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만 잉크가 퍼지듯
공기사이로 빠르게 번져나간 검정.
남은 작은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놀라울만큼 아름다운 남색빛.
점잖은 신사의 예복 마냥
고상하고 화려하게 자리잡은 밤하늘.
금색실로 수놓아진 문양을 따라
가장 높은곳.
가장 수수한 자리를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찬란한 보석의 자리.
하지만 이 한 달.
금빛 보석은 빛을 잃고..
불길하게 번득인다.
검은 요기를 띈 서글픈 구멍이,
[검은 달(Black Moon)]이,
퀭한 빛으로 하늘을 뒤흔든다.
처참하게 뚫린 하늘의 구멍사이로
한줄기 뇌성이 머리에 꽂힌다.
만물의 마음의 눈을 가리는
'사스나 벨(Saasna Belle)', 그 만의 배려여-.
=레 리델론의 추모시, '사스나 벨(Saasna Belle)' 중.
...그를 처음 만난것은 내가 아스테리온의 신전에 있은지 몇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근 10년간을 신전에서만 생활해 왔다. 여기 분들은 좋은분들 뿐이었다. 친구들...그리고 고위 무녀님들 사이에 둘러싸여 어린날을 행복하게 보냈다....라고 쓰고 싶지만. 내 주위는 언제나 고요했다. 그리고 나 역시 처음에는 어색했던 침묵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된것도 같다. 신전에서 가끔씩 나가보면, 꽤 알록달록한 옷들을 입고, 자신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놀러나온 또래 아이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그들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던건 사실이지만, 난 나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자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무녀가 되는일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모든것은 순리대로, 지어진 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보면 나는 정말 일찍 사람들이 말하는 '철'이 들어버린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 많이 웃을수도 있었는데. 더 순수하게 보낼수도 있었던 어린 시절을 교육을 받으며 수많은 눈물을 혼자 흘렸고, 그때마다 혼자 일어서왔다. 하지만 모든것은 '그'를 만나고 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나의 삶에 있어 시작이자 끝인 존재....그 때는 그런 생각 조차 할 정도로, 나에게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해가 지난 후...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서 '그'는 그랬다. 나에게...특히나.
남에게 있는 생일 조차, 수호성조차 '없는' 그야말로 '혼자'인 느낌을 더욱 받고 있는 나였다... 다른 수호성이 없는 이들(굳이 말하자면 암흑 아룬드 출생자)들도 평생 이런 생각들을 갖고 살까.... 그렇다면 나는 크나큰 행운을 받았음에 틀림없어.
슬쩍 내 머리칼을 흩뜨러 트리는 바람에 괜시리 내가 앉은곳의 들판의 들풀들이 스러진다. 흔들리고도,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기어코는 다시 일어나는 풀들. 그 풀들에 감히 나를 비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천성부터 무녀로 타고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능력...도 있다고 했고, 나 자신도 그것에 반대는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나중에야 알게된것이다. 누구든 나를 아는 순간 나를 꺼려한다는것... 아스테리온은 죽음의 무녀..
뒤돌아 보지 않는 존재라는것,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수.없.을지도 모른다고...
슬며시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눈을 쓰다듬어 본다.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예쁜 눈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색 눈을 가진 나도 상상해 보았었다. 하지만. 이제 깨달았다. 나의 수호성에게 내가 부여받은, 내가 또 다른 나의 '수호성'에게 돌려줄 수 있는 색깔... 그리고... 이 색 밖에 없을것이다. 그가 나를 찾을 수 있는.... 그리고 지금 이렇게 같이 서 있을수 있게 해준 나와 가장 어울리는,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색... 나의 역할, 나의 '마음'과 가장 조화로운...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나는 나의 수호성과의 깨어질 수 없는 약속을 했고...
그와 같은 것을 공유할수 있었다. 자신과 같은 하나의 과거. 그리고 자신과 같은 느낌.
자신과 같은 기억...
'그'는 나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또다른 '그'... 그 역시 나에게 말했다.
언제까지고 '기억'하겠노라고.
그 말 하나하나가 어찌 가슴 설레게 하는지, 하지만, 그 말이 어찌 이렇게
나를 슬프게 하는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폐가 찢기어 나가는것 같이 숨을 쉴수가 없다.
'그'의 모습에서 '그'를 찾는 것은 나의 집착일까...
하지만 그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는것, 그것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그 안에 그가 있다고 느낀것은 나만의 이기였다고...
그리고 그는 그라는 존재 하나로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서 존재감을 갖기 시작했다.
알고 있을까. 같은 가문의 두 사람이야말로, 나의 혈육, 나의 모든것이었다는것을...
그래, 알고 있지? 파비안 나르시냐크... 내.. 모든 기억. 내...모든 생명.
아마 알고 있을까..에제키엘 나르시냐크... 모든이의 우상이자, 나의 희망이었던 이...
[아직, 알고 있겠지....?]
"프랑드의 신부여, 눈을 떠보아요..."
살며시 눈을 뜬 주위는 고요했다. 매끄럽게보이는 연둣빛 하늘이 이제는 무서울 정도로 익숙하다. 아마 나중에 밖으로 나가게된다면 푸른 하늘이 이상해보이겠는걸. 나는 입에 걸린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언제 내가 잠들었을까. 또 깨어나게 된 지금은 언제일까.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약간은 긴 속눈썹이 따끔거린다. 그렇게 손으로 눈을 쓱쓱 부비고 나니 모든 상황이 이제 확실했다. 투명하기만 했던 연녹빛하늘 위로 어떤 빛이 보인것은, 그리고 그 어느쯤 한 인영의 눈이 살포시 비친것은.
모든 잠든 것을 다 깨울만한 자상한 어머니 같은 미소가 어린 동안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약간은 언밸런스한 기가 스쳤지만 나름대로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 옆에 보이는 것은 키큰 나무들, 그리고 엔젠의 안인데도 여기까지 느껴지는 강한 영의 기운.
나는 분명해 보이는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그래, 여기는 자신이 파비안과 에제키엘과 와보았던 곳이었다. 그와 동시에 정말 여행의 시작이라고도 할수 있었던 바로 그곳.
"켈리드리안 숲...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는 싱긋이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어찌 시원해 보이는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페어리들의 아름다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가는 손을 살며시 들어 엔젠의 표면을 매만졌다. 그리 크지도 않는 어린아이 주먹에 쥐어질 정도의 크기의 엔젠이 그녀의 한손에 꽉 잡히었다. 나는 시야가 어두워졌음에 약간 당황했으나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그 어떤 빛보다도 찬란한 것이었다.
그녀는 엔젠을 받쳐들듯 두 손위에 얹은 다음 두 팔을 뻗었다.
갑자기 내리쬐는 햇?, 그리고 그 엔젠의 위에 부서져 내리는 강렬한 느낌.
그리고 그녀는 몸을 한바퀴 빙글, 돌려보였다. 그녀의 고운 머리가 차분히 그녀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의식의 시작. 그리고 끝없을 모험의 끝이었다.
'파비안...'
파비안느의 달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사람. 자신의 운명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던듯 차분히 받아들일수 있던 사람. 자신의 힘든 짐을 떠맡듯이 지고 나르면서도 나의 짐까지 지워버린 이기조차 받아들여 줄수 있었던 사람...
[괜찮을거야... ]
어둡지만 밝았던 연녹색 엔젠속으로 서늘함이 스며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회전을 시작으로 페어리들은 춤의 향연을 펼쳐보았다. 팔랑거리는 꽃잎마냥 가볍지만,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깊이 각인되는 하나의 즐거움. 그것은 여느 축제보다 화려하며 간소하다. 그 날, 페어리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진지하며, 여느때보다 정교한 춤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페어리들의 여왕, 그녀의 이름은...
"이로서 끝입니다... 프랑드의 신부여."
그녀가 미소지었다.
알수 있다. 피부에 와 닿는 이 느낌. 끝인가... 정말 끝인가...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