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남 민주화운동 기념비와 주민교회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의 명동 성당이 학생, 노동자, 시민의 항쟁과 투쟁의 성지였다면 성남에는 주민교회가 있었다. 주민교회는 당시 각종 기도회와 시국 강연등의 모임과 연대의 장소이자 삶터였다. 당시 성남시청사 가 있던 바로 옆에 위치했던 주민교회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학생 시민들으 자연스런 집결 장소가 되었고 촉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주민교회 이해학 목사, 이상락, 한숙자, 산자교회 김해성 전도사등과 신도들이 함께 길거리 시국기도회를 열기도 하며 비폭력 평화시위를 했다. 최류탄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도망치지 앉고 도로 한복판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며 기도하던 주민교회와 시민 학생들의 투쟁과 헌신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6.10 민주항쟁 27주년인 2013년 성남시 민주화 운동 40주년의 그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성남민주화운동 기념비 조형물을 세운다. 당시 함께 싸웠던 성남 지역의 각 시민단체와 시민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기념비를 설치하고 매년 이를 기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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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종태 열사(1958-1980)
분신 당시 열사는 23살의 청년으로서 1980 광주 시민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사른 노동자였다. 그는 1980년 6월 7일, 서울 이화여대 사거리에서 분신했다. 당시는 1980년 광주학살 직후라 무섭고 야만의 시대였다. 언론뿐만 아니라 모두가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가운데 진실을 밝히고 항거해야 한다는 시대의 증언과 항쟁을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살라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벌을 요구 하였다. 또한 열사는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와 유인물을 배포하고 분신하였다. 주민교회 청년신도였던 김종태 열사의 이 정신과 항거를 추모하여 주민교회는 매년 이를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다.
3.87년 6.10 민주항쟁 시위 행진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당시 민주화 요구의 열기는 독재타도 호헌 철폐 즉, 직선제 쟁취의 구호를 외치며 6.10 민주광장(구 성남 시청 광장)으로 모여 들었고 학생들의 시국연설과 종교계, 정치인, 시민, 노동자의 연설을 듣고 대열은 종합시장 방향으로 행진을 하였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시민들도 합류하게 되고 상대원시장(당시 원다방 있던 곳)까지 행진을 한다. 이때 당시 당시 상인분들도 음료수와 물, 담배를 시위대에게 건네주고 다방, 술집 직원들도 함게 동참하기도 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이 장소에 6.10 민주항쟁 기념표석을 설치하여 그 역사적 의미와 사건을 기억하고자 한다.
4.가천대학교 (당시 경원대학교) 송광영(1958-1986), 천세용(1971-1991)열사 추모광장
경원대학교는 당시 성남 유일의 4년제 대학으로서 각종 시위와 민주화 싸움의 선봉대 역할을 한다. C동(현재 진리관 건물) 앞에서 집결하여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교문밖 진출을 시도하였다.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도 함께 동참하기도 하였고 교통 통제로 돌아기지 못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은 이곳 경원대학교에 와서 밤을 세기도 하였다.
1986년 9.17일 당시 경원대학교 법학과 2학년 학생이었던 송광영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 물러나라 학원 안정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유인물을 남기고 분신 항거 투쟁을 하였다. 그는 몸에 기름을 붓고 진리관 앞 운동장에 뛰어가며 구호를 외치다 쓰러진다. 열사는 광주 출신으로서 어려서 부터 행상과 노동자 생활을 하다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으 부조리오 불평등 그리고 군사독재의 반민주, 야만성을 몸소 겪고 이를 증언하였다. 열사의 분신후 1990년 송광영 열사 추모비를 건립한다. 그러나 1996년9월22일 당시 최원영 학교재단과 경찰 공모로 추모비가 탈취되어 시골 농가에 버려진다. 이를 뒤늦게 알게된 동문과 유가족, 재야 어르신들이 현상금까지 걸어 탈취된 추모비를 수배한 결과 추후 다시 되찾게 되나 너무 고의파손되어 다시 모금하여 1996년 12월 13일 다시 세운다.
천세용열사(당시 전산과 2학년)는 1991년 노태우 군사정권하에 시위를 하다 전경으 곤봉에 맞아죽은 명지대생 1학년 강경대의 죽음에 분노하고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경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 후 F동 (당시 창조관건물)에서 투신하여 사망한다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해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 세차장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당시 동지는 강경대 치사사건과 박승희, 김영균 동지의 분신으로 전국적으로 규탄집회가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에 참석하는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동지는 이같이 어려운 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을 깨우쳐 일으킬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게 되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91년 5월 3일, 동지는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4만 학도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신나를 뿌리고 몸에 라이터를 갖다 댄 뒤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6m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려 산화해갔다. 이를 기려 천세용 열사 추모비를 송광영열사 추모비 옆에 세운다. 이외에도 경원대학교에는 장현구(1969-1995), 진철원(1976-1996 당시 도시계획과 2학년),이상희열사(독문과)등 총 5인의 열사가 있다.장현구 열사(전자공학과)는 1995년 송파4거리서 분신 자살을 하다. 당시 대선 선거감시단 활동과 학원 자주화 운동을 하고 구속과 구타등의 후유증을 앓다 분신 사망하다. 진철원 열사는 당시 대학 2학년으로 선배인 장현구 열사의 죽음 이후 진상규명에 싸우던중 학내 총여학생회실에서 분신 사망한다.
5. 동서울대학(당시 대유공전) 신장호 열사(1969-1990) 추모팻말
당시 전남 광주에서 제4기 전대협 출범식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에서 친구들과 합류하러 가다 경찰의 검문을 피하다 달리는 기차에서 추락하여 사망함.
당시의 동문들과 선후배들이 이를 추모하기 위해 교내에 추모 팻말을 설치하였다. 열사는 학내 노래패 동아리 활동을 하며 역사인식과 사회 정치 문제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각성, 청년 학생으로서의 신념을 가진 학생이었다
6. 성남 시청 소녀상
이재명 당시 성남 시장의 주도하에 전국 최초로 시청 내에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하여 일제 치하의 만행과 치욕을 기억하고 특히 일제치하 성노예로 끌려간 우리 할머니들으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여 역사를 통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고 평화와 자유를 향한 염원을 담았다. 또한 4.16세월호 참사를 추모 기억하기위해 당시 세월호의 조형물을 시청사 내부에 설치하여 세월호 유가족과 학생시민을 위로하고 이를 추모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에게 경각심과 사회적 연대로서의 힘을 보태고자 하였다. 또한 시청사를 단지 행정만의 공간이 아닌 시민 참여의 공간, 역사를 생각하는 공간으로 전환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