소론을 조정하면서 군사 제도와 경제를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인 탕평파를 길러내 그들에게 정국을 주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죠.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습니다(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균역법을 비롯한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 군제 개혁, 문물 제도 정비 등을 추진하였습니다.
영조의 탕평 정치를 통해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어느 정도 조정되고, 왕이 정국의 운영을 비롯하여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습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지요. 이 후 탕평의 원리에 의해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노론이 정국을 이끌었지요. 사도 제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후에는 절대적으로 노론이 우세하였습니다.
① 시파를 등용하였던 것은 정조입니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환
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7회 고급 26번 문제
26. 영조의 청계천 준설 공사 답④
이 문제는 공부한 내용이 아니라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겁니다.
가끔 이런 문제들이 출제되어 당황스럽게 하기도 하나 공부 차원에서 풀어보세요.
문제에 주어진 그림은 ‘어전준천제명첩’ 에 있는 청계천 준설 공사 모습입니다. 이는 1760년(영조 36년)에 실시된 청계천 준설을 성공적으로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그린 일종의 기록화첩입니다. 다리 위에 영조가 앉아서(임금 모습은 그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상징적인 어좌만 그려져 있음) 준천 공사를 지켜보고 있고 청계천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소까지 동원하여 준설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네요.
영조는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탕평책, 균역법 시행, 법전 정비, 문예 부흥 등 정치와 사회, 문화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청계천 준설도 중요 치적 중의 하나입니다. 당시에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로 인해 범람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본 영조는 백성들의 의견 등을 들은 후 청계천 준설 공사를 지시합니다.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공사를 시작합니다. 청계천 밑바닥에 쌓인 흙을 파내고 수로도 직선으로 변경하며 하천 양안에는 석축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는 공사가 두 달간에 걸쳐 시행되었고, 연인원 20만명이 동원되고 3만 5천냥과 쌀 2,300백석이라는 그 당시엔 어마어마한 자금을 들인 대역사였습니다. 당시 청계천 준설 공사는 도시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고마운 공사였습니다. 청계천 준설 공사를 마친 뒤 영조는 준설 과정과 재원, 인력 충원 방법 등을 자세하게 적은 <준천사실(濬川事實)>과 <준천소좌목(濬川所座目)>도 편찬하도록 했답니다
①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행하기 위해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설치하였습니다.
② 청계천에 토사가 유입되어 하천바닥이 지속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큰비가 오면 홍수가 자주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 준설 공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③ 하천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었음을 자료의 그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죠?
④ 영조는 청계천 준설 공사를 시작하기 전 청계천에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며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리고 이 공사가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 하여 수만금을 내어 노임을 주도록 하고 공사를 재
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⑤ 내사산(內四山)은 서울 도성을 둘러싼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을 말합니다.
이들 산의 수목이 도시민들에 의해 땔감용으로 벌목되고 경지로 개간됨으로써, 이들 산에서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토사량 계속 늘어 하천 바닥을 높여 홍수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내사산의 벌목을 금지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회 2급 17번 문제
17. 영조 시기의 사실 답②
이 문제는 1점짜리 문제지만 연표 형식으로 출제되어 숙종~정조 시기의 역사 흐름에 약한 분들에게는 2점짜리 이상의 난이도로 다가올 문제입니다.
기출문제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대비해 공부하기 위한 용도이니 문제풀이를 통해 정확히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보고 있는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은 다음에 이러한 유형, 이러한 주제가 나왔을 때 맞으면 됩니다.
그럼 문제에 주어진 사건의 연도를 하나씩 알아둡시다.
황해도 대동법 실시(숙종 34년, 1708), 이인좌의 난(영조 5년, 1728), 규장각 설치(정조 1년, 1776), 신해통공 실시(정조 15년, 1791)입니다.
따라서 (가)는 이인좌의 난(영조 5년, 1728)∼규장각 설치(정조 1년, 1776)에 해당하여야 하는 역사적 사실이어야합니다.
결국 영조 때의 사실이네요.
① 수원 화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죠?
수원 화성은 2년 4개월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796년에 완성되었습니다.
화성 건설이 끝난 후에는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하여 공사에 관련된 비용, 인력, 기계, 물자, 건축물들을 상세히 기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공사에는 정약용이 기안한 거중기를 사용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② 균역법 실시는 영조 때인 1750년에 실시되었죠.
③ 경상도에 대동법이 시행된 것은 1677년의 일입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처음 실시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 100여 년이 걸렸습니다.
실시 순서는 경기도(1608), 강원도(1623), 충청도(1651), 전라도(1658), 경상도(1677), 황해도(1708)입니다.
④ 황사영 백서 사건(1801)은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서양인 주교에게 신유박해(1801)의 전말을 보고하는 한편, 열강의
군사력를 동원해 조선에서 포교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입니다.
박해 | 내용 |
신해박해 (정조 15년, 1791) | 신해박해(진산 사건, 모친의 신주 소각) → 윤지충·권상연 처형 |
신유박해 (순조 1년, 1801) | ◦ 벽파(僻派)가 득세하면서 남인 시파(時派) 제거 ◦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초기 교회의 지도자인 이승훈·정약종 등 처형 ◦ 남인이었던 정약용(강진)·정약전(흑산도) 형제 유배 ◦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를 서양인 주교에게 보고하고 군대를 보내 조선을 위협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 |
기해박해(헌종 5년, 1839) | 벽파의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공격, 프랑스 선교사 3명 처형 |
병오박해 (헌종 12년, 1846) |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
병인박해 (고종 3년, 1866) | ◦ 1866년~1871년까지 계속된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 배경 : 러시아를 막기 위해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려 하였으나 실패 ◦ 과정 : 신자 수천 명과 9명의 프랑스 신부 처형 → 신부 리델이 조선을 탈출, 톈진에서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 요청 → 로즈가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병인양요) |
1886년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 체결, 천주교 선교의 자유가 인정 |
⑤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낸 사건은 숙종 때(1696)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영조의 균역법 실시(1750)
18회 고급 20번 문제
20. 군역 제도의 개편과 균역법(1750) 답⑤
조선 후기 경제 부분에서는 수취 체제 개편이 매우 중요하게 출제됩니다.
수취 체제 부분에서는 공납제를 개편한 대동법에 대한 문제가 가장 많이 출제되고 다음으로는 군역 제도를 개편한 균역법에 대한 문제가 출제됩니다.
문제에 주어진 자료를 보면, '영조(영조실록 자료이니)가 양역(良役)을 절반으로 줄여라. 호포제나 결포제 모두 문제가 있으니, 양역 대신 내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대책 강구'라고 하였으니 균역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에 농민의 유망이 심해지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기 위해 전세 제도는 영정법으로, 공납 제도는 대동법으로, 군역 제도는 균역법으로 점차적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이중 군역(양역)의 폐단을 시정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개혁 방안에 대한 논의를 거쳐 1750년, 영조 때부터 시행된 것이 균역법입니다. 농민들은 군역에 나아가지 않는 대신 기존에는 대략 군포 2필을 납부하였지만, 균역법이 시행되자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습니다(부담이 절반으로 감소).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기존에 왕실이 받아 사용하던 어장세·선박세 등의 잡세를 군포 수입으로 받아 보충하게하였습니다.
ㄱ -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 때 받았던 기부금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등에 필요한 비용이 부족하자 이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받았습니다.
ㄴ - 대동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인 공납제를 개혁하여 대동법을 실시합니다.
대동법은 부담 액 수를 줄여 주고, 납부 방식도 토산물을 징수하던 방식에서 토지의 결 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방식으로 간편하게 하였습니다(공납의 전세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2회 고급 22번 문제
22. 군역제의 변천과 특징 답②
이 문제는 응시자들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주제는 아니지만, 그리고 교과서에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군역과 관련하여 공부할 때 군적수포제, 균역법, 호포제 등은 일반적으로 꼼꼼히 공부하면서도 봉족제나 보법은 의외로 대강 넘어가는 분들이 많거든요.
이 기회에 잘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군역의 변천 과정은 문제에 나타난대로
봉족제(태종)→보법(세조)→군적수포제(중종)→균역법(영조)→호포법(고종)으로 변천해갑니다.
(가)봉족제
조선은 태종 이후 사병을 모두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보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이 군역을 지는 동안 필요한 식량, 의복 등의 경비를 대주는 보조인으로, 의복이나 식량을 직접 대주는 것이 아니라 그 비용으로 매달 무명 1필을 내는 부담을 졌어요.
이때는 자연호를 편제하여 3정(丁)이 1정군(正軍)이 되게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 아버지가 정군(당번병으로 군역을 짐)이 되면 아들들이나 사위들이 봉족이 되는 제도였어요. 따라서 정군이 봉복(보인)에게 무리한 부담을 요구하지 않는 구조였지요.
(나)보법(保法, 1464)
세조 때 들어 봉족제를 전면 개편하여 자연호 대신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하는 인위적인 편제인 보법을 실시합니다.
양인 장정을 철저히 조사한 뒤 정남 2정(丁)을 1보(保)로 삼고 그들로 하여 정군을 돕도록 하는 원칙을 세워 시행합니다.
갑사는 2보(4명), 정군은 1보(2명), 수군은 1보 1정(3명) 등 담당하는 군역에 따라 보인의 수를 다르게 하여 그 경비를 마련하게 하였어요.
보법의 실시로 군역은 확대되었지만 요역 담당자가 감소하였기 때문에 군역 부담자가 요역 부담까지도 겸하는 현상, 즉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군적수포제(중종, 1541)
군역이 요역화되자 농민들은 힘든 군역을 기피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관청이나 군대에서 군역에 복무해야 할 사람에게 포를 받고 군역을 면제해 주는 방군수포, 또는 군역 담당자가 정군에 복무하는 댓가로 보인에게 받은 면포로 다른 사람을 사서 군역을 대신하게 하는 대립제가 불법적으로 행해지게 됩니다. 군포 징수제가 점차 확산되자 1541년에는 이를 합법화하는 군적수포제가 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양인 장정들은 1년에 군포 2필을 지방관에게 납부하면 병조에서 이를 받아 군인을 고용, 양성하게 되는 일종의 직업 군인제가 실시되게 됩니다.
(라)균역법(영조, 1750)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실시한 균역법으로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어요.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습니다.
(마)호포법(고종, 1871)
흥선 대원군이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부담시켰던 제도입니다.
이에 따라 신분 구별 없이 모든 호당 2냥씩을 군포로 납부하게 하였어요.
호포제는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샀는데, 이에 따라 대원군은 양반들은 양반의 이름이 아니라 하인(노비) 이름으로 호포세를 내도록 하여 그들의 체면을 유지시켜 주도록 했다네요...ㅋㅋ
설명이 조금 길었지요.
사실 전체 흐름을 알려면 더 자세한 설명들이 중간중간에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길어져서......이해해주세요.
② 보법의 실시로 정군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정군의 숫자는 대립제, 방군수포제를 합법화해준 군적수포제 실시로 확 감소하게 됩니다.
군적수포제 실시로 사실상 의무병제가 무너지게 되고, 또 군역 담당자들에게 군포를 받아 그 돈으로 필요한 군인을
고용해야 했는데, 그렇지도 못하면서 결국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9회 고급 37번 문제
37. 균역법 답④
이 문제는 <정조실록>에 실려 있네요.
자료를 보면 '이 법을 시행한 지 30년 만에 어염세 수입이 대폭 감소하였다. 선대 왕께서 이 법을 만드셨는데 법이 오래되자 폐단이 생겨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정조의 선대 왕은 영조니까 영조가 만드신 법, 어염세 수입 등을 연관시켜 보면 균역법임을 알아낼 수 있어요.
균역법은 영조가 실시(1750)한 것으로, 농민들의 군포 부담을 1년에 군포 필만 납부하면 되도록 줄여준 제도였습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란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습니다.
① 대동법 실시 이전 공납 제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공납의 폐단을 개혁한 대동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조선 초까지 시행되었던 전근대 국가에서 정하였던 일반적인 조세 수입 원칙입니다.
⑤ 세종 때 실시된 연분9등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과전법의 경우 수확량의 10분의 1을 내도록 하였는데, 1결의 최대 생산량을 300말로 정하고, 매년 풍흉을 조사하여
수확량에 따라 납부액을 조정하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조세 제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1444),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조정하였어요. 조선 후기 인조 때에는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키는 영정법을 실시합니
다(1635).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6회 고급 31번 문제
31. 균역법 답③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양역(양민들이 지던 역)', '군적', '군포 납부', '이웃의 이웃이 견책을 당하고(인징(隣徵))', 친척의 친척이 징수를 당하며(족징(族徵))', '황구', '백골' 등의 용어나 내용를 통해 이 자료가 군역의 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군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제도는 균역법이죠.
이 문제를 통해 균역법의 실시 배경, 내용,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자구요.
균역법의 실시 배경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합니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부과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습니다. 그런데다가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부담자는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죠. 여기에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 담당자에게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려갑니다.
이렇게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집니다.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영조 때 균역법이 시행됩니다(1750).
균역법의 내용과 결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어 부담이 많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게 되면 정부의 군포 수입이 줄어들게 되어 재정 약화를 가져오게 되겠죠?
따라서 군포 수입 감소로 줄어든 재정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몇 가지 보충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지주에게는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말을 부담시키고,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실 등에서 거두어 사용하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 등의 잡세 수입도 재정 수입으로 편입시켜 보충하게 되죠.
그러나 균역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전가되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됩니다. 세도 정치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나타나죠.
아래 제시한 9회 고급 37번 문제를 보면 균역법 실시 이후 다시 나타나는 폐단에 대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① 춘궁기나 흉년을 대비 마을에 세워진 창고는 사창(司倉)이나 상평창(常平倉), 의창(義倉) 등의 구휼 시설입니다.
② 영정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선 후기 인조 때 정부는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말로 고정
시킨 영정법을 실시합니다(1635).
④ 대동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호패법과 오가작통법을 강화하는 조치는 농민의 유망을 막고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는 군역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정조의 개혁 정치
25회 고급 25번 문제
25. 정조 재위(1776~1800) 시기의 사실 답③
사진으로 제시된 책의 제목은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 그리고 이 책은 이덕무, 박제가(서얼 출신으로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인물), 백동수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종합 무예서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은 정조 때 편찬되었으니, 정조 재위 시기의 사실을 찾으면 되겠네요.
정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준론 탕평)을 통해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던 반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어요.
규장각을 설치해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또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노론들이 장악한 5군영을 대신해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어요.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으며, 여러 차례 이곳에 행차를 하였습니다.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습니다.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신해통공을 발표해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였습니다.
또,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어요.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습니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습니다.
① 4군 6진 개척은 세종 때의 일입니다.
조선은 세종 때에 최윤덕이 여진족을 정벌한 뒤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4군(1433)을, 김종서는 두만강 유역에 6진
(1449)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어요.
② 요동 정벌은 고려 말 ~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어요.
고려 말 우왕 때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토록 했으나, 이성계
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였어요(1388).
조선 태조 때(1395)에도 명과의 갈등으로 정도전의 주도 아래 요동 정벌을 추진되었으나, 1차 왕자의 난(1398) 때
그가 제거당하며 중단되었습니다.
③ 정조는 노론들이 장악한 5군영 대신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1785)을 설치해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④ 나선 정벌 당시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때인 1654년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어요.
⑤ 훈련도감이 설치(1594)된 것은 선조 때입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연패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4회 고급 24번 문제
24. 정조(1776~1800)의 업적 답②
창덕궁 후원에 주합루 세우고 여기에 정책 연구를 담당하는 규장각을 두었던 인물은 정조입니다.
영조와 정조에 대한 문제는 자주 출제되는 주제이니, 정치 개혁, 문물 정비 등을 꼭 자세하게 알아두세요.
참고로 건물 이름에 ~루(樓)가 붙는 건 2층 이상의 건물입니다.
정조는 즉위 후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준론 탕평)을 통해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던 반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어요.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해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
또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으며, 여러 차례 이곳에 행차를 하였습니다.
① 과전법에 대한 설명으로, 과전법 체제는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되고(1556) 관리에게 녹봉만 지급하면서 소멸되었어요.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에게 과전을 지급하던 제도였으나,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세조 때인 1466년에는
직전법을 마련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였어요.
② 정조는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③ 태종은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였습니다.
호패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가지고 다녔던 신분 증명패였어요.
④ 환국은 숙종(1674~1720) 때의 일입니다.
⑤ 성종은 정치·경제적으로 비대해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을 중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김종직과 그 문인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2회 고급 22번 문제
22. 정조(1776~1800)의 업적 답⑤
문제에 제시된 내용과 사진을 통해 화성에 대한 설명임을 알 수 있죠. 화성은 정조의 지시로 건설하였다는 것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가)에 들어갈 국왕은 정조이니 정조의 업적을 살펴보죠.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힘겹게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즉위 후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준론 탕평)을 통해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던 반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어요.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해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
또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으며,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재위 기간 중 화성에 자주 행차하였지요. 화성 행차 시에는 백성들과 만나 의견을 듣고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① 효종(1649~1659)에 대한 설명입니다.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② 6조직계제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던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 때 실시되었어요.
이는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도록 한 제도였어요.
③ 숙종(1674~1720) 때의 일입니다.
숙종 때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어요(1712).
④ 균역법은 영조 때 제정(1750)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어요.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으로 영조 때에 균역법이 시행되었습니다.
⑤ 정조는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1회 고급 35번 문제
35. 정조(1776~1800)의 업적 답④
각 시대 주요 왕들의 업적을 파악하는 문제는 매회 빠지지 않고 몇 문제씩 출제되는 주제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조선 전기 태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조선 후기에는 숙종, 영조, 정조에 대한 문제가 빈번하게 출제되니 잘 공부해 주세요.
특히, 영조와 정조는 여러 분야에서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기에 두 왕의 업적을 비교, 파악해 두셔야 합니다.
문제에 제시된 설명을 보면, '중·하급 관리 중에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제도'라는 것을 통해 '초계문신제'에 대한 설명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조의 정책이었죠.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준론 탕평)을 추진하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던 반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정조는 즉위한 직후 창덕궁의 후원에 건물을 지어 규장각이라 명명하고, 직제를 갖춘 한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는데,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정조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는 차원에서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기도 합니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가 화성 행차 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 즉 관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신해통공을 발표(1791)하여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 대한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각종 상품에 대한 사상(私商)의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한 상업 정책을 폈습니다.
① 세종의 업적입니다.
② 속대전 편찬(1746)과 서원 정리는 영조 때의 일입니다.
영조는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고, 속대전(1746)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습니다.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은 대전통편입니다(1785)
③ 인조 때에는 반정공신들이 자신의 군사력을 유지하려는 문제와 맞물려 후금과의 대결 국면에서 도성 방어를 위해
어영청을 설치하였고(1624), 같은 해 이괄의 난 이후 경기 북부 방비를 위해 총융청을, 정묘호란 이후에는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할 수어청(1626년)을 설치하였어요.
④ 정조는 신해통공(1791)을 발표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었습니다.
⑤ 정조 이전에 이미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고, 이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어 숙종 때에 이르러
함경도와 평안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었습니다(1708).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6회 고급 19번 문제
19. 정조(1776~1800)의 개혁 정책 답①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는 정말 자주 출제되는 주제입니다.
문제의 그림에 나타난 대화의 내용 중 '화성 행차', '돌아가신 아버님을 참배하러 현륭원(사도 세자의 묘) 행차', '억울함 호소'를 통해 그림에 제시된 왕이 정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화성 행차 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답니다.
따라서 정조의 개혁 정치 내용을 살펴보면 되겠네요.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준론 탕평)을 추진하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던 반면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
또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습니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가 화성 행차 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습니다.
① 붕당이 장악한 5군영을 약화시키고 왕권 직속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두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② 조선 전기 세종 때의 사실입니다.
세종은 북방을 개척해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습니다.
③ 청을 치자는 북벌론은 효종과 숙종 때 제기되었습니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
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청이 강성한 상태였으므로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④ 호포법은 고종 즉위 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실시하였습니다.
호포법은 상민에게만 거둬들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제도였습니다.
⑤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일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9회 고급 27번 문제
27.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④
문제에 제시된 그림은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그리고 위 문제에도 나왔던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입니다.
모두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있는 그림입니다.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는 화성 행차 행렬이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때 배들을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 것을 설계한 이가 정약용입니다.
그리고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는 정조가 화성에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정조는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때문에 재위 기간 중 화성에 자주 행차하였지요.
이런 행차를 통하여 정조는 백성을 직접 만나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하였답니다.
① 5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은 숙종 때 설치되었습니다(1682).
② 속대전은 영조 때 편찬되었습니다(1746). 정조 때 편찬된 법전은 대전통편입니다(1785)
③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한 이는 효종입니다.
④ 정조는 박지원 등이 청나라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 전통적인 옛 사상이나 문체에서 벗어난 새로운 문체)의 경박한
문체를 구사해 글을 쓰고(열하일기 등) 이것이 유행하자, 한문의 문장 체제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회복할 것을
주장하는 ‘문체 반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는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⑤ 삼정이정청은 철종 때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를 계기로 설치되었습니다(1862).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9회 고급 33번 문제
33. 정조의 개혁 정치와 규장각 답④
이 문제도 이 주제와 관련된 연관 문제로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주어진 사진은 창덕궁 후원에 있는 주합루로, 규장각 건물입니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후원에 새로 집을 짓고 고사를 따라 규장각이라 명명하고, 직제를 갖춘 한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게 합니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합니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는데,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정조는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는 차원에서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등 서얼 출신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하기도 합니다.
ㄱ -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로 장용영을 설치하였습니다.
장용영은 도성에 있는 내영과 화성 행궁에 있는 외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지휘부는 화성(수원)에서 활동하였습니다.
ㄷ -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의 방화, 약탈이 있었던 곳은 외규장각이 있던 강화도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7회 고급 29번 문제
29.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④
문제에 제시된 사진은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입니다.
이는 정조가 화성에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ㄱ - 무위영은 장어영과 함께 1882년에 개화 정책에 따라 설치된 군대입니다.
이때 개화 정책에 따라 종래의 5군영을 2영(무위영, 장어용)으로 개편, 강화합니다.
ㄴ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여(신해통공)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였어요.
ㄷ - 완론 탕평책은 영조의 업적입니다.
정조는 준론 탕평책을 폈습니다.
ㄹ - 정조 때 백동수 등에 의해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였어요.
ㅁ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 ㅁ으로 묶인 ④번입니다.
6회 고급 28번 문제
28. 정조의 개혁 정치 답⑤
이 문제는 정조의 업적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문제네요.
각각의 답지를 통해 자세히 설명할게요.
① 정조가 추진한 준론 탕평은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 붕당의 입지를 떠나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 있는 인사들을 중용해 나갔습니다.
이에 반해 영조의 탕평책은 완론(緩論) 탕평이라 일컫어집니다.
영조는 붕당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 균형을 유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각각의 의리와 명분보다도 타협을 종
용하였습니다. 즉, 각 당파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과 왕이 내세우는
논리에 동의(왕권에 순종)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지요. 당시 대립하던 노론·소론 중에 온건
론자들이 이를 지지하여 그 정국이 완론(緩論) 탕평이라 일컬어지고, 그 참여자들을 탕평당이라 불렀습니다.
② 앞서 말했듯 정조는 준론 탕평을 펴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는(영조와는 반대되는) 인사들을 중용합니다.
반대로 영조의 완론 탕평에 참여했던 무리들이 탕평당을 형성하여 탕평의 근본 정신을 저버렸다고 비판하며 영조 때
세력을 키워 온 척신·환관 등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영조 때 탕평파 대신들을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채제공,
정약용 등의 남인 계열을 중용하였습니다.
③ 초계 문신 제도는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던 것을 의미합니다.
④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는 등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⑤ 신해통공(1791)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市廛)의 전매 특권(금난전권)을 폐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상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27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이번 시험을 보고온 분들을 포함해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적어주세요.
영조 균역법은 광해군의 대동법과 더불어서 매회 문제 또는 선지로 나오는 것 같아요.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죠??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영조 문제가 저렇게 많이 출제가 되는군요? 영조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 할 만큼 여러가지 업적이 있내요
아직 공부 시작 단계라서 영조부분은 공부 하지 않았는데 공부할때 주의해서 봐야겠네요
오우..확실히 뭔가 백성을생각했구나 싶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훔..개인적인 접근법이라...글쎄요 사실 저는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않아서 그런지
2번과 5번을 저도모르게 갈등햇던것같아요
문제를 보니까 정조와 영조문제는 혼합해서 나오는것 같네요
각각의 특징을 잘 알고 비교해보는 연습을 하는게 필수겠어요!!특히 탕평책은 매회출제되는 것 같아요
영조와 정조에 대한 문제는 공부하면 쉽게 풀수 있을것같아요. 다 기본적으로 공부하고 가는 부분 같아요.
영조와 정조내용은 조선후기 가장 중요한 부분인거 같애서 열심히 봤더니 쉽게 풀수있었어요!
다른분들 말씀대로 조선후기에 영정조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루는것 같네요 신경써서 봐야겠습니다!
영조 정조는 자칫하면 헷갈릴 수 있는데 업적을 구분해서 잘 알아놓아야겠어요
영조랑 정조는 중급 시험 때 공부한 내용으로도 대부분 맞출수 있겠네요..다만 업적 구분이 확실히 되어야 한다는게..정치적으로는 구분이 쉬운데 개혁은 어렵네요
해설이 자세해서 도움이 잘 되었습니다.ㅎㅎㅎ 그러나 해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폭넓게 알고있어야 더 도움에 잘 될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