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묘소와 심곡서원 느티나무 기행
김경식시인/기행작가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불안할 때에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정암 조광조(1482~1519)선생이다. 아름다운 가을날에 용인시 상현동 203번지에 있는 심곡서원을 찾아간 이유다.
조광조가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500년 된 느티나무는 아직은 푸르고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다. 심곡서원은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영동고속도로 동수원 나들목을 통해 가면 수월하다. 용인방향으로 약 2km정도 가다 왼편 수지 상현마을 고층 아파트단지가 보이는 정암로로 들어서면 이내 심곡서원이다. 지금은 거의 사방이 아파트 속에 아름다운 숲을 간직한 심곡서원은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을 지나 사당을 잇는 중심축으로 배치된 우리나라 서원 건축구조의 전형이다. 광교산과 형제산에서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약간은 경사지의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서원입구에서 돌계단을 올라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당이다. 강당인 일조당(日照堂)은
지금은 서예교실이 되어 있다. 이곳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들과 유림들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다. 일조당(日照堂)은 정면3칸, 측면3칸의 그리 크지 않은 건축물이다. 나무로 제작한 벽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을 달아 사면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얼핏 보면 강당보다는 목판본과 같은 것을 보관하는 서원의 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당 내부의 높은 벽에는 많은 중수기와 상량문, 편액들이 즐비하다. 일조당(日照堂)이란 이름은 조광조 선생이 사약을 받고 쓴 시에서 따왔다.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또한 전남 화순(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한양을 바라보면서 1519년 음력 11월19일 쓴 절명시’는 그가 얼마나 충신이었는지 알수 있다.
愛君如愛父(임금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憂國如憂家(나라 근심하기를 집안근심하듯 하였노라)
白日臨下土(밝은 해가 아래 세상 내려다보고 있으니)
昭昭照丹衷(가이 없는 이내 충정 길이길이 비추리라)
"내가 죽거든 관을 얇게 만들고 두껍게 하지 말아라. 먼 길을 가기 어렵다.
조광조는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네 집에 묵었으므로 마침내 보답하려 했으나 보답은 못하고
도리어 너에게 흉변(凶變)을 보이고 네 집을 더럽히니 죽어도 한이 남는다."
죽음 직전에 이런 말을 하고 조광조는 한양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4배를 드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군신의 예를 갖추었다. 심곡서원은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선생을 선양하는 서원이다. 서원의 건축물은 그렇게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지만
선생이 심은 느티나무와 선생이 직접 조성하였다고 전하는 작은 연못이
사뭇 심곡서원의 역사성을 말해준다. 느티나무는 키 19m, 허리둘레는 4m다. 옆에서 함께 자라고 있는 향나무는 조광조의 변치 않는 기상의 상징이다.
당시에 이곳에 느티나무를 심은 의미는 조광조 자신의 사상을 100년이 아니라
1,000년 이상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살은 썩고 뼈도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느티나무는 천년을 산다. 그런 나무에게 자신의 의지를 심는 것은 선비가 할 일이었다. 심곡서원의 느티나무는 금년 가을에도 조광조의 삶과 억울했던 죽음을 낙엽이 떨어지면서 슬퍼할 것이다. 그 잎새들은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덮이게 될 것이다.
심곡서원은 1650년(효종1)에 창건되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처음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위패를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배향하던 충렬서원(忠烈書阮)에 두기도 하였다. 이후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이곳으로 서원을 옮겼다. 서원 건립과 함께 효종으로부터 ‘심곡’이란 현판 사액과 토지 노비를 받았다.
조광조의 후배지만 친구처럼 지낸 양팽손(梁彭孫1488~1545)을 추가 배향한 것이 특징이다. 양팽손은 문인이며 화가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화순)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와 그림으로 소일하며 살았다.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조광조는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종성으로 부임하는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와 있던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운다. 조광조는 이때부터 시문과 성리학의 탐구에 정열을 쏟는다. 소학(小學), 근사록 近思錄〉등을 기본으로 경전에 응용하였다.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계승한 김굉필의 문하에서 선두로 젊은날에 사림파의 영수가 된다. 이것이 화의 근원이 될 줄은 그도 몰랐으리라.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10)때 그의 스승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명목으로 윤필상(尹弼商), 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된다. 이때 조광조도 유배된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조선 정치의 현실을 한탄하면서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한다.
드디어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그는 대학의 도를 강조하였으며 도학정치와 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사성 유숭조(柳崇祖1452~1512)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등에 지고 도학정치를 강조한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도탄에 빠뜨린 직후였다.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정치적 분위기를 일신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다. 중종은 이런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기반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왕도정치를 실현함에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것은 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법으로 왕과 관직에 몸담은 자들이 도학을 실천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실현으로 보았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근본인 군주가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를 바로 행 할 수 없고 아래로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는 이상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선조들이 만든 법을 갑자기 수정할 수는 없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실천적인 정치 행위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반포하고 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했다.
여씨향약의 주된 강목(綱目)은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患難相恤)'이다. 지방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하기 위한 향약의 실천 정치는 조광조의 일단의 행동적 정치를 엿볼 수 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 미신타파를 이유로 백성에게 폐해가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관철했다. 1518년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며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직한다. 이때에 조선의 과거시험이 문장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양심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정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하고 1519년부터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 김구(金絿), 김정(金淨) 등 소장 사림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한다.
이들은 조정의 요직에 등용되어 이상정치 실현을 위해 장애물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낸다. 1519년 중종반정 때 훈작을 삭탈한다. 이 일은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중종도 조광조의 이런 급격한 개혁주장을 내심 위기를 느꼈지만 공신 76명의 훈작을 삭제한다. 이는 반이 넘는 숫자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조광조는 ‘孟子’의 말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내면적 수양에 정열을 다하고 겸손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맹자의 독선기신(獨善其身)이라는 ‘자신이 위태로울 때 남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 한 몸의 처신만을 온전하게 하라’는 것을 거부했다. 조광조 개혁의 교훈은 세상을 바꿀 기회가 왔을 때 세상에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로 적을 만들지 않는 선비정신을 정립하는 것이리라. 결국 위기위식에 혼연일체가 된 훈구파는 그냥 당하고 있지 않았다.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조광조와 사람들을 제거할 모의를 한다. 이들은 조광조와 신진사림에게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새겨 벌레가 갉아 먹게 한 다음에 궁녀에게 주어 중종에게 보여 주라고 하여 의심을 조장시킨다. 홍경주는 왕에게 고하여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사리(私利)를 취하고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능멸하고, 신분을 위협하는 행위로 조정의 위신을 위태롭게 한다고 고한다. 신진사림들과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 김식, 김구, 김정 등을 투옥하고 사사(賜死)의 명을 내린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탄원으로 사형이 보류되어 지금의 전남 화순인 능주(綾州)에 유배된다. 그러나 훈구파의 김전(金詮), 남곤, 이유청(李惟淸)같은 조광조의 정적들이 3정승에 임명되어 현량과는 폐지되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이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런 조광조의 죽음을 접하고 안타까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첫째는 장원급제하여 너무 빠르게 출세한 것이요. 둘째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는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점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의 개혁정책은 연산군 때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천함으로 조선에서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벌였던 정책이다. 실행방법이 너무 급진적이라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발로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도학정신은 이황(李滉), 이이(李珥)를 비롯한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조광조의 사상과 죽음은 사림들에게는 정신적인 모델이 되었으며, 조선 유학의 기본적인 골격이 되었다. 선조 때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정암집 靜庵集』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다시 이곳을 찾게 되면 심곡서원에 함께 배향되어 있는 그의 친우 양팽손 선생의 시「산수도」 한 수를 읽으며 욕심을 버리고 싶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그림자 그림 같고
강을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온 돛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거두어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구경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 할 수 있고
여울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 양팽손 시 「산수도」
심곡서원을 마주 보는 산에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가 있다. 서원을 나오면
길 건너에 하마비가 서 있다. 정암 조광조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는 하마비 유례를 읽으면 그가 죽은 후 백성들이 그를 얼마나 흠모했었나를 알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산모퉁이를 지나면 43번 국도와 만나는 오른편에 묘소를 안내하는 간판이 서 있다.
진입로 입구에 고색창연한 정암 조광조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비의 앞면 상단에는 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문정공정앙조광조선생신도비명)’라고 전자(篆字)체로 새겨져 있다. 선조 조광조가 세상을 떠난 후 66년 후인 1585년 선조 때에 건립된 이 비는 높이가 244cm, 폭 93cm, 두께 34cm로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1515~1590)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이산해(1539 ~1609)가 글씨를 썼다. 홍문관이었던 김응남(1546~1598)이 두전(頭篆)을 썼다. 가파르지만 묘역이 넓은 산등성이에서 오른편에 정암(靜庵) 조광조의 묘가 있다.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된 이씨(李氏)와 합장묘다. 율곡 이이가 묘비명을 썼다.
조광조의 묘터는 명당터지만 지금은 앞이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남향과 서향이 막혀있다. 생거진천(生居鎭川)이요, 사거용인(死居龍仁)라 했던가? 이곳 용인은 명당터가 많아서 이런 말이 전해 오지만 지금 용인은 아파트촌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사거용인(死居龍仁)이 아니고, 생거용인(生居龍仁)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
지금 용인시는 난개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늙은 느티나무 몇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은 희망이다. 만약 이곳에 느티나무 숲이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500년 전에 심었던 느티나무와 조광조의 묘소 주변의 숲은 이제는 콘크리트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용인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비정한 시대지만 나무와 숲은 안식처를 아낌없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조광조 선생은 그의 저서 『정암집』에서
“배우는 자의 급선무는 의(義)와 이(利)의 분변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이런 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곳 심곡서원과 조광조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후에
느티나무 우듬지 사이로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평안을 찾게 될 것이다.
-계간<산림문학> 2019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