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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2014-07-06)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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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오늘 전례 ▦ 오늘 우리는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김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영적 풍요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 풍요로움이 권세와 재물이 아니라, 주님과 교회를 위한 곤궁과 환난 속에서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신부님의 짧고도 위대한 일생에서 비롯되었음을 오늘의 교회는 거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진리를 전파하신 신부님을 기리며 그 모범을 본받기로 다짐합시다. <7월 5일 대축일 미사를 주일로 옮겨 드릴 수 있다.> |
[대축일미사 추천성가] : 입당 성가 : 287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 예물준비 성가 : 211번 주여 나의 몸과 맘 221번 받아주소서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 166번 생명의 양식 174번 사랑의 신비 180번 주님의 작은 그릇 파견 성가 : 286번 순교자의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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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2014-07-06) | 미사전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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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 -
이 성인은 하느님의 법을 위해 죽기까지 싸웠으며, 악인들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그는 튼튼한 반석 위에 집을 지었네.<대영광송>
[본기도] :
하느님, 올바른 신앙을 전파하다가 순교한 복된 김대건 안드레아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도 뜨거운 사랑으로 복음을 실천하여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
요아스 임금과 대신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자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의 진노를 전하신다. 그러나 임금은 사람들을 시켜 즈카르야를 돌로 쳐 죽이게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당당히 고백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낳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이르신다. 사도들은 끌려가 재판받고 학대받으며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말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시는 분은 사도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복음).
[제1독서] :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8-22 그 무렵 18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31(30),3ㄷㄹ-4.6과 7ㄴ과 8ㄱ.17과 21ㄱㄴ(◎ 6ㄱ 참조)
◎ 주님,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님, 진실하신 하느님, 저를 구원하소서.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소서. ◎
[제2독서] :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 마태 5,10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 음]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지향기도] :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모범을 본받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데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청합시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영원한 목자이신 주님, 한국 교회가 선조들의 순교 신앙을 기억하며 주님의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게 하시고, 모든 사제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모범을 본받아 세상의 유혹과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지켜 주소서. ◎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로우신 주님, 이 나라 정치인들, 특히 지난 지방 선거에서 선출된 단체장들과 의원들에게 주님의 정의와 지혜와 사랑을 심어 주시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더욱 노력하게 하소서. ◎ 3. 청소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의 샘이신 주님,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기도하오니, 그들이 생명과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도록 도와주시고, 절제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일치의 주님, 저희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그리스도 안에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깨닫게 하시고,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 +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주님,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는 저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예물기도] :
주님,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된 김대건 안드레아에게 육신의 온갖 고통을 이겨 내게 하셨듯이,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 마음에도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 <순교자들의 증거와 모범>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복된 순교자 ( )는 주님을 현양하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를 흘려,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나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 거룩하시도다! …….
[영성체송] : 마태 16,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영성체 후 묵상] :
성 김대건 신부님의 대축일을 앞둔 어느 날 오후, 모처럼 서울 대신학교의 성당에서 잠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성당에 신부님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또한 그것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신학생 시절의 긴 세월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김 신부님 곁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학교에는 신부님의 유해를 찾아 순례하는 사람들 때문인지 유해의 안치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안내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거기의 설명 가운데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1901년 5월 23일 미리내를 출발하여 오후 1시 45분 용산 신학교에 도착했다. 1902년 6월 23일 유해를 용산 신학교 성당에 정식으로 제대 밑에 안치했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자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암매장하였다가 유해의 머리 부분이 경남 밀양으로 소신학생들과 더불어 피난하는 수난을 겪었다.” 김대건 신부님이 하늘 나라에 가신 뒤에도 늘 당신이 사랑하셨던 이 나라, 이 겨레와 함께하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신학생 시절, 김 신부님에 대한 저의 인상은 늘 집안의 큰 어르신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 묵상하던 그날은 ‘청년’ 김대건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품에 안고 돌아온 젊디젊은 사제가 몸을 숨겨서야 겨우 조국에 발을 디딜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헤아려 보니 참으로 애잔하였습니다. 『가톨릭 성가』 287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노래’의 2절이 떠올랐습니다.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 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낙담하고 체념할 만도 하건만 김 신부님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만큼이나 사랑하셨던 자신의 나라가 새로운 길, 올바른 길을 찾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언젠가는 주님의 섭리로 그리되리라고 믿으셨습니다. 문초를 받으시고 형장으로 끌려가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절망적인 상황에서 남기신 신부님의 말씀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신부님의 그 깊은 신앙과 순교 정신,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질 역사에 대한 의연한 희망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할 때 낙담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수고의 씨를 뿌리는, 하느님의 영이 깃든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
주님, 이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일찍이 복된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가 지녔던 믿음과 용기를 주시어, 저희가 온갖 시련을 이겨 내고 충실히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파 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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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1] : 우리들의 순교
오늘은 한국의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굳은 신앙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되새기고 본받기 위한 특별한 날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와 강인한 성격과 굳은 신심을 가진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조국을 떠나 마카오로 파견되어 필리핀 등 외국을 전전하며 어렵게 공부하였습니다. 신부로 서품되고 귀국하여 8개월 동안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 삶을 다해서 교우들을 보살피고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면서 듣게 되는 복음에서는 진정한 신앙인은 어떤 박해 앞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통과 난관 앞에서도 모든 것을 참아낼 힘과 또 박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의 증거자가 될 지혜를 성령께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평화를 누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김대건 신부님께서도 순교하시기 전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 낌이 없으랴. 그러나 천주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 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사후에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순교성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생명까지도 내어 놓으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를 기억하는 오늘, 신부님의 순교영성을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큰 과제입니다.
때로 신부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순교영성을 살고 실천한다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순교자들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의 시대는 실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과거 신앙의 선조들처럼 피 흘림의 순교를 요구받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피를 흘리는 피의 순교 대신에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백색 순교”와 “녹색순교”가 필요합니다. “백색순교”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써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녹색순교”란 고통을 극복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순교 현장은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자리입니다. 신앙은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는 삶으로 내가 머무르는 자리인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 안에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를 끊어 버리고, 하루하루의 삶을 봉헌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이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하겠습니다...........◆
[말씀자료 : 고준석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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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2] : 임자님
오늘은 우리나라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이동 경축한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1836년 열여섯 살 때에 모방신부에 의해서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남부에 있는 마카오의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1845년 8월 17일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국내에 들어와서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로운 통로를 개척하다가 잡혀서 순교를 하시게 되었다(19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을 그 시대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서 ‘임자’라고 표현하셨다. 말하자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 임자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느님의 종이며 일꾼이다. 종이나 일꾼은 임자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임자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도 없고, 또한 한번 알아본 후에도 하느님을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보다도 못하다고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그 임자이신 예수님께서 다가올 고난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 의회에 넘겨져 회당에서 채찍질 당할 것이고, 가족들조차 거슬러 서로 죽게 할 것이지만‘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 바로 앞의 구절이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 16)”이다. 양들과 이리떼와는 전혀 싸움이 되지 않는다. 양이 무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임자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문제가 달라진다. 주님께서 당신 막대와 지팡이로 이리떼를 치시고 양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다. 그야말로 아쉬울 것 없도록 쉬게 해 주시고 상을 차려 주시지 않겠는가(시편23편)!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를 하시기 전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 한마디 하고자 하오. 박해라는 것도 천주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일어나는 게 아니오. 마땅히 주를 위해 힘차게 참아주시오. (중략) 큰 사랑을 가지고 천주를 섬기도록 힘쓰시오. 사랑으로써 한 몸 한 마음이 됩시다. 그렇게 하면 죽은 후 영원히 주님 앞에서 서로 만나 끝없는 즐거움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오. 나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를 바랍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죽는 순간까지 임자와 함께하며 끝까지 견디셨다. 우리도 김대건 신부님을 본받아 인생에 어떤 고통과 좌절이 올지라도 임자와 함께하며 끝까지 견디도록 해야겠다.........◆
[말씀자료 : 윤준원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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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3] : 아! 첫사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념하는 날이다. 교황 베네딕도16세께서 예수성심대축일(6월19일)부터 1년간 사제의 해를 선포하셨으며,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되새겨 보는 것은 모든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큰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고 본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8월21일 충정도 솔뫼에서 순교자 집안의 후손인 김재준(이냐시오)과 모친 고 우슬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36년 여름 경기도 용인 은이공소에서 나 모방 불란서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15세의 어린나이로 명석한 재주와 굳센 기질과 열심한 믿음을 인정받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고 1845년1월15일 조선에 잠시 입국하여 교회를 돌보고 지도를 작성하며 순교자들의 자료를 정리하고 성직자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고 다시 상해로 가서 조선교구 3대 주교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의식은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교우촌 금가항(金家港) 소성당에서 거행 되었습니다. 4명의 서양신부, 1명의 중국인 신부가 참석하였고, 또 거기에 교우들이 무리를 지어 참석하였습니다... ... 조선인 첫 사제를 볼 때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였는지 당신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1845년 다블뤼 신부의 서한)
1845년8월31일 상해를 출발해 40여 일 만에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10월12일 강경 부근 황산포에 도착, 서울로 왔다. 그 인근, 용인 지방까지 교우촌을 방문하였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신부님은 주교님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다 6월5일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40여 차례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9월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짧은 삶을 사셨지만 조선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였고 온갖 고난과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성모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었다.
“교우들아! 그에 어울릴만한 열매를 맺으라, 주께서 은총으로 강생 구속하여 고귀한 피로서 우리를 기르신다.”(옥중서한)
성 아오스딩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도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믿음으로 환난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로마 5.3) 옥중에서도 교우들에게 끝까지 견디어내어 구원을 얻을(마태 10.22)것을 격려하였다.
“교우들아! 이런 황당한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옥중서한)
대축일을 맞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충실한 믿음과 열정적인 사랑과 용기 있는 삶을 모든 신자들과 사제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말씀자료 : 김 충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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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4] : 또 하나의 순교
2007년 8월 17일. 제 꿈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98년 2월에 신학교에 입학해서 그렇게 꿈꿔왔던 사제 서품을 받은 날입니다. ‘사제 서품!’ 신학생이라면 몇 번이나 꿈꿔보고 상상하는 날입니다. 물론, 사제 서품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사제 서품 날짜가 정해진 후, ‘8월 17일’이라는 날짜 자체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님이신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신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신 김대건 신부님은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신학생 후보로 선발 되셨습니다. 마카오에서 공부를 하시고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에게 사제 서품을 받으셨으며,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흘러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로 결정되시고 1984년 시성되셨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25세라는 젊은 나이, 사제로서의 생활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박식한 지식으로 인해 배교만 한다면 높은 지위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러한 세상의 지위가 영원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에, 순교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것은 물론 육신의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부님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이었고,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날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들 앞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순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보게 됩니다...........◆
[말씀자료 : 손용창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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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5] : 천만 번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축일을 지냅니다. 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출생했고 1836년에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문과 라틴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최양업, 최방제보다 늦게 선발된 김대건은 수련기간이 짧아 보내기를 주저했으나 다시 그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결국 함께 마카오로 보냅니다.
공부를 마치고 조선 입국을 모색하던 중, 중국 팔가자에서 김대건은 최양업과 같이 1844년에 부제품을 받고 1845년 페레올 주교로부터 상해 김가항에서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김신부는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를 태우고 10월에 조선에 도착합니다. 이어 김 신부는 주교님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 통로의 개척에 나서게 됩니다. 백령도에서 청국 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보내고 순위도로 돌아왔을 때 그 곳 관헌에게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게 됩니다. 그 뒤 무려 40차의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9월 15일 영의정 권돈인은 김대건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여 문효수의 형을 내림에 따라 김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합니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후에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 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됩니다.
이상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해 봅니다. 1) 김대건은 결격 사유가 있는 학생이었으나 오히려 제일 먼저 신부가 되었고 또 한국 교회의 썩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그는 오늘 이렇게 기억되고 있고, 앞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김신부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마감합니다. “애덕으로 결합하여 있읍시다. 그러면 죽은 다음에 우리는 영원히 결합하여 있을 것이고, 영원히 천주 대전에서 누릴 것입니다. 천만번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2) 아이들은 백번 변한다는 점입니다. 김대건은 꼴찌였으나 첫째가 되었습니다. 지금 내 아이가 어리숙해 보인다고 해서 평생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어른들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이에게 수 많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부모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보다도 아이들은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아이에게서 다양한 재능을 못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욕심이 아이의 엄청난 가능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지켜보십시오. 아이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천지창조 이래의 계획을! 찾아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그 아이에게 담아주신 보화들을!..............◆
[말씀자료 : 김현배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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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강론-6] : 작은 순교자의 삶
어떤 학생이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에 대한 강론을 듣고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솔직히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속이 답답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 멀고 힘든 길을 가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되었는데, 1년 만에 순교를 하셨다니 말입니다. 그냥 배교하는 척이라도 해서 좀 더 오래 교회를 위해 봉사하면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순교자에 대한 생각이 이 학생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배신과 표변(豹變)이 서슴없이 자행되는 시대, 그래서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 한탄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대열이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조선이란 땅은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일단 들어가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자굴과도 같은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조선으로 떠나기 전 선교사들은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눈물의 작별을 하고 동료 사제들, 자신의 주교님께 하직 인사와 유서를 남기고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선교사들의 조선행(朝鮮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무죄한 어린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으셨던 선교사들의 길은 오직 처절한 십자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신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로부터 사제수업을 받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역시 당시의 숙연한 분위기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김대건 신부님의 입국 역시도 목숨을 건 길,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꿈에서조차 그리워했던 고국의 부모님,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 이제 그 고향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 뿐…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마음 속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아픔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자 없이 서러운 민중들의 한가운데로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길, 예정된 죽음의 길, 굶주림과 고문, 처참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반성해 봅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죽기를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시작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작은 것 하나도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날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하느님께 제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나 자신에 대해 죽는 ‘작은 순교자의 삶’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청해봅니다..........◆
[말씀자료 : 권순호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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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하느님께 제 자신을 봉헌하는 삶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나 자신에 대해
죽는 ‘작은 순교자의 삶’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기를 청해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