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광
장덕호(68세)는, 한때는 원동기의 대명사로 일컬어졌던 88(대림, 80cc)을 닦고 있었다. 수돗물 아까운 줄 모르고 흠뻑 적신 뒤에 퐁퐁 묻혀 구석구석 훔쳐내기를 세 차례. 김치 담고 있던 아내에게 남우세당하고 있는 것도 못 알아챌 만큼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마침내 유월 땡볕에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행주로 물기를 가셔냈다. 덕호는 검은 선글라스를 쓴 뒤에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 오토바이와 나란히 서서 짝다리를 짚었다. 할망구 어떤가? 신성일이 뺨치나? 이른 점심 자시더니 가관이시네유. 생전 안 닦던 오토바이 광을 내질 않나, 신성일이 들으면 기겁할 말씀 하시질 않나. 임자 결전의 날이 밝았구만. 아내는 중천에 뜨겁게 떠 있는 해를 흘깃 보았다. 날 밝은 지가 언젠디. 덕호는 오토바이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어떤 다방이서 죽치실 거래유? 긴급 사항 있으면 바로바로 연락혀드려야쥬? 해튼 할망구하고는. 국가고시 보러 가는 길이여. 구까고시 다방유? 알것슈. 댕겨오슈.
새낭골 당구장 젊은 사장이 초크 가루 묻은 손으로 가슴을 비비댔다. 오늘은 왜 안 만지나 했다. 서초애(18세)는 찻잔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했네? 사장이 브래지어 끈을 퉁겼다. 가슴 언저리가 따끔했다. 사흘에 한 번은 해. 왜? 계속 안 하면 처지잖아. 사장의 친구들(알아보나마나 백수임에 틀림이 없는)이 성화를 했다. 임마, 안 칠 거야. 쳐야지. 사장은 큐를 비스듬히 세우고 초크질을 했다. 초애는 보자기 네 귀퉁이를 잡아 매듭을 엮고는 일어섰다. 사장이 방금 때린 흰 공이 저쪽 벽에 부딪고 돌아나와 빨간 공 두 개를 차례로 맞혔다. 벌써 가려고? 시험본다니까. 초애는 카운터에서 기다렸다. 사장은 보름 전 아이엠에프 타령을 한 사발 늘어놓더니 공 닦는 애를 내보냈다. 한 오 분이 지난 뒤에 사장은 큐를 든 채로 왔다. 사장은 금전관리기를 열어 동전까지 정확히 셈해주었다. 검은 지갑에 지폐는 지폐대로 동전은 동전대로 챙겨 넣는데, 사장의 큐 끝이 미니스커트 자락을 들먹였다. 검은색이네. 실큰가? 오빠, 가께. 오늘밤 어때? 초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 출입문을 밀어젖히는데 사장의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시험 잘 봐라.
박정수(18세)가 다니는 명실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아이들은 대개 학교의 자랑인 연못가에서 쉬는 시간을 보냈다. 정수는 예닐곱의 급우들에게 둘러싸여 신나게 말발을 세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정수에 대한 존경심, 부러움, 열등감 같은 감정들이 표나게 어려 있었다. 아까부터 느티나무께서 얼쩡거리고 있던 혜수가 결심한 듯 다가왔다. 정수가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자, 눈치를 챈 급우들은 시샘 어린 얼굴을 하고 자리를 비켰다. 혜수는 수줍은 척, 붉은색 포장지로 둥글고 길게 싼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뭐야? 뜯어봐. 포장지를 뜯는 정수의 흰 손이 가늘게 떨렸다. 깨엿 두 가락이었다. 고마워. 불쑥 나타난 시커먼 손이 엿가락을 채갔다. 옥외 화장실로 담배 피우러 갔던 조만기(18세)였다. 혜수가 눈 흘기며 종알댔다. 넌 먹지 마. 나도 시험치는데? 혜수가 엿을 도로 빼앗아 정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쟤 주지 말고 너만 먹어. 치사하다. 치사해. 안 먹는다. 안 먹어. 4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연못가의 아이들은 부리나케 교사를 향해 뛰어갔다. 시험 잘 봐. 정수에게 다정하게 속살거린 혜수도 교복 치마를 출렁거리며 멀어져갔다. 곧 연못가에는 정수와 만기만 남았다. 둘은 바위 옆에 던져놓았던 책가방을 메고 교실이 아닌 교문을 향해 슬슬 걸어갔다. 만기가 깨엿 한 뭉텅이를 베어 물고 으드득거렸다. 넌 좋겠다. 이 녀석들 보게. 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별명이 해골인 교감이었다. 안녕하세유. 안녕은 접어두고 시방 뭐하는 작태여? 오토바이 시험 보러 가는듀. 담임선생님한티 얘기혔슈. 오토바이 시험? 예. 면허증 따서 뭐하게? 이유 없는 반항 할라구?정인혜(35세)는 경찰서 3층 회의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운전면허 시험 문제집을 펼쳐놓고 한 자라도 더 외우기 위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인혜는 경찰서에 들어오기 직전, 그러니까 한 시간 십 분 전에 문제집을 샀다. 필기시험 장소인 텅 빈 회의실에 입실하여 벼락치기에 몰두, 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중학교 졸업 이후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해보는 공부였다. 열두시 사십분께 이등으로 들어온 명옥희(43세)가 아는 체를 했다. 이게 누구시래유? 우유 배달 아줌마 아닌감유? 인혜도 옥희를 알아보았다. 동화 1차 아파트 105동 303호 안주인으로서 딱 부러지는 으뜸 고객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우유값 가지고, 내일 와라, 일 주일 뒤에 와라, 다음달에 받아라, 하면서 여러 걸음 시키길 예사로 아는 여느 사모님들이 본받아야 마땅할, 제날짜에 제값을 제꺽제꺽 치르는 깔끔한 아줌마였다. 아줌니도 면증 따시게유? 갖고 있으면 폼날 것 같아서유. 근디 아줌마도 면증이 없었슈? 없었쥬. 쯩 없으면 짤라버리겠다고 난리잖아유. 그렇구만잉. 노가다판에서 이력서 써 갖고 오라는 푼수구만잉.
경찰서 정문 앞에는 신호등이 있었다. 빨간 불로 바뀌어 막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려던 시내버스 운전사는 기겁을 해서, 황급히 발을 떼었다. 갑자기 뛰어든 테트(대림, 50cc) 세 대가 부다다당 지나치고 있었다. 오토바이에는 각기 다음과 같이 눈에 잘 뜨이는 글자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일출다방 96∼3476. 아미타불다방 33∼0989. IMF다방 452∼6754. 저 쌍년들을 그냥! 운전사의 악다구니를 모르쇠한 아가씨들은 정문 앞에서 제지당했다. 작대기 두 개짜리 계급장을 단 전경이 절도 있게 경례를 붙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인자(19세), 심정희(21세), 구원정(26세)은 한마디씩 이기죽거렸다. 어떻게 오긴, 잘 왔지. 새로 오셨나봐. 구엽게 생기셨네. 전경은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정문 초소 파란색 비닐을 덧씌운 쪽문이 열리고, 작대기 네 개짜리 계급장을 단 고참 전경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라, 연합전선이네. 누가 어느 다방 커피가 제일 맛나나 시음회라도 여나 보지요? 신삥 교육이나 잘 시키셔. 쟤가 뭔 실수라도 했나요? ‘쟤’라는 발음에 신임 전경은 부동 자세를 취한 뒤 예, 이경 박진만! 하고 기합 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원정은 짐짓 거친 목소리로 꾸몄다. 레지들도 몰라보고 쓰것어. 고참 전경은 씨익 웃었다. 어서들 들어가세요. 늦으시겠어요.
한시 오 분 전에 입실한 명실고등학교 정인재(18세), 김성인(18세), 양치현(18세)은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들 좆나게 많다. 저 나이 먹도록 뭐 했다냐? 저 나이쯤 되면 기사 붙여갖고 그랜저 끌고 다녀야지, 쪽 팔리게 원동기 시험 보러 오냐? 그래도 저 할아버지들이 정주영이 그런 애들보다 더 열심히 살으셨을걸. 무슨 소리야? 평생 뼈빠지게 열심히 일한 사람일수록 가난하고, 뺀질뺀질해도 교활한 인간일수록 뻔드르르하게 산다는 거지. 인재와 성인이 멀뚱하니 대꾸가 없자, 치현은 말끝을 이었다. 난 말야, 하면 된다, 땀 흘린 만큼 얻는다, 베짱이보다는 개미가 되어라, 같은 말들이야말로 우리가 배운 최고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구조적으로 모순된 사회지. 성인이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뒤 종이컵을 우그러뜨렸다. 시발, 어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딴 소리는 집어치워라. 인재가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키듯 그들처럼 교복 차림인 세 아이를 가리켰다. 쟤들 대고 애들 아니냐? 맞아, 저 새끼들 토요일날 난리가 아니었대지. 완전히 영화 찍었대. 시발, 재미있었겠다.
어느 다방 냄비들인가 젖통 한번 큼직하네. 정원형(62세)은 옷차림이 유난스러운 아가씨들 쪽을 흘깃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벗든가, 좀더 입든가, 거참 살벌나게 입어번졌네. 저게 그래도 시험친다고 한 가지씩 덧입고 온 행색일 것이라고 원형은 생각했다. 아엠에뿌 땜이 다방물 하나는 맑아졌당께. 가까이 앉은 이재만(63세)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아엠뿌가 뭔 죄 있다고 사사건건 아엠뿌를 붙인댜. 아니, 그럼 내 말이 글렀는가. 거 뭐냐, 니, 거 단란주점이니 룸싸롱이니 하는 것들이 손님 없어 문 처닫는 시국에 김대중이 유곽 때려잡겠다고 설치는 시점 아닌개비. 배운 거라고는 뭐 파는 재주밖에 없는 가시나들이 어쩌것어. 급수 떨어지고 들어오는 돈냥 적어도, 날라야지. 찻잔이 금잔이니 하고. 마담들이 팔자 좋아졌지. 메주가 굴러들어와도 고맙수 환대하던 사람들이 이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푼수로다 골라서 쓰잖남. 그런가? 나는 당최 물 사정에 어두워서 말이여. 긍께 논두렁에만 박혀 있지 말고, 나돌아댕기면서 살란 말이여. 그건 그려. 근디 저 양반은 밤새 선녀 꿈을 꿨나베. 원형이 가리킨 사람은 흰머리가 검은머리보다 훨씬 많은 서용호(65세)였다. 접수 번호순으로 앉게 되어, 자신과 같은 늙다리들은 대개 이른 번호를 받아 창가 쪽에 몰려 있었는데, 유독 용호만은 번호가 늦었는지, 아가씨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끼여 있었다. 재만이 코웃음쳤다. 꽃밭에 썩은 좆이 따로 없구만.
아따, 증말 어지간히들 떠드시네유. 조용히 좀 해보슈. 김 순경은 숫제 악을 써댔고, 곁에 서 있는 손 경위는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간간이 하품을 해댔다. 할아버지 조용히 해보시라니께유. 그 사람 점심에 뭘 삶아먹었간디 소릴 빽빽 지르고 그란댜. 그렇지 않혀도 간당간당하는 귀청 그예 터져버리것네. 거기 고등학생들, 자네들이 배우는 사람답게 솔선 수범 정숙해야 될 꺼 아녀? 김영수(17세)가 박복진(17세)의 머리통을 때렸다. 애만 조용히 하면 된대유. 아가씨들도 좀 조용히 혀보슈. 구원정(26세)이 말대답을 했다. 미안허유. 침묵은 금인디, 그쥬? 웅성거림이 겨우 잦아들었다. 시험에 앞서 몇 가지 말씀드릴 테니까 귀담아들으세요. 그럼 귀로 듣지 항문으로 듣남. 이만길(58세)이었다. 응시원서 다 갖고 왔쥬? 응션서가 뭐랴? 손에 들고도 모르남. 잉, 이거. 홍석진(65세)의 가르침에 이성만(66세)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응시원서를 꽉 움켜쥐었다. 조용히 하시고 잘 들으시란 말유. 시험중에 자꾸 질문해쌓지 마시고…….
김 순경의 열변을 간추려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응시원서를 책상 오른편에 놓아라. 8절지 문제지와 16절지 답안지, 각각 한 장씩을 나누어 줄 것이다. 문제지에는 절대로 볼펜을 대지 마라. 문제지가 열 종류로 대개 서로 다른 유형의 문제지를 받게 될 것이니, 옆에 사람 것 싹 베끼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오십 분 동안 시험을 본다. 다 푼 사람은 나가도 좋다. 답안지는 엎어놓고 나가라. 문제지도 가지고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니까 책상에 문제지, 답안지, 응시원서 이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어야 한다. 김 순경의 끝말은 이랬다. 질문이 많으실 걸로 압니다. 질문 받다보면 해 다 가니께, 질문은 문제 풀면서 그때그때 받는 걸로 하것습니다.
문제지와 답안지를 나눠 주던 손 경위는 석수삼(67세) 곁에서 잠시 멈추었다. 이번이 몇 번째시쥬? 수차례 되지. 나도 자세히는 믈러.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있간디. 그류, 칠전팔기라는 말도 있슈. 오늘은 잘 좀 찍어보슈. 그려, 나가 오늘은 찍는 연습까장 하고 온 사람이여. 김 순경은 대꽃다방 김진이(23세)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다. 공부 좀 했나? 할 게 따로 있지. 진이의 천연스러운 대꾸에 뒷자리에 앉은 임민석(25세)은 풀풀 웃었다. 느덜은 어느 학교 댕기냐? 손 경위가 떼로 앉은 교복 입은 아이들에게 대중없이 물었다. 키 큰 장택기(17세)가 대답했다. 여러 학교서 왔슈. 지글지글 볶은 머리를 한 신양희(40세)가 문제지를 훑어보고는 체머리를 흔들어댔다. 보는 순간 어지러운 것이 대책이 없어번지네. 순경 아저씨, 컨닝구하면 안 되남유? 옆자리에 앉은 지성호(40세)가 대신 응했다. 자유 민주 대한민국인디 안 되는 게 어디 있것슈. 요령껏 하슈. 우리가 이냥 나란히 앉은 것두 인연인디, 상부상조혀감서 잘 좀 풀어보쥬. 얼레, 이 아저씨가 추파를 던지네. 그게 다 아줌니 시들지 않은 미모 탓이쥬. 아무헌티나 던지는 게 추파가 아니잖남유? 큰일 낼 양반이시네. 우리 죽은 남편 레이더에 포착되면 작살날 틴디. 김기석(30세)이 헬멧을 쓴 채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오토바이 타구 왔어요? 급한디 어쩐대유. 최고 시속으로다 날러왔쥬. 뭐, 잘못 됐남유? 얼른 들어가슈. 김 순경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다는 듯이 문제지와 답안지를 내주었다.
석수삼(67세)은 문제 풀 생각은 않고 눈 감고 있었다. 눈을 번쩍 뜬 그는 한순간 도통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그는 문제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답안지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1번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2번에도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는 마지막 50번까지 모두 동그라미만을 그렸다. 수삼은 뿌듯한 얼굴로 이름 적는 난에 이름 석 자를 빼뚤빼뚤하게 적어 넣었다. 그가 유일하게 쓸 줄 아는 글자였다. 수삼과 마찬가지로 오리 놓고 리을 자도 못 알아보는 이태형(72세)은 1번 O, 2번 X, 3번 O, 4번 X 하는 식으로 동그라미와 가위표를 번갈아 그렸다. 답안지 작성을 끝낸 태형은 순경을 불렀다. 어이, 이리 좀 와보셔. 이름 좀 써줘야 디겄어. 알았슈. 나가 계슈. 그려, 오늘은 붙을 꺼 같응께 멋있게 좀 써줘 잉. 김 순경은 태형의 답안지를 보고 한마디했다. 그 할아버지 참, 동그라미면 동그라미, 엑스면 엑스, 하나로 밀어붙이는 게 확률이 높다니께. 평생을 일자무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또 있었다. 민철해(65세). 게다가 그는 수삼이나 태형처럼 몇 번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필기시험을 보는 거였다. 답안지와 답안지보다 두 배 더 크게 생겨먹은 문제지를 눈앞에 두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리사니가 잡히지를 않았다. 옆자리 양성정(59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보슈. 이거 어떻게 해야 되는 겨? 당최 모르것어. 낸들 알간듀. 잘은 모르것구, 작은놈(답안지)이다 동그래미 아니면 각기표를 긋는 것인 모양이유. 뭣이라고? 땡그라미를 어쪄? 성정은 손 경위를 불렀다. 여기 좀 봐유. 이 할아버지 까막눈인 것 같은디 설명 좀 자세히 해주셔야 되것오. 경위는 철해의 깨끗한 답안지를 보고는 말했다. 처음이쥬? 뭐가? 시험 말유. 시헴? 말하면 잔소리지. 난 국민핵교도 귀경 못 하고 산 사람여. 볼펜을 잡으세유. 니, 잡았어. 요기 칸에다 동그라미나 가위표 중에서 아무 거나 해보세유. 뭘 어쩌라고? 경위는 방금 가리켰던 칸에다가 직접 동그라미를 그렸다. 2번 칸에는 가위표를 그렸다. 이런 식으로 하시란 말유. 그럼 되는 겨? 그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글자는 읽고 살았으나 지금은 돋보기를 쓰고도 우리나랏말인지 미국말인지 구별 못 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도 경위와 순경을 자꾸만 불렀다. 글자 해독 능력이 없는 노인들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질문 없이 답안지를 꾸미고 나가는 사람들은 몇 달에 걸쳐 부단히 드나드는 경험자들이었고, 자꾸만 질문을 해대는 부류들은 오늘이 첫 경험인 응시자라고 보면 틀림이 없었다. 질문은 오히려 글자 해독 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노년들에게서 더 많았다. 글자는 읽었는데 뜻을 이해하지 못해 구절풀이를 해달라는 주문이 속출하는 것이었다. 아예 답을 가르쳐달라고 대놓고 졸라대는 사람도 있었다. 동그라미를 큰놈(문제지)에다 쳐야 되는지 작은놈(답안지)에 그려야 되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이름을 어디다 적어야 되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아까 설명해줄 땐 뭐했슈? 백 번을 차근차근 얘기혀도 못 알아들을 판국인디, 기차 달려나가듯 쏘아붙인 걸 무슨 수로 알아듣는댜. 문제지에 낙서를 하지 말라고 했것만 기어이 낙서를 하고야 만 사람, O표에 두어 줄 쓱쓱 그어놓고 그 옆에 X 적으면 무조건 틀린 거라고 강조했건만 하고야 만 사람, 경위와 순경은 한 말 또 하느라고 입을 쉴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회의실을 나간 것은 임민석(25세)이었다. 그는 시험지 받은 지 삼 분 만에 답안지를 덮어놓고 나갔다. 고등학생들도 경쟁 붙은 듯 앞다투어 퇴실했다. 십 분 안에 못 나가고 미루적거리고 있으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쪽팔리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가씨들과 청장년 축도 금세 나갔다. 몇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심탄회하게 찍어버린 노인들도 빨리 나간 편에 속했다. 시험 개시 이십 분이 넘도록 의자에서 엉덩이를 못 뗀 사람들은 대부분의 노년층과 몇몇 아주머니들이었다. 노년층은 어찌 되었든 버티고 있으면 무슨 수가 날 거라고 믿는지, 쉼 없이 부산떨며 두 경찰을 괴롭혔다. 아주머니들은 백일 불공 드리러 온 신실한 신도처럼 지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박말자(50세)의 경우 문제를 다섯 번씩 거듭하여 읽었으며, 동그라미와 가위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쇠다리도 두드려보는 조신함을 보였다.
경찰서 구내식당은 필기시험을 일찍 끝내고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바깥 날씨 덕에 대형 선풍기 두 대가 탈탈탈 돌아가는 식당은 때 아닌 성수기를 맞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원한 것 하나씩 사서 빨거나 홀짝였다. 김영수(17세), 이무진(17세), 최철민(17세)도 오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아껴 먹으며 ‘블명대전’을 떠들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블명대전(블랙킹파와 명왕성파의 대격전)’으로 최종 정리된 패싸움 얘기는 그들이 지난 토요일부터 최신 정보를 덧붙여가며 재탕, 삼탕, 사탕 해먹고 있는 화젯거리였다. ‘블명대전’의 서막은 토요일 새벽에 올랐다. 대명고생 중심의 명왕성파 다섯과 상업고생 중심의 블랙킹파 하나가 해수욕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사소한 시비 결과 다섯이 하나를 묵사발 내놓았다. 비보에 접한 블랙킹파가 책가방을 팽개치고 짱돌, 쇠파이프, 사시미칼 등을 숨긴 채 오서대교에 집결한 것이 오전 열시였다. 블랙킹파는 4교시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명고 교문을 통과했다. 종례를 마치고 가방을 싸던 얼굴이 잘 알려진 명왕성파 하나가 느닷없이 난입해 들어온 블랙킹파의 사시미칼에 가슴을 찔렸다. 최신 정보에 따르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 기습적인 칼질을 신호로 명왕성파와 블랙킹파는 대명고 교정, 오서대교, 구시가지 등을 옮겨 다니며 다섯 시간 동안 난투극을 벌였다. 그날, 육 년 전에 실업계에서 인문계로 전환한 대명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실시해오던 자율학습(타율학습이란 말이 타당하겠지만)을 사상 처음으로 실시하지 않았다. 학교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니 서둘러 귀가하라는 교내방송이 있었다. 너덜만 좋아졌다잉? 철민이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쪽쪽 빨며 말했다. 무진과 영수는 명왕성파 타도를 꿈꾸며 새로이 들고 일어난 대명고 신흥조직 각설이파 회원이었다.
필기시험 응시자 마흔세 명 중, 여섯 명이 떨어졌다. 백 점 만점에 육십 점 이상만 맞으면 합격이었다. 총 50문항으로 한 문제당 2점이었으니까 탈락자들은 30문항을 못 맞힌 거였다. 모조리 동그라미를 그린 석수삼(67세)은 붙었다. 그가 받은 C형 문제지의 정답은 O가 33개, X가 17개였다. 동그라미와 가위를 번갈아 그린 이태형(72세)은 떨어졌다. 민철해(65세)도 첫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떨어졌다. 나머지 네 명의 탈락자 중 셋도 노인인 관계로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장만호(36세)가 떨어진 것은 의외였다. 무시라구요? 내가 불합격이라고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대유. 백 점을 맞아도 시원치 않은 판국인디 떨어져야. 초등학생도 눈 감고 풀 문제를 내가 틀려. 만호는 기어이 답안지를 확인해보았다. 아이구, 이 돌팍아. 자신이 작성했던 답안지를 들여다본 만호는 제 머리통을 마구 두들겼다. 그는 4번 문제를 깜빡 풀지 않고 넘어간 뒤, 한 칸씩 당겨서 정답을 적었다. 5번 답을 4번 칸에 적고, 6번 답을 5번 칸에 적는 식이었다. 문제를 다 푼 뒤 50번 칸이 비어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겨 실수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김 순경은 탈락자들에게 응시원서를 도로 내주었다. 이거 갖고 다음달에 오세유. 한 번 접수하면 일 년 동안은 계속해서 필기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필기시험을 일단 합격하면 일 년 동안 실기시험 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합격자들은 경찰서를 나와 실기시험 장소인 운전학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름길 도보로 이십 분쯤, 오토바이로는 오 분쯤 떨어져 있었다.
운전학원의 원동기면허 실기시험장은 한 달에 한 번 사용되는 탓에, 평상시에는 주차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차들이 衁자 코스, S자 코스, 턱 코스를 가뭇없게 가리운 채 빽빽이 주차되어 있었다. 연습할 요량으로 시험 예정 시간을 한참 앞당겨 온 박영진(65세)과 이윤호(68세)는 혀를 끌끌 차며 공원 나무그늘 밑 벤치에 앉아 낭패를 달래고 있었다. 그들과 좀 떨어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컵라면을 먹고 있는 양선우(18세)와 김석진(18세)도 재시험 응시자였다. 그들은 그깟 오토바이 시험도 떨어졌다고, 이미 면허를 딴 친구들로부터 한 달 내내 비웃음을 당했다. 그들은 억울했다. 선우는 1차, 2차 모두 선을 밟아 실패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 갔을 뿐 절대로 밟지 않았다고 믿는 선우는, 될 수 있으면 고등학생은 합격시키지 않겠다는 의도를 가진 경찰들의 도끼눈에 재수 없이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1차는 긴장한 나머지 넘어져서 실패했지만, 2차는 손톱만한 오점도 없이 잘 탔다고 자신하는 석진도 경찰에게 감정이 많았다. 제한시간 초과라니, 그건 터무니없는 억지 누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난 한 달 동안 자신들을 떨어뜨린 경찰들을 향해 다섯 양동이는 넘을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여고 3학년인 이은영(19세)도 재시험 응시자였다. 집에 들러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시험장에 다 와 가는데 배에서 요사스러운 소리가 났다. 아침도 굶었고 점심도 먹지 못했다. 주머니에 돈 같은 것은 없었다.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소식이 없어, 동생 하나 데리고 팔십 세에 육박하고 있는 조부모와 살고 있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소녀 가장이라고 불렀다. 소녀 가장은 뉘 집 자식들인지 귀티 잘잘 흐르는 꼬마아이들 셋이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은영은 꼬마들을 붙잡았다. 어느 학교 다니니? 청룡초등학교유. 몇 학년이니? 6학년유. 은영의 다정한 물음에 꼬마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풀지 못하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했다. 얘들아, 누나 무섭게 생겼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가 대답했다. 안 무섭게 생겼어유. 은영은 그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 너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되겠니. 이 누나는 아주 무서운 사람이란다. 어느 정도로 무서운지 보여줄까. 은영은 바지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냈고, 약간 뜸을 들였다가 팔뚝을 그었다. 핏줄기를 본 꼬마들은 울상을 지었다. 무섭지? 무서워유. 이렇게 무서운 누나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꼬마들은 벌벌 떨면서 지갑을 열고 주머니를 뒤집었다. 은영은 돈을 챙기며 물었다. 집에 가서 뭐라고 할래? 아무 일 없었다구유. 그렇게 말씀드리면 안 되지. 군것질했다고 해야지. 알았지? 은영은 꼬마들에게 빼앗은 돈 오천사백오십 원을 밑천으로 비빔밥을 사먹었고, 공원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았다. 은영은 담배도 피웠는데 그걸 본 양선우(18세)와 김석진(18세)은 못 볼 꼴 봤다는 듯이 들어도 좋다는 식으로 욕했다. 좆나 까진 년이구만. 똥통 들어가서 피우면 예쁘게라도 봐주지. 야, 고삐리들 나한테 씨부린 거야. 그럼, 여기 까진 년이 너말고 또 있냐? 이 씹새끼들이. 갑자기 날아온 은영의 발길질에 선우와 석진은 한 군데씩 얻어맞고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은영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한 대도 못 때려보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한 선우와 석진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은영은 분이 안 풀린 듯, 둘의 뺨을 세 대씩 후려쳤다. 이 광경에 박영진(65세)과 이윤호(68세)는 기가 찬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겨우 한마디씩 했다. 말세는 말세여. 여장부 났구먼.
원동기면허 시험장에다가 주차하신 분들은 조속히 차를 빼주시기 바랍니다. 시험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를 원동기면허 시험장에…… 안내방송이 몇 번이고 계속되었다. 실기시험 재응시자 다섯 명과 오늘 필기시험에 합격한 서른일곱의 응시자는 차가 모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 경위는 오토바이들을 살펴보았다. 오토바이를 가지고 온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 몇 달 전까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지 않는 사람들이 이용하라고 시험전용 오토바이 두 대를 따로 준비했는데, 낡은데다가 체형에 맞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았다. 해서 요즘은 아예 내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타고 온 것이나 만만하게 보이는 오토바이를 빌려서 실기를 보았다. 대개 다방 아가씨들의 테트가 각광을 받았다. 고등학생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는 대부분 각종 장신구를 장착한 125cc로 요란한 데가 있었다. 후위부를 높여 가장 튀어 보이는 VF(대림, 125cc) 앞에서 경위의 눈길이 매섭게 빛났다. 이거 누구 오토바이입니까. 이정욱(21세)이 자랑스럽게 나섰고 아이들은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불법 개존 건 알아, 몰라? 불법이라고요? 알았든 모르든 간에 압수니 그리 알아. 키 내놔. 해맑았던 정욱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얼른 내놓지 못해. 정욱은 열쇠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차들이 모두 빠지고 시험코스가 드러났다. 넓이 일 미터쯤 되는 衁자 코스, 길이 이십 미터쯤 되는 S자 코스, 마지막으로 높이 십 센티미터에 넓이 사십 센티미터쯤 되는 턱이었다. 시간 제한은 이십오 초였으며, 두 번의 기회가 있었고, 선을 밟거나 오토바이에서 발을 내려놓으면 실패였다. 미리 와 있던, 지난번 실기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던 사람들 중에 재응시하러 온 박영진(65세) 등 다섯 명이 첫 순서였다. 영진은 지난번처럼 다방 오토바이를 빌려 탔다. 운명의 衁자를 그리지 못하고 선 밖으로 이탈했다. 김 순경이 혀를 찼다. 연습 좀 하고 오시라니께유. 이기 연습한다구 되는 거라 말이야지. 선 밟아도 봐드린다니께 그걸 못 꺾으세요. 난들 안 꺾고 싶간. 영진은 2차 시도에서도 여지없이 실패했다. 다섯 차례에 걸쳐 열 번 시도해서 열 번 모두 衁자를 꺾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이윤호(68세)도 衁공포증 걸린 사람처럼 발발 떨다가 발을 내려놓고 말았다. 2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전 사패였다. 먼저 실패한 영진이 윤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안 되는 사람은 백날 혀도 안 되나벼. 글게 말여, 오토바이 면허 따기가 하늘 별 따기네. 한 달 동안 오토바이로 조간 석간 가리지 않고 신문을 돌려 실력이 무척 는 이은영(19세)은 1차에 합격했다. 양선우(18세)와 김석진(18세)도 무난히 합격했다. 재응시자 다섯 명 중, 셋은 붙고 둘은 떨어진 거였다.
오늘 필기시험에 합격한 서른일곱 명의 차례였다. 1번 장덕호(68세)는 몇 년 만에 때 빼고 광 낸 제 오토바이 88을 고집했다. 衁자와 S자를 우습게 통과했으나 턱에서 미끄러졌다. 긴장한 덕호는 2차 시도 턱 코스에서는 최대한 속도를 줄여 안전운행을 했다. 제한 시간에 십오 초나 늦은 사십 초에 통과했으나 손 경위는 합격을 선언했다. 2번 홍석진(65세)은 1차 시도에서는 衁자에서, 2차 시도에서는 S자에서 물을 먹었다. 석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상에 만만한 것은 없다는 말이 생판 그른 말은 아니었구먼. 양성정(59세)은 선을 마구 밟아대며 1, 2차를 마쳤다. 경위는 망설이다가 합격유, 해버렸다. 주일해(58세)도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다. 일해는 사 년 전 기가 막힌 일을 당해 쌓여온 울화를 한방에 털어버린 듯한 후련함을 맛보았다. 그해 여름 늦은 밤, 일해는 물꼬 보고 오다가 경찰들에게 잡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날 그 검문소 치들이 자정이 가까워가는 시각에 들판 한가운데 있는 비포장 도로에까지 나와 검문을 하고 있었던 연유는 하루에 세 건씩 기소중지자든, 무면허든 단속해내라는 경찰서 윗대가리들의 압력 때문이었다. 핏발 선 검문소 치들에게 잡혔으니 용코 없었다. 물장화 신은 발로 검문소에 끌려가 조서 쓰고, 한 달 뒤 원동기면허 없이 오토바이 몬 벌금 이십만 원을 에누리 없이 물고 말았다. 재수 없는 한여름밤의 악몽으로 치부하고 살기에는 너무나 기가 차고 원통 치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의 이 영광으로 울분이 그나마 좀 풀린 듯싶은 거였다. 노년층은 합격자 반, 불합격자 반이었다.
청장년 축은 1차에 긴장한 나머지 약간의 실수를 하는 사람은 다수 있었으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 합격했다. 유일한 탈락자인 이정욱(21세)은 오토바이를 빼앗긴 이후 넋빠진 얼굴을 하고 있더니 시험을 포기하고 사라져버렸다. 다방 소속 아가씨들은 선수였다. 모범 답안을 작성하듯 제한 시간 안에 사뿐히 통과했다.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해서 휘파람 연호와 박수를 받은 아가씨도 있었다. 고등학생들도 선수 뺨쳤지만, 손 경위와 김 순경의 날카로운 지적에 다섯 명이나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시험 응시자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노년층에게는 가능한 합격할 수 있도록 관대하게 적용되는 법이 고등학생들에게는 가능한 떨어지도록 철두철미하게 적용되었다. 선을 살짝만 스쳐도 경찰은 냉정하게 불합격을 외쳤다. 그러나 그 점을 대놓고 따지고 드는 응시자는 없었다. 떨어진 고등학생들은 경찰에게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꼬투리 잡힐 건더기가 없는 완벽한 솜씨를 보이지 못한 제 탓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태어나서 가장 사내답지 못한 짓을 방금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듯 몹시 낙담한 얼굴이었다. 박정수(18세)는 합격 판정을 받은 후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혜수의 호출기에 음성을 남겼다. 나야, 붙었어. 네가 준 엿 때문인가봐. 저, 거기서 기다릴게. 그럼 이따가 봐. 박말자(50세)는 합격 판정을 받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갔다. 오줌을 누러 간 게 아니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 없는 만세를 열 번도 넘게 외쳤다. 그녀는 감격과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명옥희(43세)의 감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이 부서지도록 급하게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 당신이유? 나유. 합격혔슈. 합격해버렸단 말유. 뭐라구요? 큰일하셨다구요? 그럼 큰일혔쥬. 내 평생 국가가 보장혀주는 증맹서를 딴 게 처음인디 나가 시방 감격 않게 됐슈. 뭐유? 잘 안 들려유. 예? 저녁때 콩국수 해먹자구유? 합격자들은 운전학원의 학과 강의실에 모여 손 경위로부터 반 시간에 걸쳐 안전교육을 받았다. 날도 더운디 시험 치시느라고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인자 안전교육 받으시고 집에 돌아가셔서 푹 쉬시다가 보름 있다가 교통계로 오셔서, 거 원서 접수한 디 있쥬, 거기 오셔서 면허증 찾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안전교육을 시작하것는디, 교육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할 건 해야 되니께 잘들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고등학생들, 자네들이 문제여. 자네들이. 어이, 거기, 여기가 학교여? 여기까지 와서 졸고 있게. 흠, 고등학생들은 특히 정신 똑바로 차려갖고 들어주기 바라면서, 자, 두서없이 대중없게 그냥저냥 막 생각나는 대로 유의사항을 말해보것습니다. 요목조목 차례 잡아 해봤자 우이독경하는 소리니께유. 파이버 꼭 쓰고 다닙니다. 파이버! 파이버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계시것지요? 여자분들한테 잠시 실례되는 말씀이것습니다만, 거 불알 같은 거 아니것습니까. 불알 떼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냔 말입니다. 앞으로는 불알 꼭 달고 다닙니다. 파이버 안 쓰고 다니면 불이익도 상당할 것입니다. 지가 교통순경을 대표히서 맹세하건대 앞으로 파이버 미착용으로다 걸리면 얄짜리 없이 딱집니다. 특히, 고등학생들. 자네들 파이버 쓰면 폼 안 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같은디, 폼 충분히 나니께 꼭 쓰고들 다니셔. 다음에 면허증 꼭 소지하시고 다니십니다. 면허증 다락 궤짝 속에다 꼭꼭 숨겨놓고 안 가지고 다니는 분들 많은디, 그럴라믄 뭐러 땁니까. 땄으면 동네방네 보란 듯이 자랑하고 다녀야 될 거 아닙니까. 냉혹한 말씀 같지만, 앞으로 면허증 안 가지고 다니셔도 에누리 없는 딱집니다. 알으셨쥬? 면허증 꼭 가지고 다닙니다. 다음은 특히 문제적인 고등학생 여러분을 위한 당분디 광분하지 맙니다. 오토바이에 엉덩이만 올려놓았다 하면 광분해버리는 경향을 보이는데, 광분은 절대 금물이여. 오토바이가 무슨 스트레스 해소용 애만 줄 아는 청춘이 많은 걸로 아는디, 어라, 이것도 교육이라고 벌써 오락가락하는 양반들이 쌨네. 어이, 눈들 뜨슈. 대충이라도 주워듣고 가야 될 거 아닌감유? 안 되것구먼. 그럼, 여기서, 잠을 깨우는 취지로다, 할아버지 눈 떠봐유. 이거 재미진 얘기닝께 들을 만할뀨. 잠을 깨우는 취지로다가 사고 사례 하나 얘기하고 넘어가것습니다. 이건 거짓말 한 자락 안 보탠 알짜배기 실화유. 작년에 발생한 사곤데, 특히 고등학생 자네들 잘 들어. 자네들의 친구들이 일으킨 사고닝께, 배울 점이 많을껴. 새벽 두시였습니다. 시티백(대림, 100cc)이라고, 크지도 않은 쥐꼬리만한 오토바이에 셋이나 탔다는 겁니다. 난 당최 이해가 안 가는디 제우 열여덟 살 먹은 소년 둘, 소녀 하나가 왜 새벽 두시 그 지랄빼기하고 있었느냐 말야. 어쨌거나 시티백 엔진 후달리거나 말거나 요것들이 백십, 백이십 막 밟아댔단 말입니다. 자, 오수대교에서부터 빠다다당 죽을 줄 모르고 달립니다. 어찌 되것습니까. 결과는 뻔에 뻔자였지 뭐. 명대 들어가는디 교차로 있죠, 잉? 거기서 트럭 한 대가 슬며시 나왔던 겁니다. 박치기 확실히 났습니다. 맨 앞에 운전했던 남자애, 이십칠 미터 날아갔습니다. 당연지사 즉사했고, 가운데 탔던 낭랑 18세 소녀, 십팔 미터 날아갔습니다. 심각한 중상. 그 다음 마지막 탔던 소년, 육 미터 날아가서 경상 입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고를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것습니까 없것습니까. 첫번째 교훈은 뭣이것습니까. 오토바이 탈 때는 절대루…….
장덕호(68세)의 아내가 막내아들의 전화를 받은 것은 저녁 여섯시께였다. 지금 기차역에 도착했으며, 며느릿감을 데리고 왔는데, 곧 들어가니 인사 받으실 준비하고 계시라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유난스럽게 느닷없는 짓만 골라 하던 자식이었다. 아내는 전화를 걸었다. 거기 일일사쥬? 잉, 거 뭐시냐, 구까고시 다방 좀 갈쳐주슈. 뭐셔, 그런 다방이 읍슈? 아닐뀨. 우리 바깥양반이 구까고시라고 분맹히 얘기허구 나가셨는디. 그때 덕호는 운전면허시험을 함께 치르고 공히 합격을 한 또래들과 어울려 한잔을 꺾고 있었다. 구면보다는 초면이 많았지만, 그들은 당당한 합격자라는 유대로 인해 천년지기처럼 스스럼이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다들 기쁨이 크겠지만, 석수삼(67세)이 가장 기쁨이 큰 모양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데 큰 경사까지 겹쳤으니 우리 한번 코 삐뚤어지게 마셔보자, 쐬주값은 얼마가 되었든 내가 내마 하고 술값을 예약하고 나설 정도였다. 그는 공중전화로 서울 사는 며느리에게도 자랑을 했다. 니, 나여. 별일 없쟈. 여그? 별일이 있어야. 어디 펜찮으시냐규. 어허, 니는 별일이면 나쁜 것부텀 떠올린다니. 좋은 별일도 많은 법인디. 니, 별일이 뭣이냐면, 나가 드디어 면증을 따부럿다. 그려, 칠전팔기혀부럿다. 뭐 그렇게 경하받을 일은 아닌디, 축하여준다닝께 고맙다. 축하잔치허러 이번 주에 내려오것다구? 어허, 야 좀 보소. 아엠뿌 시국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디 그런 것까장 잔치를 헌더냐. 그냥 식구끼리 간단히 식사 한끼 하면 되지. 그럼, 언제들 내려올텨? 잉 그려, 케이크도 사 갖고 온다구. 그런 걸 뭐하러 사온다니. 돈 아까운디. 작은놈으로다 사라 잉.
이재만(63세)은 메시지(대림, 50cc)를 타고 국도의 화단을 따라 시속 십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 딸이 제 자전거보다 느리다라고 빗대는 속도였지만, 안전한 게 제일 아니겠는가. 오늘도 어김없이 저쪽 건널목 자리에 교통경찰 둘이 단속을 서고 있었다. 그중에 장 순경은 돋보기 시력에도 똑똑히 보였다. 저 새파랗게 젊은 순경 놈한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욕지거리가 퉁겨 나왔다. 두 달 전인데 그날따라 장씨 성을 가진 순경놈이 정지 신호를 보내왔다. 면허증을 보여달라는 거였다. 면허증이라는 것은 자동차 몰고 다니는 사람들한테나 필요한 것이지, 오토바이는 경운기나 자전거처럼 그런 거 없이 몰고 다니는 건 줄 알았던 재만은 젊은놈이 다짜고짜 세우는 것에 은근한 부아가 나 엇나갔다. 그랬더니 순경은 나이 대접하는 셈치고 다소곳해지는 게 아니라, 기어이 그 면허증이라는 것을 내놓으라고 장날 자릿값 뜯어내는 깡패처럼 악다구니치는 것이었다. 왕년에 성질 있다고 삼동네에 소문을 떨쳤던 재만은 죽은 성질 되살려 바락바락 훈계조로 나갔는데, 순경도 만만치 않았다. 순경은 무면허운전 어쩌고 하면서, 벌금이니 구속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을 막 해댔다. 법 냄새 나는 말들이 속출하니, 환갑 지난 나이에도 법 무서운 줄은 아는 재만이 밀렸다. 순경은 기어이 무면허운전자 처리를 하겠다고 설쳤는데, 뒤늦게 온 얼굴 알고 있던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겨우 선처를 받았다. 재만은 건널목께에 이르러 날 잡아보소 노래부르듯 일부러 느리적거렸다. 눈길을 안 주던 장 순경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다가왔다. 아저씨, 또 타고 나왔슈? 면허를 따든가, 버스 타고 다니든가 하라니께유. 왜 자꾸 사람 속을 쐽여유. 이 사람, 정말 말 한번 곱게 하는 법 없구만. 내가 말 곱게 하게 생겼슈? 그렇게 말해도 타고 다니는디. 재만은 칼을 뽑아들 때라고 생각했다. 젊은 순사 양반, 이젠 함부로 말하지 말드라고. 나가 이젠 무면허운전자가 아니구만. 무슨 소리래유? 지금 면허증 따 갖고 오는 길이란 말여. 그 쯩인가 하는 것은 보름 있다 준다니께 보여줄 수가 없지만서두, 어찌되었거나 나는 따부럿네. 알것는가? 나도 면허란 말여. 면허 따면 다유? 파이버는 왜 안 쓰고 다뉴? 순경은 재만의 헬멧 쓰지 않은 반백머리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임민석(25세)과 서초애(18세)는 무슨 동화책에 나오는 마을 흉내를 낸 듯 내부 인테리어가 독특한 커피숍에 들어갔다. 초애의 오토바이를 얻어 탄 민석이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해서 이루어진 걸음이었다. 삼층이었는데 창가여서 시내 풍경이 약간 보였다. 가도에 붐비고 있는 사람들과 차도를 메우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던 초애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웃깁니까? 아뇨, 내가 우스워서요. 저수지 하나 채울 만큼 마셨는데, 이런 데 들어와본 건 처음이에요. 들어온 지 반 시간쯤 되었을 때 초애가 말했다. 나랑 술 한잔 할래요? 민석은 잠깐 생각한 뒤에 고개를 저었다. 왜요? 바쁜 일 있어요? 바쁜 일은 없지만 해야 될 일이 있네요. 공부? 아뇨, 소들에게 밥을 줘야 됩니다. 방학 동안 제가 소밥을 책임지기로 했죠. 아, 그래요. 근데 소들은 뭘 먹죠? 지푸라기, 물, 사료 이런 순서로 주죠. 풀은 안 먹나요? 풀도 먹죠. 난 소들이 풀만 먹는 줄 알았어요. 민석은 사료와 지푸라기도 풀이지 않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았다. 내가 하찮아 보이죠? 남들은 휴대폰 들고 차 끌고 다니는 나이에, 오토바이 시험이나 보러 다니고. 초애가 누나처럼 말했다. 그건, 자각지신(原, 자격지심)이에요. 오토바이도 못 타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박정수(18세)와 혜수는 성심당에서 피자를 먹었다. 정수는 늘 붙어 다니는 조만기(18세)를 떼어내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들이 교사들 흉을 보며 한참 즐거워하고 있을 때 이은영(19세)이 들어와 카운터에 석간신문을 올려놓았다. 다른 날처럼 후딱 나가지 않는 그녀를 보고 주인은 아, 참 내 정신 좀 봐, 하고 밀린 신문 대금을 치렀다. 그녀는 새낭골 당구장에도 신문을 넣었다. 사장이 스포츠 난을 펼쳤을 때 아미타불다방 심정희(21세)가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정희의 몸매를 멀리서 훔쳐보고 있던 김성인(18세)이 찬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새로 온 냄빈가, 쥑여주네. 그는 정인재(18세), 양치현(18세)과 더불어 짜장면 내기를 치고 있었다. 불합격자의 멍에를 썼기 때문인지, 치현은 당구를 이기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IMF다방에도 신문을 넣은 은영은 교통단속 나와 있는 경찰을 발견하고 헬멧을 썼다.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던 은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씨이발, 덥네. 은영의 캡(효성, 50cc)은 부다다당, 한 떼의 고등학생을 지나쳐갔다. 오늘 원동기면허증을 딴 김영수(17세)와 박복진(17세)도 그중에 있었다. 둘은 국영수 전문학원에 가는 중이었다. 필기시험 보다 눈이 맞은 신양희(40세)와 지성호(40세)는 학원 밑 중국집에서 탕수육 안주에 고량주를 두 병째 음미하고 있었다. 오늘 한번 막 가버리자구요.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디 뭐가 무서워요? 안 그류. 양희씨? 좋은 생각이시네유. 이왕 말 나온 김에 쯩 딴 기념으로다 막 달려볼까유. 해수욕장까지. 니, 그거 참 좋은 생각이시네유. 양희는 오 년 전에 죽은 남편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자, 성호씨 우리 마셔유. 좋지유. 건배! 니, 참 늦었는디, 면허증 따신 거 진심으로 축하드려유. 지두, 많이많이 축하드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