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의 금강경 강설 - 31
原文
何以故 如來所設身相 卽非身相
解義
『왜 그러냐 하면(何以故) 여래께서 말씀하신 몸뚱이의 모양(如來 所設身相)은 곧 몸뚱이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몸뚱이의 모양이 여래일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卽非身相).』하고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육체를 나라고 하여 여자 몸뚱이 타고 나면 시집 가려고 애를 쓰고 남자 몸뚱이 타고나면 장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를 씁니다.
이런 망상을 버리지 못하여 죽어서
또 태어나고 업을 짓고 하게 되는데
한번 나서 늙어 죽는 고생이 보통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죽을 수 없어 살아 있는 것이지 살아 갈 이유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세상은 결국 먹고 똥 싸고 그것 때문에 무의미 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꼼짝 못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그것을 위해 죽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모두 농사짓고 장사하는 이유는
죽기가 싫어서 안죽으려고 하는 짓에 불과합니다.
단 십분이라도 더 살려고 발버둥질합니다.
그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게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 죽으려고 결정만 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합니다.
농사짓고 장사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다 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아닌 본래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니 밥을 먹어 산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산 것도 아니고 돈을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
이 <마음>을 발견하고 발심한 보살은
육체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하고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그게 바라밀이고 응무소주(應無所住)하는 행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찾아 생사를 초월하여
죽음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하루 밥 세 끼가 재미나서 먹는 것도 아닙니다.
밥 안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씁쓸한 산삼을 먹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안 먹고 영원히
살아 있는 우리 마음을 깨쳐야 합니다.
그래서 전 우주의 관광여행이나 다니고 아무 할일 없는 관광여행,
중생제도를 위한 여행 길에 올라서
모든 중생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모두 마음 깨쳐 생사해탈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육체와 정신 두가지가 있는데 어느게 참 나인가,
이 육체는 언젠가는 늙어 죽을 것이며
그것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근육이나 뼈가 우리 몸뚱이의 주가 되는데 이것을 분석해 보면 결국
수분 . 당분 . 지방질 등의 물질적 요소에 불과합니다.
혈액이나 오줌 등을 보더라도
결국 이것은 물질이며 오장육부는 물론 뇌세포까지라도 그것은 물질적 구조에 불과하며 물질은 결국 생명일 수는 없습니다.
이 몸뚱이는 마음이 없으면 송장입니다.
육체를 부려먹는 게 마음입니다.
마음은 운전수고 육체는 택시와 한 가지입니다.
마음이 몸뚱이더러 앉으라, 서라, 가자,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그런데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마음이 곧 나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산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히 믿어지면 그날 저녁부터 잠도 잘오고 영원히 죽움을 면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니 큰 환희를 얻습니다.
곧 이 몸뚱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몸뚱이가 아닌 줄을 알아야 합니다.
原文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解 義
이 금강경 계통을 전부 통틀어
반야부(般若部)라고 하고 그 부수(部數)만도 육백부나 되고 경책의 권수로는 이천권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반야심경(般若心經) 같은
작은 경도 있지만 큰 경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백부의 골수를 통틀어 얘기하는 대표적인 글이 다음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란 네 구절입니다.
이 네귀 열여섯글자 안에 금강경의 핵심은 물론 반야 육백부 전체의 뜻을 유감없이 표했다는 뜻에서 반야제일게(般若第一偈)라고도 합니다.
그 게송(偈頌)의 뜻은
『모양으로 있는 모든 것, 모든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이 모든 현상이 상이 아닌 줄을 직관(直觀)할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고 마음을 깨친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릇 있는 바 모양(凡所有相)이란 현상계를(現象界)를 말하고 이때에 현상은 모든 생각, 안 보이는 모든 것까지 다 포함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만분의 일초도 가만히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질량 변화를 쉴새 없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 됐다가 돌아오고 하므로
이것은 결국 믿을 수 없는 허망상(虛妄相)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皆是虛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학문 .
예술 . 종교 . 불교도 다 허망하고
오직 자기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로 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실연당했을 때 보다도
더 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여자하고 연애를 하다가 그 여자 뒤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또는 그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려고 했던 그 마음이 홱 돌아섭니다.
그 총각 처녀 지나간 길로 걷기도 싫어질 겁니다.
애정문제 가지고도 이렇게 마음이 돌아서는데 하물며 우주 인생의 근본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게 없습니다.
온 세상이 날 죽이려하고 부처님까지도 날 죽이려고 하는 것 같을 겁니다.
이 육신을 죽여서 구렁텅이에 꼼짝 못하게 해 놓고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우주 인생과 나와는 완전히 정이 뚝 떨어집니다.
연애하다 실연 당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육신인 가짜 나는 이 얘기 끝나고 죽을지, 앞으로 계속 얼마나 살아 있을지 그걸 생각하고 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착하게 됩니다.
남편이 작은여자를 얻어 속을 썩이더라도「누가 먼저 죽을지 모른다.
내가 전생에 남편에게 속을 썪여서
나에게 복수하는 것이니 달게 빚이나 갚자.」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이것이 곧 지혜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배워야 할 지식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나면 모든 것이
상(相)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됩니다(若見諸相非相).
「이 세상에 미련이라고
남을만한 사건이란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망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래는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고
마음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니
그게 곧 참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닳아 없어지도록 육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몸뚱이 한테
정이 떨어지고 나니 마음만 드러납니다.
눈과 귀가 보는 게 아님을 확실히 알면 몸뚱이도 포기해 버리고
우주와 온 세상을 다 포기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버릴 수 없는 것만 남는데
그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자리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깨치기 전에도 여래(如來)하면
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연애하다 한번 배신 당하면
뜨겁던 정이 냉정하게 끊어져서
얼음보다도 더 식어 버립니다.
우리도 이 육체와 무서운 연애를 한 셈입니다.
그 어느 누구한테 어느 무엇에게 보다도 다시 없이 이 몸뚱이를 소중히 아끼고 거두고 하루라도 더 살리려고
아들 딸도 제쳐 놓고 불성(佛性) 자리만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그것들이
다 상(相)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발견한다.
곧 자기를 자꾸 정리해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육체의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 자리를 발견합니다(卽見如來).
금강경에 사구절만 읽어 가지고
성불한 사람도 있고 반야바라밀만 읽어 가지고 신통(神通)이 나오기도 하고「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만 외워서 견성(見性)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가지만 해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다라니를 하든지 하나에 전념을 해야지 이것 저것 다하면 그것은 허욕이 되고 정신이 한 가지로 통일 되기 어렵습니다. 가령<옴마니반메훔>만 자꾸 염송(念頌)하다 보면 나중에는 소리도 아니고<옴메>만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시간이 빨라집니다.
현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그런 줄 확실히 알았으면 마음이 드러난다는 금강경 사구게 곧「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마음을 다해 읽었다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안 드러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독만독(千讀萬讀)해서도 안된다면 내생에 또 독송할 각오로 자꾸 읽어야 합니다.
<자명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