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으로 이주해온 지도 어언 13년이 지났다. 그리고 지난 10월 14일에는 신사우동 주민센터에서 주관하는 2시간 정도 동네투어에 참가하여 가이드의 안내로 신사우동 내의 역사적인 몇 몇 장소를 버스를 타고 탐방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춘천시 우두산 충렬탑이다. 가보고 거기가 6.25한국전쟁 개전초기 치열함 전쟁터라 가슴이 뭉쿨하였고 숙연하였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춘천이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춘천은 역사도 깊고 역사적인 유적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다. 아래는 6.25한국전쟁 개전 초기 6사단 7연대의 우두벌판, 우두산과 봉의산, 춘천대첩에 대한 전쟁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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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의해 국군은 벼랑 끝까지 내몰린다. 넘을 수 없는 전력 차이로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고 북한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전선은 무너졌다. 그러나 누구도 항복하지 않았고 단기간에 끝날 것 같은 6.25 한국전쟁은 3년간 계속됐다.
② 북한군은 30일 이내에 남한을 점령한다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빠르게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춘천지역에서 진격을 멈춘다. 북한군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춘천지역을 지키던 부대는 육군 6사단, 사단장은 김종오 장군, 6사단이 북한군 2군단을 저지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군의 작전계획은 3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 단계는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한국군의 주력을 섬멸한다. 두번째 단계는 대전 광주 대구에 있는 예비부대를 격멸한다. 3단계는 부산에 미군이나 연합군이 들어올 수 있는 항구를 봉쇄하고 전쟁을 끝낸다. 전쟁 완료. 북한 김일성은 남침하면 군과 정부가 붕괴 되고 박헌영이 얘기한 것처럼 남한에서 좌익 동조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게 되면 한국은 싸울 의지나 전투력 없이 붕괴될 것이다 라고 봤다.
③ 러시아군이 작성한 작전개념도를 보면 서울 방향으로 북한군 1, 3, 4사단이 공격을 한다. 북한군 2, 12사단은 춘천과 홍천에서 수원으로 들어와서 한국군의 주력을 섬멸한다. 이게 1단계 작전 계획인데 난이도가 높았다. 북한 김일성은 이 계획대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으니 소련고문단을 주요 부대에 파견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북한은 10만명 이상이 동원되는 공격계획을 수립할 능력이 없었다. 장군은 책으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
④ 춘천에서 북한군 2군단을 막아내어야 하는 국군 6사단, 서쪽에서 옹진군을 거쳐서 방어 라인은 뚫리고 있었다. 동쪽 라인만 뚫리면 소련과 북한의 목표는 90% 주력부대 괴멸이 눈 앞에 있었다. 국군 6사단은 9300여 명, 북한군 2군단은 무려 37,000여 명 4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북한군 2군단은 3개 사단 그리고 1개 고속기동연대가 있었다. 고속기동연대는 소련제 모터사이클을 180대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평원에서 사용했던 모터 사이클을 춘천-홍천과 같은 산악지대에 투입을 했다. 고속으로 달려서 수원으로 기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⑤ 북한군 2군단에는 SU-76 자주포가 총 48대가 있었다. 이게 국군 6사단의 심장을 떨리게 한 북한군의 무기였다. 당시 북한군의 T-34 전차는 국군에게 전차 공포증을 유발했다. 자주포는 원거리에 있는 적을 쏘기 위해서 곡사로 쏘는 반면에 전차는 근접 거리에서 직사로 정확하게 사격하는 무기체계다. 북한군은 전차와 비슷한 SU-76 자주포를 밀고 내려 왔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 자주포에 위장을 했다. 국군 6사단에는 전차도 자주포도 없었다. 6사단이 가진 강력한 화력은 105미리 곡사포였다. 방열을 해서 쏴야 하는 재래식 화포다. 춘천지역은 포병전력으로만 북한군이 국군에게 두 배 이상 우세했다. 홍천지역은 7배 이상 우세했다.
⑥ 국군은 군복이나 철모도 없어가지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들을 썼다. 6사단은 먹을 식량 조차 부족했다. 남아 있는 식량은 건빵 하루치 650상자,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 방어를 했을까. 전력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군 6사단은 이걸 막아냈다. 이것 자체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주인공은 6사단 소속 11명의 특공대다. 북한군 SU-76 자주포의 약점은 뚜껑이 없는 무기였다. 산악지역 고개를 올라오는 10대의 자주포가 있었다. 대전차 포대가 선두를 포격했다. 이 자주포가 멈추자 그 사이 특공대가 선두에 있던 1호 자주포와 후미 자주포 포탑 위로 기어올라가 수류탄을 투척했다. 자주포 몇대가 벼랑으로 떨어졌다. 9대 이상을 격파하였다. 특공대원들은 무사했다. 이 때 활약했던 조달진 일병이 2012년 7월 이 달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되었다.
⑦ 6사단 전투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사실 포병이었다. 포병공격으로 북한군 1개 보병대대를 폭파했다. 6사단은 북한군 동태에 세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6사단의 임부택 소령은 남침 징후를 사전 인지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군 6사단은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필사적으로 버텨내다가 후퇴하였다. 춘천과 홍천전투가 있었기에 맥아더가 한강을 들러보고 파병하게 되었다. 이에 스탈린이 경악했다. 북한 2군단이 못 싸운게 아니라 국군 6사단이 너무 잘 싸웠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군 장군이나 단위 부대장이 투항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목숨 건 애국심이 전쟁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다.
⑧ 춘천대첩, 6·25 전쟁 초기 중동부전선에 위치한 국군 제6사단이 춘천 소양강, 봉의산 일대에서 사흘간 치른 방어전투이다.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북한군 제2군단 2사단과 12사단을 맞아 거둔 첫 승전이기도 하다. 이 전투로 춘천,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3일 작전은 좌절됐다. 국군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을 이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국군은 이 승리로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이 증원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었다.
⑨ 당시 6사단 사단장은 김종오 대령, 6사단 7연대 연대장 임부택 중령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춘천 발산리 일대에서 가장 먼저 북한군이 밀고 들어왔다. 6.25 새벽녘 북쪽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포성이 점차 커지더니 포탄이 38선을 넘어 후방 쪽에 비 오듯 떨어졌다. 포격 피해는 38선 경비부대보다 후방의 아군 진지가 더 컸다. 짙은 안개를 뚫고 불을 뿜기 시작한 포화는 한동안 계속됐고, 춘천 고탄리 일대에서 탱크를 앞세워 남하한 북한군에 의해 38선은 힘없이 무너졌다. 7연대 중대와 본대와의 통신이 끊겨 고립됐고, 합류 과정에서 무수한 전우가 적의 총탄에 쓰러졌다.
춘천 신북읍 여우고개 일대까지 퇴각했던 7연대는 우두산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했다. 특공작전으로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7연대는 춘천 신동면과 옥산포 일대에서 소양강 도하 직전까지 집중 포격을 가했고 북한군의 공세는 멈칫했다. 아군의 포는 고작 105㎜ 포와 박격포가 전부였지만 밀집대형으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향해 집중 포격을 가해 포연 자욱한 소양강 너머로 북한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북한군 2사단 전력의 40%를 무력화시킨 이날 전공으로 소양강 1차 방어는 물론 그 사이 주민들이 무사히 소양강 이남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⑩ 북한군의 소양강 남하를 저지하려고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최후 방어전은 6월 27일 오후까지 사흘 밤낮 계속됐다. 이때 6사단 지휘부는 소양강 방어선과 북한군이 집결한 우두 벌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춘천 봉의산 정상에 사단 지휘본부를 정했다.
⑪ 우두산 정상에 있는 충렬탑은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5년 7월에 세웠다. 우두산에 충렬탑이 세워진 이유는 이곳이 6.25전쟁 당시 춘천대첩을 이끈 최전선 제6사단 제7연대 연대본부 지휘소가 자리한 때문이다. 6월 25일 새벽 5시 20분경 사북면 원평리 모진교를 돌파한 북한군은 불과 세시간만에 현재의 신복읍 용산3리인 역골까지 진출하였고, 그곳에 군단지휘소를 세우고 춘천 공략을 개시하였다.
⑫ 당시 춘천에 주둔하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2대대가 오항리부터 가평으로 가는 홍적고개까지 전방을 방어하고 있었고 1대대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우두산을 중심으로 후방에 배치되어 방어를 담당했다. 전쟁 발발 당일에는 7연대가 우두산의 지휘소에서 우두 벌판을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 제2군단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춘천을 지켜 냈고, 6월 26일 봉의산으로 연대진지를 옮기고 1대대가 우두산에서 지내리 입구까지 방어선을 펼치고 전투를 벌였다.
⑬ 국군은 벌판으로 밀려오는 북한군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춘천대첩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충렬탑에는 6.25당시 참전했던 유엔군 16개국의 국기와 탑이 세워져 있다. (⑪번부터 ⑬번까지 2022년 7월 29일 발행, 저자: 오동철, 책명: 신사우동 p.80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