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현장로 별세
서경석목사(우리민족서로돕기 집행위원장)의 부친 서재현장로(새문안교회 명예장로)가 지난 14일 93세를 일기로 별세, 16일 새문안교회 장으로 장례예배를 드린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故 서재현장로는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의 한분인 서경조목사의 손자로, 황해도 장현에서 출생해 일본 상품불매운동 등 항일 시위에 적극 가담해 왔으며 독립투사로 활동했다. 해방과 함께 중국에서 귀국해 해군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삼표제작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명진권사(새문안교회 공로)와의 사이에 서원석장로(대한성서공회 국장, 새문안교회 장로)와 서경석목사(서울조선족교회 시무), 서만석목사(재미한인교회 시
무), 등 4남이 있다.
뿌리깊은나무/ 4대째 신앙 전통 이어온 믿음의 가문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가정
대를 이어 신앙의 전통이 이어지는 가정.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갖는 소망일 것이다. 스스로 혹은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 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나도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하는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고, 게다가 신앙의 전통이 2대를 넘어 3대, 4대째 이어진다고 하면 그 가정에 대한 부러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그런 유서 깊은 신앙 전통의 맥을 이어오는 가정들 중에서 서원석장로(새문안교회·대한성서공회 진흥국장)와 서경석목사(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 형제의 가정은 두말할 나위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신앙 집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
이들 집안의 신앙 내력을 따지자면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4년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서상륜·서경조 형제가 이들의 증조부가 되기 때문. 어찌보면 이들 가정의 신앙 역사가 한국 기독교 역사보다도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순수 자생 토착교회인 `소래교회'의 창설자인 증조할아버지 서상륜과 서경조목사, 첫 유아세례자인 할아버지 서병호장로, 독립운동가로 해군제독으로 애국의 길을 걸어온 아버지 서재현장로에 이어 교계에서 대를 이어 봉사하고 있는 서원석장로·서경석목사 등 이들 서씨 집안은 한국 기독교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인 것. 국내 성경 반포의 주역인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 서상륜이 끝까지 평신도 전도인으로 남아있던 것에 반해 서경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하나였다. 서원석·경석 형제 집안의 신앙 내력을 이야기 함에 있어 서상륜과 서경조를 함께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가 있다.
혹자들은 이들 형제가 서상륜의 후손인지 혹은 서경조의 후손인지에 대해 많은 궁금증들을 갖고 있는데 실상은 이런 것. 우선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들은 서경조 목사의 후손이다. 서목사의 둘째 아들인 서병호장로의 장남 서재현장로의 후손들이므로. 하지만 서상륜 증조할아버지의 슬하에 아들이 없던 고로 옛날에 흔히 그랬듯이 동생 서목사의 둘째 아들인 병호가 서상륜의 아들로 호적에 입적된다. 그러므로 호적상에는 서상륜이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것. 다시 말하면 핏줄로는 서경조의 후손이지만 호적상으로는 서상륜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 후손인가를 지금에 와서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지만, 이렇든 저렇든 간에 서원석장로와 서경석목사 형제는 오랜 신앙의 맥을 이어온 가정의 후손들임이 자명하다.
서씨 집안과 관련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이들에 그치지 않는다. 할아버지 서병호의 부인 즉 외할머니의 집안도 신앙의 내력에 있어서는 내로라 하는 집안인 것. 외할머니 광산 김씨 집안도 독립운동가 김규식, 여성 운동가 김마리아, 최초의 신학박사인 남궁억을 비롯해 정신여고 초대교장인 김필례, 서울여대 초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에까지 신앙의 가계가 이어진다. 서씨 집안의 장남 서원석 장로(53세)는 그가 몸담고 있는 대한성서공회 집무실 한켠에 자그마한 보따리를 하나 간직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자필 문서 및 이분들에 대해 조사된 각종 자료 뭉치와 사진들이다.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인 서병호장로(서경조목사의 아들)와 함께 살았지만, 한번도 증조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서경조할아버지와 서상륜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등 집안 내력에 대해 자랑 삼아 이야기 하신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서장로는 "하지만 매일 새벽 무릎 꿇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던 모습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있다"고 회고한다. 대한적십자사 초대 이사장, 한국기독교연합회 초대 회장, YMCA 전시대책 위원장 등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던 할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원석·경석 형제에게는 늘 무릎 꿇어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만 각인돼 있는 것.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히려 외부 사람들의 노력과 발굴에 의해 알게되었을 정도로 집안 에서 회자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들 서씨 형제는 한결 같이 이렇게 입을 모은다.
"저희는 모두 아버님(故 서재현장로)을 존경합니다. 근면하고 검소하게 또 정직하게 평생을 사셨던 아버지의 삶을 존경합니다. 아버지도 그의 아버지인 서병호장로의 삶을 보고 자라셨기에 가능하셨겠지요.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의 삶을 본받으셨겠구요. 말로 전해내려 오는 집안의 신앙 가훈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 섬기기를 말없이 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셨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신앙은 삶을 통해 저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집안의 신앙 전통이 아버지의 삶을 통해 계승된 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대째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서원석장로는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하던 성서반포 사업을 물려받듯 대한성서공회에서 진흥국장직을 맡아 일하고 있다. 그 바로 밑의 동생인 서경석목사(52세·우리민족서로돕기 사무총장)는 요즘 한창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재외동포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3남 만석씨는 미국에서 목사로 사역중이고, 4남 창석씨는 새문안교회 집사로 봉사중이다.
"아버님을 회상할 때마다 긴장이 되고 지금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 형제는 교회를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이러한 신앙 유산이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묄쌔" 이들 형제를 보며 떠오른 시 한구절이었다.
이수진 sjlee@kidokongbo.com" target="emptyframe">sjlee@kidokongbo.com
차종순 / 호남신대 총장
한국 개신교의 전래 과정은 크게 두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북쪽 경로(서북쪽)는 평안도의 상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들과 접하며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으며, 남쪽경로는 관직에 있는 상류층들이 일본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미국 선교사들을 만나 복음을 듣는 과정에서 일본의 선진농업을 배우게 되고 이어서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정치적인 통로를 이용함으로써 한국에서 공적인 선교사업으로 이어졌다.
▲ 서경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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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경로는 똑같이 성경을 번역하였다. 북쪽경로는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하여 한국으로 들여왔으나 보급되지 못하였지만, 성경번역에 참여하였던 한국인들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이르렀으며, 남쪽 경로는 관리들이 성경을 번역, 미국 선교사들이 성경을 들여와서 선교사들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북쪽경로는 내국인에 의한 교회설립으로, 남쪽경로는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두 경로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하나로 접합됨으로써 한국의 복음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가기 시작했다.
두 경로의 만남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사람이 바로 서경조목사이다. 그는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하여 황해도 솔내교회에서 신앙의 기초를 쌓고 지도자가 된 후 초기 한국인 7인의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의 기초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황해도 솔내지역에서 김성첨(담) 가문의 후예들과 맺은 인연은 곧바로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 산맥을 형성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서씨 집안의 두 형제 서상륜과 서경조는 한국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다. 형 서상륜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사업가적인 기질을 가진 외향적인 사람으로서 장사를 통해 출구를 찾으려 하였던 반면 동생 서경조는 내향적인 학자풍의 사람으로서 사물을 깊이 성찰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로서 대조적이었다.
서경조는 1852년 12월 14일 의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본명은 상우(相祐)이고, 경조는 자(字)였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1948년 7월 26일생)보다 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문을 익혔으나 한서를 탐독할 수 있을 정도로 한문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
서경조의 기독교 입문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제1단계는 형 서상륜을 따라 만주를 왕래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모습에 대한 감동에서 출발한다. 제2단계는 기독교 서적을 통한 지식습득의 단계이다. 서경조는 형과는 다르게 학자적인 관심에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작으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신문화의 위대함을 배우고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제3단계는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 솔내로 이주하여 솔내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다.
형을 따라 간 곳에서 로스(John Ross)가 보내 준 6천권의 성경 중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을 전해 받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한 서경조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죄와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됐으며, 최후로 성령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신앙을 갖기로 결단한다. 서경조의 입신(入信)과정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걸었던 대다수의 과정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솔내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서경조는 1887년에 세례를 받고 1919년 중국으로 떠나기까지 약 30년을 목회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는다. 지금까지의 기록상 서경조는 1887년에 봄에 서울에서 혹은 가을에 솔내에서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후 1888년부터 서경조는 선교사의 권서(勸書: colpoteur)와 조사(助師: helper)로 발탁되어 황해도 장연지방의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서경조를 초창기 한국인 선교 파트너로 신뢰하고 있었고 서경조에게는 황해도 솔내교회로 부름받았다는 확고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인정받는 한국인 동역자(조사/권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삶이 오히려 좋아질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로지 솔내교회로만 향하였던 서경조에게서 우리는 신앙인 혹은 교회 지도자로서의 곧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첫째는 그의 학자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성경탐독과 성경교사로서의 유능함이며, 둘째는 공의회로부터 독노회와 총회에 이르는 기간에 보여준 그의 서기관으로서의 유능함이며, 셋째는 감사할 줄 아는 제안자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서경조는 1904년에 평양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업을 받고 1907년 9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는다. 7명의 신임 목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서경조는 목사를 대표하여 축도하는 순서를 맡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축도 목사로서의 영예를 가졌다. 서경조목사의 공헌은 아무래도 유능한 서기로서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하여 한글 회의록을 치밀하게 남겨둠으로써 후대에 '서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본보기가 됐다.
한편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서 동사 순회 전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어느 덧 서경조의 나이가 회갑을 넘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60세를 넘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음을 감안할 때, 서경조는 1913년에 사역을 중단하고 제2의 고향인 솔내로 귀향하여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의리의 목회자이며 첫 부르심에 충실한 목회자이다. 두번째로 그는 공의회와 노회의 서기로서 기록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목회자이다. 세번째로 그는 추수감사절 제정을 주창함으로써 은혜를 아는 목회자였다. 네번째로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민을 결정하고 해외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녀들의 독립활동을 지원한 목회자였다.
물론 서경조 목사의 지도력은 자신의 목회활동과 더불어 가혼으로 사돈이 된 솔내지방의 김성첨 가문의 자녀들과 더불어 양 집안의 후손들의 영향력은 한국과 해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경조 목사가 동료 7인의 목회자 가운데에서 비교적 빠르게 한국을 떠나 1919년부터 중국에서 생활함으로써 목회자로서 그의 활동은 1887년으로부터 1919년까지 한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1919년으로부터 1938년에 이르는 기간은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한국교회에 더욱 더 크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
한국 기독교 명문가를 찾아서(새문안교회 서원석장로 가문)
우리나라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역사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짧다, 불과 100여년의 길지 않은 역사지만 국민들의 복음화율은 놀라울 만큼 높다. 근래 들어 성장세가 멈추어 안타깝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높은 복음화와 함께 세계에서 첫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자랑스러운 선교대국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빠른 성장을 한 이면에는 구한말 기독교 전래 이래 대를 이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기독교의 명문가들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나라 기독교 성장의 한 축을 이뤘던 기독교 명문가 중에서 이번 호에는 새문안교회 서원석장로의 가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원석장로 조상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역사는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증조부인 서경조목사는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한분이다. 그리고 서목사의 형인 서상륜은 우리나라 최초로 내국인들이 세운 황해도 장연의 솔내교회 설립자다. 서경조목사와 서상륜 형제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서경조목사는 1852년(철종3)12월 14일생이며 본명은 상우, 경조는 자(字)다. 서상륜은 4년 앞선 1848년생이다. 이들 형제는 조실무모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1884년 의주에서 황해도 장연의 솔내로 이주하여 형제가 함께 솔내교회를 세웠다.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들 스스로 세운 최초의 자생교회다. 서경조는 솔내교회에서 당회를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그 후 1907년 평양에서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신학교 졸업생들을 안수할 때 다른 6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최초의 장로교 목사 7명중 한 분이 된 것이다.
한국최초의 장로교 목사와 한글판 성경번역에 앞장선 형제
목사임직 후 황해도 장연과 옹진 등지에서 전도목사로 활동하다가 1910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동사전도목사가 되어 새문안교회와 남대문교회, 그리고 고양과 파주, 시흥, 교하, 김포, 통진 등 경기도 일원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1911년 언더우드의 동사목사로 새문안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3년 새문안교회에서 사임하고 목사직에서 은퇴한 뒤 장연의 솔내로 귀향했다. 1916년 서울 안동교회에서 잠시 목회활동을 하다가 사임한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상하이임시정부요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둘째아들 병호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서경조목사는 젊은 시절에 총각으로서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와 결혼했는데 그 아들을 자신의 장남으로 입적시켰다. 그가 후에 의사로 활동한 서광호다. 성경적이고 넉넉한 서경조목사의 높은 인품을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 후 낳은 아들이 병호다. 그런데 유일한 친자인 병호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던 형 서상륜에게 양자로 입양시켰다.
한편 서경조목사의 형 서상륜은 한만국경을 오가며 홍삼무역을 하던 장사꾼이었다. 같은 시기에 만주지역에 머물고 있던 스코틀랜드장로회 선교사 로스(J. 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조선선교 계획을 세우고 조선인 동역자를 찾고 있었다. 이들은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배포함으로써 조선선교의 길을 개척하려 한 것이다. 때마침 서상륜은 만주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의 고비를 맞고 있었다. 이때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장티푸스를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예수를 영접한 서상륜은 로스 성경 번역 팀에 합류했다. 성경 한글번역에는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 의주 출신의 홍삼장수들이 가담하고 있었는데, 뛰어나게 학식이 높았던 서상륜의 가담으로 마침내 1882년 누가복음서가 한글로 간행되었다.
이들 번역자들은 스스로 한국기독교 최초의 개신교 개종자가 되었고, 권서(勸書)전도자가 되어 조국의 전도길에 나섰다. 서상륜은 1882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조국 땅에 잠입하여 이른바 ‘서북 벨트’의 기독교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의주와 평양을 거쳐 연고가 있던 황해도 장연의 소래(松川)에서 예배모임을 결성, 마침내 한국인 스스로 세운 최초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했다. 그의 이런 전도활동은 뒤이어 내한한 미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연결되었다. 특히 1887년 9월 27일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에 의해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설립된 최초의 장로교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바로 서상륜이 전도한 신도들이 주축을 이룬 교회다. 서상륜은 또한 이른바 한국개신교 북방선교루트(스코틀랜드장로교계)의 대표자로서 남방선교루트(미국 개신교 선교부)와의 연합을 이루어낸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오직 기독교 전파에만 몰두하여 왕성한 선교활동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직분에 연연하지 않아 변변한 교직도 갖지 않았던 그는 1925년 12월 16일 평범한 평신도 신분으로 별세했다.
서경조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서상륜의 양자로 입적한 송암 서병호장로는 다른 대부분의 독립지사들처럼 광복 후 정관계 일에 관여치 않고, 오직 교육과 종교 활동에만 전념한 분이다. 독립지사이며 교육가이고 종교인인 송암선생은 1885년 7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솔내)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인 황해도 장연 솔내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8세였던 1893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민노아학당(현재의 경신학교)에서 1년간 신식교육을 받았다.
송암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그 후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가 살다가 1901년 다시 상경했다. 경신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여 1905년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엔 고향으로 돌아가 부친 서경조목사가 세운 해서제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2년 후인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다시 1년간 교사로 활동했다. 1909년부터 모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4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이주했다. 남경에서 금릉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금릉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중국 땅에 망명하여 활동하고 있던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며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1918년 금릉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김규식, 여운형, 김철, 한진교, 선우혁, 신석우, 장덕수 등과 함께 조국의 자주독립을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신한청년당은 150여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재무부, 서무부 등 6개 부서를 두고, 독립운동의 선봉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한 기관지 ‘신한청년보’를 발간 교포들에게 배포하여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중국에 망명한 유력한 인사들을 발탁하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했는데 송암선생도 위원으로 선출되어 내무위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편 1919년 3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 친동서인 김규식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파송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송암선생은 김규식을 파리에 밀사로 보낸 후 곧 비밀리에 부산으로 잠입하여 국내정세를 살피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해 2월 김철, 선우혁 등과 함께 역시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전개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하여 상하이로 귀환했다. 상하이에 귀환한 송암선생은 3월 하순부터 신한청년당을 움직여 새로운 계획에 착수했다. 여운형, 선우혁, 김철 최창식, 이광수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의 보창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고 열방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천명하는 밀서를 보내는 등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19년 4월에는 이춘숙, 남형우,·등과 함께 임시의정원법 심사위원이 되어 임시의정원법 전문 13장 57조를 손질하여 채택토록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 대한인거류민단 의사원 등으로 독립전선에서 적극 활약하며, 고향인 황해도 장연군조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20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극동지역시찰단이 중국에 파견되었다. 이때 그는 안창호, 정인과, 여운형, 이유필, 김순애, 신국권, 임춘희 등과 함께 환영 및 안내위원으로 선임되어, 시찰단이 머무는 동안 상하이 등 중국 곳곳을 안내하며 우리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오직 교육사업과 종교활동에만 전념하다
1921년에는 상하이에서 적십자회를 조직하여 굶주리며 어렵게 사는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특히 소위 ‘훈춘사건’으로 불리는 일제가 사주한 만주지역 거주 우리 동포들의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현지에 달려가 동포들을 구호하고 돕는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1925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신한청년회총회가 열려 임원개선과 금후의 사업에 관한 새로운 계획이 결정되었다. 이때 이사장에 김규식이 선임되었으며, 송암선생은 여운형,·한진교, ·김철, ·정광호·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또 상하이한인기독교이사회 이사장, 한교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23년에는 남화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33년에는 상하이에 우리 교민자녀들을 위해 설립한 인성학교 이사장에 취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항일정신을 함양시키는 등 후진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일제가 일장기 게양을 강요하며 탄압을 가해오자 학교를 폐교하고 새로운 활동방안을 모색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1947년에 귀국한 서병호선생은 대부분의 다른 독립지사들과 달리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이사, 경신학교 이사를 거쳐 1950년 이사장이 되었다. 6,25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대한기독교청년연맹 전시대책위원회위원장, 맹인협회, 농아협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였고, 서울로 환도 후에 기독교학교연합회를 조직하였으며 1953년 경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아동복지회 재단이사, 안양기독보육원재단이사로 활동하며 사회복지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새문안교회 장로로 교육과 종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1960년 경기노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72년 소천 했다. “내 목표는 오직 일제로부터 우리민족이 독립하는 것이었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새문안교회 서원석장로가 할아버지 송암선생에게 “왜 다른 독립지사들처럼 정계에 나가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한 말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해군 장성이며 기업가로 활동한 서재현장로
서병호장로의 아들이며 현재 새문안교회 서원석 시무장로와 조선족교회에 시무중인 서경석목사의 부친인 서재현장로도 일제치하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1906년(고종 43) 11월 15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1919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의 소년회 회장을 지냈다. 상하이 둥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5년 5월, 25명의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일제를 겨냥한 제국주의 타파 및 치외법권 철폐를 외치며 중국 학생들의 외세배척 운동에 가담하였다. 1931년 9월에는 상하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의 중흥을 협의하고, 같은 해 11월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이 청년동맹의 새로운 조직과 구성 등에 관한 임무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1월 한국 청년들의 단체훈련과 혁명역량을 강화할 목적으로 김석 등 8명의 동지와 함께 상하이한인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4년 3월에는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6·25한국전쟁 때는 해군 중령으로 참전했다. 1955년 해군공창장을 끝으로 준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재계에 몸담아 한국기계공업 사장, 강원산업(주) 부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기계공업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아버지 송암선생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땅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지사였지만 스스로 독립지사로 자처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그의 독립운동 경력을 알고 있는 지인의 추천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엄정한 심사를 거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999년 7월 14일에 별세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을지무공훈장, 건국훈장 애국장(1994)을 받았다. 애국독립지사 서재현의 네 아들 중 장남이 현재 새문안교회에서 시무중인 서원석장로이며, 차남이 조선족교회를 섬기고 있는 서경석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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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나눔과 기쁨’재단 사무실에 상근하는 목사들과 실무자들. 서경석 목사(가운데)는 작은교회 목사를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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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반대애국시민대연합'이 21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진행한 집회 무대에 올라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향해 '김정일 치하에서 살아야 한다' '쓰레기' 등의 발언을 하고 있는 서경석 목사 ⓒ안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