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벌교 꼬막축제와 함께한 제석산(563m)이야기(제2편) | |
|
벌교 꼬막축제와 함께한 제석산(563m)이야기
벌교(筏橋)라는 고장은 70년대만 해도 동부 6군에서 가장 큰 읍(邑) 이였다. 동서남북으로 열려있는 도로망과 여수 부산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선수 포구는 자연스럽게 벌교를 풍부한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 당시의 벌교 5일장이 그것을 대변 했다. 상주 인구도 5만에 가까워 시(市) 승격 운동이 추진 될 정도였다. 외지 사람들이 빈번하게 드나 들다보면 시비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읍내에 권투도장과 각종 무술을 연마하는 체육관이 들어 선것도 그때 당시 였다. 그렇게 해서 얻은 명예가 "벌교가서 주먹자랑 하지마라" 였다.
벌교 읍내를 감싸고 있는 산들이 전부 불경서 이름을 따온 것도 특이하다. 존재산,백이산,금전산,부용산,그리고 제석산이 모두 그렇다. 옛날에 존재산자락의 징광리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벌교의 산들이 탱화를 닮은 것과 일맥 상통 한다고 선암사 지허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오늘 우리가 오른 제석산도 산 높이와 관계없이 그 품격은 당당하기 이를대 없다.
제석(帝釋)이란 뜻은 제석천(帝釋天)을 말한다. 불경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33개의 하늘이 있다고 한다. 이 33개의 하늘 중 제일 높은 마지막 하늘이 제석천이고 그곳에서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분이 제석천왕이라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제석산은 두개의 봉우리가 마치 하늘의 집웅처럼 솟구쳐 있다. 좌측의 봉우리가 방금 지나온 신선대이고 오른 쪽 상단부가 제석산 정상이다. 이 만한 기상이면 벌교인 들이 자부심을 갖을 만도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신선대를 오른 쪽으로 살짝 비껴 내려서게 되면 돌밭길이 잠깐 이어지다가 곧 안부에 도착한다. 이곳은 사거리 갈림길로 동쪽은 한재골이고 서쪽은 연산 저수지로 내려가는 길이 된다. 우리들은 직진을 하여 솔밭길로 들어 섰다. 이 길은 태백산맥 문학관이 있는 옛 제각 쪽 방향이다. 지금은 제각을 철거하고 새로 소설속의 현부자집을 신축해 놓았다. 이 갈림길에서 벌교 읍내로 떨어지는 이 소나무 숲 길이 제석산 전체 능선 중에서 가장 운치 있는 등산로가 된다. 전면에 멀리 보이는 삼각봉이 첨산이고 그 오른 쪽은 장군봉으로 고흥군과의 경계를 긋고 있다.
한동안 이어지던 소나무 숲 길이 끝나고 전망이 터지자 여자만이 펼쳐진다. 전면의 농경지가 태백산맥의 소설속에 나오는 중도방죽의 들판이다. 외정시대 때 뻘밭을 막아 논을 만든 것이다. 그 방죽 끝에 선수 포구가 있다. 지금은 토사가 쌓여 큰 배가 들어오질 못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제법 큰 화물선이 드나 들었다. 멀리는 고흥반도와 연결이 되있고 오염되지 않은 갯뻘이 많아 풍부한 어패류의 보고가 되고 있다. 발걸음이 멈추어 선다. 얼마만에 보는 여자만의 아름다움인지 모르겠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고 있는 긴 방죽 위의 길은 희끄무래한 자취를 이끌며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 끝머리에 읍내가 잠들어 있었다. 읍내 너머의 들녘이나 동네는 켜켜이 싸인 붉은 어둠의 장막에 가려 자취가 없었다. 끼륵, 끼륵, 끼룩..... 문득 기러기떼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파문을 일구었다. ㅅ자를 옆으로 누인 대형을 이루며 기러기떼가 동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 이 문장은 태맥산맥의 도입부에서 중도방죽의 아침을 묘사한 내용이 생각나 옮겨 본다.
산 자락을 서쪽으로 돌아 회정마을 뒤 편으로 진입을 하자 석양 빛이 쏟아진다. 해는 천치마을 뒷 산으로 지고 있었다. 일출과 일몰은 같은 태양이면서도 그 빛이 다르다. 하루 온종일 뜨거운 열기로 세상을 밝히더니만 힘이 소진되어서 일까 어쩐지 힘이 없다. 그래 석양 빛은 허전 한지 모르겠다. 고향의 하늘에서 바라보는 저 해가 내일은 서울의 하늘에서 다시 뜨겠지만 난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웬지 가슴이 찡해 왔다.
능선 끝자락에 공동묘지가 있다. 금년 추석전에 벌초를 잘 해놓아 보기가 좋다. 이렇게 관리가 잘 된 묘지를 만나면 내일 처럼 기분이 좋다. 묘역 끝쪽에서 좌측으로 이정표가 있다. 소나무 가지에 제석산악회 꼬리표 한 장을 매달아 놓고 마지막 하산길로 들어섰다. 오늘 밤 꼬막축제가 열릴 제일고등학교 운동장이 훤 하게 내려다 보였다. 행사장 일부에서는 벌써 분위기를 잡고 있는지 걸판진 음악소리도 들려온다. 이제 오늘 산행도 끝이 나고 있었다.
오후5시25분 현부자집 앞 마당에 도착했다. 이 곳 어디에 새끼무당 이였던 소화의 집이 있었다. 좌익에 물들었던 양조장 집 아들 정하섭과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곳이다. 옛날에는 고옥이 들어서있던 곳 이였는데 이렇게 새로 반듯한 기와집으로 신축해 놓았다. 그때는 이곳을 제각이라고 불렀었다. 국민학교 다닐때에 소풍을 왔을 정도로 주변의 경치가 좋았다. 오래된 사쿠라 나무가 길 양쪽에 늘어서 있어 봄이면 나들이 코스로 그만이였다.
현부자집 건물 맞은 편에 세워진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아직 완공이 되지를 않아 개관을 못하고 있었다. 벌교를 무대로 펼쳐진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적 수난과 아품을 담아낸 소설이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첫번째는 정신없이 읽었고 두 번째는 발목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을때 정독을 했다. 이 문학관에 집필 당시의 자료와 소장품이 전시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산행을 모두 끝내고 저녁식사가 준비되어있는 식당으로 집결을 했다. 오늘 저녁 만찬은 벌교 꼬막축제 추진위원회에서 특별이 제석인들을 위해 마련 된 것이다. 서화다리 입구에는 꼬막을 위주로 한 식당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저녁을 먹게된 이 꼬막회관은 식당 규모가 제법 큰 집 이였다. 맛갈스런 남도 음식이 군침 넘어간다. 회무침에다 밥을 비벼먹는 건데 꼬막 까 먹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저녁7시부터 시작된다던 광주방송국(KBC)특집 쇼가 마냥 늦어지고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관람객들이 몸살을 앓는다. 입장이 난처해진 사회자가 익살을 떤다. "아, 어떤 아자씨가 이 마이크를 갖어가버려 이제 찾아 왔당께 그러네!" 그렇게 1시간을 기다렸다. "내일 하자!" 또 관객들이 웅성 거린다. 그러자 사회자가 또 익살을 떤다. 지금 송대관씨하고 태진아가 구례에서 자기가 출연 하겠다고 쌈박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떼우다 밤8시가 넘어서야 특집 쇼는 막을 올렸다.
요즘 잘나가는 김용임씨의 무대다. 밴드 없이 테이프로 반주 음악을 내보는데도 음향은 좋았다. 코러스 아가씨들이 쭉쭉빵빵이다.
조명장치가 잘 된 가설무대다. 무대 뒷편에서 폭죽이 터지기도 한다 녹화 카메라 4대가 정신이 없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송대관씨의 무대다.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살이 많이 찐 것 같다. "오래 오래 사랑밭고 싶어요~"
내 고향 벌교의 밤은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꼬막 축제가 열리고 있는 행사장 주변에는 각설이 장터도 있다. 가수들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특집쇼 무대보다는 걸판진 장터가 더 좋았다 연탄불에 구어먹는 전어가 제맛을 낸다. 아~ 벌교는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겨 주었다.
|
|
첫댓글 꼬막 먹고 잡다......
아~이글을보니 나도 시간될때 제석산코스를 밟아야겠다~~
야아~ 내고향 남쪽에 같이 갔다온 느낌이다,,, 좋은 글 멎쪄부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