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외동읍 옛이름 모화군(毛火郡)에 얽힌 사연
친애하는 회원님 여러분!
뭔가 설날 같은 것이 지나간 것 같은데, 또 설날이 다가오네요. 그리고 그때도 새해 인사를 했는데, 또 새해인사를 해야 하는 얄궂은 풍습이 생뚱맞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한 달 걸러 새해인사를 두 번씩이나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했으니까 저도 새해인사를 다시 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외동향우회와 외동향우회 카페를 운영해 오신 최영식 회장님과 우희곤 카페지기님, 그리고 수고하신 임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시고, 온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이 용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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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때 신라(新羅) 육부촌(六部村)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에 속했다. 이후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는 계림부(鷄林府)에 속했고, 조선조 때인 1413년에는 계림부(鷄林府)가 경주부(慶州府)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조선조 고종(32년) 당시인 1895년에는 경주부(慶州府) 동면(東面)과 서면(西面)으로 분리되었다가 10년 후인 1905년에는 동면(東面)과 서면(西面)을 다시 통합하여 외동면(外東面)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외동읍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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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80년에는 월성군(月城郡) 외동읍(外東邑)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에는 경주군(慶州郡) 외동읍(外東邑)으로 변경되었다가 1995년에는 경주시와 경주군의 통합으로 경주시(慶州市) 외동읍이 되었다.
외동읍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조 말기 경주부(慶州府)의 남쪽지방인 남산(南山)과 마석산을 중앙으로 양분하여 서쪽은 내남면(內南面), 동쪽은 외남면(外南面)이라 칭하고, 19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남면(外南面)의 북부(北部) 일부를 제외하고 지금의 불국동(佛國洞)에서 울산광역시 경계까지를 외동면(外東面)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이 지금의 외동읍사무소 홈페이지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러나 외동읍의 옛 명칭이 모화군(毛火郡)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옛 모화군의 군청소재지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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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조(新羅朝) 당시에는 지금의 외동읍 지역을 모화군(毛火郡) 또는 모벌군(毛伐郡)으로 통칭되었고, 문벌군(蚊伐郡)이라고도 칭했다.
신라 6부촌인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관할에서 본피부 관할로 변경되었다가 그 일부인 지금의 외동읍 지역을 모화군(毛火郡)으로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처소(處所 ; 지금의 군청소재지)는 모벌(毛伐) 또는 모화(毛火)로 표기했는데, ‘伐’이든 ‘火’든 둘 다 고대(古代)에 ‘들’이나 ‘벌판’을 뜻하는 ‘ㅂ.ㄹ(블)’로 읽혔는데, 지금의 모화리(毛火里)를 말한다.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毛火里)의 지명유래에 “신라시대 불가(佛家)에 귀의하는 사람이 모벌군성(毛伐郡城) 성문에 이르러 삭발을(毛伐) 하고, 머리털을 불태운(毛火) 다음 불국사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여, ‘모벌(毛伐)’ 혹은 ‘모화(毛火)’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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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족에 보이는 산이 치술령이다)
모화리(毛火里) 일대가 동대산과 치술령의 사이에 위치한 협곡지형이어서 산 사이의 벌판이라는 뜻으로 ‘묏벌’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 ‘모벌(毛伐)’이라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대의 모벌군(毛伐郡)은 서라벌과 신라의 중요 항구였던 울산을 사이에 두고 서라벌의 현관(玄關)역할을 하다가 서기 757년 신라 제35대 경덕왕 17년에 임관군(臨關郡)으로 군의 명칭이 변경되었다.
모화리의 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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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군(毛火郡)이 임관군(臨關郡)으로 명칭이 변경된 이유는 신라 제35대 경덕왕 당시 신라의 조정에서 전국의 지명들을 모두 이두(吏讀 ; 신라 때부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차자 표기법) 문자에서 한자명(漢字名)으로 고치면서 비롯되었다.
경주 지역의 여러 군현들 역시 이때 한자음이나 뜻을 빌려 표기했던 우리말 지명들이 모두 한자명으로 고쳐졌다. 모화군(毛火郡)이 임관군(臨關郡)으로(現 외동읍), 비화현이 안강현으로(現 안강읍), 구도성은 대성군으로(現 보문동) 바뀌었다.
옛 대성군이었던 보문동의 보문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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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군(毛火郡) 즉, 임관군(臨關郡)의 위치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가 중심지인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범위가 불분명하다. 지금의 외동읍과 울산시 북구 지역으로 추측된다.
서라벌(徐羅伐)의 남쪽 관문이자 국방상의 요지이며, 울산지방의 현(縣)들을 관할한 무척 큰 고을이었음에도 상세한 역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모화군(毛火郡)은 역사초기부터 서라벌의 외곽을 구성하고 있었다. 내물왕때에 가야군과 일본군이 울산에서 합류한 후 ‘모벌’을 돌파해 신라를 침공한 후부터 ‘모화(毛火)’는 국방상 중요성이 부각된 듯하다.
모화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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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모화군(毛火郡) 역사를 조금 더 알아본다. 신라의 3국통일 이후인 722년(신라 성덕왕 21년)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이 축조되어 ‘노당(弩幢)’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731년에는 신라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등 대일관계가 험악해지자 ‘노당’이 증원되는 등 모화군(毛火郡)은 남해안 국방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당(弩幢)’은 신라 때 병부(兵部)에 속한 관직으로 ‘노사지(弩舍知)’의 바로 아래 벼슬로서, 위계(位階)는 ‘선저지(先沮知)’로부터 ‘대사(大舍)’까지 있었다.
그 시절 모벌군성(毛伐郡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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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년(문무왕 11)에 설치하여 1명을 병부(兵部)에 두었고, 경덕왕 때 ‘소사병(小司兵)’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노당(弩幢)’이라는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원래는 ‘사설당(四設幢:弩幢 ·雲梯幢 ·衝幢 ·雲幢)’의 하나로 ‘노당’의 한 사람이 병부에 있었으나, 뒤에 화살을 한 번에 여러 개 나가게 하는 ‘쇠뇌(弩)’를 사용하는 ‘당(幢)’이 생겨, 그 으뜸자리에 ‘노당주(弩幢主)’를 두고 다른 ‘노당’을 각 감(監)에 수십 명씩 배치하였다.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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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군에 성을 쌓은 신라조의 관리는 원진(元眞)이라는 사림인데, 원진은 신라 제33대 왕 성덕왕 때의 관인이다. 722년 각간의 관등으로 왕명을 받고 모화군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이 성을 관문성이라고 한다.
원진은 축성 당시 3만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둘레 6,792보, 높이 5척165cm)이 되는 성을 완공하였다. 이 성은 울산 방면으로부터 침략하는 왜구를 막아주는, 신라 왕경(王京) 부근의 가장 웅장한 석성이 되었다.
《당서》 ‘신라전’에 “산을 이어 수십 리에 걸쳐 좁은 골짜기를 쇠문으로 잠갔으니, 이를 관문이라 하며, 항상 ‘노(弩)’를 지닌 군사 수천 명이 지킨다.”고 쓰여 있을 정도이다.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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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은 모벌군성 또는 모벌관문이라고 했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사적(史蹟)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정면적은 1,128,879㎡이며, 현재 성문지(城門址)·창고지 등이 남아 있다.
관문성(關門城)의 석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편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는데, 이것은 동해 쪽에서 침입해오는 왜구(倭寇)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기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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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성은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경주평야의 동쪽, 즉 왜구(倭寇)들이 경주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倭敵)을 방어하는 데 큰 구실을 했었다.
위에서 말하는 북형산성(北兄山城)은 경주~포항간 국도를 따라서 23km를 가다보면 형산강 하류에 국당2리가 있고, 그 뒷산을 형산(兄山)이라 호칭하고 있는데 ‘형산강(兄山江)’이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관문성(모벌군성 ; 모화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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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표고 265,5m로 그렇게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근에서는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할 뿐 아니라 경사가 심하고, 북쪽에 형산강(兄山江)이 흐르고 있어서 북쪽으로부터의 외침(外侵)을 방어하기에는 알맞은 입지조건을 지니고 있다.
산성의 안쪽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면 북동쪽에 형산강(兄山江) 하류와 포항(浦項) 일대가 한눈에 조망(眺望)되므로 북쪽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동대교에서 본 형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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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왕13년(673) 9월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성내에서 발견되는 토기편(土器片)들을 보면 좀 더 이른 시기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축성법(築城法)은 발굴조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흙을 이용하여 축조하되 체성주위에서 석렬(石列)이 일부 노출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기단부 외벽은 석축을 하고, 안쪽인 적심 부분은 토축(土築)하는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길이 약 1.8km의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형산강 발원지 괘릉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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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당시 왕성 내의 반월성(半月城)의 주위가 1,023보인 데 반하여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5척으로 그 규모가 커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新羅)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성문지로 추정되는 석축이나 창고지·병사지(兵舍址)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남산성(南山城)을 축조하는 데 이용한 돌과 같은 잘 다듬은 돌을 자연석과 함께 쌓았다.
반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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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남산성(南山城)과 관문성의 석축성벽을 비교해 볼 때 관문성을 축조한 축성술이 휠씬 발달된 축성방식이라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경주 주변의 성곽과는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여 길게 축조한 특수한 양식의 산성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산성(南山城)은 경주 남산의 북쪽에 신라시대 산성이 남아 있는데 바로 신라 남산성 혹은 남산신성이라고 하는 성이다. 사적 제22호 경주 남산성(南山城)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나, 문화재 안내문이 설치된 곳을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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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13년(591)에 쌓은 남산성은 좌우의 명활산성(明活山城)과 서형산성(西兄山城)에 대응하여 도성 수비를 완벽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금오산의 북쪽 봉우리를 싸안고 동서로 계곡을 끼어 성안에는 수량이 풍부하고 산 정상에 서면 경주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이 치열한 각축을 벌일 때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성한 것으로 축조 당시에는 ‘남산신성(南山神城)’이라고 불렀다. 산성의 돌출한 곳마다 지금도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어 망루와 치첩(雉堞 ;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골짜기를 건너는 곳마다 수문(水門)을 두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세 곳의 창고 터가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3,750미터이다. 경주의 서쪽은 서형산성이 동쪽은 명활산성(明活山城)이, 그리고 북쪽은 북형산성이, 남쪽에는 남산신성(南山神城)이 경주 주변을 늘 함께 호위하며 지켜왔던 것이다.
명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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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은 월성의 동쪽으로 경주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자비왕이 한때 이곳으로 궁궐을 옮긴바 있으며, 소지왕도 월성으로 다시 옮길 때까지 명활산성에 머물러 있었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도성(都城) 외곽의 중요한 관문이었던 까닭에 여러 차례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해발 259미터의 능선을 따라 4.5킬로미터나 뻗쳐 있는 명활산성(明活山城)은 높이 10미터가 넘으며, 내벽 석성에 높이 5미터의 외벽을 갖춘 이중 구조의 성곽이었다.
모화3리 경노당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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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깬 돌’과 ‘냇 돌’로 쌓아 만든 완벽한 타원형 수구가 성벽에서 발견되었고, ‘깬 돌’을 수직으로 쌓은 성벽의 틈새를 잔돌이나 진흙으로 메웠다. 성벽의 밑 부분은 자갈과 진흙을 함께 다져 층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서형산성(西兄山城)은 이칭으로 선도산성(仙桃山城), 서연산성(西鳶山城), 서악산성(西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경주시 서악동에 소재하는 산성으로 둘레가 약 2.9㎞에 달하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1940년대의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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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성은 서쪽으로 침입하는 적들로부터 신라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593년(진평왕 15)에 경주의 명활산성(明活山城)과 함께 개축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늦어도 593년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673년(문무왕 13)에 다시 증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산성에서 서쪽으로 4km 가량 떨어진 부산성(富山城)이 축성된 이후에는 그 기능이 매우 약화되었다가 신라 말쯤에는 폐성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모화군(毛火郡)은 지금의 외동읍과 신라의 중요한 외항이었던 울산의 두 현, 굴아화현(屈阿火縣 ; 지금의 울주군 범서면)과 율포현(栗浦縣 ;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강동면)까지 관할로 했었다.
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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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화군(毛火郡)의 관할 하에서 두 현이 있던 울산지방은 사라센 제국과 당나라, 일본, 탐라국(耽羅國 ; 제주도)의 상인과 사신이 드나드는 무역항으로 번창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라센제국(Saracens)은 이슬람교의 신봉자들이 이룩한 대제국(大帝國)의 총칭이다. 사라센 또는 사라센족(인)은 대체로 이슬람제국의 사람들을 말하는 용어로 원래 로마제국 말기에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에 사는 유목민(遊牧民)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선도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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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13년까지 예언자 ‘마호메트’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북방의 ‘메디나’로 옮겨갔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 교단(敎團)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라센 제국은 ‘메디나’의 이 자그마한 이슬람교단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국가였다. 632년 예언자(豫言者) ‘마호메트’가 죽은 뒤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들은 ‘아부 바크르’를 새 지도자인 ‘칼리프’로 추대하여 지속적(持續的)으로 세력을 넓혀 7세기에는 동쪽으로 이란에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갓이다.
사라센 제국은 잠깐 사이에 아라비아로부터 북 아프리카와 유럽에까지 이르는 큰 영토(領土)를 갖게 되었다. 사만 왕조, 사파리 왕조, 살라리 왕조, 비잔틴 왕조, 함단 왕조, 부와이 왕조, 파티마 왕조들이 모두 사라센 제국이었다.
동천강 속심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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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중세 1000년의 시기 중 아라비아 민족이 지배하는 새로운 노예국가(奴隸國家)였던 사라센 제국이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대륙 일부의 패권을 장악했던 전반기를 ‘암흑시대(暗黑時代)’ 또는 ‘야만시대’로 불린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모화군(毛火郡)의 처소(군청소재지)는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外東邑) 모화리에 두었으며, 앞에서 소개한 대로 지금의 울산광역시 지역인 굴아화현과 율포현을 영현으로 두었다.
또한 모화군(毛火郡)의 명칭은 앞서 소개한 대로 모벌군 또는 문벌군(성덕왕 때의 지명)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지금의 외동읍 지역인 모화군(毛火郡)은 신라의 수도로 이르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어 왜군의 침로를 막기 위해 성덕왕 때 관문성을 쌓았으며, 경덕왕 17년(757)에 임관군(臨關郡)으로 개칭했었다.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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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틈만 나면 서라벌(徐羅伐)을 침공하던 왜구를 물리쳐 명성을 떨치던 당시의 모화군(毛火郡)의 영현이었던 굴아화현과 율포현에서 신라조(新羅朝)의 패망을 촉진하는 모반이 있었다는 것은 여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조 말엽에 모화군(毛火郡)의 영현이었던 굴아화현 출신의 박윤웅(朴允雄)이 당시 그 일대의 강력한 호족으로 활약했는데, 930년 이들 세력이 고려에 귀부(龜趺 ;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여 신라지역이 고려에 통합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때 박윤웅은 그 공적으로 고려조의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고, 그의 영역인 모화군(毛火郡)과 산하의 굴아화현 등 두 개의 현을 비롯하여 동안군(東安郡)의 영현인 우풍현까지 통합하여 흥례부(興禮府)라는 거대한 고을을 탄생시켜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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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모화군(毛火郡)은 울주(鬱州)로 개명한 흥례부에서 제외되었고,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동경(東京 ;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추후 병합되었다. 이상의 내용이 옛적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 모화군(毛火郡)의 명칭이 전래된 유래에 속한다.
그러나 경주시 외동읍 사무소 홈페이지에 나오는 연혁에는 모화군(毛火郡)이나 임관군(臨關郡)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홈페이지 상의 연혁에 의하면 외동읍은 고대의 사로국(斯盧國 ; 신라) 6부족 중에 본피부(本皮部), 즉 취산진지촌에 속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모화군(毛火郡)의 군청소재지였던 모화리에는 신라가 당(唐)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멸한 후에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었다. 지금 모화리(毛火里)의 자연부락인 ‘땅지’ 또는 ‘땅진’이라는 마을이 그곳이다.
당나라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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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삼국통일기(三國統一期)에 원군(援軍)으로 왔던 당(唐)나라 군사가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하여 ‘당진(唐陣)’이라 하던 것이 경상도사투리식의 경음(硬音)으로 발음이 변하여 ‘땅진’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땅지’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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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은 경주에서 울산이나 부산으로 갈 때 어디로 갔을까. 지금이야 자동차 페달을 밟기만 하면 날아갈듯 갈 수 있겠지만, 예전에는 고개를 넘고, 산을 넘는 지름길을 택했다.
그 길이 경주 모화(毛火)에서 석계(石溪) 길을 접어들어 ‘성저’마을과 울산(蔚山)시 울주군 범서면 ‘두산’마을의 경계에 있는 관문성(關門城)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울산의 ‘다운동’을 지나 태화강(太和江)을 건너 굴화, 무거를 통해 부산으로 갔었다.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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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關門城) 얘기를 조금 더 보탠다. 보통 관문성(關門城)의 길이를 약 12㎞라 하는데, 경주 양남면 신대리 정상에 있는 ‘기박산성’까지 포함할 경우의 길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관문성을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부르며 일명 ‘만리성’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관문성(關門城)은 몇 동강으로 갈라져 있다. 서쪽은 동해남부선과 동천강(東川江)이 잘라놓았고, 동쪽은 동해남부선 기찻길이 잘라놓았다.
폐선된 동해남부선 모화역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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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새로이 포항 - 울산 간의 복선전철(複線電鐵) 공사를 한다고 다시 한 번 동강을 내어버렸다. 울산(蔚山)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연결하는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 단선철도의 복선전철화 사업 때문이다.
이 복선전철화(複線電鐵化)사업은 지난 2010년 4월말께 포항(浦項)에서 기공식을 가진데 이어 경주시 외동읍 모화역(毛火驛) 일원에서 안전기원제를 열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시행하는 동해남부선 단선철도(單線鐵道) 복선전철화 사업 공사는 사업비 2조5천656억 원을 투입해 오는 2014년 개통을 목표로 총 76.5㎞를 8개 구간(區間)으로 나눠서 단계별로 시행된다.
동해남부선 복선전철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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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군(毛火郡) 얘기로 다시 돌아간다. 모화군은 남해안 국방의 중요거점이면서 또한 신라(新羅)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당시의 모화군은 신라의 중요한 외항이었던 울산의 두 현, 굴아화현(중구, 효문, 양정일대)과 율포현(동구, 강동, 염포, 북구일대)까지 모화군에서 관할했었다.
지금의 울산(蔚山) 반구동 항만유적에서 보면, 울산공설운동장 부근까지 무역선이 왔고, 육로와 동천강(東川江)을 이용한 수로를 통해 현재의 7번국도 방향으로 물품들이 수송되었다.
지금의 강동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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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關門城)은 동대산맥과 태백산맥의 줄기가 형성하는 협곡(峽谷)을 지키면서 왕도의 현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고향 입실(入室)이라는 지명도 ‘문을 지나 안(경주)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그 시절 사라센제국의 ‘아랍’인들도 모화군(毛火郡)을 통해 신라의 왕성(王城) 경주로 들어왔고, 일부는 신라에 귀부하여 신라의 신민(臣民)이 되기도 했었다.
동천강 계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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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의 신라조정(新羅朝廷)에서는 이들 ‘아랍’인들의 우람하고 억센 체격이면, 왜구는 물론 잡신(雜神)까지 거뜬하게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석상을 만들어 왕릉의 수문장(守門將)으로 세우기도 했었다.
회원님들이 잘 아시는 대로 우리들의 외동읍 괘릉리(掛陵里)에 소재하는 원성왕릉(元聖王陵)의 수문장들이 그 시절 신라조(新羅朝)에 귀부했던 ‘아랍’인들의 모습이다. 얘기가 나왔으니 이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보태기로 한다.
원성왕릉의 외호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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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괘릉(掛陵)에는 봉분(封墳)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서부터 동서 25m 사이에 돌사자 2쌍,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 화표석이 각각 한 쌍씩 있다. 그중 화표석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들 석상(石像)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쌍의 늠름한 무인석이다. 이 무인석은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담당(守護擔當)의 사천왕(四天王)이나 역사상(力士像) 같은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 형상으로 능을 지키고 서있다.
경주(慶州)의 고분군(古墳群)과는 좀 동떨어진 이곳에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형식으로 조영(造營)된 괘릉(掛陵)에 나타난 이 이방인(異邦人)은 과연 누구이며, 어떤 이유에서 이 능의 외호석물(外護石物)로 등장했을까. 지난 80여 년 간 구구히 논의해 오던 문제다.
1910년대의 원성왕릉 수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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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 민족의 민족혼을 소멸하기 위해 왕릉의 거송을 무두 베어내고, 왕릉 앞을 흐르는 우박천이 범람하여 외호석들이 모두 매몰되어 있으나, 그대로 방치해 놓았다)
어깨가 넓으며 목과 허리에서 한 번씩 꺾여 몸의 중심이 한쪽 다리에 실리면서 자신 있게 버티고 서있는 자세와 양팔의 위치, 그리고 넉넉한 얼굴의 표정은 실로 외호담당자(外護擔當者)로서의 무인(武人) 형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목고비(深目高鼻)한, 즉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서역인상(西域人像)이다. 동양사(東洋史)에서는 흔히 아리안계나 터키계의 인종상을 심목고비로 묘사한다.
그런데 이 무인상(武人像)은 무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의상(衣裳)은 의외로 갑옷 같은 딱딱한 복장이 아니라, 장식(裝飾)이 별로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이다.
1950년대의 원성왕릉 수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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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외동중학교에 다닐 때도 외호석들이 모두 하천에서 범람한 모래와 흙에 매몰되어 있었다. 일제 때는 의도적으로 그냥 방치했고, 6.25 이후에는 이를 복원할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심목고비한 무인석상(武人石像)은 괘릉뿐만 아니라, 경주시(慶州市) ‘도지동(道只洞)’에 있는 성덕왕(聖德王 ; 신라 33대왕, 702~736년 재위)릉과 경주 북방 안강(安康)에 있는 흥덕왕(興德王 ; 신라 42대왕, 826~835년 재위)릉에서도 발견된다.
성덕왕릉의 무인석(武人石)은 머리 부분만 남아있으며 얼굴의 파멸이 심하여 형태를 가려내기가 어려우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괘릉의 것과 엇비슷하여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필자의 향리에 있는 괘릉의 무인석상(武人石像)을 좀 더 구체적으로 관찰해 본다. 괘릉의 무인상은 직육면체(直六面體)의 평평한 돌 위에 세워진 257cm나 되는 크고 우람한 모습이다.
괘릉의 무인상
동쪽 무사(武士)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왼손은 철퇴(鐵槌)를 거머쥐고, 오른팔은 굽혀서 불끈 쥔 주먹을 오른쪽 가슴에 대고 있다. 서쪽 무사(武士)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오른 손에는 철퇴를 잡고 왼팔은 굽히고 있다.
마주보는 무사상(武士像)과는 반대 동작을 취하고 있지만, 다 같이 능을 지키기 위해 남쪽을 향해 버티고 선 모습이다. 둘 다 크고 우람한 몸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고개와 허리를 약간 돌린 모습인데 얼굴 모습이 별스럽다.
지금의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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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무사(武士)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 팔꿈치를 굽혀서 가슴에 댄 주먹 쥔 손에는 힘찬 근육이 나타나 있고, 손목까지 덮인 소매는 품이 째여 활동하기 알맞은 옷이다.
왼 팔은 펴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이고, 굵고 힘찬 팔뚝을 드러내고 있는데, 배꼽까지 올라오는 울퉁불퉁한 쇠몽둥이를 쥔 손은 쇠같이 힘차 보이면서 살아있는 듯하다.
원성왕릉 동편 문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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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를 빼고는 옷자락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만큼 몸피가 탄탄하다. 옷은 간편하게 차렸는데 오른쪽 허리춤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차는 둥근 ‘복(福)주머니’를 차고 있다. 쌍꺼풀진 부릅뜬 큰 눈은 치켜 올라갔고 흙먼지를 막기에 충분할 만치 두드러진 눈썹은 숱이 많고, 눈과 눈썹 사이가 좁다.
콧등이 우뚝한 큰 코는 밑 부분이 넓고, 끝이 처진 매부리코인데, 콧수염은 팔(八)자로 양끝이 말려 올라갔다. 큰 얼굴에는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다문 입가가 약간 처져 힘과 용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귀밑으로 흘러내린 곱슬 수염은 숱이 많고 길어 목을 덮고 가슴까지 내리 닿고 있다. 곱슬 머리카락은 또한 목뒤로 흘러내렸고, 머리에는 중앙아시아식 ‘터번’을 썼는데 머리 뒤에는 끝 부분이 내려와 있다.
동편 무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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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돌리고 있는 것과 힘의 균형을 맞추도록 반대 방향으로 틀었던 몸체는 허리 부분에서 다시 처음 방향으로 돌려 S자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되니 한쪽 다리에 힘이 실려 언제라도 움직일 것 같은 운동감(運動感)을 느끼게 한다. 자신감 있게 버티고 선 모습과 팔의 자세, 손에 쥔 무기(武器), 얼굴 표정 등은 능에 잠든 임금의 영혼을 지키기에 충분한 형상이다.
그러면 당시의 신라인(新羅人)들이 이토록 별난 서역인(西域人)의 형상을 어떤 이유에서 왕릉의 외호물(外護物)로 선택했을까.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학계의 견해는 당시의 당(唐)나라에서 유행하던 호인용(胡人俑, 흙으로 만든 서역인상)을 본받았을 거라는 것이다.
서편 무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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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근거는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武人石像) 모습이 중국의 명기용(明器用) 호인용(胡人俑)을 닮았다는 것에 두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역(西域) 무장들의 장대한 체구와 색다른 용모를 모델로 하여 무인상(武人像)의 호인용을 만들어 능묘의 명기(明器)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唐)으로부터의 문물을 섭취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던 당시의 신라(新羅) 귀족들이 지킴역의 명기로 사용되는 호인용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웠을 거라는 것이다.
지금의 아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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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논리다. 그러나 지금은 이 논리와는 달리 다른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당나라의 능에서 출토된 호인용과 신라의 무인석(武人石)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그것은 차원을 달리한 서역문물(西域文物)의 수용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주장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이 주장에 의하면 우선 중국에서의 명기인 호인용의 크기는 30㎝ 안팎에 불과하지만 괘릉(掛陵)이나 흥덕왕릉의 외호물인 무인석(武人石)은 그 8배에 달하는 대형조각물이며, 기법에서도 선명성(鮮明性)이나 생동감이 훨씬 더 넘쳐흐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호인용은 갑옷을 입고 있으나 무인석은 평범한 복장 차림으로 크게 다르다.
서역인들의 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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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수용은 서역인에 대한 직관(直觀), 즉 현장의 서역인을 직접 모본(模本)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괘릉의 무인석에 나타나고 있는 얼굴의 형상(形象)이라든가 ‘터번(turban)’을 착용한 복장은 분명히 서역인의 특색 그대로이며, 그 선명성과 정확성 또한 놀라울 정도다.
이것은 서역인의 용모나 복식(服飾)에 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조공(彫工)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중국 호인용의 무사복(武士服)과는 달리 민간복(民間服)을 입히고 체구나 형상 자체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파악과 지견(知見 ; 식견)에 기초한 것이다.
지금의 모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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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 말하면, 서역인(西域人)에 대한 현장모델화가 없이는 이토록 정확한 형상의 조각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인상(武人像)의 현장모델은 바로 일찍이 이상향 신라(新羅)를 찾아온 서역인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 무인석(武人石)이 오른쪽 옆구리에 지름이 10㎝ 가량 되는 ‘복(福)주머니’를 차고 있는 모습이다.
복주머니는 동양(東洋), 특히 우리나라의 고유한 장신구(裝身具)로서 신라(新羅) 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서역인의 신라 내왕(來往)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명의 융합(融合)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무인석의 복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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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화군 얘기를 하다가 괘릉(掛陵) 얘기가 되고 말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결국 괘릉의 무인석(武人石)은 단순한 형상적 기능을 노린 상징물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경부터는 서역인(西域人)들이 신라 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武將)이나 문관(文官)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학계에서는 아직도 이 무인석이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중국의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은 미술품 정도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아랍인들이 신라에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수(隋)·당(唐)의 미술품을 보고 모방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모화리 원원사지와 삼층석탑(쌍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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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중국(中國)과 아랍권 현지에서 발견된 여러 문헌에서 ‘무슬림들이 신라에 정착했다’는 구절이 발견되면서 당시의 서역인(西域人)들이 중국을 경유했거나 울산항(蔚山港)을 통해 경주(慶州)까지 진출했다는 설이 정설이 되고 있다.
때문에 지금은 괘릉(掛陵)의 무인상은 신라인들이 아랍계 상인(商人)들을 직접 보고 만들었을 것이라는 쪽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괘릉은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 무덤 앞의 무인상(武人像)이 아라비아인으로 전해지면서 황남대총과 천마총, 서봉총, 금관총 같은 경주(慶州) 시내에 있는 많은 고분에서 발견되는 유리잔과 유리병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괘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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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고구려(高句麗)나 백제(百濟) 무덤에는 없는 유리제품이 유독 신라 무덤에서만 나오는 것은 이 유리제품이 육지와 바다의 실크로드를 이용해 신라와 교역했던 서역인(西域人)들의 전래품이라는 것이다.
신라고분(新羅古墳)에 부장된 유리그릇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개발돼 세계 각지에 전파돼 로만 글라스(Roman glass)로 이름 붙여진 것들로,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수만리나 떨어진 신라(新羅)까지 오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모화역전 시내버스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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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제품의 전래경로(傳來經路)에 대해 일부 학자들이 “북아시아의 초원지대를 관통해 중국 북부를 경유하거나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와 중국의 장안(長安)을 거쳐 신라(新羅)까지 왔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에서는 뱃길로 인도와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베트남을 경유해 중국 남부를 거쳐 신라(新羅)에 이르렀을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이 모화군(母火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아랍인들의 왕조인 사라센제국의 무역선이 울산항에 기항했다는 기록이 있고, 모화군을 경유하여 왕성인 경주(慶州)를 왕래했는가하면, 일부는 신라(新羅)에 귀부하여 신라의 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화리 모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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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부설 노인대학 졸업식 기념촬영 장면이다)
그리고 당시의 신라(新羅) 조정에서는 그들의 건장한 체격이 왕릉의 수문장(守門將)으로 적격이라는 판단아래 석상(石像)으로까지 만들어 그 시절의 왕릉에 세워져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 자꾸만 길어져 여기에서 무조건 파일을 덮는다.
배경음악은 우리들의 고향 옛적 모화군(毛火郡)을 포함한 신라왕조(新羅王朝)의 주제가이자 ‘서라벌(徐羅伐)’의 노래라 할 수 있는 현인의 ‘신리의 북소리’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신라의 북소리
현 인
서라벌 옛노래냐 북소리가 들려온다
말고삐 매달리며 이별하던 반월성
사랑도 두 목숨도 이 나라에 바치자
맹세에 잠든 대궐 풍경 홀로 우는 밤
궁녀들의 눈물이냐
궁녀들의 눈물이냐 첨성대 별은
화랑도 춤이더냐 북소리가 들려온다
옥피리 불어주던 님 간 곳이 어데냐
향나무 모닥불에 공들이는 제단은
비나니 이 나라를 걸어놓은 승전을
울리어라 북소리를
울리어라 북소리를 이 밤 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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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 모화역 플랫폼(1966)
![](https://t1.daumcdn.net/cfile/cafe/0378CF42511C43FB0C)
(카페지기의 모습이 보인다)
복덕방이 되어버린 모화역사
![](https://t1.daumcdn.net/cfile/cafe/2177BD35511E289A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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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화리 내력에서 경주 일대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지니고도 잠잠하다가 이제
산업화 되면서 우뚝 솟은 고층 건물을 보니 놀랍네요
모화리 일대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자리가
생기고 그나마 외동 인구가 줄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예사로 듣던 모화 (김동리 무녀도) 더욱 가까이
다가 서네요 좋은 글 감사드리며
새해를 맞아 좋은 일 많으시고
건강과 함께 하시는 일마다 행운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저의 향리가 모화라서 그런지 새롭게 느껴집니다선배님.땅지가 당나라 군사 주둔지라 지명을 알만하네요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줄 이제사 알았심더 선뱃님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하셨는지 놀랍습니다.
모화군의 위치와 넓이는 조금씩 변천해 온것 같습니다.저의 시골집이 모화리 377번지(하모 철교 위)인데,
위 모화군청 사진은 모화공단에서 문산쪽, 하단 사진은 마을회관 중심이라기보다(마을회관쪽은 우측하단)
도경계인 관문성부근 동대산 쪽에서 본 왼쪽이 땅지, 이화, 윗쪽은 속심이, 문산공단 쪽으로 보이네요.
아무튼 모화군은 지금의 외동읍과 울산의 농소호계지역까지 포함한 넓은 지역이었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김동리의 무녀도에 나오는 무녀 모화네는 이런 넓은 모화군지역 어디에서 태어나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지금의 안강 부근의 강쪽인 것 같습니다.
제가 모화 사람인데도...모화군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외동읍 자문위원으로 모셔서 외동읍 홈페이지도 좀 보완되면 좋겠다 싶네요....사실 저는 외동읍 홈페이지도 못가 봤는데..ㅎㅎ 모화를 중심으로 최근 사진 정말 감사합니다. 공장이 많이 들어 서 있고....큰길이 좀 난것이 다르기는 하고...우박에서 오봉산 성만리 가는 중간쯤 오른쪽의 뿕은디 산은 형체가 없어지고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거 같고..동해남부선에서 석계로 바로 큰길이 뚫어져 있는것이 훤히 보이네요...
시간 날때 자세히 또 봐야겠습니다. 사진도 다운 좀 받아놔야겠네요..ㅎㅎ 치술령이 굉장히 먼거리였는데...사진으로는 가까이 보이네요...저는 어릴적에.....관문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대산으로....서쪽으로는 동천강을 가로질러서... 오봉산 ....순금산으로 뻗어져 있었는데...그 성을 잘못알고 만리장성이라고도 했습니다.ㅎㅎ그 순금산 정상에서는 날씨 좋을때는 울산 앞바다가 보이고...섬도 희미하게 보였는데...어른들은....그 섬이 대마도라고 하였습니다. 그 순금산 정상 조금 지나 성터 바로 옆에 저의 부모님 묘소가 있는데...그기만 가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좋았는데..자주 가지도 못해아쉽기 한량 없습니다.
그 순금산에 있는 순금사에는 초안 스님이라는 스님이 계시는데...그 스님이 어찌나 절을 잘 가꿔놓았는지...옛날 순금사는 형체가 없고...마치 불국사 버금가는...ㅎㅎ좀 과한 비교이기는 하지만...큰 절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법당 왼쪽 벽에는 저의 모친 영정도 걸어놓고...많이 빌어주고 있던데....그 절에 시주도 많이 해야되는데....가난한 월급쟁이 객지생활 쪼달리다 ......신도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죄송할뿐입니다. 직장에 메인 몸도 아닌데...뭐가 그리 바쁜지..ㅎㅎ .경주도 자주 못가고....모화도 못가고....산소며 절에도 못가고...못가는데가 많아서 미안하고 죄송한게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