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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嚴相益 변호사의 法窓日記> 소설가 鄭乙炳씨의 외로운 ‘昇天’
단 한 푼도 횡령을 하지 않은 老作家를 경험 없는 판·검사들이 횡령범으로 몰아 범죄자 낙인을 찍자 그는 ‘문둥이’가 되어버렸다. 죄 없는 그가 횡령범으로 수감되면서 그 충격으로 외아들이 죽고, 스트레스로 인해 부인마저 잃었다. 감옥에서 聖者가 된 그는 마지막 작품 하나를 남기고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嚴相益
⊙ 1954년 경기도 평택 출생.
⊙ 경기고·고려대 법대 졸업.
⊙ 군법무관시험, 사법고시 합격. 大盜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탈북 난민 한영숙씨 사건 등 변호.
⊙ 수필집: <변호사와 연탄 구루마> <욕심그릇이 작을수록 자유롭다> <하나님 엄변호삽니다>
<은빛남자의 금빛이야기> 등.
소설: <여대생 살해사건> <검은 허수아비>,
논문: <미국과 프랑스의 언론법 비교>.
천직이 作家였던 소설가 정을병씨.
지난 2월 18일. 영하 10도를 밑돌던 강추위가 풀리고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서 벌써 옅은 봄 냄새가 전해져 왔다. 동네 산으로 산책을 나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변호사님, 저, <한맥문학>의 김진희입니다.”
문학지를 고집스럽게 운영하고 있는 할머니 사장이었다. 내 글을 그 문학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원로 작가 鄭乙炳(정을병)씨의 재판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받자 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정을병 선생이 지난 저녁 일곱 시에 돌아가셨어요. 가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유언하셨어요. 내가 가 보니까 喪家(상가)가 너무 썰렁한 거예요. 그래서 변호사님께 연락한 거예요. 꽃이라도 하나 보내 주세요.”
나는 그의 죽음의 형태가 대충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그와 가족이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의 변호사였다. 수사기관의 功名心(공명심)과 黃色(황색)언론, 그리고 文人(문인)들의 先入見(선입견)이 합쳐져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등에서 끈끈한 땀이 번지던 2005년 6월 말 오후였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설가협회 이사장 정을병씨가 가난한 문인들에게 지원되는 정부보조금 수억 원을 횡령했다는 보도였다. 순간 실망감이 엄습했다. 정을병씨는 내가 존경하는 문학계 元老(원로)였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는 그가 쓴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정신적 양식으로 해서 성장했다. 뉴스를 듣던 택시기사가 냉소적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개새끼들, 눈먼 돈만 있으면 꼭 저렇게 해 처먹는다니까.”
정을병씨 횡령사건에 대한 재판이 문학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해 늦가을 어느 날 그에 대한 재판결과를 알았다. 그는 10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소설가 정을병과의 인연
변호사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선고된 결과만 가지고도 그 裏面(이면)을 알 수 있었다. 70대 중반의 노인인 문학계 원로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는 것은 법원이 그를 상당히 나쁘게 봤다는 의미였다. 거액의 횡령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는 암시가 선고문에 담겨 있었다.
초겨울이 다가온 어느 날, 한 작가의 소개로 정을병씨의 부인이 내 법률사무소 문을 두드렸다. 抗訴審(항소심) 변호사 선임을 위해서였다. 소박한 검은 코트를 입은, 차분해 보이는 부인이었다.
“변호사비는 300만원에 안 될까요?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그래요. 감옥에서 우리 영감이 하는 말이 그 금액 이상이면 못하겠다는군요.”
수억 원을 횡령했다는 정을병씨였다. 얼핏 납득이 가지 않았다. 거액의 국고금을 빼돌려 쓴 사건이면 변호사 업계에서 수천만 원 이상을 받기도 하는 사건이었다. 횡령범들은 빠져나가기 위해 변호료를 아끼지 않았다. 수십억 원을 횡령해서 1억원을 주고 빠져나가면 이익이라는 게 범죄경제학이기도 했다. 부인이 말했다.
“우리 영감이 도와달라고 하는군요. 자기 재판은 법관이나 검사와 싸우는 자존심 있는 在野(재야) 변호사가 필요하다는군요.”
그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뭔가 겉에 드러나지 않은 수면 밑의 빙산 같은 사연들이 틀림없이 들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나는 영등포 구치소 앞길을 걷고 있었다. 철망이 앞에 쳐진 기다란 회색 담을 따라 잎이 다 떨어진 플라타너스 가지가 추운 겨울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나는 정을병씨가 쓴 글을 통해 대충 그의 삶을 알아보았다. 그는 1934년 바닷가인 남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는 성직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1955년 그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생이던 그가 어느 날 기숙사 근처에 살던 김말봉이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면서 인생의 궤도가 수정됐다. 사과상자를 책상 대신 쓰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촛불 아래서 펜을 들고 하얀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채워 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그는 또 다른 성스러운 모습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문학을 한다는 것은 평생 가난을 공기처럼 마시고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새로운 신앙 대상이 된 소설을 위해 직업도 대학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별을 보면서 도서관에 나갔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면서 하루 종일 소설을 읽었다. 도서관이 그의 스승이고 대학이었다. 밤이면 돌아와 원고지 앞에 앉았다. 한 평짜리 방이 그의 교회였고, 글을 쓰는 행위가 기도였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했다. 입는 것, 먹는 것, 가지는 것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기로 했다. 술과 담배는 아예 배우지 않았다. 그는 체험한 걸 써야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朴正熙(박정희) 정권 초기, 그는 강제노동을 시키는 국토건설단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생하게 겪은 일들이 <개새끼들>이란 소설로 형상화됐다. 그 책은 대히트였다. 그러나 정권에 밉보인 그는 ‘文人(문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의 체험은 또 다른 소설로 피어났다. 그는 십자가에 몸을 매달고 피로 작품을 쓰는 작가였다.
그 후 그는 사이비 종교단체를 소설로 썼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의사들의 비리를 글로 썼다가 구속영장이 신청되기도 했다. 그의 순교자 같은 奇行(기행)은 7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횡령범이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세계적인 작가 중에는 진짜 횡령범이 더러 있었다. 은행원이었던 오 헨리는 횡령으로 감옥에 간 후 거기서 소설가가 됐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도 50대 후반 세금 징수원을 하다가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갔었다.
“난 받을 돈을 받았을 뿐”
1974년 3월 2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법정에 선 문인들. 오른쪽부터 李浩哲·任軒永·金宇鍾·장병희·鄭乙炳.
구치소의 변호사 접견실은 동물원의 침팬지 우리 같은 투명한 유리박스였다. 거기서 정을병씨와 마주 앉았다. 깡마른 몸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노인이었다. 추워 보이는 하늘색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죄인의 태도가 아니었다. 쑥스럽거나 부끄러워하는 표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당당해서 내가 의아할 정도였다. 변호사인 나는 ‘내가 왜 왔나?’ 하고 속으로 물을 정도였다. 그는 사건 얘기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대화를 풀기 위해 형식적으로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벌써 다섯 달째 감옥 안에서 살고 있었다.
“밖에 있을 때나 비슷해요. 책을 읽고 명상도 하죠.”
70대 중반의 노인답지 않게 카랑카랑한 힘 있는 목소리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난 횡령한 적이 없어요. 받을 돈을 받은 거지.”
너무 강하고 역설적인 대답에 놀랐다. 잘못했다고 해도 용서받을까 말까였다. 그런 뻔뻔스런 태도는 재판장을 분노하게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협회장을 하면 주로 기부받으러 다니는 일을 하죠. 가난한 문인들에게 원고료 명목으로 얼마씩이라도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해서였죠. 그렇지만 단번에 턱 기부금을 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자존심을 꺾고 여러 번 찾아가 사정해야죠. 그 과정에서 더러 밥값도 내고 기름값도 들었죠. 막말로 다른 어느 단체의 회장도 순수하게 자기 개인 돈을 털어서 뛰는 걸 못 봤어요.
협회에서 내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서 거기다 매달 활동비를 보내줬죠. 그걸 쓴 거요. 협회에서 발간하는 문학지에 광고도 유치했어요. 협회에서 만들어준 통장에는 내 저작권료나 원고료도 섞여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받을 돈 받은 거지. 그 돈 이외에는 검사가 아무리 뒤져도 단 한 푼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는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법은 상황에 따라서는 형식논리고 치사했다. 자기 회사의 돈을 자기가 빼서 써도 횡령이다. 국가보조금 항목을 변경해서 합리적으로 써도 법에 걸렸다. 법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법관 마음이었다. 자기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면 無罪(무죄)라고 덤비는 사람들은 위험했다.
“그래도 세상은 지금 엄청난 오해를 하는데 해명하셔야죠.”
내가 말했다. 알리고 싸우지 않으면 세상은 모른다.
“설득이나 변명할 필요가 없어요. 아니면 아닌 거지, 뭘. 모략하는 놈들한테는 대꾸할 필요조차 없어요.”
그가 한마디로 말을 끊었다.
“단 한 푼도 횡령한 적 없다”
나는 법원에 가서 수사기록을 모두 복사했다. 수많은 소설가들이 그를 엄벌해 달라고 보낸 진정서 때문에 상당히 두꺼운 분량이었다.
핵심 내용은 간단했다. 국가에서 가난한 작가들을 위해 원고료를 지원하는 보조금이 나왔다. 협회 여직원은 그 돈을 빼내서 승용차를 사고 애인의 신용카드 대금도 대준 것으로 드러났다. 남자 사무책임자도 국고보조금으로 아파트를 사고 주식에 투자했다. 그리고 국고보조금에서 회장인 정을병씨 명의의 통장으로 매달 고정적인 금액이 이체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직원이 비자금 통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여직원이 담당 형사에게 진술한 조서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돈 관리는 단돈 1000원까지 정을병 회장의 결재를 받았습니다. 입금, 출금 및 영수증까지 전부 회장님이 꼼꼼하게 챙기면서 사인을 했죠. 그분은 자기가 쓰는 소소한 경비까지 협회 공금에서 받아 갔어요. 말단 직원인 저는 그 돈을 맞추기 위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정을병 회장님은 나랏돈은 떼어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형사는 여직원의 옆자리에 정을병 회장을 불러 대질신문을 했다.
―여직원의 말을 들으셨죠? 정을병 회장님 주도로 거액의 횡령사건이 벌어졌는데 빨리 자백하시고 사건을 끝내시죠.
형사는 여직원의 말을 근거로 정을병을 추궁했다.
“단 한 푼도 횡령한 적이 없소. 내 원고료나 저작권료도 다 돌려받지 못했는데 무슨 횡령 같은 소리를?”
정을병씨가 단호하게 부인했다.
―원고료가 아니고 국고보조금을 횡령했다면서요?
형사가 다그쳤다.
“국고에서 나오는 돈은 바르게 쓰라고 오히려 주의를 줬죠.”
정을병씨가 말했다. 그 말에 여직원이 되받아쳤다.
“회장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죠. 수시로 국고금에 대해 같이 의논하고 따로 비자금으로 챙겨 쓰는 걸 알고 묵인하셨잖아요? 회장님은 그런 사실 다 알면서 왜 그러세요?”
이번에는 형사가 증거를 들이댔다.
―여기 통장을 보세요. 국고금을 횡령한 비자금 통장에서 바로 정을병이라는 이름의 통장으로 매월 돈이 간 게 분명한데, 이게 횡령이 아니면 뭡니까?
형사는 계속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여직원에게 허위의 결산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다면서요?
“그런 적 없어요. 결재가 올라오니까 그렇게 지출된 걸로 알고 사인해 줬을 뿐입니다.”
여직원의 변명
―국고보조금을 횡령하고 말썽이 생기니까 허위자료들을 폐기시키라고 명령하셨다면서요?
“그런 사실 없다니까요.”
―여직원이 폭로하는데 그런 사실이 없다니?
정을병씨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 같았다. 돈이 매달 들어온 그의 통장과 송금 영수증은 치명적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변호사 입장에서, 너무 명확한 상황은 오히려 반대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을병 회장에게 횡령의 故意(고의)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정말 그렇게 했을까? 차명계좌나 현찰로 받아야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이름이 박힌 통장으로 돈을 송금받았다. 횡령을 그렇게 했다면 바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사연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상한 건 重罪(중죄)를 저지른 여직원이 불구속되어 거리를 활보한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피라미 여직원보다 거물을 쓰러뜨리고 싶어 하는 수사기관의 공명심이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약점을 가진 여직원은 수사기관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불구속이라는 미끼를 던지면 어떤 모략도 서슴지 않는 게 세상이다. 여론은 이미 그에게 최악이었다.
상황을 모르는 정을병씨는 돈키호테처럼 판사에게 대들었다. 그는 질 나쁜 횡령범으로 낙착됐다. 회장과 사무책임자, 여직원의 횡령액을 비교해도 맞지 않았다. 사무책임자가 아파트를 사고 주식에 투자했고, 여직원이 승용차를 사고 빚을 갚았다면, 회장의 횡령액은 더 금액이 커야 했다. 그런데도 횡령액은 공식적으로 그의 통장으로 들어간 활동비가 전부였다.
수사서류보다 그와 얼굴을 맞댔을 때 나오는 느낌이 더 정확한 것 같았다. 그는 모략에 걸렸을 가능성이 많았다. 수사기관이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직무유기의 냄새가 났다. 수사기관이 눈을 감고 법원이 무관심할 때 법의 피해자가 탄생한다.
거물들이 철저히 파괴되는 과정은 대중들에게 야릇한 쾌감을 주는 최고의 파티였다. 그런 과정에서 연예인 최진실이 죽었고 꽃동네의 聖者(성자)도 쓰러졌다.
무죄 선고
나는 법정에서 집중적으로 여직원과 남자직원을 추궁했다. 그들로부터 역공격을 받기도 하고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검찰은 그들 편이었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항소심 재판장이 비로소 내가 제기하는 의문점들에 동감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짓누르는 듯한 무더운 공기가 꽉 찬 법정에서였다. 마침내 재판장이 정을병 회장의 비리를 폭로한 여직원에게 진지하게 묻기 시작했다.
―비밀자금을 어떻게 만들었죠?
“서류상 배정된 예산보다 실제로는 더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를 들면 1억원의 예산을 집행했는데 실제로는 8000만원 밖에 들지 않은 경우가 많았죠. 몰래 통장을 만들어 그 차액들을 입금해 두었습니다.”
―왜 본인이나 다른 남자직원은 전부 借名(차명)계좌나 현찰로 몰래 돈을 빼가고, 회장인 정을병씨에게만 그의 이름으로 된 공식적인 통장으로 그 돈을 넣어줬죠? 국고보조금 통장에서 바로 그쪽으로 말이죠.
물귀신 작전으로 회장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냐는 의미였다.
“….”
여직원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비자금에서 돈을 빼내서 공식적인 정을병 회장의 통장에 송금을 해 준 건 맞죠?
“그렇습니다.”
―회장이 말단 여직원보다도 횡령한 금액이 적은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하죠? 전에 진술한 것 같이 회장인 정을병이 1원 한 푼까지 다 관여했다면 더 많은 돈을 횡령해야 맞지 않나요?
“….”
여직원은 당황해 하고 있었다.
―대답할 말이 없습니까?
재판장이 엄한 얼굴로 다그쳤다. 재판장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즉석에서 여직원을 구속해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는 위치였다. 거짓말을 하면 횡령죄 외에 僞證罪(위증죄)로 처벌할 수도 있었다. 여직원이 흔들렸다. 재판장이 진실을 말하도록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수사기록을 보면 병든 늙은 어머니를 돌보느라 아직 시집도 못 가고 혼자 힘들게 산다고 나와 있는데 맞아요?
정직하게 말하면 정상참작을 할 수도 있다는 암시였다.
“그렇습니다.”
여직원은 겁먹은 표정이었다. 사실 재판 때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비자금 통장을 만든 사실을 정을병 회장이 정말 알았어요?
재판장이 다시 확인했다. 여직원의 한마디에 유죄냐 무죄냐가 판가름 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몰래 만들어 둔 비자금 통장의 존재를 피고인 정을병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재판장이 다시 여직원에게 다그쳤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정을병 회장은 아무것도 모르셨어요.”
모든 게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재판장이 검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정을병씨는 횡령죄가 아니네요. 비자금의 존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횡령범이 되겠습니까?
정을병씨에게 실질적으로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이었다.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판장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검찰에서는 횡령죄의 기소는 취소하고 국고보조금 항목을 무단으로 변경한 것으로 죄명을 바꾸겠습니다.”
검찰은 일단 파괴 대상이 된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나는 일단 保釋(보석)을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파렴치한 횡령범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에게 연락을 했다.
“보석 청구를 하고 싶은데 현찰이 있으세요?”
“우리 영감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법원에서 보석금으로 수천만 원의 현찰을 납입하라고 해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사전에 돈을 낼 수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감옥에 가서 영감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어디 가서 私債(사채)라도 얻을 건지 아니면 감옥에 계속 있을 건지 의논하고 말씀드릴게요.”
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물었다.
“그 많은 작가들이 얼마씩이라도 걷어서 보석금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소설가협회장을 하시면서 전체 회원을 위해서 많이 헌신하셨잖아요?”
“지금도 회원들이 전부 오해를 하고 우리 영감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몰라요. 심지어 내가 협회 돈으로 호화로운 해외여행까지 했다고 모함을 하는데, 나는 그런 호강을 한 적 없어요. 재판장이 횡령하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그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는 신문도 없고…. 지금 남편 옆에는 한 사람도, 정말 한 사람도 돕는 사람이 없어요.”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돈 대신 재판장의 마음을 움직일 원고지 수백 장 분량의 보석청구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게 남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며칠 후 땅거미가 내릴 무렵 정을병씨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깨끗한 재킷과 바지를 입고 모자를 단정히 쓴 산뜻한 모습이었다.
“감방에서 저녁을 먹고 자려고 누웠는데 교도관이 와서 짐을 싸 가지고 나가래요. 그래서 집으로 갔지. 하여튼 그동안 고맙소.”
그의 말투는 잠시 어디 다녀온 사람 같았다. 그와 마주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1심에서 재판을 받아 보니까 판사가 검사 말 이외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도대체 횡령을 하지 않았다고 말해도 들어줄 귀가 전혀 없는 거예요. 판·검사들이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소설을 한 편 쓰고 싶어요. 읽기 싫어해도 그걸 보고 뭔가 느끼게 말이죠. 그런데 우리 소설가들이 法曹(법조)의 생리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그런 작품들이 나오기가 불가능하지. 그게 안타깝소.”
“우리나라에 법정소설을 쓰는 분들이 더러 있지 않나요?”
내가 물었다.
“이번에 내가 감옥 안에 있으면서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소설들을 모두 읽어 봤어요. 전부 다 얄팍한 스토리들만 나열한 것들이었어요. 그런 건 소설이라고 할 수 없어요. 문학은 철저한 체험과 깊은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갖추어진 글이 없습디다.
내가 감옥에서 여러 사람이 있는 방에 있었어요. 내가 74살이라고 房長(방장)을 시킵디다. 그런데 좁은 감방에 변기까지 함께 있으니까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이 생겨요. 식사할 때도 바로 옆에서 소리를 내면서 똥을 누더라고. 그래서 내가 각자 용변을 보는 시간을 정해 줬지. 겹치지 않게 하고 식사시간을 피해서 일을 보게 말이오. 그런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감옥 안의 상황을 소설로 쓰겠어요? 소설의 기본은 경험이고 철학이오.”
그의 화두는 감옥 안에서도 오직 문학이었던 같았다. 내가 물었다.
“이번 체험을 통해 그 안에서 발견하신 진리가 없습니까?”
“복도에서 걸어가는데 흉악범으로 찍힌 인간이 소리 없이 다가와 갑자기 빵 한 조각을 내 입에 물려 줍디다. 그의 가슴 속에도 따뜻한 인간미가 들어 있더란 말이오. 경험 없는 젊은 판사들이 어떻게 그런 휴머니티를 발견할 수 있겠어요? 법적인 관점은 인간을 보는 데는 가장 큰 맹점이라는 것을 알았지.”
볼 줄 아는 사람은 어디서든 진리를 발견하는 것 같았다.
“횡령범 낙인 찍히자 문둥이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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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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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줄 아는 사람은 어디서든
진리를 발견 하는것 같다"
°°°
내 주변을 내 지인들을 자리이타
마음과 행으로 늘 ~빛나게
하옵소서,,,🙏🙏🙏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수사기관의 공명심과 黃色언론 그리고 문인들의 선입견이 합쳐져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이비 종교단체를 소설로 썼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의사들의 비리를 글로 썼다가 구속영장이 신청되기도 했다. 그의 순교자 같은 奇行(기행)은 7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법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처벌은 법관 마음이었다 자기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면 無罪(무죄)라고 덤비는 사람들은 위험했다
공금으로 차를 샀다는 약점을 가진 여직원은 수사기관의 노예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수사기관이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직무유기의 냄새가 났다 수사기관이 눈을 감고 법원이 무관심할 때 법의 피해자가 탄생한다
재판장이 횡령하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그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는 신문도 없고
1심에서 재판을 받아 보니까 판사가 검사 말 이외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문학은 철저한 체험과 깊은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갖추어진 글이 없습디다
법적인 관점은 인간을 보는 데는 가장 큰 맹점이라는 것을 알았지
국가돈 공금은 1원이라도 함부로 쓰면 안되고
철저히 직원단속을 해야 했다
경찰과 힘있는 검사와 판사의 태도를 아예 안보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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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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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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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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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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