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유월의 한국전쟁과 눈치
김 난 석
남북분단의 현실을 소재로 한 소설로
최인훈의 ‘광장’을 제일로 꼽기도 한다.
주인공 이명준은 해방이 되자 가족과 함께 만주에서 귀국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좇아 월북하게 된다.
남한에서 이산가족으로 살게 된 이명준은
남한사회의 모순을 목격하면서 월북하게 된다.
그러나 북한에도 혁명의 광장만 있을 뿐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
유월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편입되어 참전하게 되지만
북한군이 퇴각하던 중 남한군에 잡혀 포로 신세가 되고 만다.
양측의 포로교환계획에 따라 양자택일의 날이 오자
이명준은 북한도 남한도 아닌 제3국행을 택하게 되는데
심한 갈등 끝에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만다.
결국 이쪽 저쪽 눈치를 다 보았지만
분단된 조국에는 이상(理想)이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전쟁 때의 웃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 중에 미군병사가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쏼라 대니까
이 젊은이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오케이” 라고 해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아마도 미군병사는 그 젊은이에게 저편이냐를 물었으리라.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쟁을 통해
남측만의 피해만보더라도 2백만 명 이상의
사망이나 실종, 부상 등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이외에 물질적 정신적 피해와 북측의 그것까지를 더하면
한없이 슬프기만 할 뿐이다.
전쟁 초기, 북측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낙동강까지 점령하게 된다.
영남지방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북측 손아귀에 들어갔던 거다.
남측은 전열을 정비해 다시 반격을 시작, 압록강 까지 진격하게 된다.
압록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남측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거다.
결국 한반도는 일부지역을 제외하곤
완전히 세상이 뒤집어져봤던 거다.
언제 어느 편이 지배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생생하게 맛본 것이다.
이쪽이어도 저쪽이어도 괜찮다면 아무 걱정할 게 없지만
이쪽일 때는 그동안의 변절을 심판받아야 했고
저쪽이면 반동으로 색출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역사의 굴절을 통해
우리는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습성이 심화되어 간 게 아닐까...
여차하면 형국이 바뀌게 되니 소신을 고집해나가기 어려웠을 게다.
유월전쟁 이후 안보를 이유로 정치집단이 순리적 민주절차를 뒤로 미룸에 따라
이러한 습성은 점점 더 심화해져 갔으니
소신이나 지조는 버리고 눈치로 영합하는 경향이 도처에 생기게 된다.
그 결과 민주적 절차 대신 특정인의 독단이 통하게 되고
국정 시스템이 겉돌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그렇게 매도하던 독재시대도 지났고 군사정부도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겁내하던 정보기관이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공공조직이나 사조직이나를 막론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역할을 다하려는 치열성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눈치만 보려 드니 시스템이 겉도는 거다.
지나간 정부 때 행담도 개발 사업을 할 때였다.
대낮에 차가 수없이 드나들고 흙이 쌓여갔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상당기간 동안 지속되어 왔음에도
정작 주관 중앙행정기관에선 눈치만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엉뚱하게도 대통령 자문위원이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하니 기가 찰 일이 아니던가.
우리의 통일사업을 누가 이렇게 뚝딱 물 말아먹을까 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바로 유월전쟁에 가 닿아있는 것 같아
나는 유월이 오면 가슴이 아픈 것이다.
유월전쟁이 일어나던 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길에 올랐다.
내 아버지는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감에 따라 같이 내려가시고
내 어머니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를 기다린다시며 남으시겠단다.
너라도 어서 피난해 살아남으라시니,
나는 우리 집에 기숙하던 중학생 막내삼촌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 됐다.
얼마 가지 않아 인민군이 나타나자 내 삼촌은 산속으로 숨어버리니
나 홀로 어디로 가나?
몇 차례 낯선 인민군을 만나게 되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들이 나를 어찌할까?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리니 그랬을 것이다.
길마다 사람으로 뒤범벅이었다.
피난 가는 사람..., 아군..., 그리고 적군...
가끔 지나온 길에서 포탄이 터졌는지 검은 연기가 났다.
복잡한 길을 피해 철로를 택하기로 했는데, 여기는 한가했다.
가다가 배가 고프면 철로에서 나가 민가에 들려보지만 빈집일 뿐,
다시 철로를 찾아 남으로 남으로 내려갈 뿐이었다.
휴, 드디어 시골 역이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눈에 익어 마음이 편해졌다.
시골에 도착은 했지만
세상물정에 초연한 할머니 할아버지뿐이었다.
그동안의 영양실조로 야맹증이 찾아왔으니
해만 떨어지면 캄캄한 암흑이었다.
세상이 뒤집혔을 텐데 눈치를 어찌 봐야 할까?
밤마다 들마당에 나가 ‘장백산 줄기줄기’를 배우고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게 되었다.
형들이 나와서 불러보라고 하면 나는 비틀거리면서 나가게 되었다.
서울 놈이 왜 이리 비실대느냐고 윽박지르면
나는 할 말이 없을 뿐이었다.
그 꼴을 보지 말라고 야맹증에 걸린 것이던가...
다시 세상이 뒤집히더니
시골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다.
뾰족한 대창을 들고 이 집 저 집 뒤져댔다.
나에게 친절했던 아저씨도 끌려 나와 피투성이가 되었으니
나는 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러는 것일까?
휴전이 되고서야
내 아버지는 모든 것 훌훌 떨어 버리고 밤차를 타고 귀향하셨다.
아마도 부모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되어서였을 게다.
우스갯소리로
“노(NO)” 했다가 쓸개를 빼내고 “예(yes)” 하면
그게 바로 노예가 되는 길이라 한다.
이젠 이런저런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광장을 어서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눈치 말고 열린 광장 말이다.
오늘은 1950년, 그 육이오 전쟁 발발 74년째 되는 날이다.
당시의 감회를 상기해 봤다.(지난 날의 단상)
위 글은 지난 날의 단상이지만, 우스갯소리로
“노(NO)” 했다가
쓸개를 빼내고 “예(yes)” 하면
그게 바로 노예가 되는 길이라 한다.
톡톡 수다방 선남선녀들이시여!
야바위에 휘둘리지 마시라.
첫댓글 네. 반성합니다.
노~ 예
되지 않기로. .ㅎ
리디아 여사야 사리가 분명하니
그럴리 없겠지요.
그래도 아차, 하면 넘어간다네요.
아니길~~~ㅎ
눈치 빨라 그래도 이만큼 사나봐요.
sense.? 좋은 말인데.~~^^
ㅎㅎ
눈치 빠르면 절간에서도 젓갈을
얻어먹는다지요.
인간의 자유와 이상 사이의 갈등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6.25분단의 아픔 속에서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적 배경 속에 자유를 향한
열망이 담겨져있는 소설 ㅡㅡ광장
오늘도 톡톡수다방 광장 이 활짝 열렸답니다^^
♡♡♡
맞아요.
최인훈의 광장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톡톡수다방은 자유로운 수다 만발.^^
50년11월생. 저에엄마는 그날 저때문에 바로 위오빠와 셋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고생을 면했다고. 그전쟁통에 가족 피해없이 다행이었습니다
전쟁둥이였군요.ㅎ
다행이네요.
전쟁 둥이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NO ㅡ Yes
크크 노예로 가는길이
웃음이 납니다.
석촌행님 전 야바위에
절대 절대 휘둘리지
않을겁니다.
ㅋ 앞일은 모르지만요
옛일은 휘둘리지 않았겠지만
앞날은 모르는 것
정신줄 꼭 잡으시라요..ㅋㅋ
전쟁둥이는 아니지만
조직에서 너는 이쪽 줄 저쪽 줄?
선거때도 몇 번 누구?
우리나라사람들은 편 가르기 참 좋아해요 ㅎ
노도 예도 않고 입닫고 사는게
때론 속편하지요
그럴수도 있겠지요.
지조 있다는 것은
눈치 보지 않고
소신대로 산다는
것이겠지요
아무렴요.^^
노예가 되느니 한길만 꿋꿋이 가야겠지요
중심만 잃지 않으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