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과 함께 한 소나무
소나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다. 한반도에서 자라기 시작한 것은 약 6천 년 전으로 추정한다. 조상들은 곱게 벗은 소나무를 지조를 상징하는 선비나무로 숭상하고, 소나무 보호 정책을 꾸준히 펼쳐왔다.
소나무(솔+나무)에서 '솔'은 산의 꼭대기를 뜻하는 '수리'가 변한 말로, 어원적 의미는 '우뚝 솟아 높이 자라는 나무'다. 한자 송(松)은 나무(木)와 임금, 제후(公)가 합쳐진 글자로, '나무 가운데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소나무 아래에서 태어나 소나무와 더불어 살다가 소나무 그늘에서 죽는다고 할 정도로 소나무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자마자 금줄에 솔가지를 끼워 나쁜 기운을 막았다. 어린 시절 뒷동산에 올라 솔바람을 맞으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마음껏 뛰어놀았다. 해마다 추석이 되면 솔 향기 물씬 나는 송편을 빚어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소나무의 정기를 받고 튼튼히 자라 아들 딸 낳아 기르며 부모님을 정성껏 모셨다. 그리고 이웃과 더불어 올곧게 살다 죽어서는 송판으로 짠 관에 몸을 실어 편안히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한 평생이다.
소나무 목재는 다른 나무에 비해 탄력이 좋아 뒤틀리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으면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딘다. 그래서 목수들이 선호한다. 솔잎은 맛이 쓰지만,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다. 솔에서 풍기는 향은 사람들의 머리를 맑게 하는 작용이 있어 누구나 좋아한다.
한옥과 궁궐들이 대부분 소나무 목재로 지어졌다. 곱게 자란 굵고 가는 소나무를 베어 기둥과 서까래로 사용하였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은 굽은대로 제구실을 톡톡히 해낸다는 뜻이다. 전통 건축의 자연미를 살리려고 휘어진 나무가 그대로 기둥이나 대들보로 쓰인 例들이 있어, 곧은 나무만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줄기와 마디가 곱고 금강석처럼 단단하여 이름 붙여진 금강(金剛) 소나무를 일명 춘양목(春陽木)이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백두대간, 영동 지역(경북 봉화 춘양면) 바닷바람을 거칠게 맞으며, 음지에서 더디게 자란 탓에 나이테의 폭이 좁아 강도가 높다. 황장목(黃陽木)은 나무에 속고 괭이 부근이 붉은 빛을 내는 질이 좋은 소나무로, 궁궐의 목재용이나 배를 만들고 관을 짜는 데 쓰인다.
조상들은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송금령(松禁令)으로 소나무를 보호하였다. 고려 10대 왕 정종 원년의 송악산에서 연료 채취를 금하고, 조림(造林)사업으로 산림을 보호한다는 기록은 특기할 만하다. 조선시대에 성저십리(城底十里: 성으로부터 4km) 소나무 벌채를 금지시켰다. 오늘날 환경 보존을 위한 그린벨트에 해당한다. 개발제한구역은 도시의 수평적 면적 평창을 억제하기 위해 산업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1971년에 도입된 제도다. 그 후 지역주민의 생활 편익을 위하여 어느 정도 규제가 완화되었으나, 녹지대의 감소가 심히 우려된다.
조선왕조 통치의 기틀이 된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과수, 산림보호에 관한 규정에 이르기를 "지방에 있는 금산(禁山)에는 나무를 베는 것과 불 놓아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여 해마다 봄에 소나무 묘목을 심고, 그 숫자를 임금에게 보고한다. 이를 위반했을 때에는 산지기와 담당관이 곤장을 맞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약한 땅기운을 보강하기 위하여 소나무를 심었다. 안동 하회마을에 유운룡(1539~1601)이 조성한 숲이 대표적이다.
판옥선 같은 배를 만들 때도 주로 소나무를 썼다. 2005년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의 유물 통나무배에서 소나무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박상진 교수는 거북선 몸체가 대부분 육중한 소나무라고 추정한다. 조선시대 박치기 전술(撞破)을 위하여 싸움배의 앞부분은 단단한 참나무를 썼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배는 소나무나 참나무보다 무르고 가벼운 삼나무로 건조하였기 때문에 항속은 빨라도 해전에서 충돌하면 쉽게 부서질 수 밖에 없었다. 배 밑바닥도 우리의 U형과 달리 V형으로 속도는 빠르나 방향 바꾸기가 힘들어 기동성이 떨어졌다. 선박의 우수성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요인 중에 하나다.
김제의 '벽골제'는 삼국시대에 쌓은 저수지다. 둑의 뼈대를 소나무로 하고 자갈과 진흙을 다져 굳혔다. 소나무가 현대건축에서 철근 역할을 한 것이다. 오랜 세월 썩지 않고 버티는 이유는 나무가 물을 먹으면 철근콘크리트처럼 목질의 인장 강도가 높아 더 단단해지는 원리 때문이다.
소나무를 태워 먹을 만들었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에 민어의 부레에서 나오는 아교와 반죽하여 굳힌 송연먹(松烟)을 벼루에 갈아 글씨를 쓰고, 수묵화를 그리거나 목판인쇄에 사용하였다. 우리나라 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일본의 쇼쇼인(正倉院)에 소장돼 있는 신라의 먹 2점이다. [고려도경]에 고려의 송연먹이 뛰어나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봄철에 먹을 것이 부족하면 들나물을 뜯어 먹고 살았다. 물이 오른 소나무 속껍질을 빻아 송기떡을 만들어 먹었다. 솔잎과 송화가루, 송이버섯은 건강식품이다. 조상들은 비상시에 솔잎가루를 느릅나무에서 나오는 즙에 타 먹어 생명을 유지하였다. 솔잎과 솔씨를 도가나 불가에서는 선약(仙藥)으로 여겼다.
솔은 관절염이나 신경통, 중풍 치료에 좋다. 복령(茯笭)은 베어낸 지 3년 정도 된 소나무 뿌리에서 기생하는 버섯이다. 위장의 기능을 개선하고 불면증, 당뇨, 장염 치료에 좋은 한약제다. 솔잎죽은 오장을 편하게 한다. 송화(松花)는 4, 5월에 채취하며, 송화가루에는 지방간을 해독하는 콜린과 항산화 효과가 있는 비타민 C, E가 풍부하게 들어있다. 또한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항균성 외에도 신경을 안정시켜주므로 숲속의 보약으로 불린다. 예전의 구황식이 오늘날 건강식으로 뒤바뀐 것이다.
소나무는 십장생 가운데 하나로서 장수(長壽)의 징표요, 지조와 절개, 불사(不死)를 상징한다. 이를 잘 표현한 작품이 완당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1844)이다. 눈 내린 토담집 마당에 소나무를 그렸다. 그 발문에 "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야: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추상 같은 선비를 만날 수 있다. 강직한 소나무를 묘사한 세한도는 운명이 기구한 그림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에서 이국을 떠돌다가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천신만고 끝에 서해가 손재형 선생이 찾아낸 보물이다.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소나무가 우리를 지키는 위대한 힘이다. 애국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는 늘 푸른 민족의 혼이다. 대중가요 '상록수'의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는 모두 함께 불의에 맞서 정의를 고대하는 민중의 차분하고 강직한 외침이다.
소나무는 우리 생활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는 나무다. 먹거리와 건축재료, 약재는 물론 항상 변하지 않는 고고함과 정중함이 자연스럽게 겨레의 심성을 곱고 강인하게 길러준 것이다. 청정한 소나무는 품격 높은 우리의 자화상이자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