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흐린밤 볼펜으로 / 이승훈
![](https://t1.daumcdn.net/cfile/blog/2372E83654D5B95C05)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눈이 송이송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창문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와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 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사평역에서 / 곽재구
![](https://t1.daumcdn.net/cfile/blog/2469FD3654D5B95D0E)
그리움으로 하여 빛나는 뭇별처럼
무딘 세상의 땅 끝으로 바람이 갑니다
햇살보다 소중한 이름들을 생각하면
그리움 보다 먼저 떠오르는 웃음
오늘은 흐르는 물결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출렁입니다
내 마음이 꽃 피면
내 마음 환한 그리움이 꽃 피면
아직까지 숨겨져 꼬깃꼬깃 내 마음 한 구석에 살던
아픔마저도 끝내 구름처럼 사라집니다
세월이 가기 전에
저 세월 다 사라지기 전에
다시 만나
옛 추억의 그 누구라도 다시 만나
함께 출렁일 수 있다면
흐르는 저 도도한 물결처럼
함께 출렁일 수 있다면
흐르는 물결처럼
- 흐르는 물결처럼/ 정공량
![](https://t1.daumcdn.net/cfile/blog/225C383654D5B95D1C)
양지쪽보다는 그늘 쪽으로 마음이 기울면서부터
그녀를 오래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종갓집 며느리처럼 후덕한 잎사귀와 속 깊은
그늘을 가진 후박
아침저녁으로 그녀 곁을 지날 때마다
몇 번인가 말을 걸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 침묵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무렵
나무 그늘 아래서 깔깔대던 여학생들처럼
그녀는 얼굴 가득 노란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는 처음으로 나무들도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섰던 자리에 그늘이 사라지고
빛방석 같은 그루터기만 둥그렇게 남았다
그늘보다 빛을 쫓는 누군가가 그녀를 참수해버렸다
이 지상에서 그녀가 거느렸던 그늘과 정들었던 눈빛들
문신처럼 나이테로 새겨두고 순명하던 날,
그늘이 사라진 교정에서 나는 보았느니
쟁쟁한 햇살 아래서 키 작은 단풍나무가
눈물처럼 붉은 이파리 몇 잎 떨구고 서 있는 것을,
서녘 하늘에 노을빛 만장이 걸리고
어둠 속으로 구름의 장례객들이 떠나갈 즈음
유언처럼 개밥바라기 별빛이 오롯이 빛나는 것을
- 후박나무의 장례 / 김경윤
![](https://t1.daumcdn.net/cfile/blog/256BCA3654D5B95D0C)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에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거미 / 이수영
![](https://t1.daumcdn.net/cfile/blog/2471D93654D5B95D06)
혐오라는 말을 붙여줄까
늘 죽을 궁리만 하던 여름날
머리를 감겨주고 등 때도 밀어주며
장화를 신고 함께 걷던 애인조차 떠났을 때
나는 사라지기 위해 살았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내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는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 작별 / 주하림
![](https://t1.daumcdn.net/cfile/blog/2465E13654D5B95D12)
바람을 보러
들에 갔더니
풀들만 온몸으로 울고 있었네
내가 보고 싶던
바람은 없고
서산마루에 다만,
풀들의 울음이 떠나니며
누구의 승천을 의논하고 있었네
아, 산도 밀 수 있는
내 슬픔의 무게
후둑후둑 내리는 큰 빗속으로
하얀 그리움이 꿰어 다님을
- 폐허의 노래 / 문정희
![](https://t1.daumcdn.net/cfile/blog/2528753854D5B95D24)
그리고 틀림없이 슬픔을 이겨 낼 것이다
1년이나 5년 뒤에
그러나 기차가 굴속을 빠져나와 태양이 빛나는 초원지대를 지나
빠르게 덜컹거리며 영국 해협으로 내려가듯
그렇게 당신이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니다
갈매기가 기름투성이 물에서 빠져나오듯
당신은 슬픔에서 빠져나온다
당신에게는 일생 동안 온몸에 타르를 칠하고
새털을 붙여달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아픔이 남는다
- 플로베르의 앵무새 / 줄리언 반스
![](https://t1.daumcdn.net/cfile/blog/243B8A3854D5B95E0F)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그대 모습을
오랜만에 본 그 날
내 안으로 기분 좋은 전류가 흘러들었어요
지금, 오리나무와 참나무의 금빛 갈색 잎들은
후광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는데요
해가 산 능선 쪽으로 기울수록 단풍의 광채는
하늘로 상승하고 있답니다. 그것을 배경으로 한
지는 잎들과 새들의 소리도 후광의 한 정경이지요
나무 꼭대기에서는 잎들이 일렁이는데
그럴 때마다 그 언저리에서 맴돌던 햇살과 바람이
마구 쏟아지곤 해요
예수와 석가의 후광도 이처럼 멋지진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묘하게도 이 풍광에
그대 얼굴이 오버랩 되곤 한답니다
한참을 이런 광경 속에 있으니, 침묵 속에 잠기는 것 같아서
걷기 시작했어요. 작은 돌을 툭 차기도 하면서요
바람 따라 흩날리는 형형색색의 낙엽들
그 잎들 너머로 멀리 있는 인수봉이 눈에 들어왔어요
걸을 때마다 신호등 간판 건물 등에
그 봉우리가 잠시 가려지긴 했지만
몸을 바꾸면 다시 보이곤 하지요
이런 저런 일상으로 그대 얼굴 또한 종종 잊혀질지 몰라도
그대가 거느린 여운이야 어디 쉽게 지워지겠어요?
그대에겐 보는 이를 환하게 해주는
은은한 빛이 있으니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기분 좋은 겁니다
늘 기분 좋으면 마음이 정화된다는 말도 있지만
가끔 회상하는 것으로도 썩 괜찮은 일이지요
방금, 큼직한 후박나무 잎이 쿵 떨어졌어요
하나의 세계를 품은 그 소리
들리는가요?
- 후광처럼 / 설태수
![](https://t1.daumcdn.net/cfile/cafe/2139403455B4C38726)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 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 심재휘
![](https://t1.daumcdn.net/cfile/blog/2422063854D5B95F2D)
당신과 버스에 오른다
텅 빈 버스의 출렁임을 따라 창은 열리고
3월의 벌써 익은 햇빛이 전해오던
구름의 모양, 바람의 온도
당신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타인이어서
낯선 정류장의 문이 열릴 때마다 눈빛을 건네 보지만
가로수와 가로수의 배웅 사이 내가 남기고 가는 건
닿지 않는 속삭임들 뿐
하여 보았을까 한참 버스를 쫓아오다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하얀 꽃가루, 다음엔 오후 두 시의 햇빛,
그 사이에 잠깐 당신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적도 없는 당신
내 입술 밖으로 잠시 불러보는데
그때마다 버스는 자꾸만 흔들려 들썩이고
투둑투둑 아직 얼어있던 땅속이
바퀴에 눌리고 이리저리 터져 물러지는 소리
무슨 힘일까
당신은 홀린 듯 닫힌 가방을 열고
오래 감추어둔 둥글고 단단한 캔디 상자를 꺼내네
내 손바닥 위에 캔디를 올려 놓을 때
떠오르던 의문과 돌아봄, 망설임까지
어느덧 그것들이 단맛에 녹아 버스 안을 채워 나갈 때
오래 전에 알았던 당신과 나, 단단한 세상은 여전하지만
시작도 끝도 없고 윤곽마저 불투명하던 당신에게
아주 잠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 순간
- 후르츠 캔디 버스 / 박상수
![](https://t1.daumcdn.net/cfile/blog/27275E3854D5B95F25)
그 많던 잎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햇볕을 물고 깔깔거리던 한낮이 지나고
그루터기만 남은 저녁,
그 위에 앉아 잘린 내부를 본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
겹겹이 숨어 있던 생의 여러 국면들
아직 환하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 가장 먼 곳에서 이별했다
생장점은 이미 잘려 나간지 오래,
남은 것이 없으니 떼어낼 것도 없지만
아직 없는 손끝이 아픈 저녁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기억은 늙지도 않아
우기와 건기의 절기를 따라온 시간의 고리들
차곡차곡 차고 앉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여기서 대체
우리가 국수 가락의 처음과 끝처럼
앞도 뒤도 없이 하나였을 때,
권모술수 없이도 주문을 외울 줄 알아
봄밤은 태평성대
국수의 어원은 매듭을 풀다,
풀 수 없는 매듭을 잘라버리고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파문의 더미 위에 앉아
침묵같은 휴일의 산책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는데
그루터기와 나 사이, 비단 같은 사양 한 자락 미끄러지고
없는 기억이 아픈 저녁 빛난다
- 환각통 / 김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