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어려운 용서(容恕) 1 유비옥은 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가슴에 의혹으로 남아 있던 모친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리옥상은 그의 앞에서 걷고 있었다. 야산에 들어선 순간 그녀가 길을 인도한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비옥은 그녀가 몹시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으나 마음의 격동으로 인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제 말을 들어주셔서." 단리옥상은 겨우 그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장 쇄심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유비옥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불당 안에 들어선 순간 그는 가슴이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엄숙한 분위기였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불상이 모셔져 있는 연화대였다. 그 앞에는 2개의 팔뚝만한 황촉이 타오르고 있었고, 단 아래 1명의 중년여인이 염주를 굴리며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유비옥은 여인을 바라보며 안색이 굳었다. '저 여인이 바로……!' "어머님." 단리옥상은 중년여인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며 말문을 열었다.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머님, 이 분이 바로 제가 말씀드렸던……." 단리옥상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순간 중년여인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앉으시게." 짤막한 말이었으나 그 음성에는 만감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유비옥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 황촉 빛을 받은 여인의 얼굴은 비록 중년의 나이였으나 미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단리옥상이 여인과 무척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비옥이라 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아아……." 우문수연은 탄식을 뿜어냈다. 그녀는 염주를 굴리며 시선을 그에게 돌리지 않았다. 왠지 그를 보기가 두려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염주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소협이 유비옥이란 말이지? 유철심의 아들인……." "그렇습니다." 유비옥은 낭랑하게 말했다.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그의 가슴은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침내 우문수연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녀는 멍하니 유비옥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하더니 곧 고개를 떨구었다. "그 사람을……. 쏙 빼 닮았군." 우문수연의 음성에는 회한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비옥은 급히 물었다. "절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때 단리옥상이 대신 말했다. "저는…… 당신에 대해 어머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 유비옥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리옥상은 그에게 경칭을 쓴 적이 없었다. 야산에 들어섰을 때 그녀가 경칭을 사용하긴 했으나 그때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들으니 몹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마치 과거와는 딴 사람이 된 듯했다. 한편 우문수연의 입가에는 한 줄기 따뜻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단리옥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자 들어 어머니가 저런 미소를 지은 적은 없었는데…….' 그녀는 문득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문수연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우문수연은 유비옥과 그녀를 번갈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우문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군. 이제 자네를 보고자 한 이유를 말해 주어야겠지." 우문수연은 염주를 자그락거리며 돌렸다. "아아! 이 죄 많은 과거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중얼거리는 그녀의 음성에는 회한이 가득 담겨 있었다. 2 "이 몸은…… 그 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었지.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정도로……." 우문수연의 아미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비옥은 침묵한 채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그 분은 그런 내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네. 아니, 날 제대로 보아주려고도 하지 않으셨지. 도리어 항상 내 곁을 떠날 생각만 하는 것 같았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이 몸이 너무도 독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네." 유비옥은 고개를 들어 단리옥상을 힐끗 바라보았다. 눈길이 마주치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었나 보군.' 우문수연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 몸은 포기하지 않았지. 어떻게든 그 분의 사랑을 얻어보려 애썼지만…… 그 분은 더욱 날 피하기만 했네. 아아! 그건 참으로 불행한 사랑이었지. 한쪽은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한쪽은 달아나려고만 했으니……." 단리옥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현재를 그대로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분은 집요하게 사랑을 요구하는 날 견디다 못했는지 대화성을 떠나고 말았지. 그리고 일 년이 지났을 때 그 분은 한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네." 여기까지 말한 우문수연의 눈에는 고통의 빛이 떠올랐다. 아직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듯이. "놀랍게도 그 분은 이미 그녀와 혼인을 했던 것이었네. 그 사실을 안 이 몸은 절망했네. 아아, 자네는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아는가? 당시 이 몸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네." 우문수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 유비옥은 계속 침묵했다. 그는 우문수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그것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이 몸은 참으로 어리석었지. 모든 것이 끝났는데 난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네. 오리려 더욱 그 분에게 집착했지. 결국에는 한 가지 무서운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분의 사랑을 되찾고 말겠다는……." "어……어머니……." 단리옥상은 우문수연의 무릎에 엎어지며 오열했다. 같은 여인으로서 사랑을 얻지 못한 아픔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흡사하기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유비옥은 한숨을 쉬었다. 비록 오래 된 이야기였지만 당시의 상황이 손에 잡힐 듯했다. "그와 결혼한 여인의 이름은 강설란이었지. 그녀는 몰락한 문사 가문의 여인으로 현숙할 뿐더러 고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네. 이 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한 여인이었지." 유비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 없이 자랐던 어린 시절은 지금까지도 멍에로 남아 있지 않은가? 이제 새삼스럽게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그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 몸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있었네. 도리어 그녀의 착한 심성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질 뿐이었다네. 더구나 무공도 모르는 일개 평범한 여인이 그 분의 사랑을 앗아갔다고 생각하니 도도하던 자존심이 크게 손상 당했을 뿐이었네." "……." "당시 이 몸은 그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네. 결국은 무서운 결심을 했지. 그를 얻을 수 없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잃는 편이 더 낫다고……." 유비옥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 동안 비밀에 부쳐졌던 어머니의 죽음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 부친에 의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부친 또한 그렇게 말해 왔었다. 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친은 어머니를 사랑했었다. 그가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살아온 것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유비옥은 가까스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문수연을 바라보았다. 몇 번인가 열릴 듯 말 듯하던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이 몸은 한 가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네. 그것은 바로 그의 손으로 그의 여인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었네. 물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녀가 없다면 그 분이 다시 날 사랑할 것이란 계산 때문이었네." "……!" "방법은 간단했네. 그녀에게 간세(間世)의 누명을 덮어씌우면 그만이었네. 그가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녀가 변황의 간세란 사실이 밝혀지면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네." 우문수연의 무릎에 엎드려 있던 단리옥상의 몸이 부르르 경련했다.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그럴 리가……. 세상에!'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토록 파렴치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문수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에서 초연해진 듯 염주를 굴릴 뿐이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결국 이 몸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네. 당시는 흑련사의 간세들이 중원 곳곳에서 암약하던 때라 그것을 이용하기는 쉬운 일이었네. 이 몸은 그녀를 간세로 만들기로 했네." 유비옥의 눈썹이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안배를 모두 끝낸 후 나는 일급 기밀 하나를 흑련사에게 전해 주었네. 결국 본성에서는 기밀이 그들에게 노출되자 누군가 본성에서 간세로 암약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를 색출하기 시작했네. 그로부터 한 달 후…… 공교롭게도 그 조사를 맡은 사람은 유철심 그 분이었지. 그 분은 내가 파 둔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네. 모든 상황이 강설란이 간세인 것으로 몰고 말았지." '그럴 수가……!' 유비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로소 그는 어머니가 어떻게 해서 돌아가시게 되었는지 확연히 알게 되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여인의 빗나간 애욕이 한 가족을 철저하게 파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단리옥상도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막을 알게 된 그녀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그쳐 물었다. "그……그럴 리가……. 어머니께서 정말 그런 짓을 하셨단 말인가요?" 우문수연은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다 전생에 지은 죄업 때문이란다. 이제 그 업보를 받을 일만 남았을 뿐이지. 아미타불……." "그……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단리옥상은 다시 물었다. 물론 그 질문은 유비옥이 하고 싶은 것이었으나 그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녀가 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흑련사의 간세였다는 사실에 그가 받은 충격은 참으로 큰 것이었지. 하지만 그 분은 공사(公私)가 분명한 분이었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아내를 지하뇌옥 속에 가두었단다. 당시 그녀는 해산한 지 불과 열흘밖에 안 되었을 때였지. 그녀는…… 그로부터 사흘 후 한 장의 유서만을 남기고 자진해 버렸지……." "아아!" 유비옥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히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핏덩이를 낳은 지 열흘밖에 안 된 산모가 어두운 지하뇌옥에서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자진했을 장면을 상상하니 미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유비옥은 비로소 부친이 왜 주귀(酒鬼)가 되어 평생을 광인처럼 살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어 불상을 노려보았다. 불상은 여전히 변함 없는 자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상 위에 보지도 못한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지고 있었다. "흐으윽……." 유비옥은 바닥에 고개를 묻었다. 오열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아……." 단리옥상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녀는 유비옥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유비옥의 원수의 딸이 아닌가? 우문수연의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유서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 그것을 본 그 분은 회의를 품고 은밀히 내사하기 시작했네. 실상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아내가 적의 간세라는 것을 믿지 않았었지. 하지만 모든 증거가 뚜렷했기에 어쩔 수 없이 감금했던 것이네. 그 분은 식음을 전폐하고 그 일을 조사했네. 그리고 마침내……. 이 몸이 그녀를 모함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지." 유비옥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결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지. 결국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생의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지. 며칠 후 그는 핏덩이 하나만을 안고 대화성을 떠나고 말았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몸을 죽이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 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네. 대신 영원히 내 곁을 떠나고 말았지." "……!" 유비옥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단리옥상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않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너무나 비극적인 얘기에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듯했다. 우문수연은 두 남녀를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네." 그녀의 음성은 담담했다. 마치 모든 것들을 초월해 버린 듯했다. "그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난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게 되었네. 하지만 그때는 그저 마음이 약간 아플 정도였지. 그 후 난 단리금천 그 분과 혼인했네. 그 분은 오랫동안 날 사랑했을 뿐더러 아버님께서도 그와 맺어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계셨었지." "……." "나는 유철심이란 분을 영원히 가슴에 묻기로 하고 혼인해 버렸네. 그것으로 과거는 모두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니었네.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저지른 잘못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왔네. 그 사이 냉성과 옥상 두 아이를 낳았지만 괴로움은 점점 더해가기만 했네. 죄책감으로 인해 내 마음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았네. 결국…… 난 모든 것을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네. 부군에 대한 것도……, 내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아무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곳에 불당을 지었네. 그 날부터 참회의 불공을 드리 며…… 언젠가 업보를 풀 날만 기다리고 살아왔다네……."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우문수연의 긴 이야기가 끝났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휘이이잉……. 불당의 창 밖으로 한풍이 몰아치는 듯 바람소리가 울렸다. 풍경 소리가 묻힐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우문수연의 입술이 열렸다. "그가…… 핏덩이인 자네를 안고 대화성을 떠나기 전에 이 몸에게 던졌던 시선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 그건……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네……. 흐흑……." 마침내 우문수연의 어깨가 들먹였다. 이제까지 침착하게 과거의 일을 고백했던 그녀는 더 이상 격동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주루룩……. 두 줄기 눈물이 우문수연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 유비옥은 온통 황폐한 표정이었다. 그는 반쯤 넋을 잃고 있었다. 그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전모를 모두 알게 된 지금, 그의 감정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분명 우문수연은 그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원수였다. 그렇다면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복수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허탈했다. 설사 복수한다한들 저승에 있는 어머니가 살아 돌아올 리는 만무했다. 그는 우문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과거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유비옥은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한편 단리옥상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유비옥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유비옥의 어머님을 그토록 비열한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본래 그녀는 어머니의 복수를 유비옥을 통해 해 보려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복수를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유비옥이 아닌가? 이때 우문수연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몸은 할 말을 다했다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었네." "……." 유비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몸은 그 날 이후로 괴로움 속에서 세월을 보냈네. 부처님 앞에서 이렇게 참회하면서……. 하지만 이런다고 업보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아미타불……. 자네가 왔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네." "……?" 유비옥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뻤다니? "이제야 비로소 죄값을 치르게 됐으니 말이네." 우문수연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유비옥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분노의 복수검을 휘두르면 달게 응징을 받겠다는 모습이었다. 유비옥의 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그는 오랫동안 우문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무정검이 몇 번이나 흔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비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이를 악문 다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혹시 잊으셨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모친의 이름은 강설란. 물 강(江), 눈 설(雪), 난초 난(蘭)자입니다. 단지…… 열흘 동안만이라도 그 분의 신위 앞에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빌어주신다면…… 저는 이곳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겠습니다." "……!" 우문수연은 물론 단리옥상까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가 이토록 쉽게 용서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유비옥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우문수연이 충분히 참회했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그녀는 죄값을 치른 셈이었다. 은원(恩怨)이란 과거의 것이었다. 그것으로 우문수연을 제재한들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도리어 그의 마음만 더욱 괴로울 것이고 또 하나의 새로운 원한만을 파생하지 않겠는가? 모친의 억울한 죽음과 부친의 한도 이미 흘러간 과거의 것이었다. 결국 그는 어려운 용서를 결정한 것이다. 우문수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바닥에 엎드렸다. "아아! 고맙네. 정말 고맙네. 이제야 이 몸은…… 햇빛을 볼 자격이 생긴 것 같네." 우문수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유비옥은 몸을 돌렸다. 그는 불당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밖에 나서자 세찬 밤 바람이 옷자락을 찢어 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삭풍이었다. 하지만 유비옥에게는 그 바람이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 그는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쪽 하늘에 북두성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머님…… 소자는 저 여인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는 북두성을 향해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3 "잠깐만 기다리세요!" 단리옥상은 다급히 외치며 신형을 날렸다. 쇄심당에서 나온 유비옥이 야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차례 신형을 도약하여 유비옥의 앞에 내려섰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안돼요. 지금 가시면……." "……." 유비옥은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쇄심당 주변은 금역입니다. 그래서 대화성의 무사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한 발자국만 나가면 달라집니다. 당신은 금세 공격을 받을 거예요." 유비옥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단리옥상은 다시 그의 앞을 막았다. "아아! 제발 부탁이에요.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해도 조부님을 뵐 수 없어요. 차라리 제게 맡겨 주세요. 조부님을 만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유비옥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를 만날 수 없지?" 단리옥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부님은 이곳에서 신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따라서 그 분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대화성 무사들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이미 이곳 사람들의 눈 밖에 났어요." "후훗!" 유비옥은 냉소를 흘렸다. 그는 밤 하늘을 올려보며 차디차게 말했다. "소생은 그런 면이 싫소. 당신의 조부는 신이 아니오. 그도 똑같은 무림인일 뿐이오. 다른 사람보다 나은 조건과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오. 그런데 만날 수 없다니, 난 인정할 수가 없소." "그……그게 아니에요!" 단리옥상의 음성이 문득 높아졌다. 그녀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유비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본성의 무사들과 싸우게 되면 당신은….. 영원한 적이 되고 말아요. 그럼 저……저와는……. 그게 두려워요." 단리옥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유비옥은 흠칫했다. 몹시 뜻밖이란 느낌이었다. 단리옥상은 본래 그를 경멸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태도는 돌변하고 말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다소곳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애틋한 감정을 노출시키고 있지 않은가? 유비옥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뜻은 알겠소. 하지만…… 지금 나는 당신의 마음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구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산이 막히면 산을 뚫고, 바다가 가로놓이면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진정한 장부의 도리요. 설사 만난(萬難)이 있더라도 소생은 돌아가지 않겠소. 길을 비키시오. 단리 소저." "……!" 단리옥상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그녀의 눈이 유비옥을 바라보았다. 유비옥은 그녀의 눈길을 피해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단리옥상은 그와 눈길을 마주치려 했으나 소용 없음을 알자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인가? 그토록 도도하고 자존심 강했던 그녀가 지금 한 사내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만일 그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아마도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달빛이 유비옥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단리옥상은 문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미안하오, 단리 소저." 유비옥은 그녀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단리옥상은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저만치 걸어가는 유비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저 분이 가시는 길을 지켜 주소서!" 4 정적. 그것은 폭풍전야(暴風前夜)의 정적 같은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최근 들어 무림은 조용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정적이야말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것이라고. 그것은 얼마 후에 닥칠지도 모를 피비린내 나는 혈겁의 전조(前兆)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혈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인살막이 일으키는 혈풍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전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무림 곳곳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명문대파인 점창파(點蒼派)가 가장 먼저 혈세(血洗) 당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점창을 폐허로 만든 백인살막은 곧이어 산동(山東)으로 향했다.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 내려오던 악씨세가(岳氏勢家)가 그들의 살겁에 멸문(滅門)하고 말았다. 백인살막의 혈보(血步)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예고도 없이 각 문파와 무림의 명숙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혈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전 무림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곳곳에서 이는 피바람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백인살막의 횡행에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이번에는 변황무림이 준동(蠢動)하기 시작했으니……. 대화성에 의해 물러갔던 흑련사(黑聯社)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 동시에 밀어닥친 것이었다. 무림인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들의 눈길은 어쩔 수 없이 한 곳으로 향했다. 대화성(大華城)! 무림의 수호신인 대화성이 나설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대화성은 묵묵부답이었다. 무림 곳곳에서 혈풍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수십 년간 무림의 중추 역할을 해 왔던 대화성은 도무지 요지부동인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무림인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화성은 골치를 앓고 있었다. 중원무림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도무지 요지부동인 대화성은 대화성대로 뜻밖의 인물로 인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것은 겁 없이 대화성으로 뛰어든 한 청년무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대화성주를 만난다는 핑계로 대화성을 온통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대화성주 검작 우문좌하는 무림의 신이었다. 한데 그는 단신으로 대화성에 뛰어들어 우문좌하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리고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대화성을 흔들어 놓고 만 것이었다. 그는 연일 소란을 일으켰다. 거대한 대화성은 단 한 인물로 인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대화성의 수천 명에 달하는 무사들은 그를 잡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청년무사는 신출귀몰했다. 그는 좌충우돌, 대화성의 무사들과 대적하면서 효과적으로 자신을 알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를 포위했지만 그때마다 대화성의 무사들은 번번이 그를 놓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대화성의 자존심이 완전히 뭉개지고 만 것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유비옥이었다. 철검무정(鐵劍無情) 유비옥의 행동은 전 무림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대화성의 무사들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검작 우문좌하의 처소로 점점 접근해 가고 있었다. 호천령주 나후성은 혈안이 되어 그를 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완전히 제쳐둔 채 그를 추적하는 데 혼력을 다하고 있었다. 대화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사태는 대화성을 경악시킨 것은 물론, 무림에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편 유비옥은 점차 우문좌하의 처소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수십 회가 넘는 격전을 치렀다. 호천령주 나후성이 이끄는 호천단(護天團)의 무사들과 수없이 격돌했다. 그 동안 그는 우문좌하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천단의 우문좌하에 대한 충심은 가히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도외시한 채 우문좌하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유비옥은 처음 그들이 우문좌하를 신으로 우러러보는 것에 대해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를수록 그들의 굳건한 믿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인간이 이토록 타인에게 군림할 수 있다니…….' 그런 생각이 들수록 그의 오기도 강해졌다. 기필코 우문좌하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한편 그는 호천단과 대립하는 동안 뜻밖의 수확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새삼 무도(武道)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수백 명의 호천단 무사들은 모두가 강호에서는 일류급 무인들이었다. 그런 그들과의 대결을 통해서 무학의 오묘한 이치를 하나씩 깨달아가게 된 것이었다. 더불어 그의 마음도 차츰 평정(平靜)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이제 생각났다. 그는…… 무영천살이었다.' 그는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첫날 천화원에서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던 청의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바로 무영천살이었던 것이다. '과연 그 자는 이곳에 잠입했구나. 그렇다면 그의 목적은 호천중일 것이다.' 유비옥은 확신했다. 모습은 달라졌지만 눈빛은 무영천살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의 목적은 호천중에게 복수하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 동안 그는 많은 생각을 했다. 호설릉의 말에 의하면 우문좌하도 호천중의 의중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호천중을 방임하고 있었다. 그가 우문좌하를 만나려는 이유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유비옥은 검으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카캉! 불꽃이 튀고 두 자루의 검이 날아갔다. 다급한 신음과 함께 2명의 호천단 무사들이 나뒹굴었다. 다행히 그들은 손아귀가 찢어졌을 뿐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유비옥은 다시 3명의 무사들 사이로 파고들며 검을 수평으로 펼쳤다. "헉!" "크으……." 3명의 무사들은 연달아 뒷걸음질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유비옥은 재차 비호처럼 포위망 사이로 파고들며 연달아 6명의 무사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면서도 살상(殺傷)은 자제했다. 그가 대화성에 온 목적은 우문좌하를 만나기 위함이지 살인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후성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유비옥을 열 번도 넘게 대적했지만 그때마다 불가사의한 느낌을 받곤 했다. '정말 기이한 놈이다. 어찌하여 시간이 갈수록 강해진단 말인가?' 그가 어찌 알겠는가? 유비옥이 호천단 무사들과 격전을 벌이면서 허검(虛劍)의 오의를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후성은 안색이 싹 변했다. 차차차창! "크흑!"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비명이 꼬리를 물었다. 호천단 무사들이 허수아비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가면 성주의 거처였다. 우문좌하를 신처럼 신봉하는 나후성으로서는 유비옥을 더 이상 접근시킬 수가 없었다. 그는 진기를 돋워 버럭 외쳤다. "모두 들어라! 죽음으로써 저 자를 막아라! 너희들의 행동 여하에 따라 대화성의 명예가 달려 있다. 성주님의 거처를 사수하지 않으면 모두들 죽음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는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대화성에 투신한 지 근 15여 년, 자칫하면 그 동안의 노역이 물거품이 될 판국이었다. 쩡! 나후성은 검을 뽑은 후 유비옥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뻗쳐 나오고 있었다. 유비옥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풍림(淸風林)이란 이름의 숲이 근처에 있었다. 울창한 숲 위로 한 채의 전각(殿閣)이 보였다. 전체가 흑색을 띤 전각은 마치 거대한 탑(塔)을 연상케 했는데 숲 한가운데 우뚝 솟아 마치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유비옥은 가슴이 진탕하는 것을 느꼈다. '저곳이다. 대화성의 신이 있는 곳. 그러나 이제는 신비의 막을 내려야 할 것이다.' 청풍림 속에 있는 전각은 대화성주 검작 우문좌하의 거처였다. 이제 그는 마지막 관문에 들어선 것이다. 호천단 무사들의 눈빛이 사뭇 비장한 것은 상황이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유비옥은 결심을 굳혔다. 호천단 무사들의 수효는 어림잡아 100여 명 이상이었다. 그들만 뚫으면 우문좌하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유비옥은 나후성을 바라보았다. 강골(强骨)의 사나이였다. 그는 단순한 성격이었으나 우문좌하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했다. 그는 검을 움켜쥔 채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강골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유비옥은 진기를 한 바퀴 돌렸다. '더 이상 끌 수는 없다. 오늘은 결론을 내고 말리라.' 그는 나후성이 그다지 밉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비옥! 사생결단을 내자!" 나후성은 그의 앞 1장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유비옥은 차갑게 냉소했다. "후훗! 널 죽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 소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유비옥은 무정검을 중단으로 움직였다. 주위의 무사들은 겹겹이 에워싼 채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만일 나후성이 꺾인다면 그들도 모두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결코 순조롭지 않겠구나.' 유비옥은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나후성의 안색이 싹 변하는 것이 아닌가? 유비옥은 의아했다. '무슨 일이기에……?' 나후성하는 갑자기 검을 늘어뜨리더니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라도 한 듯 공손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유비옥은 더욱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나후성은 눈썹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검을 허리에 도로 차더니 그를 향해 말했다. "가라, 유비옥. 널 막지 않겠다. 그 분께서 널 만나고자 하신다." "……!" 유비옥은 흠칫 놀랐다. 그는 시선을 청풍림으로 돌렸다. 우뚝 솟아 있는 전각. 그곳의 주인이 그를 청한 것이다. 그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후성은 비위가 틀린 듯 내뱉었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어서 숲으로 들어가라. 하지만 그 분을 만나면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비옥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며 말했다. "나후성, 당신은 진정한 장부요. 당신을 오랫동안 기억하겠소." "……!" 나후성은 뜻밖인 듯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숲으로 사라지는 유비옥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긴……. 입장만 아니라면 나도 네놈이 마음에 든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