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인간 / 이재기
남파랑길 4코스. 다대포 포구를 혼자 걷는다. 냉동창고와 공장이 즐비한 감천항의 삭막한 풍경에 살짝 지루하다고 느낄 즈음, 멀리 6층짜리 회센터가 보인다. 입주한 횟집 모두 ‘○○ 초장 횟집’이라고 초장이 들어가는 간판을 내걸었다. 초장 사랑에 빠진 생선회에 진심인 민족이다. 포구를 걷는 내내 초장 횟집과 활어 시장이 노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아니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다대포 포구의 모습이다.
새해 들어 매주 한 코스씩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남해안의 수려한 둘레길을 따라 이어진 남파랑길. 시작할 때는 큰 기대하지 않았다. 길을 따라 아무렇게나 지어진 주택가, 손바닥만 한 땅마저 놀리지 않고 정갈하게 일구어진 텃밭. 수정산과 구봉산의 둘레길을 걸으며 내려다본 부산은 그동안 보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해운대나 광안리 해변의 아름다움, 남포동의 부산함과 맛있는 음식. 그동안 관광지만 쫓아다닌 것 같다. 사람이 다니던 길을 이어 만든 남파랑길을 걸으며, 부산의 속살과 냄새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년 연말에 나는 이스탄불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항공사 마일리지가 일주일 후 없어진다고 해서 아까운 마음에 아무 준비 없이 탄 비행기였다. 애당초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같은 관광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풍광보다는 사람에 끌리는 성향이다. 어디에 가더라도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더 관심이 간다. 모스크나 박물관도 방문했지만, 머릿속에 남은 곳은 현지 사람들만 찾는 외진 시장과 골목이었다. 꾸며지지 않은 모습. 시끄럽지만 삶이 묻어나는 그곳에서 튀르키예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4박 5일, 짧은 여정의 마지막 날. 이스탄불 전경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참리자 언덕으로 향했다. 관광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걸어 오르면서 주변을 살폈다. 전망이 좋아서인지 도롯가에는 고급 주택이 즐비했다. 잘 가꿔진 정원, 멋진 승용차.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만튀르크의 후예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언덕의 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한가한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이국의 풍경을 내려보았다. 낯선 땅에 홀로 있다는 외로움 때문일까? 거기에서 생뚱맞게 감천고개가 떠올랐다.
태극도를 따라 부산에 온 작은할아버지는 감천고개 위에 허름한 집을 얻어 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방학을 맞아 찾았던 그곳은 하층민의 고단함이 버무려진 삶터였다. 두 평 남짓한 좁은 가게에는 됫박으로 팔던 쌀, 보리, 잡곡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살림방과 부엌이 옹색하게 가게에 붙어 있었다. 고개에서 내려 본 감천마을은 청계천의 옛 판잣집을 닮아 있었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담은 파란 물탱크를 지붕에 이고 있는 모습이 힘겹게 보였다. 동네 아이들의 거친 언사만큼 감천마을의 삶은 치열했다. 돈을 벌어 동네를 떠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고 했다.
몇 년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 아이들 목소리와 연탄재가 넘치던 골목은 예쁜 카페와 상점 그리고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전망 좋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를 두고 담소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생경했다. 개량 한복을 입고 골목을 걷는 외국인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작은할아버지 집은 문화마을로 개발되면서 헐렸고, 관광객을 위한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10여 분 골목을 따라 내려가자, 기억 속의 감천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 한참 머물러 있었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었다. 대개 3박 5일. 비행기에서 하루 잠을 자고 시차에 익숙해질 때쯤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관광은 언감생심이었다. 반나절이라도 시간이 나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근처를 훑어보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의 서운함 때문일까?. 시간이 남아도는 지금, 유튜브를 보며 세계 곳곳의 길을 눈으로 걷고 있다. 스코틀랜드로, 히말라야로, 모로코로. 해외에서 길을 걷는 나를 상상하기도 한다. 갑작스러운 여행에 이스탄불을 찾은 것도 상상을 실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거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땅이었다. 하지만 뭔가 채워주지 못하는 허전함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감천고개를 떠올리면서 우리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어느덧 몰운대를 지나 다대포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온다. 남파랑길 4코스는 까도 까도 새것이 나오는 양파 같다는 느낌이다. 다대포 포구의 삶의 냄새, 몰운대 둘레길의 호젓함도 좋았지만, 탁 트인 해수욕장 위로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멀리 파도에 밀려온 모래 언덕, 잘 관리된 갈대숲 길도 보인다. 아직 남은 길이 멀다. 아미산 전망대에서 보는 낙동강이 어떨지, 또 어떤 풍경과 삶이 나를 맞을지 궁금해진다.
걷기 좋은 길이 많다. 남파랑길, 해파랑길,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성곽길 등. 지자체마다 둘레길을 만들고 오라고 유혹한다. 해외의 낯선 길을 걸으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당분간 우리의 길을 걷고 싶다. 길에서 과거를 찾고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고… 어쩌면 발로 이 땅에 기록을 남기고 싶은 어설픈 내 욕심 때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