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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7강-아버지의 현존 안에 거하라(40절-4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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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절 아버지의 현존 안에 거하라.》 우리는 이게 익숙한 말씀인데 도마복음에 어떤 식으로 설명되어 있는지 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포도 줄기가》 포도나무가 예로 들기 좋았나 봐요. 그래서 '포도 줄기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심겨져 있으니》 그러니까 줄기가 본체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거죠. 《튼튼하지 못하여 뿌리째 뽑혀서 썩게 될 것이다.》 비슷한 글이 요한복음에 있어요. 그런데 좀 달라요. 한번 보실래요. 요한복음 15장 5절, 6절 말씀인데 [나는 포도나무요]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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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체라고 얘기하는 거죠. 예수님이 내가 본체다. 내가 포도나무다. [그대들은 가지다.] 아까는 줄기와 뿌리였다면, 줄기와 본체였다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가 성자와 성도 간에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녀 간에, 자녀는 성도죠 아버지는 성부고. 성부와 성도 간에 지금 여기가 뿌리라는 거죠. 우리가 아버지의 권능으로 사는 거죠. 그러니까 아버지에 뿌리를 두고 우리가 줄기로서 산다. 여기가 본체, 여기가 줄기. 이 관계, 이 그림을 좀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이 아버지의 영이 뭡니까? 아버지의 영이 성령이잖아요. 그러니까 성부, 아버지의 영이 성령. 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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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성도가 사는 거예요. 여기에 접속하지 않으면 뿌리째 뽑혀서 썩게 되는 거예요. 접속하지 않고 살면 이제 혈육의 자녀로 사는 거고, 사탄의 종으로 사는 거고, 뿌리째 뽑혀서 썩게 된다는 것은 지옥 간다는 거죠. 그런데 이 그림을 그대로 기억하시고, 예수님과 성도 간에 이게 가능하다고요. 성도라면 이 아버지 성부 자리에, 여기에 성자를 놓고 내가 포도나무면 그대들은 가지다. 요한복음 얘기입니다. [누구든지 그대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대들을 안에 있으면] 나랑 접속해 있으면, 영적으로 접속해 있으면 [그는] 그 성도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그대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나간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곧장 말라 버릴 것이다.] 이런 비유를 많이 쓰셨나 봐요. 그렇죠. [그러면 사람들이 그 가지를 모아다가 불로 태워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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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심판의 날 유황불에 던져져서 지옥에 간다 이 소리고. 좀 맛이 다르죠.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한테 주목하죠. 성령의 온전한 구현이신 성자한테 주목합니다. 성자와 하나가 되자. 이게 요한복음의 큰 스토리라면 도마복음에서는? 성자가 성자가 된 원인이 뭘까요? 성자도 똑같아요. 성자도 성자와 성부 관계를 보면 성자가 자녀잖아요. 성자는 성부에 뿌리를 박고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성령을 구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에요. 사람의 아들이죠. 그러니까 온전한 구현자인 성자와 또 성도 간에 이런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도마복음은 아버지라는 본체를 더 강조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라는 성자를 강조했다. 이 차이점도 한번 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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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시면 아버지와 자녀, 우리 존재의 뿌리는 아버지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이 없이는, 아버지 영에 뿌리를 두지 않고는요 모든 존재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살 수 없고, 사실은 우리가 알 건 모르건 아버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뿌리 노릇 안 해주다가 언젠가 뿌리 노릇 해주는 게 아니고 원래 뿌리예요. 뿌리인데 모르고 사는 거죠. 알고 사는 사람들이 거룩해진 성도입니다. 성령 각성을 해서 내 본체가, 내 뿌리가 I AM이라고 하는 이 성령 자리구나 이거 알면 성도가 돼요. 그럼 칭의,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나의 본질이 아버지라는 걸 알면, 나의 본질이 성령이라는 걸 알면 거룩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동안 혈육의 자녀, 사탄의 종이었는데 친부모를 만났단 말이에요. 그럼 바로 승격입니다. 친부모를 만났으니까 바로 승격, 뭘 잘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뭘 잘해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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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부모가 하나님이니까 그냥 승격인 거예요. 그게 칭의예요. 성령 각성하면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본체로서는 하나님이요 에고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이게 불교에서 돈오하는 거랑 똑같아요. 돈오하면 바로 부처다. 이 소리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내 본성이 불성이니까 내가 부처다 이 소리가 나오죠. 마찬가지로 내가 성령을 각성하고 나니까 성령이 내 뿌리더라 이겁니다. 내 본체더라. 따라서 나도 하나님이더라 이거예요. 그게 칭의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거나 착하게 산 게 아니더라도 성령 각성만으로도 의로운 존재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진짜 하나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지키는 게, 품위 지키는 법을 배우는 게 성화죠. 칭의, 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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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부활체까지 얻어서 천국의 몸, 영적인 몸까지 얻게 되면 영화, 이게 3단계, 믿음의 단계라는 거 더 말씀드리고요. 자 41절로 가볼게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이 말씀도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에요. 보세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이게 마태복음에도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돼있어요. 마태복음도 한번 볼까요. 13장 12절, [가지고 있는 자는 더 받아서 넉넉해지겠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건 아주 선문답 같은 얘기잖아요. 재밌죠. 선문답 같은 얘깁니다. 가지고 있는 자는 더 받을 거고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뺏길 거다. 말이 묘하죠. 있지도 않은데 또 뺏긴데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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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도마복음으로 보죠. 《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는 자는 더 많이 받게 될 것이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아무것도 없는데 《가지고 있는 적은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자 무슨 말씀일까요? 한번 볼게요. 각주 4번 [하나님의 영을 각성한 자는 영적인 몸까지] 더 넉넉하게 선물 받게 되는 거죠. 영생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을 망각한 자는] 혈육의 자녀, 사탄의 종은 [가지고 있던 몸뚱이마저 뺏기고] 어떻게 돼요?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과 하나님 아버지 자리와 접속한 사람은, 성령을 각성한 사람은 영혼육이 온전해지니까 결국 육의 영생까지 얻게 될 것이지만 성령을 못 만나면, 성령 각성을 못하면 있는 몸뚱이마저 뺏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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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이라는 게 그냥 진짜 죽는 게 아니라 '사망을 맞이한다' '죄의 품삯은 사망이다' 이건 '죄의 결과물은 사망이다.' 성경에서는 그냥 죽고 사라진다는 게 아닌 지옥불에 떨어진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시고. 각주 2번을 제가 안 보고 왔네요. 아버지의 현존 안에 거하라. 아버지의 본체에서 떨어지지 마라. 이 소리는 뭐겠어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중심인 아버지의 영원한 현존] 하나님 아버지 그러면 무조건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좋습니다. 무조건 영원한 현존이라고 보시면 돼요. [I AM 거기랑 하나가 되어 살아야] 뿌리가 튼튼해야 우리가 영혼육이 다 건강하겠죠. 자 여기를 영이라고 할게요. 여기를 혼, 영혼육, 영혼육이 다 건강해지려면 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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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를 줘야 돼요? 비료는 뿌리에다 주죠. 물은 뿌리에 주죠. 뿌리가 강건해야 줄기, 가지가 잘 뻗어나가고 꽃 피고 열매를 맺겠죠.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영이 튼튼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영이 아버지의 영이잖아요. 사실은 아버지의 영, 아버지의 영이 여러분의 본체에요. 여러분은 줄기, 가지, 열매, 꽃이고요. 그러니까 혼과 육을 꽃 피우고 열매 맺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항상 본체에 접속해라. 이게 '아버지 현존 안에 거하라'고요. 40절을 이걸로 설명할 수 있고, 여기랑 같이 41절 얘기도 볼까요. 그러면 아버지 영과 접속한 자는 칭의죠. 의로운 존재가 됐죠. 부모님 만났으니까 의로운 존재가 됐어요. 내 신분이 나왔다고요. 이 영을 모를 때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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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을 모르는 자는 혼과 육으로만 살죠. 이런 존재는 혈육의 자녀입니다. 혈육의 자녀고 사탄의 종입니다. 사탄-종, 혈육-자녀, 외워두세요. 반대는요 하나님 자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죠. 자녀죠. 아들 딸이 되는 거죠. 자 이렇게 보시고 그래서 이 성령을 각성한 자는 혼이 거룩해지는 성화와 육이 부활하는 영화까지 넉넉히 받게 될 것인데 이 영을, 성령을 모르는 자는 어떻게 돼요? 이 혼과 육으로만 사는 자는 대다수 고등침팬지 중생들이 이렇게 살고 있죠. 대다수 인류들은 어떻게 돼요? 죽을 때 가지고 있는 몸뚱이마저 날려버리고, 혼은 지옥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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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예수님 표현이 그래요, '이를 갈 것이다.' '고통 받으며 이를 갈 것이다.' 그냥 저는 전달해 드렸습니다. 자 《42절 나그네가 되어라》 이런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 같아요. 교회 같은 데 가면 이런 얘기 많이 하더라고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지나가는 나그네가 되어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 하고 살아가라는 거죠. 자 각주 5번 한번 볼까요. 베드로전서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한 게 있어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십시오.] 기본적으로 나그네라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속의 세계에, 여기에 안식하지 말고 어디에 안식하라는 거예요? 나그네는 본집이 따로 있죠. 본집이 이 혼과 육의 세계가 아니라 영이 우리 본집입니다. 이 정도 느낌으로 아시면 돼요. 나그네가 되라고 해서 '집에서 항상 짐 싸놓고 언제든 떠날 준비하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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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하며 살아야 하나님 자녀로 잘 사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냥 가정을 꾸리고 사시건 어떤 모습으로 사시건 우리 안식처는 어디예요? 본향은 이 성령 자리, 성령이 우리 본향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성령에 안식하면서. 이 현상계도, 여기에 안식하면 어떻게 돼요? 그런데 이걸 오해하지 마시라는 거예요. 나그네라고 하니까 이 세계를 부정하라는 식으로, 이 세계에는 어차피 무상 하니까 어디건 정 주지 말고 살아라. 이렇게 인식하지 마시고 우린 사랑하러 왔는데 정 주지 말고 살아라 이러면 또 안 맞잖아요. 모순이 일어나잖아요. 이걸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 현상계를 고향으로 알지 말고 영의 세계가 나의 고향인 줄 알아라 이 소리죠. 예수님 이런 얘기도 하셨어요. '인자는 어디 안식할 곳이 없다.' 동물도 다 안식처가 있는데, 나는 안식할 곳이 없다. 안식할 곳이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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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영에 있어요. 세상을 초월한 영의 차원이 안식처예요. 우리 본체고 안식처예요. 여기 안식하는 사람은 뿌리가 튼튼하니까 어때요? 혼이 거룩해지고, 육이 부활체로 거듭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현상계도 하나님의 창조 신비의 작품으로서 이 현상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단순히 나그네란 말에서 무상만 보지 마시고, 내가 진짜 안식해야할 뿌리는 현상계에 있는 게 아니라 절대계의 하나님 자리다 이걸 알고 살면 오히려 현상계까지 어떻게 돼요? 넉넉히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 논리가 항상 그렇죠. 오직 하나님 나라와 정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 의식주 관련된 모든 것들도 넉넉히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비슷한 논리로 '나는 나그네다.' 그래서 항상 여기에 주를 두지 말고 성령에 주를 두면 그 은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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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과 육에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도 중심을 잡고 사랑을 구현하면서 모두를 천국으로 이끄는 위대한 도를 펼치는 장이 되겠죠. 이 세계가. 그래서 나그네란 말에 너무 무상함만 보시면 불교도 대승불교가 아니라 소승불교로 흐르게 됩니다. 무상하니까 떠나자. 나그네니까 정 주지 말자. 여기서 누구와도 깊게 사귀지 말자. 업 짓지 말자. 이런 논리로 가면 사랑을 안 하게 돼요. 사랑을 거부하게 돼요. 이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하라 예요. 사랑을 어디서 합니까? 여기서 해야지. 천국 가서만 사랑하실 거예요? 여기서 사랑 안 하고? 가리시면 안 되죠. 《43절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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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내용일까요? 보시죠.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 묻기를 저희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대답하셨죠. '그대들은' 《그대들은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늘 화가 나 계시죠. 사랑하려고 왔는데, 사랑하려고 오신 사랑꾼인데 늘 화가 나 계세요. 《그대들은 오히려》 화도 사랑인 거죠. '그대들은 오히려' 《유대인들과 같도다.》 '에이 유대인 같은 놈들' 이게 여기서는 아주 심한 욕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들은 어쨌단 얘기에요? 기존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어땠단 겁니까? '그들은' 《나무는 사랑하되 열매는 미워하거나, 열매는 사랑하되 나무는 미워하기 때문이다》 또 선문답 같죠. 별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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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보시면 나무가 있고 열매가 있어요. 이것만 구분하시면 돼요. 나무가 있고 열매가 있다. 자 여기서는 이런 느낌으로 볼까요. 영 그리고 우리 에고의 마음. 혼과 육의 세계죠. 영, 성령의 세계와 에고의 세계, 절대계와 현상계, 현상계에서는 나그네처럼 살아가라. 내 본집은 어디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라는 얘기에요? '본집이 천국이고, 성령 자리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라' 이 소리입니다. 나그네처럼 살아라. 계속 복습을 해가면서 가는 기분인데요. 자 그래서 이제 43절에 집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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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냐고 물었는데 '에이 유대인 같은 놈들' 이러면서 '나무는 사랑하되 열매는 미워하거나 열매는 사랑하되 나무는 미워한 놈들' 이게 무슨 뜻이냐? 자 8번 보시면, 죄송합니다. 오늘 왜 이러죠. 각주가 너무 깨알 같아요. 6번 각주 또 빼먹고 왔어요. 진짜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서 이렇게 연결해서 이해하세요. 6번 각주, '나그네가 되라' 이 얘기 마무리, [이 세상에서는 진정으로 쉴 곳이 없다. 참된 안식처는 우리 내면의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원한 현존이다.] 이런 것도, 이 각주도 옛날에 달아놓은 각주들인데 다시 보면 제가 놀래요. '아니 그때도 똑같은 소리 하고 있었구나.' 살짝만 다듬어주면 언제든 통하더라고요. 웬만하면 이게 진리가 맞으니까 이러겠죠. 자 다시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래서 이제 나무와 열매 얘기로 올게요. 이 나무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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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이해하시려면, 이 도마복음을 이해하시려면 이 구절을 한번 보시는 게 좋아요. 마태복음 12장 33절에서 35절 말씀, 이거 한번 볼게요. 기존 복음에 있는 말씀, [좋은 나무를 길러라.] 나무 얘기가 나오죠.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자 여기서 이 영은 시공을 초월한 자리고, 영을 우리가 기를 수는 없잖아요. 영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영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을 또 길러요. 우리가 길러야 할 건 뭐예요? 우리의 속마음, 이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입니다. 속사람을 길러라. 제가 늘 말하는 불교식으로 육바라밀의 마음이에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육바라밀의 마음인데, 지금 이 성령의 열매를 듬뿍 향유하는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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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얼마나 지혜로우며, 얼마나 사랑이 넘치며, 얼마나 정의로우며, 얼마나 겸손하겠어요. 그렇죠? 사랑과 정의와 겸손과 지혜가 충만한 속마음, 이게 우리 속사람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뭐겠어요? 제가 늘 드는 비유 있죠. 차가운 쇠공에 이 성령의 불덩어리가 임해서 뜨거워진 데가 여기까지예요. 여기는 지금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요. 여기도 분명히 쇠공인데, 영은 쇠공이 아닙니다. 그냥 불인데, 이 부분의 재질은 그냥 쇠공인데 지금 불처럼 타오르고 있어요. 그러면 식은 부분이 있겠죠. 여기는 겉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겉사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심. 속사람은 양심, 작용으로서의 양심이에요. 본체는 영이니까, 양심의 본체는 영이다. 자 이 그림 놓고 보시면 뭐가 나무인지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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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령의 마음, 성령과 그대로 공명하는 우리의 혼이 지금 영혼으로 나누면 혼이에요. 이 혼이 지금 속사람이고 이게 나무입니다. 여기 이 나무가 잘 자라 있으면 밖으로 어떻게 될까요? 차가운 데까지 가가지고 또 열매를 맺겠죠. 이게 지금 열매예요. 밖으로, 언행으로, 말과 행실로 구체화된 게 지금 열매입니다. 속마음이, 속생각이 밖으로, 말과 행실로 구체화된 거죠.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죠. 그러니까 좋은 나무를 길러라. 이게 제가 늘 말하는 '성령과 하나 되어 있어라'는 겁니다. 믿음의 마음, 이게 기독교식으로 이 마음이 다른 말로는 그대로 믿음의 마음이에요. 또 다른 말로는 '깨어 있어라' 해서 '깨어있음'의 마음이에요. 자 성령을 늘 만나고 있죠. 성령과 늘 독대하고 있죠. 천주교에서 '관상(觀想)한다'고 그러죠. 하나님하고 다이렉트로 만나는, 하나님하고 다이렉트로 만나는 이 마음, 하나님, 하나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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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렉트로 만나는 이 마음은 이미 하나님 마음과 공명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미 내 마음이 아니에요. 내 마음인데 내 마음이 아니에요. 내 마음인데 분명히 성령의 진리로 충만한 마음이에요. 보통 내 마음이 아니죠. 이 겉사람의 마음은 진짜 내 마음이에요. 탐진치 충만한, 탐욕, 분노, 어리석음 충만한 내 마음인데 이쪽은 진리로 충만한 사랑의 마음, 양심의 마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나무를 기르라는 게 이거예요 틈날 때마다 여러분 성령과 하나 되어서, 성령과 공명해서. 성령의 열매가 뭡니까? 오늘 자료 중에도 있어요. 미리 읽어 볼게요. 4페이지에 있는데 안 보셔도 돼요. 보세요. [성령의 열매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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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평화] 이건 평온의 마음, 깨어있음의 마음이죠.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이게 육바라밀로 하면 이래요. 사랑이 보시바라밀, 기쁨과 평안은 선정바라밀, 이쪽은 보시바라밀, 기쁨과 평화, [인내] 는 어때요? 인욕바라밀, [자비]도 보시바라밀이고, [선량함] 선량이라는 것은 지혜입니다. 항상 선한 걸 추구하는 선량한 마음, 그다음 7번째 [성실] 성실은 정진바라밀, 그렇죠. 또 뭐있을까요? [온유] 는 또 사랑 쪽이면 [절제] 는 지계 쪽이겠죠. 지계바라밀, 그럼 다 나왔죠. 선정, 지혜, 반야라고도 하죠. 선정, 반야, 보시, 인욕, 정진, 지계. 다 나왔잖아요. 똑같아요. 사도 바울 생각도 본인은 천국의 시민권자라고 주장할 만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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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천국이란 다른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와 정의로움이다.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도 쳤습니다. 어때요. 다해서 9가지 열매인데, 9가지 열매를 기쁨과 평화와 정의로움이라고도 표현한 적도 있어요. 예수님은 딱 두 개죠. 평안과 진리, 똑같아요. 그래서 그게 속마음이에요. 늘 여러분 성령 안에서 평안해야 돼요. 기뻐야 돼요. 아무리 힘들어도 기쁨이 샘솟는 걸 느끼셔야 돼요. 아무리 힘든 중에 겉사람은 지금 탐진치가 충족이 안 되어서 죽겠다고 하는 중에도 속에서 뭐가 올라와야 돼요.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 안에서 오는 위로의 기쁨이 있어야 돼요. 위안이 있어야 돼요. 인내의 힘이 나와야 돼요. 일체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오케이 할 수 있는 인내의 힘이 나와야 돼요. 남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나와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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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지키는, 자신의 마음을 절제시키는 힘이 나와야 돼요. 나온다고 늘 51%는 아닙니다. 일단 나온다는 거에 초점을 두세요. 이게 올라오나 보세요. 무서운 정진력이 나와야 되고, 늘 선량한 마음, 지혜로운 마음이 나와야 돼요. 선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이 나와야 돼요. '이건 자명하고 저건 찜찜하구나' 이걸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이 나와야 돼요. 이 마음이 나와도 문제입니다. 나와도 속사람이 겉사람에 비해 51% 이상의 힘을 갖느냐? 그건 또 다른 문제거든요. 속사람이 겉사람을 제압하면 그게 이긴 자가 되는 거고, 이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거고, 이긴 자가 되는 겁니다.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면요 영적 전쟁을 나가면 그냥 그 전쟁에서 총알받이 되는 겁니다. '여기 어디지?' 하다가 그냥 총알 맞고 가는 거예요. 전투를 치러볼 수도 없어요. 지금 뭔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지금 정확하게 상황을 알고 있어야 돼요. 순간순간 내 앞에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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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이건, 순경이건 올 때 내 안에서 영적 전쟁이 일어납니다. 우리 속마음이 얼마나 내공을 갖고 있느냐가 거기서 관건이라는 말이에요. 그거를 그냥 예수님이 편한 말로 '좋은 나무 길러라' 그랬어요.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 여기서 속사람이 힘을 못 얻고, 그렇죠. 지금 좋은 나무라는 게 속사람이에요. 나쁜 나무를 길렀다는 건 뭐예요? 탐진치의 마음만 충만한 거죠. 이 여기가 없는 거죠. 지금 속마음이라고 다 착한 게 아니에요. 속마음이 착한 게 속사람이라고요. 속마음이 성령 뜻대로 됐을 때 속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속마음이 지금 이 겉사람이 속마음까지 지배해 버리면 이 속에도 뭐가 들었겠어요? 탐진치 가득하죠. 욕심만 가득하겠죠. 속에 욕심이 들어 있다가 언행으로 뭐가 나와요? 소시오패스적인 언행이 나오겠죠. 근데 이 속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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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람이 강건해져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나무를 길렀으면 밖으로 무조건 좋은 열매가 나오게 됩니다. 자 그래서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 밖으로 튀어나온 거 보면 속에 들어있는 거 알 수 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독사는 사탄입니다. 이 사탄의 자식들아, 이거예요. 사탄의 자식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겉으로만 선한 말 하고 있는 위선자들한테 하는 말입니다. 이 위선자들아, 위선자를 독사의 자식들아, 사탄의 종들아. 자 소시오패스, 위선자는 그냥 사탄의 종입니다.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이 나오냐.' 속에 보니까 지금 성령과 만남도 없고, 칭의도 없고, 성화도 없어서 성령과의 만남도, 의로워짐도 없고, 거룩해짐도 속에 없는데, 탐진치만 속에 그득한데, 밖으로도 탐진치가 나와야 되는데 속은 이게 그득한데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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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맺는 것만 계율 지킨다면서 고상한 척하면 어떻게 돼요? 그게 진짜 위선자죠. 그러니까 나무는 악한데 열매만 선한 척할 수도 있겠죠.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근데 그게 진짜로 선하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 두었다가] 이 성령의 9가지 열매 쌓아 두었다가, 밖에 내 놓으니까 선한 걸 내놓고, 악한 사람은 속에도 탐진치, 밖에도 탐진치, 그렇죠. '악한 것 쌓아놨다가' [밖에 악한 것 내놓는 게 아니겠느냐] 이 구절을 알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을 왜 비방했어요? 이 독사의 족속들아, 저 유대인 같은 놈들. 자 각주 8번 보세요. [나쁜 나무는 사랑하면서] 악한 마음은 사랑하면서, 그렇죠. [나쁜 열매를 미워하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며, 좋은 열매를 사랑하면서 좋은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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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짓도 어리석은 짓이다.] 선한 행실은, 열매는 되게 좋아하지만 진짜 착한 마음먹는 건 싫어하고, 그렇죠. 나쁜 마음은 너무 좋아하면서 나쁜 마음이 또 열매 맺는 것은 어때요? 싫어하고, 자 이렇게 풀어야지 맞겠네요. 아까 제가 풀이한 거는 그냥 일반론이고요. 이 구절은 이렇게 풀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무는 사랑하되' 그러면 악한 마음은 겁나게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때요? 그 악한 행실은 또 되게 미워해요. 악한 짓을 실제로 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데 속마음은 악해 있고 '나무는 사랑하되 열매는 미워하거나' 이걸 이렇게 풀고, '열매는 사랑하되' 착한 열매 맺고 싶어요, 복 받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런데 어때요? 천국 갈 마음은 안 먹어요. 또 앞에 구절은 '나무는 사랑하되' 그러니까 악한 마음은 겁나 사랑하는데, 열매, 지옥 갈 열매는 되게 두려워한다는 거죠. 이렇게 이해하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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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은 딱 맞겠습니다. 나무와 열매 간에 여러 가지 생각해 보세요. 자 그러니까 [좋은 나무를 사랑할 때 좋은 열매를 얻게 된다. 좋은 열매를 얻으려거든 좋은 나무를 길러라! 나무와 열매를 모두 사랑하여,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실이 나오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본인이 이렇게 본인을 밝혔다는 거예요.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나는 좋은 나무를 사랑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일 뿐이다.' '나무와 열매를 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다르더라. 다시 번역하면 이거죠. '그들은 늘 악한 마음먹으면서 지옥 가는 건 싫어하고, 천국은 가고 싶으면서 좋은 마음은 안 먹는다.' 이렇게 풀면 딱 이해되시죠. 이래서 이제 결론은 뭐예요? 예수님 어떤 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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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 키워서 좋은 열매 맺는 사람일 뿐이다.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신 거죠. 당신은 누구십니까? 했는데 얘기해 준 거잖아요. 여러분도 지금 보시면 아시겠죠. 난 어떤 사람입니까? 늘 칭의 차원에서 성령의 현존에 안주해 있으면서 늘 내 마음을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나무로 잘 키워가면서 열매는 어떤 열매 맺어요? 밖으로 언행은? 성령의 뜻에 맞는 언행을 한다. '나는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게 예수님 본인에 대한 자각인 거죠. 나는 내 뜻대로 말고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냥 이 얘기를 하신 거예요. 좋은 나무, 나쁜 나무, 좋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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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열매 이걸 이용해가지고 이런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기존 복음에도 있는 얘기고요. 약간 맛만 다르죠. 아무튼 나무랑 열매 얘기를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러니까 이런 다양한 글들이 남아 있죠. 지금 밖으로 여러분 언행하시기 전에 속이 성령의 은총으로 충만한가 성령의 열매를 향유하고 있나 알아차려 보세요. 내 마음이 자비의 마음이고, 온유한 마음인지, 기쁨과 평화의 마음인지, 지혜로운 마음인지, 인내하는 마음인지? 그렇죠. 성실한 마음인지, 절제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그 반대, 탐진치의 마음인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마음인지? 나무를 보면 열매를 알겠죠. 내 마음이 지금 탐진치면 밖으로 나가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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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겠구나. 이거 아시겠죠. 내 맘 안에 이런 지혜와 자비가 꽉 차 있으면 밖으로도 지혜롭고 자비로운 열매를 내가 맺겠구나, 100%는 아니어도 그럴 확률이 높겠죠. 속에 있는 게 밖으로 나오겠죠. 평소에 속에 있는 게 밖으로 나오겠죠. 그리고 이제 딱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진짜 그 순간에 속에 있는 게 밖으로 바로 터져 나오겠죠. 평소에 관리를 잘해 놓으시면 확률이 높아지겠죠. 아직 제가 안 읽은 게 있네요. 각주 8번 뒤에 가면 각주가 좀 더 남았네요. 44절까지 못 가겠는데요. 이거 일단 읽어보죠. 각주. 대학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소인이 한가로이 있을 때에 악한 짓을 함에 못하는 짓이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는 슬그머니 그 악한 짓을 숨기고 선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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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배가 군자를 보고는 위선자가 되는 거죠. '한가로이 있을 때' 남이 안 볼 때, 남이 안 보는 속마음도 그러니까 소인은 속마음도, 속마음은 남이 못 보잖아요, 여기서도 악이 충만해 있고 밖으로도 악한 짓을 하다가 군자를 딱 보더니 악한 짓을 숨기고 선함을 드러낸다는 건, 속은 시커먼데 밖으로는 선한 척하더라. 나무는 나쁜데 열매는 선한 열매를 맺은 척 사기를 치는 거죠. 이게 위선자입니다. 진짜 선이 아니고 사기죠. [남들이 그 사람을 봄에 폐부를 다 들여다보듯 할 것이니] 그런데 남들 눈에 다 보인다.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일러 속마음이 정성스러우면 밖으로 형체가 나타난다고 한다.] 예수님하고 똑같은 말씀이죠.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속마음이 정성스러우면, 속마음이 양심에 정성스러우면 밖으로도 양심이 터져 나온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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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 홀로 아는 그 자리] 자기 속마음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조심하는 거다. 이게 유교경전 대학 책에 나온 내용이에요. 자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또 딱 잘 맞는 구절이, 마태복음 23장 25절에서 28절 보시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늘 욕먹죠. '재앙이 있을 것이다.' [너희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바깥만 닦고 있다.] 이 열매만 그럴싸하게 자꾸 이렇게 광내고 있다는 거예요. 속은요?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탐진치로 [충만해 있다. 눈먼 바리새인들아 먼저 네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럼 밖도 깨끗해질 거다.] 속이 선하면 밖도 선해질 텐데 예수님의 일관된 논리입니다. 속이 선하면 밖도 선하다. 유교경전의 성인들의 가르침입니다. 속마음이 정성스러우면 밖으로 형체가 드러난다. 밖으로 잘하려고 하지 말고 속에 충실해라.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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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밖을 잘하려고 하지 않고 먼저 자기만 아는 속마음 관리를 잘하는 법이다 이 얘기고요. 그 속마음이 안 보일 것 같죠. 다 티 난다. 다 드러난다. 이게 포인트였죠. 자 그 구절에 관해서, 누가복음 12장 2절에 3절, [숨겨둔 것은 드러날 것이며 감춰진 것은 알려질 것이다.] 속에 있는 것 다 드러난다. [그대들이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밝은 곳에서 들릴 것이며, 그대들이 안방에서 귀에다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이 정도로 숨겨진 것은 다 밖으로 드러난다고 알고 살아가라. 그래야 하나님의 사도다. 이 소리고요. 아까 유교는 속마음 남들이 폐부를 들여다보듯이 다 들여다본다.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러니까 절대로 속마음을 양심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서 밖으로 양심이 드러나게 해라. 이것이 군자의 길이다. 군자의 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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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길이 똑같다는 것도 한번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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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윤홍식의 도마복음 강의 27강-아버지의 현존 안에 거하라(40절-43절)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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