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 노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이장욱-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
이장욱-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
이장욱-지나치게 사소한 딜레마
이장욱-구름의 전사(戰士)
이장욱-의심의 여지가 없는 겨울잎
이장욱-리얼리스트
이장욱-사라지는 꽃
이장욱-호명
이장욱-오해
이장욱-기하학적 구도
이장욱-결정
이장욱-모조품
이장욱-게릴라
이장욱-절규
이장욱-결국
이장욱-투명인간
이장욱-로코코식 실내
이장욱-인파이터
이장욱-결정
이장욱-전선들
이장욱-코끼리
이장욱-중독
이장욱-정주역
이장욱-이상한 나라
이장욱-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이장욱-내 잠 속의 모래산
이장욱-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이장욱-객관적인 아침
이장욱-로맨티스트
이장욱-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장욱-바지 입은 구름
이장욱-마네킹
이장욱-달려라 버스
이장욱-완전한 밤
이장욱-복화술사
이장욱-오렌지 우주선
이장욱-午前
느림 … 반복 … 그속의 꿈결같은 감동 - 한국경제신문
*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 - 이장욱
내 얼굴이 안경을 찾아 쓰고 천천히 단단해지는 아침, 창 밖 가로수의 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된다. 내 발이 1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을 때, 멀리 인수봉 암벽에 가파른 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내 몸이 기어나가 어느 사립대학 담 아래를 걷고 있을 때, 아주 먼 항성에서 드디어, 천천히, 지상에 도착하는 빛.
그 순간에 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가령 나는 바위 틈으로 화사하게 일렁이는 산철쭉. 절벽에 사선으로 그어진 그 가지 아래서 막 처음 편 제 날개에 놀란 호랑나비. 그러므로 나는 햇빛 속에 눈 감고 최초의 바람을 느끼는 자.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외포의 갈매기들이 부리를 적시는 저녁에, 나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근해에 저물어가는 수평선. 까마득한 上空의 구름이 작은 빗방울로 변신하는 순간에, 나는 비상구 앞에 멈춰 움직이지 않는 구두.
내 몸은 불 꺼진 방에 안장된다. 지상의 빛이 녹아 사라진 시간, 내가 문득 눈을 뜨면 내 곁에 누군가 모로 누워 있다. 나는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깨운다. 이봐, 누군가 널 부르는군. 창 바깥 지나치게 낙관적인 하늘에 비는 내리는데.
* 편집증 환자가 앉아 있는 광장 - 이장욱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소나기, 내린다. 문득 허공에 그어지는 사선 사이, 황혼의 시청 앞을 있는 힘을 다해 걸어가는 사람들. 지나가라 지나가라.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라. 견딜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생애 너머를 지나는 구름. 물론,
누구나 제 삶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문득 유턴하는 시내 버스. 지금 당신이 나를 의심하듯, 나도 나를 의심한다. 한 여자가 머나먼 골목을 나와 의아한 표정으로 길 끝을 바라본다.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로,
비 내린다. 세한빌딩의 가장 아래 계단에 앉아 광장을 바라본다. 깜빡깜빡 졸며 회상하는 일생. 이쯤이면 괜찮을 것이다, 이쯤이면 괜찮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혹은, 집도 길도 아닌 오후의 술청에 들어 죽은 애인과 술 한 잔 하는 꿈. 우리를 위한 비,
내린다. 저것은 헛것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자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며 굽 높은 신발을 고쳐 신는 것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잠시 하늘을 바라본다. 뒤돌아보는 자들에 대한 혐오. 그러므로 지나가라.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라. 내가 나를 의심하는 만큼의 집요한 자세로, 구름을 향해 날아가는 광장의 비둘기. 비에 젖는 날개.
* 지나치게 사소한 딜레마 - 이장욱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타조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요컨대 몸이 너무 무겁다는 것. 열대의 황혼 쪽으로 한없이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타조.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15층 아파트 창틀에 끼어 가볍게 죽어 있는 잠자리. 텅 비어 마른 날개. 어느 오후 쓰레빠를 끌고 비디오 빌리러 동네 언덕을 내려갈 때마다,
그때마다 인수봉에 내리는 황혼 쪽으로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네. 나는 아무 때나 끔찍해진다. 퉁퉁 불어버린 生의 부기를 확인시키는, 저 거대한 거울.
나는 그 거울 속으로 아예 터벅터벅 들어와버린 타조처럼. 열쇠를 안에 두고 열리지 않는 문, 한량없이 두드리고 있네.
이 삶은 코믹한가, 트래직한가.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다만,
더듬이만으로 일생을 기어가는 벌레, 벌레의 없는 눈 위로 가득한, 가득한, 가득한, 노을.
* 구름의 戰士 - 이장욱
나는 그대를 그대는 구름을 구름은 다시 그대를
천천히 통과하는 오후, 너는 이제
날 만지지 말라. 나도 이제
널 만지지 않겠다.
저 먼 곳 석양이 내리는 빌딩 숲 너머에서
슬로 모션으로 떠오르는 붉은 헬리콥터,
나를 향해 소리없이 기총 소사하는.
나는 꽃으로 피어 난무하는 총알들을 피하는 자.
나의 “매트릭스”, 나의 모태는 이 부드러움이야,
이 부드러움 안에서 나는
하염없는 죽음의 풍경과 만난다.
헬리콥터, 헬리콥터, 그대여 무차별
난사해 다오.
투하해 다오.
먼데서 몰려오는 검은 비는 허공을
허공은 바다를 바다는 제 몸의 심연을
고요히 통과하는 밤.
어느덧 심연의 그대가 다시 나를 향해
천천히 떠오르는 풍경.
진주만 공습의 낡은 필름처럼
고요히 다가오는 헬리콥터.
그대도 시뮬레이션인가? 나는
부드러운 영혼의 집.
오늘은 먼 하늘 구름을 통과하는 새의 부리가
천천히 클로즈 업되는 새벽,
제 몸의 끝, 그 단단한 첨단에 온몸을 걸고
혼자 구름을 통과하는 새.
*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겨울잎 - 이장욱
나는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간 것이다. 뚜레쥬르 베이커리를 지나가는 下午의 육신 쪽으로 수직 낙하하는 겨울잎, 겨울잎 안에서 천천히 사라져간 햇빛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겨울잎의 풍경 속을 지나간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무성하고 울울한 저 너머, 횡단보도 앞에서 푸른 신호를 기다리는 여자가 오래도록 통과할 숲의 풍경. 나무에 깃들어 사라진 벌레들을 나는 보지 못했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아이의 어젯밤 꿈속을 나는 거닐었는지도. 말하자면 그 꿈속의 눈내리는 거리를.
그러므로 이곳은 겨울잎과 햇빛과 벌레들이 이루는 세계. 뚜레쥬르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나오는 늙은 사내는 어젯밤의 아주 쓸쓸한 手淫에 대해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나는 떨어지는 겨울잎에 눈을 두고 지나쳐갔으나, 우리가 그 겨울잎이 기억하는 햇빛과 벌레와 바람을 떠올렸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뭇잎. 십일월의 下午, 뚜레쥬르 베이커리 앞으로 수직 낙하하던 잎새가 내 생에 무성하여 다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무와 나뭇잎. 그 잎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 햇빛도 그대의 생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저 꿈 속의 눈 맞는 겨울숲이.
* 리얼리스트 - 이장욱
오늘은 가을과 가을 사이에 가로수들 젖은 머리 풀지
내일은 겨울과 겨울 사이에 늙은 정치가는 선언문을 낭독하지
또 어리둥절한 아침을 지나자 거리엔 수많은 여자들이 피어나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모닝글로리의 아이들은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늙은 여자는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최선을 다해 침묵하지
당연하다는 듯이 관광 버스는 人道의 여고생들을 향해
질주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여고생들은 웃음과 욕설을 그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먼 그대의 자살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오늘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 거리엔 상상하지 않은 일들만 일어나네
잠깐 고개를 돌리면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저 어리둥절한 풍경 앞에서 다시
오늘은 가을과 가을 사이에 가로수들 젖은 머리 풀고
내일은 겨울과 겨울 사이에 대통령의 선언문이 배달되지
저기 누군가 아주 현실적인 혜화동의 오후에 주저앉아
문득 웃음을 터뜨릴 듯한데
* 사라지는 꽃 - 이장욱
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으로서 꽃은,
햇살의 내부에서 잊혀진 어둠에 대하여,
지하의 부러진 뼈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으로서 꽃은,
오직 사라짐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꽃은,
단단한 화분과 난분분한 들판을 구분하지 않는다 꽃은,
풍향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끝없이 몰려가는 바람을
결코 바라보지 않는다 꽃은,
불타오르거나 흐느끼지 않음으로써 꽃은,
15층 베란다에 서서 까마득한 지상을 가늠하는 자와
그 흐린 눈을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꽃은,
오로지 나무일 뿐인 무서운 나무들 사이에서
아직도 견고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꽃은, 저기
저렇게 사라져 가는
꽃은,
* 호명 - 이장욱
그대는 바람불고 그대는 비 내릴 때,
나는 그대를 부를 것이다 단 하나의
가지 끝으로부터 단 하나의
꽃잎이 조용히 멀어지는 순간,
멀어지는 꽃잎이 일생을 다해 긋는
부드러운 선과 더불어
그대가 바람 불고 그대가 비 내릴 때,
나는 그대를 부를 것이다
그대의 위태로운 자세를 위해 문득
텅빈 배후를 제공하는 하늘,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청계천 육교 아래의 저 기나긴
밤, 거리, 가로등, 약국,
그리고 약국, 가로등, 거리, 밤,
생후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그대가
이제야 겨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나는 가장 건조한 음색으로 그대를 부를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불렀다고 생각하여
그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단 하나의 이미지로 정화되는 생
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밤, 거리, 가로등, 약국,
약국, 가로등, 거리, 밤
그대는 바람 불고 그대는 비 내리는
어느 순간,
그대는 가볍게 웃으며,
* 오해 - 이장욱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상 위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껴갈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이 내 생각을 휘감아 반대편 창문으로 몰려가는데, 내 생각 안에 있던 너와 바람과 용의자와 국제면 하단의 보트 피플들이 강물 위에 점점이 빛나는데,
너와 바람과 햇빛이 잡지 못한 나는 오전 여덟시 순환선의 속도 안에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고정되는 중. 일생을 오해받는 자들,
고개를 기울인 채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다.
* 기하학적 구도 - 이장욱
그는 한없이 환원된다, 단 하나의 점으로,
필사적으로 수평선을 넘어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뗏목으로,
국가대표 양궁 선수가 꼬나보는 최후의 표적으로,
물밑을 투시하며 집요하게 활강하는
물새의 시선으로,
하지만 케이블 티브이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과 무관하게
새벽의 그는
또 수많은 표적을 향해 분할된다,
그의 위장은 마구 뒤섞인 음식물들에 대해,
그의 혈액은 불규칙한 순환궤도에 대해,
안 보이지만
미친 듯이 다른 방향을 찾아 증식하는 머리칼과,
또 발톱의 기하학,
그의 온몸을 이리저리 수렴해가는
허공의 소실점들은
어느덧 15층에서 추락하는 사내에게 작용하는
중력의 핵심으로
그를 가두는 단 하나의 점.
그 순간 그가
그의 몸 안에 임재한다는 것,
위장과, 발톱과, 피와,
미친 듯이 증식하는 머리칼과 사랑과,
다시 소실점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길 잃은 개 한마리가 온힘을 다해
새벽 네거리의 공허에 사선을 긋고 있다,
그의 귓전을 스치는
시속 일백 킬로의 기계들,
수없이 그어지는 강철 선분을 끊고 새벽 여섯 시의 태양은
수직의 이미지로 정지해 있다,
* 결정 - 이장욱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을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그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모조품 - 이장욱
그러므로 나는 낡고 오래되었다
지금 이 표정은 오랫동안 흘러간 다른 표정들에 의해 제조된다
문득 내 그림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날아오르는 비둘기,
다행히 나는 추억 따위에 민감한 종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 하나가 아닌 것, 나는
머나먼 어제에서 종로3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포되었다
나는 한없이 복제되어 내일은 또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모든 아침은 단단하며
나는 결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가령 제일은행 현금자동인출기가 쎄팅하는 나에 대해
순순한 표정을 지을 때도,
구립도서관의 대기번호를 받아들고 멍하니,
창밖의 미루나무가 이루는 직립의 본능을 주시하는 순간에도,
나는 단 하나의 사랑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낡고 오래된 귀가는 머나먼 어제에서
종로3가에 이르기까지
하염없이 제조된 것,
다행히 나는 단 하나의 표정을,
단 하나의 흐느낌을,
단 하나의 비둘기를,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이다.
* 게릴라 - 이장욱
어쩌면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다시 폭설 속으로 발목을 빠뜨리며 걸어갈 수 있다면
누군가 한량없이 그곳에 서 있었던 듯
아파트의 창문들은 오랜 침묵에 젖어 있다.
그리고 다시 습한 안개가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
나는 몸을 기울여 먼 곳의 소리를 듣는다.
서서히 젖어드는 추위, 그 때 내 입술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고 중얼거렸던가 혹은
죽어가는 어머니의 표정은 아름다웠어 그런데
눈은 내리지 않았지, 였던가
누군가 지나갔다고 생각하여 숨죽여 돌아보면
아주 오래전에 불던 바람이 거기 있다.
소실점 근처의 가로등 하나가 조용히 꺼진다
메마른 어둠이 내 몸을 통과해 가는 동안
나는 몇 통의 편지를 떠올린다
너무 희미한 어깨를 지닌 연인이었던가,
아니 옛친구였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떤 완고한 집착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나른한 긴장과 더불어
서서히 다가오는 공포를 향해 검은 총신을 겨눌 뿐,
그 경우 전방의 어둠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아직
외곽 도로의 노란 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으나
곧 짙은 안개가 도시를 감쌀 것이다,
비탈의 추위, 나는 어떤 신호를 기다린다
그리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표정은 아름다웠지,
라고 나는 중얼거릴 것이다, 소실점 근처의 가로등처럼,
누군가 저 끝 바람 속에 깜빡인다.
* 절규 - 이장욱
모든 것은 등뒤에 있다.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만 몸을 떨었다.
곧 네거리에 서 있는 거대한 주유소를 지나야
할 테지만 나는 아무래도 기나긴 페이브먼트,
이 낯선 거리의 새벽 공기가 다만 불안하였다.
천천히 붉은 구름이 하늘을 흐르기 시작했으며
흐릿한 전화 부스에는 이미 술 취한 사내들
어디론가 가망 없는 통화를 날리며 한량없었으므로
나는 길 끝에 눈을 둔 채 오 분 후의 세계를
다만 생각할 수 있을 뿐. 어느 단단한 담 안쪽
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믿을 수 없는 고음역의
레퀴엠, 등뒤를 따라오는 몇 개의 어두운
그림자, 쉽게 부러지는 이 거리의
난간들, 나는 온힘을 다해 아주 오래된 멜로디를
떠올렸으나 네거리의 저 거대한 주유소,
그리고 붉은 불빛의 편의점 앞에서
결국 뒤돌아보게 되리라, 결국 되돌아
보는 그 순간 나는 어떤 눈빛을 지니게 될는지
두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떻게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는지
다만 몇 개의 그림자, 그리고
등뒤의 세계.
* 결국 - 이장욱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 지나 내가 어느 이상한 날에 정오를 지나 새벽을 지나 오후 네시를 지나 그리고 어느 이상한 날에 빈 공터와 당구장과 동대문 운동장을 지나 문득 흥겨운 술집의 죽은 친구의 화사한 여자들의 기나긴 과거를 걸어가는 어느 이상한 날에
어느 이상한 날에 결국 모든 것이 그러했을 것이네 중얼거리는 이상한 날에 잠자리가 타워 라이트 너머 저무는 햇빛 속을 흐릿하게 날아가는 풍경, 저건 뭔가를 단숨에 넘어버린 자의 포즈야 아주 단순한 리듬의 생, 그러므로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 지나 까마득한 플라이 볼을 바라보며 아득해지는 써드베이스맨의 비애를 이해하는 이상한 날에
이제 기나긴 바람은 낯선 방향으로 불고 나는 은퇴한 복서처럼 하릴없이 걸어가는 이상한 날에 대체로 흐리고 오후 한두 차례 소나기, 그런데 이곳에선 사람들의 표정이 너무 자세히 보여, 자주 울던 가수는 끝내 무서운 침묵 속에 최후를 맞았으나 어느 이상한 날에 그를 지나 그녀를 지나 그대를 지나 문득 저 아득히 이상한 날에는 결국,
* 투명인간 - 이장욱
문득 스스로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온다. 세면. 식사. 여자의 전보. 이곳은 아름답군요 언제 서울로 돌아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그대의 소식을 두고 외출한다. 등뒤에서 나의 몫으로 주어진 시간을 폐쇄하는 문. 여기가 문밖인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사물들. 아무렇게나 아름다운 것들, 가령 담배꽁초. 보도블럭. 초로의 여자가 나누어주는 <일수돈 씀니다>.
어쩌면 몇 편의 죽음만으로 한 시대를 설명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종로 2가의 가로수. 종로 1가의 바람. 크로포트킨 공작이 무의미한 세계를 견디지 못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광화문의 바람. 가로수. 다시 바람. 정신분석은 지겹다. 십 수 년 전 바움테스트에서, 나는 고의로, 부러진 나무를 그렸다. 의사는 치유할 방도를 강구하자고 말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僞藥이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와 친한 것들은 스스로를 오래 묵인하여 죽어 가는 것들이다. 가령 무언가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열해 있는 간판들. 시월의 태양 아래 혼자 끓는 육체. 손차양 사이로 문득 햇살이 무심하다. 이순신 상 곁을 날아가는 지중해行 종이 비행기. 생각난다,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불긋한 색종이라도 접어 유장한 강물에 배 한 척 띄웠을는지. 그 배 지금쯤 멕시코 만 어디서 좌초했을는지.
교보빌딩 화장실 변기 위에 달린 자동 감지기. 내가 다가가면 붉은 등을 켜는, 내 유일한 존재 증명. 그대가 서울에 없으니까 죽도록 쓸쓸하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고 나는 전보를 치지 않는다. 거리에 도열한 간판들은 고의로 부러진 나무들처럼 고요하다. 또 위약이군, 중얼거릴 때 내 몸을 가볍게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지워가는 사물들과 더불어, 다만 어느 날, 투명한 지중해의 햇빛 속을, 산보라도 할 것.
* 로코코식 실내 - 이장욱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 순간이 있다.
부엌에는 담담한 벽시계. 정오의 숲을 횡단하는
맹목적인 구름의 한떼.
나는 너무 오랫동안 걸어만 다닌 스프린터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평온한 육체 속에서 만나는
낯익은 바람. 나무. 다시 바람.
일생이 온통 아이덴티티에 관한 격조 높은 희극이야.
서울 은행 통장에 남은 이십오만 원의 잔고.
날품 팔듯 살다 간 자들의 영혼이 북경반점 창문가에서
자장면을 먹고 있네. 다시 바람. 호명.
오늘 내 사소한 하루에 영구 입주한 그대.
그대가 좋아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지금
오래된 약물의 힘을 몸 안에 느끼고 있어.
어쩔 수 없는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 것. 그러므로
오늘밤의 목표는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신촌을 걷다 만난 옛 여자는 <그만두라>고 말했지.
너는 사소한 자, 거리에서 세계를 유추하지 말라, 고.
바람, 창밖의 나무. 굽은 등으로 나무 곁을 지나가는
19세기 화가. 그의 여자 마리샬레는 거리의 여자였네.
액자 속에 조용히 걸려 있는 물랭루즈의 음악처럼
구름이 흘러가. 등고선을 따라 천천히 하강하는
로코코식 실내의 오후. 그리고 바람. 호명.
이제야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 순간이 있다.
* 인파이터 - 이장욱
-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이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 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결정 - 이장욱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電線들 - 이장욱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通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上空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電線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 코끼리 - 이장욱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날 저녁 14인치 브라운관을
황홀하게 적시던 사바나의 석양과, 코끼리의 한 生 너머에서
이제야 다른 生을 꿈꾸듯 너울거리던 코코야자수들의 풍경을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
멀리 있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 천막 바깥은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는 이름들처럼
잦아들고 잦아드는 섬들. 그렇군요,
보도블럭을 들어 보라 그곳에 해변이 있다,
라는 저 불란서 68세대의 구호에는 이상한 미신이 스며 있습니다.
迷信. 혹은 迷路. 헤매면서 붉어가는 바다에 일렁이는 섬들.
지금 인천에서 출항하는 바지선에 시선을 두고
온 밤을 공포로 소진하는 유약한 사내에게도 미신은 있습니다.
그의 술병에 떨어지는 쓸모 없는 流星 하나,
그리고 그만두라 그만두라 중얼거리듯
일생을 해변에 묻은 初老의 여자, 여자의 낮은 휘파람.
이제 무심히 온몸을 그을린 그녀의 피조개 몇 점과 더불어
황혼은 부두 쪽의 검은 공장들 뒤로 인천 하늘을 적십니다.
문득 그의 生을 관통한 납탄이
아주 오랜 세월의 오장육부를 지나 천천히
의탁할 무엇도 없는 황홀한 황혼으로 내리는 풍경을 그대는,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토록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다리가
그토록 섬세하게 구부러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누군가는 더러운 황혼녘의 부두로 스며든다는 것은.
그러므로 멀리 있는 그대여 그대 멀리 있는 이여,
가장 단순하므로 애절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것들을
한 번만 보아주세요. 서해 바다의 14인치 브라운관 속에서
처연히 무너지는 것들을, 무너져서, 무너짐으로써,
고요히 무너져가는 것들을.
* 중독 - 이장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 정주驛 - 이장욱
이미 너도 놓여 있는 궤도를 따라가는 여행. 나와 같은 궤도로, 너도 핑핑 돌고 있지.
역사를 나오면 어디든 사람들이 보이고, 사람들도 또 가판대에서 석간을 살 뿐. 그걸 깨닫기 위해,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차에서 보냈다.
석간 기사 안을 소리 없이 통과하는 내장산행 막차.
行間 속으로 들어가면 뭐가 보인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신비주의는 삶을 유연하게 만들지. 그런데 이를 어째. 여긴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곁길. 혹은 길 바깥만 있네.
가령 사슴 싸롱. 정주 여인숙.
그 뒷골목. 내 사랑.
그대와 청소년 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던 아, 그리운 한시절. 금지된 저 너머에서만이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믿던 때. 근데 믿음이 생을 망쳐요, 이루어지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지.
종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온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이 끝이었어. 이를 어째, 여긴 또 왜 아무도 없는 거야
온통 비어 있네. 내장산행 막차는 떠나고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는 몇 편의 드라마를 석간 신문은 보여 주는 것이다. 가령 사회면, 애인을 살해하고 자살한 朴某氏(29)의 1단짜리 평생.
내장산.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2면.
지워진 생애들이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될 때, 나는 신문의 시학을 외경에 가까운 심정으로 읽는다. 아아, 이게 해탈이군.
물론 아무도 行間은 읽어주지 않는다. 뻔한 <사이>들만 창궐하는 정주역 부근. 허리를 껴안은 저 남녀들은 모두 노골적이다. 뼈가 다 보인다. 하지만 오늘은 저 흰 뼈들로써 아름다우나니, 저기 아득히 손 들고 하늘을 우러르는 겨울 나무들.
용서해 줘. 나는 行間만으로 너를 이루려 했지. 누군가 키 작은 시계탑에 기대 길 끝을 보고 있다. 그를 실루엣으로 만드는, 모텔 캘리포니아, 라고 적힌 붉은 네온.
사람들은 신문을 접어들고 정류장을 떠난다. 막차는 이미 지나갔다.
다만 저무는 어느 날, 나는 결국 안개 낀 내장산을 흘러갈 것이다. 이기적인 몸, 어디다 부리고 보면 제일 편한 곳이었지. 새벽의 자욱한 行間을, 나는 안개가 되어 거니는 것이다
* 이상한 나라 - 이장욱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힘겨워서 밤눈 내리는 월계동 언덕길은 아득하던 그 이상한 겨울.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 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로만 위태롭던 산동네.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고 녹슨 제 땅에서 제 어둠을 파내려갔으므로 단 한번도 송신할 생애를 갖지 못한 그 오래된 이야기.
당신에게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어서야 시작하는 이상한 나라. 그 나라의 당신. 하지만 당신 속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 겨울의 길섶 어딘가 나는 이곳에 있고 당신은 그곳에 있으며 그곳과 이곳 사이가 자욱해서 두 그루 전신주 같던 이야기. 다시 두 그루 전신주는 아름답고 밤눈은 내리지만 아, 문득 당신이 없고서야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이야기는 문득 끝이어서야 시작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당신에게 이제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해줄게. 정말로
*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 이장욱
새벽에 눈을 뜨면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느리게 건너오는 늙은 개의 이빨을 느낀다 나는 집을 나와 외곽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자의 눈빛이 안개 저 편에 깜빡이며 저물어간다 안개가 섬을 만든다 이것은 그리운 명제이다
한 여자의 발자국이 안개의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나, 나는 한 여자의 발자국만을 따라 이곳에 왔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도대체 무엇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바게뜨 안에서 낯선 사내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멸종을 앞둔 마다가스카르 거북의 사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거북의 눈으로 안개가 내리는 녹천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냉소적인 미소였던가 여전히 안개는 섬을 만든다 섬은 그러므로 존재한다
외로운 이빨은 그렇게 빛나는 것이다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너간 늙은 개가 안개 너머 먼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그 끝의 해안에서, 이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개는 섬을 만든다
* 내 잠 속의 모래산 - 이장욱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불행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바람, 그대 허허로운 등 흘러 가네 눈 감으면 그때인 듯 메마른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 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목마름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죽은 그대의 모래산
*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이장욱
밤새도록 점멸하는 가로등 곁,
고도 6.5미터의 허공에서 잠시 生長을 멈추고
갸우뚱히 생각에 잠긴 나무.
제 몸을 천천히 기어오르는 벌레의 없는 눈과
없는 눈의 맹목이 바라보는 어두운 하늘에 대하여,
하늘 너머의 어둠 속에서 지금
더 먼 은하를 향해 질주하는 빛들에 대하여,
빛과, 당신과, 가로등 아래 빵 굽는 마을의
불꺼진 진열장에 대하여,
그러므로 안 보이는 중심을 향해 집요하게 흙을 파고드는
제 몸의 지하에 대하여.
텃새 한 마리가 상한선을 긋고 지나간 새벽 거리에서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객관적인 아침 -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나오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아나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 로맨티스트 - 이장욱
나는 밤과 어두을 넘어 아침으로.
12월의 바람이 거리를 지나가는 어느 시간에.
저물어가는 어머니 오늘도 내 깊은 밤에 쌀 씻으시네.
오늘 구름은 무효야. 저 견고한 바람을 보아. 견고한
바람 속을 지나 여하장은 날아오지.
나는 어느덧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겨울꽃과 봄꽃의 머나먼 거리 사이에. 나는
어제 본 늙은 사내를 다시 만나는 술집.
술집 창밖으로 다시 흘러가지 않는 여자.
나는 셔터가 단단히 내려진 상가를 바라보네.
단 한번도 제 온몸으로 나무인 적이 없는 나무.
나무 사이에 걸려 펄럭이는 바람. 플래카드. 바람.
축. 신장 개업. 동해 횟집. 광어 이만오천 원.
나는 단애를 지나 하류로. 하류를
흘러흘러 근해로. 다시 저 머나먼 바다로. 이봐,
오늘 외신 봤어? 결국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는군.
늙은 사내의 고독도 곧 지루해지고 바람은
다시 흘러가지 않는 여자의 거리를 점령하지.
나는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로.
밤과 어둠을 넘어 아침으로. 12월의 바람은
정치적이야, 사람들의 표정을 보라구.
표정 없이 견고한 바람을 건너가는 견고한 사내들.
사내들을 어디론가 이끄는 바람, 바람 뒤의 바람벽.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건 고양이가 아닐까?
고양이의 털을 보아. 주위의 공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 저, 바람을 타고 가는 낭만적인 고양이를 보아.
하나의 벽을 넘어 또다른 벽으로
하나의 어둠을 지나 또다른 어둠으로
어느 풍경의 겨울에서 다른 풍경의 겨울로.
저기, 꿈속의 어머니 12월의 바람을 건너가시네.
그녀는 오늘도 낭만적인 고양이와 함께
저 머나먼 내일에 쌀 씻으시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이장욱
눈을 뜨면, 문득 머나먼 나날을 지난 어느 날 같은 눈을 뜨면, 그 어
너 날의 어둠에 내 흰 몸 부드럽게 저며드는. 눈을 뜨면, 어느덧 나는
그 무심한 어둠 속 그대가 쓰는 물글씨처럼.
물글씨처럼, 두 그루의 전신주와 두 알의 갓등이 만드는 두 개의 둥
근 세계 사이에서 뜻 없이 웃어보기도, 그래, 그래 보기도 하는. 물글씨
처럼, 한번도 지나본 일이 없는 곳을 지나듯이 밤눈 내리는 언덕을 한
량없이 오르는 겨울의 길섶 어딘가. 물글씨처럼, 아무리 멀리 돌아가도
그대를 피하지 못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나는 두 그루의 전신주 나는 두 알의 갓등 나는 두 개의 그 둥근 세
계를 향해 힘껏, 돌팔매질도 해보았던 것인데. 그러나 다시 눈을 뜨면
문득 머나먼 나날을 지난 어느 날 같은. 눈을 뜨면 아직도 나는 이상한
나라에 갇힌 앨리스처럼. 그대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 바지 입은 구름 - 이장욱
나는 바지 입은 구름,
형체를 지니지 않습니다
때로 가을 하늘 선선히
산책하기를 즐기지만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문득 어두워져 가는 몸과 더불어
그대 곁을 떠도는
황혼의 그림자입니다
때로 흐린 공기 저편으로
그대 여윈 손을 넣어보시길
그리고 천천히 그대 손가락 사이로
흘러다니는 구름의 몸,
몸의 구름,
아무런 형체를 지니지 못한
그 허랑한 마음을 바라보시길
바지 입은 구름과의 휘파람,
바지 입은 구름과의 노래,
어느덧 한 사내의 일생이
흘러 다니는 저녁 하늘
스스로를 이기지 못해
이제 그대 발목을
처연히 핥는
소슬한 저 가을비 속을
그대는 거닐어보시길
나는 바지 입은 구름, 물의 몸을 지녀
몇 번의 출렁임으로도 곧
쏟아질 듯한
나는 바지 입은 구름
* 마네킹 - 이장욱
바람이 바람을 넘쳐 플래카드를 흔들고 잎 넓은 나무가 잎 넓은 나무
를 넘쳐 푸르른 날,
나는 경건하였다. 나는 불순한 상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하게 나
를 조절하였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나의 침묵은
한없이 부활하여 견고하게 나를 은닉한다. 나의 시선은 당신을 의식하
지 않으므로 이미 완성되어 있다.
격렬한 밤이 당신을 지나갈 때도 나는 기하학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내 시선 끝에 아파트가 무겁게 서 있다. 나는 그의 정지자세를 이해한
다. 어느덧 나의 고요는 당신의 꿈과 무관하며 나의 午前은 당신의 산
책과 무관하다. 나는 조금씩 사라지는 나무들이 지겹다. 나의 최후는 단
호하다.
플래카드 아래로 당신이 당신을 넘치며 걸어온다. 당신이 당신에게서
흘러나와 긴 그림자를 이룰 때 잠시 공중에 머물렀던 낙엽이 당신의 배
후를 횡단한다. 당신은 혼자 고개를 흔든다. 나는 당신이 지겹다.
* 달려라 버스 - 이장욱
내가 탄 7번 버스가 덜컹, 하는 순간
나는 완전히 7번 버시이다. 나는 3센티 상공에서
정확하게 내 몸을 의식하였다.
나는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순간에 꽃은 단 하나의 방향으로 피어나고
소년은 어느덧 다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의 연기는 연기 아닌 것들로 변한다.
어느 날 낯선 바람이 꽃과 꽃을 이어 길을 흔들 때
소년의 몸 안에 맹렬히 피가 돌아 소년을 지울 때
하늘의 연기는 허공에 미세한 통로들을 만들어
스스로를 소리 없이 삭제하는 것이다.
이제 또 무슨 생각이 나를 되찾아
와와 달려가는 하교 길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7번 버스 종점.
나는 좀더 완고하게 고개를 흔들며
하염없이 꽃 피우는 거리를 걸어갈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기억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오후인 것이어서
몇 대의 버스는 네거리를 맹렬히 질주 중이다.
* 완전한 밤 - 이장욱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흘러가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이 밤은
주공아파트 8층에서 몸을 던진 여자가 2층 난간에 걸려
그 긴 머리가 늘어져 있는 밤이에요
이 밤에는 음악이 없어요
나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역전다방의 커다란 수족관 앞에 앉아 긴 머리를 매만지며
이상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만
형광등 아래의 열대어들, 후회 없이 하늘거려요
또 긴 머리의 그녀는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귤 껍질 말라 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요
그녀는 꿈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지만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 흘러가요
오로지 이 밤은 아홉 시에서 열한 시까지의 밤이라서요
* 복화술사 - 이장욱
1
서랍 속으로 사라진 것들이
어느 날 문득 서랍 속으로 돌아오듯
어느 날 다시 돌아오는
오래 전의 목소리.
2
가령 골목을 따라가다 다른 골목을 만나면
두리번거릴 수밖에.
갑자기 나타난 곳에서
갑자기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
빛과 어둠이 이루는 윤곽
골목 저 편에서 흘러오는 이상한 소리들
너무 강력한 고요
3
저 곳인지도 모른다.
조금 낮은 지상이면 어디든 입을 벌리고 있는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담 아래 수채 구멍들.
다른 세계로 사라진 것들이
자꾸 치밀어오르는 밤이 있다.
4
욕실 하수구 위에 모여 있는 머리카락들
흑백사진 속으로 사라진 천연색
우리천변 얼음 속의 흐른
오 분 전의 구름
그리고 사라진 것들이 모려 있는,
혹은 아무리 우울한 여행을 계속해도
돌러보면 다시 그곳인,
5
문득 공포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나는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봐.
내 표정은 가능한 한
어떤 의미도 담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걸어 들어온 곳을 숨죽여 바라보면
어느새 마른 나무들의 윤곽이 바뀌어 있고
담장 위 깨진 병조각들 속으로
어제의 달빛은 빠르게 스며든다.
6
이것은 깨어날 듯 깨어나지지 않는 세계.
이것은 팽팽히 당기는 듯 밀어내는.
하지만 나는 너를 꿈 밖에서 만난다.
캄캄한 허공을 향해
오래도록 욕을 해대는 골목의 사내.
허공에 남아 빙빙 도는 그의 상형문자.
7
나는 지구의 회전을 느낄 때가 있다.
나는 골목 저 편을 믿지 않는다.
어느 골목에서 너를 습격하는 것.
너의 내부에서 문득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날이 있다.
* 오렌지 우주선 - 이장욱
내 손끝이 무심하여
리어카에서 오렌지들이 떨이지는 순간
나의 내부에서 갑자기 모여드는 것
건너편 상점에서 담배를 사다 돌아보는
地球人,
구르는 오렌지들을 제자리에 놓는 동안
나를 칭칭 휘감는
달의 시선,
왜 이렇게 땀이 흐르지?
언젠가 머나 먼 생각에 사로잡힌 밤,
나는 이 거리의 좌판들 사이를 지난 적이 있지.
고개를 흔들며 가로수 너머를 응시하던 그 때,
오렌지는 먼 곳의 어둠 속에 혼자 흔들리며
태양계의 신호를 수신하다가
이제 단 한 번 떨어져 나를 흔들고
그 한 순간으로 제 머나먼 外界를 통과하는데
나는 나의 내부를 지나간 무언가를
먼 데서 바라보네.
나를 순식간에 횡단해 버린
오렌지 우주선.
* 午前 - 이장욱
나는 나의 꿈속에서 당신을 보고
당신은 당신의 꿈속에서 나를 보았다
우리는 자주 지나친다
손을 스치려다가
손을 거둔다
급수차가 아스팔트에 흘린 물이 얼음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당신의 섬세한 명암을 떠올린다
그 아침이 약간 지나자
나는 당신을 잊는다
내 시선 끝, 지하철 창 밖으로 희끗 지나가는 것,
나는 깜빡깜빡 사라진다
당신은 나의 짧은 꿈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
* 느림 … 반복 … 그속의 꿈결같은 감동 - 한국경제신문
시인 이장욱씨가 시집 『내 잠속의 모래산』(민음사,5천5백원)을 펴냈다. 지난 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온 시인이 처음으로 낸 시집이다.
별도의 제목 없이 3개 부문으로 나누어진 '내 잠속의…'는 각 부문의 시들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밤새도록 점멸하는 가로등 곁,고도 6.5미터의 허공에서 잠시 生長을 멈추고 까우뚱히 생각에 잠긴 나무… 텃새 한 마리가 상한선을 긋고 지나간 새벽 거리에서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중)
그의 시에는 마치 꿈길을 걷는 듯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시인은 몽상적 행위를 느림과 반복이라는 어법에 실어 시를 쓴다. 그렇게 씌어진 시는 현실과 꿈의 경계지점이나 의식과 무의식의 접점을 인화한 희미한 풍경처럼 허허로운 느낌을 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런 순간이 있다. 부엌에는 담담한 벽시계.정오의 숲을 횡단하는 맹목적인 구름의 한때.'('로코코식 실내' 중)
이장욱 시의 또 하나 특징은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이미지 묘사를 통해 '뜨내기 세상의 아름다움과 참혹함을,그 덧없음과 살만함을'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 익숙한 서정,익숙한 어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때로 관습 너머 산문의 영역이라 불리는 곳까지 자신의 시를 과감히 밀고나간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씨는 "놀라운 점은 '그의 시가 여전히 시적 위의와 감동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관습의 파격을 의도한 시가 자주 시적 공감마저 파괴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시는 읽는 이에게 절실함을 준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