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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 성지
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173-2번지 교구 수원교구
신앙 선조들의 순교 기록에 보이는 '양근'이라는 지명은 대체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1736~1801), 권일신(權日身,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42~1792) 형제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는 양평군이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었고, 순교한 권상문(權相問,세바스티아노,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측 기록에 보면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출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서양 기록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한강개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다. 이 곳에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뒤에서 언급할)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완주의 유항검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아울러 이 곳은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윤유오(尹有五, 야고보,?~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자매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애초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양근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권철신의 이웃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윤유일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영세 후 그는 조선 신자 대표로 북경(北京)을 방문하여 1790년 북당(北堂) 성당에 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에 매진하다가 5년 만인 1795년 드디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 하다가 그해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윤유일의 순교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굳건히 하던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특히 언니 윤점혜는 최초 의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도와 여성 신자들의 교육에 힘썼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윤운혜는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1801)와 혼인하여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초의 양반 부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 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 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인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 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양근은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 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그 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권상문 등은 현재 시복 추진중인 분들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 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또한 성녀 조증이(발바라)는 양근 조동성 집안 출신으로 남이관 성인의 아내,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치도곤 합 150도를 맞고 옥에 갇힌지 6개월 후 11월 14일 순교하였다.
윤점혜 아가다는 윤유일의 4촌 여동생으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밤에 몰래 서울로 도망쳐와 강완숙의 집에 머물며 동정녀 소공동체를 만들고 동정녀들을 지도하였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참수할 때 목에서 흰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 윤운혜 마르타는 순교자 정광수와 결혼한뒤 서울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고 주 문모 신부님을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며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보급하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권철신의 양아들(권일신의 아들)로 처음 양근 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 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음으로 양근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 23세로 순교하였다.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전주 중바위 성지 참조)와 쌍벽을 이루는 분들이다. 이 동정 부부는 모두 양근 출신으로 조숙은 조동성 유스티아노의 친척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이들 두 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하 였다.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고, 윤점혜 아가다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 벌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 받을 수 있는 곳이다.
2004년 6월 이 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권철신의 방계 후손인 권일수(요셉) 신부가 성지 개발을 전담하 고 있었다. 권철신의 생가터인 대감마을과 주어사를 포함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이면서 순교지인 이곳을 종합 개발하려는 전담신부의 외로운 노력에 많은 교우들의 동참이 절실하게 보였다.
1)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5.29) 기본정보 활동연도 1769-1802년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교회 창설 주역들의 스승이요 학문으로 이름이 높던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그의 큰아버지였으며,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의 아버지였다. 뒷날 권 세바스티아노는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1769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세바스티아노는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또 장성한 뒤에는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이웃에 사는 윤유일 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생부인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죽임을 당하자, 권 세바스티아노는 마음이 약해져 한때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로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였고, 성사를 받으려고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 야고보 신부를 방문하고 모임을 가졌으며, 얼마 뒤에는 고향인 양근으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1795년의 을묘박해로 주 야고보 신부가 피신 생활을 하게 되자, 3일 동안 주 신부를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교리를 배웠다.
1800년 6월 경기도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 세바스티아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권 세바스티아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잠시 마음이 약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전에 한 말을 취소하였으며, 사정없이 가해지는 형벌을 받으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그의 최후 진술을 들은 뒤, 다음과 같은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하였다.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 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아울러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미혹시키는 데에 이용하였다.”
동시에 형조에서는 ‘권상문을 고향으로 이송하여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인 양근 주민들이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복녀 윤점혜 아가타(5.29) 기본정보
활동연도 ?-1801년. 같은이름 아가다,
윤점혜(尹占惠)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 바오로는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 루치아는 그의 동생이다.
윤 아가타는 일찍부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려고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몰래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숨겨 둔 뒤에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그런 다음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사촌 오빠 윤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얼마 후 윤 아가타는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가 가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1795년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윤 아가타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 나갔으며, 2년 뒤에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 아가타는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야고보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이후, 그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와 성경 읽기, 그리고 묵상에 열중하여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으며,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윤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이후 포도청과 형조에서 갖가지 형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밀고와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그녀의 고향인 양근으로 압송하여 처형하게 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윤 아가타는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갇혔다. 당시 그 감옥에는 여자 교우 한 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뒷날 그녀는 윤점혜 아가타에 대해 증언하기를 “아가타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전하였다.
윤 아가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윳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윤점혜 아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3) 복자 조숙 베드로(5.29) 기본정보 활동연도:1786-1819년
‘명수’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조숙(趙淑) 베드로(Petrus)는 1786년 경기도 양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숙’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이후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양친과 함께 강원도의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하게 되었다.
성장해 감에 따라, 조 베드로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 또한 착하고 친절하였으며, 나이에 비해 아주 점잖았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생활을 점차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신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7세 때 권천례 데레사를 아내로 맞이하면서이다.
혼인날 밤, 아내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조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조 베드로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그들의 신심은 날로 깊어져 기도와 복음 전파, 고신 극기 행위가 일상이 되었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남을 위한 애긍에 열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15년을 생활하는 동안, 조 베드로는 처음의 약속을 어기는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아내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조 베드로 부부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도와 일하게 되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필요한 뒷바라지는 모두 그들 부부의 몫이었다. 정 바오로 성인은 교회 일을 위해 떠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양에 있는 조 베드로 부부의 집에 머무르면서 모든 준비를 하였다. 당시 고 바르바라(또는 막달레나)라는 과부가 그 집에 살면서 그들 부부를 도와주었다.
그러던 가운데 정 바오로 성인이 다시 한 번 북경에 갔을 때, 포졸들이 수색 과정에서 우연히 조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내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아내 권 데레사는 자원하여 남편을 따라나섰고, 고 바르바라도 그들 부부와 함께 투옥되었다. 그때가 1817년 3월 말경이었다.
문초가 시작되자, 관장은 조 베드로 부부를 유혹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관장은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그들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조 베드로 부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히, 아내 권 데레사는 남편 조 베드로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순교를 권면하였다.
조숙 베드로 부부와 고 바르바라는 이렇게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그들 셋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조 베드로의 나이는 33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조숙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4) 복녀 권천례 데레사(5.29) 기본정보 활동연도:1783-1819년
권천례(權千禮) 데레사(Teresia)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3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권 데레사는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권 데레사는 어렸을 때부터 덕행과 신심이 남달랐다. 또 성장한 뒤로는 온화함과 애덕으로 형제간에 평온을 유지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17세 때 일어난 신유박해로 온 집안이 풍파를 입게 되었다.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게 된 권 데레사는 조카 하나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 생활하면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친척들이 그녀를 찾아와 ‘조선에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며 설득하였다. 결국 그녀는 계속되는 친척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동정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였으며, 20세에 이르러 조숙 베드로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조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날 밤에, 권 데레사는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는 글’을 써서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조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뜻을 들어주었고, 잠깐 사이에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사람이 되었다. 이후, 권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서 15년을 생활하였으며,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북경을 오갈 때마다 모든 뒷바라지를 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1817년 3월 말경에 포졸들에게 잡혀 문초를 받는 동안 어느 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혹독한 형벌을 꿋꿋하게 참아 내었다. 권 데레사는 관장이 배교를 권유하자 이렇게 답하였다.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십니다.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 모두, 부모를 배반하는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다시 몇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가하였지만, 권 데레사 부부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권 데레사는 고통스러운 옥살이 중에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또 남편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실 순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자.” 하며 권면하였다.
권 데레사 부부는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것은 1819년 8월 10일(음력 6월 20일) 이후로, 당시 권 데레사의 나이는 36세였다.
교우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그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교우들은 권 데레사의 머리채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권천례 데레사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5) ‘하느님의 종’ 권철신 암브로시오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의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태 19, 27)
하늘이 시운(時運)을 살펴 현량을 내셨으나
참소하는 무리 매우 모질어 이 어진 분 죽였도다
공의 덕용(德容) 생각하니 온화한 봄 기상일세
백세 뒤에는 다시 공을 알 사람 없겠기로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묻어 천명(天命)을 기다리노라
- 정약용, 「녹암 권철신 묘지명」 중에서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년)은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년)의 형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이며, 당호는 감호(鑒湖)이다. 복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백부이자 양부이기도 하다. 경기도 양근의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권철신은 일찍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4세 되던 1759년(영조 35) 성호 이익(李瀷, 1681-1763년)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퇴계 이황과 백호 윤휴 등 기호 남인계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하여 점차 성호학파의 존경받는 학자로 지목되었다. 이병휴·안정복·윤동규·신후담과 홍유한 · 이기양 · 한정운 등이 당시 그의 학문에 영향을 준 인물들이다. 특히 이병휴는 죽을 때까지 권철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녹암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익 · 이병휴가 사망한 다음이었다. 이때 그의 문하에 들어간 인물들은 김원성 · 이총억 · 이존창 · 홍낙민 등이었다. 그리고 이어 이승훈, 정약전 · 약용 형제, 이윤하 · 이벽 · 윤유일과 조카인 권상학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벽이 권씨 일가에 복음을 전했을 때 즉시 확신을 가지고 믿은 동생 권일신과 달리 권철신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럴 것이 새로운 교리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학문적 업적과 그와 관계를 맺어온 여러 사람들을 버려야 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학을 연구하고 그 속에서 참된 진리를 찾았을 때, 권철신은 온 마음으로 수계하기 시작했으며 집안사람들도 모두 실천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고 싶은 열망에 많은 벗과 지인들에게도 설교했다. 1779년(기해년) 겨울의 주어사(走魚寺) 강학은 권철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자리였다. 이때 모인 사람들은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여러 명이었다. 권철신은 스스로 규정을 정했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 얼음물을 떠서 세수를 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암송하고, 해가 뜨면 「경재잠」(敬齋箴)을 암송하고, 정오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암송하고 해가 지면 「서명」(西銘)을 암송하도록 하였으니, 씩씩하고 엄하며 정성스럽고 공손함으로써 규도를 잃지 않았다.’ 이 강학회는 녹암계 인물들이 종래의 유교적 강학 형태를 빌려 서학에 대해 처음 토론하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이미 여러 형태로 천주교 신앙을 담은 한역 서학서에 접해 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01년 2월 11일 심문 중에 금부도사 박조원이 “너는 교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그 세가 심히 걱정스러운 것에는 사학(邪學)보다 급한 것이 없다. 이를 금지하는 방도에 어떤 계책이 필요하겠는가? 너는 이미 사학의 이면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계책도 알 것이다.” 하고 묻자, 권철신은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너무도 마땅한 대답이었으나, 권철신이 말하는 ‘정학’은 반대자들이 말하는 ‘정학’과는 달랐다.
“네가 양근 사학의 우두머리냐?”
그 무렵 천주교에 관한 활기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권철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교리를 신봉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했으나, 정부 측 기록을 보든 교회 측 기록을 보든 이구동성으로 그를 ‘신부, 대부, 사학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였다. 신앙인으로서 권철신의 삶이 어떠하였기에 그러했을까. 정약용이 권철신을 위해 지은 묘지명을 읽어 보면 저절로 수긍이 간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뜻을 봉양하며, 친구와 형제를 한 몸처럼 아끼는 데에 힘쓰니, 그 문하에 들어간 자는 다만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가 사방으로 퍼져 마치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것이 지란(芝蘭)의 방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아들과 조카들이 집안에 가득하나 마치 친형제처럼 화합하니, 그 집에 10여 일이나 한 달을 머문 뒤에야 비로소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겨우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노비와 전원, 또는 비축된 곡식을 서로 함께 사용하여 내 것 네 것의 구별이 조금도 없으니,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까지도 모두 길이 잘 들고 순하여 서로 싸우는 소리가 없었다.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비록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고루 나누어 종들에게까지 돌려주었다. 그러므로 친척과 이웃이 감화되고 향리가 사모하였으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우러러보니, 학문과 행검(行檢)을 힘쓰는 상류 사족(士族)들까지 모두 공을 사표로 삼아 자제를 문하에 들여보냈다.”
마치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신자 공동체의 삶과 빼닮았던 것이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4-47)
권철신은 초기 교회 신자들처럼 아름답고 빛나게 복음을 살았다.
‘권 암브로시오는 음력 2월 22일에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감옥 밖에서 죽었다고도 한다. 권 암브로시오의 항구함에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달리 어떠한 자료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못한 단순한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이 교우에 대한 기억을 더럽힐 수 없다. 권 암브로시오의 마음가짐과 행실은 오랜 세월, 그리고 형벌을 받는 순간까지 너무나 확고하였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가 쓴 『비망기』를 빌려 권철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본다. 그는 현양 받아 마땅한 순교자이다.
[평신도, 2018년 겨울(계간 62호),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6) ‘하느님의 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권일신은 가학을 이어가며 형과 함께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였고 뒷날 실학자 안정복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광암 이벽은 당대 거유인 이가환과 사흘 밤낮을 토론하여 천주교의 옳음을 밝혔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을 뜻이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더욱 올바르게 전하려고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는 양근 땅 감호의 권씨 형제를 찾았다. 지우인 이벽의 열의에 찬 강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권씨 형제 가운데 권일신이 먼저 입교하여 이벽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중요한 믿을 교리와 신자로서의 본분과 실천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하게 하였다. 이존창은 크게 감복하여 루도비코 곤자가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고,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활동에 투신해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또 전라도 전주 초남에 덕망이 높고 재산이 많아 세력이 컸던 유항검 또한 권씨 형제를 따랐는데, 권일신은 그도 전교하여 그를 한국 초대교회의 전라도 사도로 남게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의 덕망과 인품으로 한국교회는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들이 속속 입교하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정기적인 종교집회가 한국 천주교 복음 선포의 기점이 되는데,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 이벽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우연한 기회에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지되었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었다. 이때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김하진에게 가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함께 처벌해 달라고 용감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벽은 집 안에 감금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지도층 교우들은 흩어졌다. 그는 교회 재건을 다짐하며 조동섬과 함께 양근에 있던 용문사에 들어갔다.
1787년 박해가 진정되자 권일신은 교회를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조용히 교회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한국교회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부처럼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아직 성품성사와 성직제도, 전례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때, 오직 교회재건의 열의에 불탔던 이들은 이른바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여 평신도로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 집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권일신과 동료 10여 명은 대단한 열성으로 엄격하게 재를 지키며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서적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교리에 위배되고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곧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 문의하였다. 당시 밀사로 윤유일이 선정되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권일신은 그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로 서한을 보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함부로 성사를 집행한 사실에 대한 엄한 책망을 들었다. 주교는 회답에서 일체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다만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일은 기쁘고 좋은 일이니 꾸준히 계속할 것을 당부하면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 권일신 등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난처한 입장임에도 교회에 순명하는 자세로 곧 성직수행을 멈추고, 오직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전교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교의 회신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내용도 있어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박해가 일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이미 그 신원이 드러났던 권일신은 1791년의 이 '진산사건'으로 홍낙안, 목만중 등에게 천주교 교주로 지목받아 고발당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당시 정조 임금은 권일신의 덕망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형조의 보고를 듣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권일신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았고, 어떤 유혹과 형벌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배교'란 말만 나오면 무섭게 화를 내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80세의 노모를 생각하게 하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착잡해진 권일신의 심정을 이용하여 배교가 아니라 임금께 조금만 양보하는 뜻을 쓰게 하였고, 이를 권일신의 굴복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배지가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는 이미 모진 형벌로 기진하여 귀양지에 가던 길에 한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신앙 때문에 당한 그의 고독한 죽음은 민족의 구원사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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