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도산국민학교 개교기념일" 입니다(1918.3.3~1993.3.1). 찬연하고도 청랭했던 75년 간의 역사를 갈선대(葛仙臺) 아래 강물에 묻은 지도 어느덧 30여 년이 되어 갑니다. 1909년 12월, 도산서원 자산을 기반으로 진성이씨 문중의 사립교육기관으로 신학문을 가르쳤던 보문의숙(1909~1918: 교사는 계남고택ㆍ하계마을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당호를 계남댁이라고 함)이 1918년 3월 3일 도산공립보통학교로 편입되면서 우리들과 역사적인 인연을 맺었습니다. 도산공립보통학교는 1941년 일제의 "국민학교령"에 의해서 다시 도산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76년 안동댐 준공을 앞둔 1975년 2학기부터 단천 신교정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한 후 19년째인 1993년 2월에 74회 마지막 졸업생들을 내보내고 보름 후인 3월1일, 영원 세계에 안치되었습니다. 마지막 졸업생들의 나이도 올해로 불혹을 넘긴 43세에 이르렀습니다. 보문의숙(1909~1918)까지 포함해서 학교가 존속하고 있다면 올해로 113년이 되고 도산공립보통학교(1918~1941/ 도산국민학교: 1941~1993)를 설립년도로 하여 연혁을 산정한다면 올해로 104년째가 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면 100회 이후로 매년 맞이하는 세기적인 생일잔치를 갈선대 아래 하얀 백사장과 자갈 강변에서 얼마나 풍성하고도 성대하게 치르고 있을까요. 단천(대사, 단사, 대세) 구교정은 물론 마실 앞 강변 둔덕에 진을 치고 앉은 졸업생들로 동네 전체가 떠들썩 하겠지요. 타향살이에 지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졸업생들이 본가 마냥 여기 저기서 생일잔치가 열리는 대사 마을로 흥겹게 몰려들고 있겠죠. 그리고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덩실 덩실 춤을 추며 추억 속에 깊게 잠들었던 교가를 깨워 부르면서 숱한 나날 애수에 겨워했던 회포를 마음껏 풀고 있겠지요. 연로하신 부모님들께서도 자리하고 형제자매님들도 모여있는 가운데 이근필 교장 선생님께서 신이 나셔서 이곳 저곳 막걸리 잔을 건내시며 함께 기뻐했겠죠.
잠시나마 행복한 상상을 해보는 데 생각이 그치고나면 언제나 처럼 서글픈 생각이 밀려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하니 또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이번에도 어렵사리 단념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적이 아쉬워 다시금 눈을 감고 이번에는 도산 땅 향촌 이 골 저 골을 돌아다녀 봅니다.
도산의 산과 강과 들은 청랭했고 기상과 풍광은 선인들을 닮아서 자못 기품과 수려함이 있었습니다. 도산 땅에서 수많은 지사와 학자가 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유년시절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도산골 마을 마을이 "퇴계의 얼"이 서려 있어 도산서원이나 다름이 없었고 어부가, 농암가를 읊으며 강호를 벗삼아 은자 같은 말년을 분강촌에서 보냈던 농암 선생의 발자취가 산천 곳곳에 스며져 있어도 그냥 그런 줄 알았고 육사 선생이 사랑했던 백마를 탄 초인과 청포를 입은 고운 임이 이 강산에 다시 오신다며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정결히 하여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그때는 그저 무념하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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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붕우를 통해 소식을 알게 된 장필모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동후 선생님과 거의 반세기 만에 은혜로운 통화를 한참 나누며 지난 옛날에 대한 소회를 경청(敬聽)한 바 있으며 장필모 선생님을 통해 4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옥근 선생님과도 50여 년 만에 소식이 닿게 되어 이산가족 상봉과도 같은 감격적인 안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김옥근 선생님께서는 글쎄 아직까지도 어렴풋이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고마운 마음과 무정하게 흘러가버린 꿈같은 세월 앞에 목이 메이는가 싶더니 끝내 눈물을 쏟았습니다. 영원한 도산인 이동후 선생님과 함께 한 통화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몰 전 도산 학교와 도산골 얘기를 한참 나누며 진한 향수와 모교애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아리고도 반가운 이산가족찾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지난해 봄에 필자의 글을 읽으신 어느 고향 선배님을 통해서 명주꾸리 천 리 길이 꼬여 있던 실타래처럼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희미하고도 낡은 인연의 끈을 어이어이 풀고 이어서 결국은 찾게 된 그리운 강위기 선생님... 올 연초 동창의 큰 노력으로 가까이 계시면서도 등잔 밑이 어두워서 전혀 몰랐던 남시창 선생님(풍산)을 50여 만에 소통한 것은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남시창 선생님 또한 여전히 도산골을 무척 그리워 하시며 옛 선생님들의 소식찾기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도산 학교 시절 함께 배구ㆍ탁구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속 깊은 그 잔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정하고도 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 세월 속에 신순영 선생님과 장낙진 선생님과 임대호 교감 선생님과 이원륜 선생님께서는 도산골의 별이 되셔서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아름다운 교정과 함께 오래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이동후 선생님을 통해서 1학년 때 담임이었던 류귀현 선생님을 반백 년 만에 소식을 알게 된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해 주신 류귀현 선생님. 어린 우리들을 운동장에 참새들처럼 모아 놓고 예쁜 무용을 가르쳐 주시던 50여 년 전 곱디고운 청순이셨던 그 모습이 선연히 지금도 떠오릅니다. 구름처럼 청춘은 흘러갔지만 백합처럼 환하시던 그 시절 그 모습은 여전히 우리들 가슴 속에 동심의 이야기로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50여 년만에 어렵게 찾은 류귀현 선생님은 코로나와 다리 수술로 만남을 조금 미루었다가... 2022년12월21일 한 번도 뵙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 비통함과 더욱 깊어진 그리움을 어이 여기에 다 쓸 수 있을까. 평생을 그리워 했던 분을 이제 우리는 영원히 그리워 하며 살게 되었다. 아~ 류귀현 선생님~ ).
인생의 아름다운 앙상블이 되신 이재일ㆍ안계화 선생님은 필자의 에세이 "도산국민학교 가을운동회"를 어찌 어찌 하여 읽으시고는 경희대학교 홈페이지를 검색하셔서 메일 주소를 찾아 "그때 옛날 종구가 지금 종구가 맞느냐?"며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선생님. 황송합니다. 거의 50여 년 만입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도산골 얘기를 쓰는 과정에서 사 오십 년 전 안면이 있었거나 혹은 전혀 없었던 육 칠십 대 선배님들께 불쑥 전화를 해도 모두가 한결같이 살갑게 대해주셨던 그 깊은 정의 근원은 모교인 "도산국민학교" 하나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될 것입니다. 아직은 많지 않은 나이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니 눈물이 많아지는가 봅니다. 이제 시절이 좋아진 만큼 올해는 여건이 닿는대로 사정이 되는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들을 찾아 뵐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부모님이 아니 계시니 은사님의 그림자가 더욱 그립습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선후배님들과도 정겨운 교류를 나누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는 모든 도산인들이 수구초심의 마음을 한결같이 가슴 깊이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라 마냥 같은 마음일 것이라 여겨집니다.
필자의 에세이 "도산국민학교의 개교기념일을 기리다"에 깃든 애틋한 심정은 비단 저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닌 도산국민학교를 나온 모든 졸업생들의 공통된 마음이라는 것을 알기 까지에는 불과 몇 개월이 채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좋았던 것은 이동운 친구가 카페방을 잘 만들어 놓아서 많은 선후배님들이 이 글을 어이 알고 기수별로 마구마구 퍼 날라 가서 돌려가면서 참 많이도 읽었습니다. 그야말로 한로 절기에 단풍꽃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말입니다. 도산국민학교가 단천 신교정에서 마지막 74회까지 배출한 졸업생 인원이 모두 3,151명인데 졸업생을 훨씬 넘는 무려 4,100여 명의 도산인들이 이 에세이를 읽었다니 참으로 가슴 시린 전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번 읽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졸업생들이 읽었을 테고 별이 되신 선배 어르신들께서도 하늘에서 읽으셨을 테고 갈선대 옆 골에 있는 왕모산성으로 이사를 간 토계 구교정 귀신교실에 살았던 늙은 귀신들도 읽었을 테고 내살미 저수지 뒷산 공동묘지에 살고 있는 토째비들도 그리움에 겨워 마구마구 읽었겠죠.
이는 많은 선후배분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옛 교정을 잊지 못하고 추억의 편린들을 가슴에 간직한 채 여전히 지금도 토계 구교정을 그리워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이러한 졸업생들의 아린 정서들이 필자를 눈물나게 합니다. 수몰의 역사가 앗아간 상흔이자, 상실감이 깊게 파놓은 슬프고도 가슴 시린 트라우마의 모습들이겠지요. 예순 중후반과 일흔대의 선배님들, 여든대의 대선배 어르신들이 어찌 아시고 연락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알고보면 반세기 전에 이 도산골과 저 도산골에서 함께 했던 정겨운 큰 형님들 아니면 큰 누님들이겠죠. 얼굴을 알면 어떻고 또 얼굴을 모른들 어떻습니까. 그저 가슴 아린 공감들을 선후배 졸업생들이 함께 하며 글을 읽고 추억을 반추하고 즐거워 하고 위안받을 수 있다면 그만이겠지요. 이런 정감을 잠시 동안이나마 에세이를 통해 줄 수 있었다는 이 행복한 사실이 제가 오늘 도산국민학교 생일날에 오히려 모교로부터 받은 큰 선물인 것 같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순간 순간 기억을 되살려서 생각나는 대로 썼고 "아름다운 풍경(카페지기 58회 이동운 친구의 항공사진)"에서 도산골 산천 사진을 갖다 붙이는 동안 저 자신도 무척이나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도산국민학교라는 그 한 뿌리의 인연으로 이 글을 읽는 순간 만큼은 모두가 옛 교정을 생각하며 지난 전설들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숙연해질 따름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많이도 흘러 갔습니다. 청량산 벽계수에 사연 많은 도산골 이야기들이 꽃잎처럼 얹혀 져서 낙강을 타고 쉼 없이 흘러 갔습니다. 옛 사람들의 사연도 우리들의 사연도 모두가 전설처럼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유수 같은 일월 속에 아름다운 교정과 그리운 부모님과 우리의 청춘을 실어서 보냈으며 또 앞으로도 흥겹게 펼쳐지고 있는 꽃중년 시대의 이야기들을 즐겁게 실어서 흘려 보낼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 전에도 아름다운 교정에서 청순한 동심으로 동무들을 한정없이 사랑했듯이 앞으로도 지순한 그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우리 오래 오랫 동안 건강히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조만간 시간을 봐서 선영을 돌아본 후 도산국민학교 양쪽 교정을 찾아가서 맑은 술이라도 한 잔 올리며 흠향할까 합니다. 신령스러운 정령들께서 하늘에서 굽어살펴 보신다면 옛날 꼬마 주인이 잊지 않고 찾아왔다고 무척이나 좋아들 하시겠지요♧.
《도산국민학교 개교기념일에 즈음하여》
58회 이종구가 삼가 모교를 그리워하며 쓰다
토계 구교정[첫 번째(본관)-두 번째(후관)사진] 운동장 정문에서 토계 하천 쪽으로 계속 내려온 뒤(사진속 고동색 장방형 밭 네 번째 사진과 다섯 번째 사진) 토계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여 옛날 방앗간(정미소) 자리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올라가면(교문에서 여기까지 전체 ㄷ자형 길: 여섯 번째 사진) 지금의 퇴계 묘소(동암종택 수졸당) 앞의 삼거리(일곱 번째 사진)와 만나게 된다. 여덟 번째는 필자가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자하봉 아래 고즈넉이 자리잡은 도산국민학교가 토계 번화가를 한 눈에 담고 있는 형상이다. 북서향에는 퇴계 선생 묘소가 있고 북동향에는 갈선대와 왕모산성이 있고 남향에는 도산서원과 분강서원(농암종택)이 있고 동남향에는 낙동강이 수북히 모여 쉬어 가는 정거장을 이루었다. 도산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도산의 얼과 기상이 집적되어 있는 지형이었다.
♤사진 캡숀(설명) 순서대로 사진을 배치함.
♤사진출처: 이동운의 아름다운 풍경(네 번째~일곱 번째 항공사진).
♤단천 구교정의 사계 그리고 수려한 여름 산천 전경과 아름다운 만추의 풍광.
♤사진출처: 이동운의 아름다운 풍경(항공사진).
여섯-일곱 번째 사진은 이동승 친구가 촬영.
♤1972년 도산국민학교 졸업 앨범 위에 있던 로고 같은 그림이다(제53회). 월계수 이파리 위에 비호보다 용맹한 사자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도산국민학교 로고가 아니다. 로고는 폐교된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분실했다. 선배들의 졸업 앨범에도 로고는 없고 이 그림만 나와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내 앤이 연주하고 필자가 노래한 도산국민학교 교가 입니다(위의 노래는 폐교 후 가사를 분실해서 부른 미완성곡이고 아래 노래는 폐교 후 30여 년만에 최근 어렵게 찾은 가사를 복원시켜 완성시킨 노래이다).
[도산국민학교 1970년대 교가 가사]
작사ㆍ작곡: 원래 미상은 아닌 데 알 길이 없다.
영지산 푸른 꿈 가슴에 심고
낙독강 유유한 기를 받는다.
아~ 아~ 도산~ 슬기롭고 거룩한 땅
높으신 뜻 기리 이어 역사 빛내리.
(올바르고 씩씩하게 무럭 무럭 자라서
우리 도산 착한 어린이 나라의 꽃들).
※ ( )안의 가사는 목실골에 살았던 방경애 후배님이(1978년 4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ㆍ가칭 60회/ 57회 방기수 선배님 동생분) 본 교가를 듣고 분실된 부분이 있다면서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직접 부른 음절을 보내주었다. 참 대단한 기억력과 모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조만간 완성된 교가를 새로 녹음해서 올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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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종구야
올려준 글 너무 잘봤어 고마워~
개구장이 옛시절 생각나 몇 번이곤 읽어 보았네
국민학교 역사도 파노라마처럼 눈앞에서 지나가고
잊고 있었던 우리의 옛 고향산천 모습이 떠오르고
정말 일기장을 들추어 보듯이 반세기 전 추억과
고향의 애뜻한 마음이 잘 들어나게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글을 써주었네~
아름다운 과거가 있어 좋고
아름다운 추억을 영화처럼 글로 써준 친구가 있어 좋다~
감사해 친구야~~
좋다.
그냥 좋구만...
저 사진 한 장 만으로도 무어라 말 할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주 뜨겁게..
어느덧 얼굴에는 깡마른 대추처럼 쪼글쪼글해져
나이테가 깊게 패인 이른 봄 날 아침에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글을 읽는 내내 우리들의 영혼이 따뜻했던 그립고 소중했던 유년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록새록...
고향의 찔레꽃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다.
고맙네 이교수님!
행복한날 되시게..
선배님,사형님,오라버님,교수님 우째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암튼 이제라도 인연이 되어 무지 좋습니다.더불어 남다른 애정과 향수를 지닌 저에게는 이런 좋은 글들이 많은 위안과 위로가 됩니다. 교가 1절 완성하셔서 재리뷰 기다리겠습니다.
44회 졸업 선배님 열정이 참 대단하시다. 그걸 다 기억하시고...
교가가 수정되어 완성 될수 있다면 좋겠네~
퍼옮김 도산초 단톡방 230302 HMS
내 기억에
아 아 도산 성스럽고 거룩한 이 땅 (왠지 땅이 슬기롭지는 않을것 같아서)ㅎ
2절 첫 구절 어렴풋이 생각나는게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어
2절
오늘도 즐겁게 교정에 모여
알뜰히 배우며(배우면?)
힘을 받는다?
힘이 솟는다?
아 아 도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