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일곱 번째 - 6)
(여수시∼광양시, 2023년 9월 23일∼24일)
瓦也 정유순
다음 행선지는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다. 어사 박문수는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전라도요, 전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광양이다(朝鮮之全羅道全羅之光陽)’라고 했다. 광양(光陽)은 고려가 건국되면서 승주(昇州) 관할 광양현(光陽縣)으로 개명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2세기 무렵에는 처음으로 광양에 감무(監務)를 파견하면서 순천에서 분리된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광양은 해양도(海陽道)에 속하였고, 이후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게 되면서 전라도에 속하게 된다.
<사곡리저수지>
임진왜란 때 광양읍성이 함락되고 광양지역이 폐허가 되면서 복구하는 동안 잠시 순천도호부에 편입되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에 23부제를 시행하면서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으나 1년 3개월 만에 폐지되었고, 전국이 13개도(道)로 나뉘게 되면서 광양은 전라남도에 속하게 된다. 1914년 돌산군 태인면을 편입하였고, 1915년에 다압면 섬진리 두치진(豆恥津)을 하동군에 넘겨주었다. 1949년에 광양면이 광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황금둘레길 이정표>
광양시는 소생활권이 광양읍을 중심으로 한 서부(광양읍, 봉강면, 옥룡면)와 동광양을 중심으로 한 동부(동광양, 옥곡면, 진월면, 진상면, 다압면)로 나뉘어 있다. 광양읍은 원래 광양의 중심지였으며, 순천시 시가지와 지척으로 순천시 권역이었다. 지금도 광양읍과 순천의 주요 지점들을 경유하며 운행하는 순천 시내버스가 평일 기준 5~7분 간격으로 운행한다고 한다.
<이름 모르는 꽃>
광양읍(光陽邑)은 북쪽으로 옥룡면(玉龍面)·봉강면(鳳岡面), 동쪽으로 옥곡면(玉谷面), 서쪽으로 순천시, 남쪽으로 광양만에 접한다. 동부는 300∼500m의 산지이고, 서부는 100m 이내의 구릉지로, 그 사이에 동천(東川)과 서천이 합류하면서 넓은 퇴적지를 이룬다. 광양읍은 영남∼호남 간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경전선(慶全線)이 동서로 가로지르고, 남해고속도로가 북부를 지나며, 국도도 순천과 하동으로 연결되어 육상 교통이 편리하다.
<광양읍 지도>
사곡리(紗谷里)는 동천, 서천, 억만천이 합류하는 지역에 자리 잡은 농촌마을이다. 옛날에 사곡리 주변의 갈밭들에는 갈대가 매우 많았고, 고랫들은 바닥이 깊어 물을 대기가 좋았다. 자연마을로는 굽널, 억만, 장성마을 등이 있다. 굽널마을은 말굽이 날아가는 형국이어서, 억만마을은 마로산성 밑에 있어서, 장성마을은 옛날 이곳에 장승이 서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황톳물>
특히 오늘 오후 걷기를 시작하는 사곡리 점동(店洞)마을은 오래 전부터 금광이 있었던 광산마을로 알려졌다. 원래 광양현 동면(東面) 사라곡리였던 지역으로 1700년대 초기에는 사리곡면, 1789년경에는 사곡면(紗谷面)의 본정촌(本井村)이었다고 한다. 봉화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점동을 ‘점골’로 불렀는데 옛날부터 철이 많이 생산되어 솥 등을 굽는 쇠점(鐵店)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점동정>
광양시는 2017년부터 점동마을 금광부지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산길로 접어드는 입구에는 ‘황금동굴’이 기다린다. 이곳은 신라후기 말부터 금이 생산되었으나, 1906년 광맥을 발견해 채굴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채굴하다 해방되자 폐광되었다. 1954년 광양광업(주)에서 채굴하다 1975년 폐광되었다. 이 금광은 광양경제 뿐만 아니라 국가경제에도 공헌하였다.
<황금동굴>
점동마을을 출발한 발길은 구봉산과 봉화산 사이의 배나무재를 향한다. 밤나무가 많아 떨어진 밤을 줍다가 야자메트가 깔린 길 위에 갑자기 황톳물이 내를 이뤄 길바닥은 질퍽하면서 미끄럽고 금방 신발이 황토색으로 물들면서 안으로는 물기가 스며든다. 분명 위에는 무슨 공사장이 있는 것 같다. 점동마을이 황금마을이었다는 추측에서 혹시 위에 있는 폐광(廢鑛)된 굴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아닌가도 생각을 해본다.
<밤>
길옆에는 돌배가 탱자 만하게 열려 어릴 적 추억을 끄집어낸다. 어려서 늦가을에 서리 맞은 돌배를 보면 나무를 흔들거나 올라가 따서 먹으면 시고 떫으면서도 단맛이 나던 기억이다. 돌배는 일반적으로 먹는 배와 달리 작으며 질감은 단단하다.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하나, 찬 성질의 과일이기 때문에 몸이 찬 사람이나 소화기관이 약한 사람이 먹으면 부작용이 있어 술 등을 담가서 먹는다.
<돌배>
가끔 뒤돌아보면 백운산이 멀리서 손짓한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향해 내려오다가 진안의 주화산(珠華山)에서 북으로는 금남정맥이 뻗어나가고 남으로는 내장산을 지나 무등산과 조계산으로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을 갈라 호남의 골격을 형성하다가 광양의 백운산(白雲山, 1222m)을 만드는 호남정맥의 끝 지점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식생이 다양하고 보존이 잘되어 있으며, 이른 봄이면 고로쇠나무 수액으로 유명하다.
<백운산 원경>
배나무재는 1910년 이전까지 이용된 광양시의 교통로로, 광양읍 사곡리 점동마을과 도이동을 이어주는 길로 과거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당시 지인이 상을 당하여 광양군 골약면 도이리에 문상을 왔던 일이 있다. 광양읍에서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택시를 이용하였는데 가는 동안 산길을 달린 기억 밖에 없다. 당시는 해변에 피조개 양식이 활발했던 아주 전형적인 농어촌이었다.
<배나무재 정상>
골약동(骨若洞)은 광양시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북쪽의 구봉화산(472m)을 중심으로 산지가 이어지며 남쪽 해안과 간척지에 취락과 산업시설이 발달한다. 성황천과 정산천이 동쪽을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동의 남쪽 간척지에 광양컨테이너 부두가 있다. 원래 조선시대 골약소(骨若所)와 골약면이었다. 1989년 동광양시가 생기면서 동이 되었다. 1995년에 광양시로 편입되고 같은 해 황금동과 성황동을 병합하였다.
<봉화산 입구>
동광양은 포스코 광양제철소, 광양항 및 유관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조성 초창기에는 동광양시로 행정구역이 분리되었으나 통합 광양시가 출범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광양읍 지역과의 심리적 거리는 줄었으나, 도시연담화(都市連擔化)가 안 되어 동광양 지역과 광양읍 사이는 아직도 분리되어 있으며, 광양읍은 오히려 순천시 쪽으로 확장되고 있는 형편이다.
<배나무재 임도>
도이동(桃李洞)은 원래 광양군 골약면 지역이다. 1914년 도이, 대화(大禾), 대근(大斤), 지동리(池洞里)를 병합하여 골약면 도이리가 되었으며, 1986년 광양지구출장소 관할이었다. 1989년 광양지구출장소가 동광양시(東光陽市)로 승격되면서 도이동으로 개칭되어 성황동 관할의 법정동이 되었다가, 1995년 골약동 관할로 바뀌었다. 멀리 광양제철소와 광양항이 보이고, 여수시로 연결하는 이순신대교가 광양만을 가로지른다.
<봉화산과 구봉산 이정표>
광양제철소는 포스코가 포항제철소에 이어 건설한 제2제철소이며, 광양시 금호동에 조성된 광양국가산업단지 중심업체다. 1981년 11월 입지를 확정하고 1982년 9월 부지조성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85년 3월 연간 270만t 조강 생산능력을 갖춘 1기 설비 건설에 착공하여 1987년 5월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8년 7월 2기 설비를, 1990년 12월 3기 설비를, 1992년 10월 4기 설비를 준공하였고, 1999년 3월 5고로를 준공하였다.
<광양제철소 원경>
광양항은 광양시 도이동에 있는 항구로, 1986년 기존의 삼일항을 흡수·통합하여 개항하였다. 항만규모는 총 길이 11㎞, 너비 0.64㎞의 컨테이너 하적장을 포함하여, 수심 20m로 현재 16개 선석 548만TEU의 화물처리가 가능하다. 광양항구는 컨테이너를 담당하는 컨테이너 부두와 철광석 원료, 유연탄 및 철강 제품을 처리하는 제철소 부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양항>
이순신대교는 여수시 묘도(猫島)와 광양시 금호동 사이를 연결하는 총길이 2260m의 현수교(懸垂橋)로 2013년 2월에 전면 개통되었다. 여수국가산업단지 진입도로 개설공사의 3구간으로 건설되어 2007년 10월에 착공하였다. 여수세계박람회 기간을 전후하여 2012년 5월 10일 임시 개통되었다가 8월 13일에 폐쇄되었고, 2013년 2월 8일에 전면 개통되었다. 순수 국산기술로 시공·건설하였으며, 약1조700억 원이 소요되었다.
<이순신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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