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金羾)
자는 자량(子亮), 호는 욕담(浴潭),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관찰사 김취문(金就文)의 손자이고, 찰방 김종무(金宗武)의 아들이다. 선생의 생질(甥姪)로서 어려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행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暦) 신사년(1581, 선조14)에 공이 태어났다. 용모가 출중하고 자품이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풍격과 운치가 호방하고 시원하면서도 말투가 부드러웠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해가 뜨면 서적을 좌우에 늘어놓고 홀로 그 가운데 앉아서 종일토록 펼쳐 보면서도 피로하거나 지친 기색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조모에게 안부를 살피러 가면서도 번번이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길에서 탐독하다가 때때로 다른 길로 잘못 들기도 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병 침략의 다급한 상황이 알려지자 열읍(列邑)의 수령이 풍문만 듣고 도망쳐 흩어졌다. 그러나 찰방공(察訪公)은 사근도 우승(沙斤道郵丞)으로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밤을 새워 수백 리를 달려갔다. 그는 고향 집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상주(尚州) 북천(北川)에 이르렀다.
찰방공이 진영(鎭營)에서 죽을 때, 공은 모친을 따라 금오산(金烏山) 도선굴(道詵窟)에 숨어 있었다. 공이 나왔다가 약탈하는 유적(遊賊)을 만났는데, 적이 공의 풍모를 보고 준수하고 활달하며 옥설(玉雪)처럼 청수하여 아낄 만하다고 여겨 공을 데리고 가려 하였다. 공이 즉시 분연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목을 마구 찌르니 피가 뿜어 나와 온몸에 흘러내리자 적이 놀라 버려두고 떠났으니, 당시 12세였다.
모친이 이미 북천의 소식을 들은 데다 또 고부인(姑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몹시 슬퍼하여 까무러쳤으며 병이 점차 위중해졌다.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선생이 안동(安東)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몇 명의 건장한 노복을 보내어 들것에 실어 돌아오게 하여 일직현(一直縣)에 이르렀으나, 끝내 공을 도와주지 못하였다. 공은 외로운 몸으로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외가에서 자랐다.
갑오년(1594)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이 소백산 승사(僧舍)로 병란을 피하였는데, 당시 공은 14세의 어린아이로서 수학하였다. 적이 물러가고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설욕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였다. 임진왜란을 언급할 때마다 번번이 오열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자, 한동안 사람들이 모두 서로 경계하며 차마 말하지 못하였다.
무릇 의복과 음식은 감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하지 않았으며, 왜인(倭人)의 물건을 철저히 막아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였다. 마침내 과거와 벼슬길에 뜻을 접었다. 좁고 사방에 벽만 있는 깔끔한 집이었고 나물밥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마음을 비우고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옛사람 가운데 가난하여 몸을 가리지 못한 이가 있었는데, 선생에게 수학할 때는 한 자 정도의 베를 갖추어서 나아가갈 때는 앞을 가리고 물러날 때는 뒤를 덮으면서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고 뜻을 독실히 하여 마침내 큰 선비가 되었다. 너는 어찌 남루한 옷을 수치로 여겨서 배우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장현광 선생을 따라 금오서원(金烏書院)에서 글을 읽었는데, 당시 조정에서 측량하여 경계를 바로잡았다. 감천변(甘川邊)에 묵힌 땅이 많았으므로, 원노(院奴)가 공의 가난을 근심하여 사사로이 공의 호노(戶奴) 이름을 집어넣었다. 이에 공이 노하여 매를 치고 다시는 상대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임금이 도성을 떠나 강도(江都)로 난리를 피하였다. 일부(一府)의 인사(人士)가 장차 의병을 이끌고 왕실을 지키려 하여 공을 추대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길이 상주 북천의 진영으로 접어들었을 때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북천은 내 원수의 땅이다.”라고 하면서 차마 밟지 못하자 재종질(再從姪) 김경(金澃)이 스스로 대신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겨울에 오랑캐의 군대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였다.남한 산성의 포위가 풀리자 공은 치욕스럽게 여겨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손으로 만고불변의 이치를 부지할 수 없어 隻手難扶萬古常。
나쁜 기운 찬 천지에 홀로 미치광이가 되었네 猩氛天地獨猖狂。
야옹의 올곧은 기운은 금오산처럼 중후하고 冶翁正氣烏山重。
농수의 고아한 풍도 낙동강처럼 길이 흐르네 聾叟高風洛水長。
남으로 백등산에 가까워 한 고조를 근심하고 南近白登憂漢帝。
동쪽으로 창해에 잇닿아 진시황에 부끄럽네 東連滄海愧秦皇。
공명이니 부귀니 사람들은 말하지 마소 功名富貴人休道。
지극한 원통 끝없어 죽지도 못하는 심정이라오 至痛無窮未死腸。
공의 생질 숭정 처사(崇禎處士) 김시온(金是榲)이 화답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집안에 전하는 충과 효는 유독 삼강오륜이고 家傳忠孝獨綱常。
세상은 미치지 않았다는데 스스로 미쳤다 하네 世謂非狂自謂狂。
구암의 어진 자손으로 우리 도가 중해졌고 久老賢孫吾道重。
여헌의 뛰어난 제자로 선비가 장자로 추대하였네 旅門高弟士推長。
종주의 세상에서 어찌 진나라가 황제라 하며 宗周此世何秦帝。
오랑캐 땅 높은 누대에서 송 황제가 눈물짓네 魂羯高樓泣宋皇。
만 길이나 되는 금오산과 용수산 길에서 萬丈金烏龍峀道。
길이 읊조리며 오가니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지 長歌來往幾摧腸。
공은 또 시에 뛰어났다. 서애 선생이 일찍이 공의 기행시(記行詩)를 보고 한참 동안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동문선(東文選)》에 넣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금오산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북쪽 골짝에 물이 돌아 모이는 맑은 못이 있어 맑고 얕아 목욕할 만하였다. 공이 그곳을 좋아하여 ‘욕담(浴潭)’으로 자호(自號)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 공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식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선군(先君)을 잘 지키지 못하였으니 나는 죄인일 뿐이다. 내가 죽으면 부디 후하게 장사지내지 말라.”라고 하였다. 향년 61세이다. 상주 연산(連山) 향해(向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우뚝한 기개와 참되고 올곧은 자질로, 구암(久菴) 선생 가정에서 태어나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과 서애(西厓) 선생 곁에서 자랐으며 여헌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익혔다. 그리고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수암(修嚴) 유진(柳袗) 및 족질(族姪) 양탄(陽灘)과 탄옹(灘翁) 두 공(公)이 모두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그 훈도(薰陶)와 도움으로 의리를 강마한 데는 틀림없이 대단히 전술(傳述)할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어서 논술하려 하지 않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만 전파되었으므로 지금까지 가려져 드러나지 못하였다.
애석하도다! 세대가 멀어질수록 모두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를 두려워하여 삼가 남은 시문(詩文)과 짧은 서간의 유기(遺記)를 엮었으니, 대개 이와 같이 하여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상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뒤에 숭릉(崇陵) 임자년(1672, 현종13)에 많은 선비가 합의하여 남강서원(南岡書院)에 배향하였다.
김성호(金性昊)가 지었다.
주)
야옹(冶翁) : 길재(吉再, 1353~1419)를 말한다.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구미 금오산 아래에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은거하며 불사(不仕)하였다. 묘소는 오산서원 근처 오태동에 있다.
농수(聾叟) :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이다.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안동(安東)에 거주하였다. 1498년 문과에 급제하여 1504년 정언(正言)을 지낼 때 서연관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되었고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호조 판서를 지내고 은퇴를 청하여 온천욕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농암집(聾巖集)이 전한다.
백등산에……근심하고 : 한고조(漢高祖)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匈奴)인 묵특(昌頓)에서 포위되었던 일을 말한다.
창해에……부끄럽네 : 진시황(秦始皇)이 한(韓)나라를 멸망시키자 장량(張良)은 조국의 복수를 위해 동쪽으로 창해군에게 가서 역사(力士)를 얻어 120근 나가는 철퇴를 만들어 주고 진시황이 동쪽으로 출행하였을 때 박랑사(博浪沙)라는 곳에서 내리치도록 하였으나, 부거(副車)를 맞추는 바람에 실패한 일이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구암(久菴) : 김공(金羾)의 조부 김취문(金就文)의 호이다.
종주의……하며 : 주(周)나라의 정통을 높이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의 무도(無道)함을 강력히 비난하고, 진나라가 만일 천하에 정사를 편다면 자신은 동해에 가서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나라의 백성은 될 수 없다고 한 일이 있다. 《史記 魯仲連列傳》
오랑캐……눈물짓네 : 송(宋)나라는 1127년 정강(靖康)의 난을 당하여 수도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북으로 끌려갔다. 《宋史 徽宗本紀》
수암(修嚴) 유진(柳袗) : 1582~1635.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류성룡의 셋째 아들로 1631년(인조9) 합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木齋集 卷8 修巖先生柳公行狀》
양탄(陽灘) : 김양(金瀁, 1574~1644)의 호이다. 자는 여함(汝涵),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구미(龜尾)와 선산에 거주하였다. 장현광(張顯光)‧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5년 증광시 3등으로 진사에 입격하였다. 수차례의 천거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
탄옹(灘翁) : 김경(金澃, 1582~1637)의 호이다. 자는 정이(靜而),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구미(龜尾)와 선산에 거주하였다. 장현광(張顯光)‧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8년 생원에 입격하였다. 정묘호란에 창의하였다. 의금부 도사‧함흥 판관(咸興判官)‧호조 좌랑‧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남강서원(南岡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