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강원 정선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 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1998년 제 1회 <고대문학 신예작가상> 수상
2004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수상작은 ‘아무르 강가에서’ 외 13편.)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박정대-눈먼 무사
박정대-사곶 해안
박정대-취생몽사
박정대-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박정대-추억도 없는 길
박정대-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박정대-혜화동, 검은 돛배
박정대-하늘의 뿌리
박정대-馬頭琴 켜는 밤
박정대-장만옥
박정대-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박정대-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
박정대-근위병과 게릴라들
박정대-야외 수업
박정대-목련통신
박정대-지구의 북호텔에서
박정대-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피의 적군파
박정대-무가당 담배 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박정대-누군가 떠나자 음악 소리가 들렸다
박정대-버찌
박정대-겨울 浮石寺
박정대-우편함 속에 사랑을
박정대-앵두꽃을 찾아서
박정대-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박정대-달맞이꽃
박정대-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박정대-슬픈 열대야
박정대-베티와 나(영화 37도 2부)
박정대-몰운대에 눈 내릴 때
박정대-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박정대-아이다호
박정대-두 달 정선
박정대-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박정대-새들은 목포에 가서 죽다
박정대-자작나무 뱀파이어
박정대-재스민 푹푹 삶은 밤
박정대-백두산 꿈을 꾸었다
박정대-거리에서
박정대-동정 없는 세상
박정대-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
박정대-음악들
박정대-어느 맑고 추운 날
박정대-푸른 돛배
박정대-하얀 돛배
박정대-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박정대-네 영혼의 중앙역
박정대-나는 음악처럼 떠난다
박정대-쇼몽에 대해 말하다
박정대-등려군
박정대-동사서독」에 의한 변주
박정대-사랑의 적소
적멸과 허무, 그리고 ‘삶에의 의지’ - 강정
눈 먼 악사의 외로운 망명정부 - 엄경희
* 눈먼 무사 - 박정대
눈멀어 나 이제사 고향에 돌아왔네
아픈 몸 좀 눕히고 잃어버린 풍경의 시력 회복하러 시골에 있는 누님
댁에 내려와 며칠을 골방에서 뒹구네
그러나 고향은 고향이되 더 이상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이제 나 몸도
마음도 쉽게 쉬지를 못하네
시골 농협에서 나누어준 달력을 치어다보며 가까스로 일주일을 버티
네, 내가 살았던 옛 마을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농협 달력, 나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자전거를
타고 달력 속으로 난 길을 달리네
내려올 때 가져온 백석과 이용악의 시집, 가끔은 또 그 낡은 너와집
에 들어가 서너 시간 아무 말 없이 뒹굴기도 하네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싸아하게 두드리고 가는 거, 그게 음악이지 生
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거, 그게 바로 시지
그런 생각할 때면 내 가슴에서 포르릉 날아간 멧새들의 소리 다시 들
려오기도 했네, 명치끝에서 고드름처럼 다시 자라나기도 했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시골 골방에 누워 있다가 봉창 여는 재미 아시
는지
내 안의 날숨과 들숨이 세상을 향해 뚫어놓은 작은 통로, 맑고 차가
운 숨결들이 누 떼처럼 넘나드는 저 벅찬 통로, 날것들이 생생하게 드
나드는 저 生의 경계선
(니북에서는 방송 채널을 통로라고 한다지?
형광등 꼬마전구를 씨불알이라고 한다지?)
씨불알 저게 바로 生이지, 시골에 내려와 어느 방송 통로에선가 아프
리카 누 떼가 필사적으로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네, 거친 물살을 가로
지르는 저 필사적인 生의 이동, 그게 바로 음악이고 귀향이지
生은 두 눈 부릅뜨고 귀향하는 것
아니 生은 눈을 감고서라도 필사적으로 귀향하는 것
고향에 내려와 바람의 음악 소리 들으며 나 조금씩 고향을 회복하네
눈 쌓인 산과 벌판이 나에겐 그 어떤 진통제보다도 강력한 위안
눈멀어 내려온 고향에서 눈감으면 이제사 조금씩 복사꽃 핀 마을 보
이네
복사꽃 사이로 날아다니던 호랑이들. 그 옛날의 무사들 보이네
노래보다 먼저, 시보다 먼저 본질적인 사랑이 눈을 밝게 하네, 그러한
곳에 이제사 나 눈감고 가까스로 당도한 것인데
사랑보다 먼저 사랑에 눈먼 나보다 먼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녀, 깊은 밤 봉창문을 통해 은은한 숨결을 보내오는 그녀
달빛만 저 홀로 위영청 밝은 밤
그러나 여전히 눈감고 골똘히 귀향하고 있는 눈먼 무사, 반가사유로
아득히 깊어가는, 눈이라도 펑펑 내릴 것 같은 칠흑의 밤
* 사곶 해안 - 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그곳에서 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넓은 황량함이 내 고독의 터전이었다니
이곳은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 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 취생몽사 - 박정대
바람이 없으니 불꽃이 고요하네
살아서는 못 가는 곳을 불꽃들이 가려 하고
있네, 나도 자꾸만 따라가려 하고 있네
꽃향기에 취한 밤, 꽃들의 음악이 비통하네
그대와 나 함께 부르려 했던 노래들이 모두
비통하네, 처음부터 음악은 없었던 것이었는데
꿈속에서 노래로 나 그대를 만나려 했네
어디에도 없는 그대, 어디에도 없는 생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
*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깍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네
가슴 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야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홀로 걸어왔는지
지금 내 앞에 망연히 서 있네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고 있네
* 추억도 없는 길 - 박정대
하늘은 신문의 사설처럼 어두워져 갔다
주점의 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고
구름은 저녁의 문턱에서 노을빛으로 취해갔다
바람은 한 떼의 행인들을 몰아 욕정의
문틈으로 쑤셔 넣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수한 욕망으로의 이동이라고 그날 저녁의
이상한 공기가 나의 등 뒤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도 하지 술을 마시고 청춘을 탕진해도
온통 갈망으로 빛나는 가슴의 비밀, 거리
거리마다 사람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세월의 화석이 되어갔다
그리고 세월은 막무가내로 나의 기억을 흔든다
검은 표지의 책, 나는 세월을 너무 오래
들고 다녔다 여행자의 가방은 이제 너무 낡아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흠칫 놀라곤 하지만
세월에 점령당한 나의 기억을 찾으러
둥그런 태양의 둘레를 빙빙 돌며 저녁의 나는
이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간판들은 화려하고도 허황하구나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
추억도 없는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 박정대
다들 돌아가버린 한적한 오후의 도서관에서
내가 생애처럼 긴 담배를 피워물 때
어디서 작은 새들이 날아와
처음 보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꽃들은
낡은 외투에 손을 꿰는 아이들의 손끝마냥
불쑥 피어오르고 있었다, 외상값
정리되지 않은 외상값에 대한 생각처럼
나는, 그 어떤,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한 상념에 잠기어 있었는데, 비가 내려
내 생각의 한가운데로 비가 내려,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하늘 한구석에서
누군가 또 낚시질을 하고있군, 글쎄
비 내리는 오후는 저녁처럼 어두워져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 검은 말 한 마리
지나가고 있었다, 저기 저 비에 젖은 별들은
진흙탕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말발굽이야, 그 무엇이
속삭이고 있었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나지막한 속삭임에게 들려주었다
다 잔인한 추억이지 뭐
* 혜화동, 검은 돛배 - 박정대
아름다운 기억들은 폐허의 노래 같다
오후 다섯시의 햇살은 잘 발효된 한 잔의 술
가로수의 잎들을 붉게 물들인다 자전거 바큇살 같은 11월
그녀는 술이 멀고 싶다고 노을이 지는 거리로 나를 몰고
나간다 내 가슴의 둔덕에서 염소 떼들이 내려오고 있다
둥글게 돌아가는 저녁이 검은 레코드,
어디쯤에선가 거리의 악사들이 노란 달을 연주하고 있다
텅 빈 마음을 끌고 가는 깊고도 푸른 거리
* 하늘의 뿌리 - 박정대
그것은 풀리지 않는 욕망의 매듭 같은 것이었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하늘의 뿌리가 지상에 스며들 때
더러는 꿈속까지 비가 내려
잠든 욕망의 옆구리를 들쑤실 때
애인이여, 너를 덮고 잠들던 나의 곤고한 청춘은
한 장의 음화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갈증과 회한이 교차하는 새벽의 문턱에서
삶은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깊은 침묵으로
나를 엄습하고, 그 결렬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던 것은
어쩌면 그 아름답고 우울한
한 장의 음화였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게 어쩌면
낡은 구식 쟁기와 같은 것이어서
이미 경작할 마음의 밭이 없는 나는
늘 죽음 쪽에 가깝고,
죽음이 나를 수소문하는 저잣거리에서
나는 추억을 헐값에 팔아 넘겼으므로
홀가분하게 죽음에 자수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상의 유리창에 달라붙은 한없이 습기찬 성에처럼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병든 혼의 가혹한 질주,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덮고 있는 갈가마귀떼의 하늘을 지나
하나의 가혹한 시간과 공기 속을
나는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자전을 거슬러올라 또 다른 별의
윤회 속으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의 뿌리여,
너는 왜 지상의 강물에 발을 담그는가
넉넉한 대지의 품속으로 뿌리내리던
빗방울들의 육체여, 너는 지금 어디를
통과해가고 있는가, 밤새도록 비가 내려
그 무슨 격렬한 표현처럼 나를 휩쌀 때
숫처녀와 씹하듯¹그렇게, 오오, 나는
하나의 세상을 통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속도에의 열망 같은 것이
나를 살아가게 하던,
이 잔인하고도 황홀한
시간의 늪 속에서
※ ¹숫처녀와 씹하듯 : 앙리 미쇼의 詩『바다와 사막을 지나』에서 인용.
* 馬頭琴 켜는 밤 -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정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 장만옥 - 박정대
멀리 가는 길 위에 네가 있다
바람 불어 창문들 우연의 음악을 연주하는 그 골목길에
꽃잎 진 복숭아나무 푸른 잎처럼 너는 있다
어느 날은 잠에서 깨어나 오래도록 네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나뭇잎에 적은 글처럼 바람 속에 오고 가는 것
때로 생의 서랍 속에 켜켜이 묻혀 있다가
구랍의 달처럼 참 많은 기억을 데불고 떠오르기도 하는 것
멀리 가려다 쉬고 싶은 길 위에 문득 너는 있다
꽃잎 진 복숭아나무들이 긴 목책을 이루어
푸른 잎들이 오래도록 너를 읽고 있는 곳에
꽃잎 진 내 청춘의 감옥,
복숭아나무 그 긴 목책 속에
* 산초나무에게서 듣는 음악 - 박정대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소통인가 네 파아란 잎과 향기를 위해 나는 날마다 한 桶의 물을 길어 나르며 울타리 밖의 햇살을 너에게 끌어다 주었건만 이파리 사이를 들여다보면 너는 어느새 은밀히 가시를 키우고 있었구나
그러나 사랑은 또한 얼마나 장렬한 소통인가 네가 너를 지키기 위해 가시를 키우는 동안에도 나는 오로지 너에게 아프게 찔리기 위해, 오로지 상처받기 위해서만 너를 사랑했으니 산초나무여, 네 몸에 돋아난 아득한 신열의 잎사귀들이여
그러니 사랑은 또한 얼마나 열렬한 고독의 음악인가
* 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 - 박정대
---네 고통의 시선이 다하는 날, 나는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외눈의 태양이여,
그대의 눈이 온전히 감길 때
헛된 꿈도 사라지고
단 한번,
내 짧았던 사랑도 완성되리
그대 드디어 눈을 감는구나
환한 봄날,
햇살은 가루약처럼 쏟아져
風景의 한쪽을 더욱 환하게 하는데
나는 저기 저,
오랜 두통의 마루를 지나
태양의 눈을 감기러 가는 달
만삼천팔백칠십 개의 내가
그대에게로 가면, 가서
그대 깊은 품속에 안기게 되면
그대 드디어,
두 눈동자의 등불을 끄고
고요히 침묵하겠구나
내 생애 마지막 일식에 대하여
그 짧은 사랑에 대하여
* 근위병과 게릴라들 - 박정대
1 근위병들
바람을 가르는 강속구는 근위병의 기본적인 자질이다
바람 속에서 현란한 개인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근위병들은
감독과 코치의 끊임없는 경멸의 시선과 억업 속을 헤맨다
근위병들의 행복은 근본적으로 거대한 왕국이 보장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들을 최대한 멀리 날려보내야만 인정받는
그 밀어냄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혹은
그 무엇인가를 밀어내지 못하면
근위병들은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근위병들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위병의 기본적인 자질이기 때문이다
차갑고 냉철한 이성이 바로 그들이
왕국에 바치는 최대의 충성이기 때문이다
간혹, 가까이 다가오는 강속구의 사랑을
어쩔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근위병들은
끝내, 데드볼의 상처를 가슴에 안은 채
왕국의 그라운드를 떠나야 한다, 근위병들 사이엔
오랫동안 불문율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있다
뜨거운 가슴은 그들 최대의 적이라는 것이다
관중들은 근위병들의 용맹을 칭송하며
바람을 가르는 질주와 강력한 타격에 열광하지만
근위병들은 결국 그들의 왕국을 떠나지는 못한다
그들은 치고, 달리고, 뛰어서
결국 그들의 홈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 쓸쓸히 바람 부는 날이면
그들 대신, 왕국의 정문을 지키는
용병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들은 끝내 왕국을 떠나지는 못한다
왕국이 거기에 존재한다고 스스로 믿음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들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서는 안 된다
연민의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 모두는 그 누군가의
행복을 방해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루살이들에게도
그들의 행복을 누릴
권리는 있을 테니까
2 게릴라들
여기,
집요하게 고독을 드리블하는 게릴라들이 있다
끊임없이 거부하는 몸짓들 사이를 헤치고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너가는 몸짓들,
향기로운 바람의 유혹에도 섣불리
고독을 내려놓지 못해
더욱더 깊은 고독 속으로 潛行하는
가난하고 남루한 숨결들,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바람과 햇살 속에서
아픈 육체가 가루약처럼 산산이 부서져도
남루한 영혼의 깃발을 막무가내로 흔드는 사람들
그러나 끝내, 가파른 그리움의 산맥을 넘어
사랑하는 이의 가슴속에 골인하기 위하여
그 오래된 그리움의 현을
다시 팽팽히 당기기 위하여
지금 여기,
온몸으로 고독을 밀고 나가는
한 떼의 게릴라들이 있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막무가내의 숨결이 있다
무섭도록 짙푸른, 현실의 그라운드를 달리며
오늘도 바람의 끝을 달려가는
전위의 영혼들
* 야외 수업 - 박정대
봄날 오후
아이들과 함께
뒤뜰에서
야외 수업을 하네
주제는
벚꽃 감상하기
내용은
벚꽃이 바람에 한없이 휘날립니다
준비물,
벚꽃나무 다섯 그루
은은한 바람 서너 장
그리고 먼 곳의
낮달 한 척
* 목련통신 - 박정대
1 어느 죽음의 기록
비정성시 대만 158분 허우 샤오시엔
시티 라이트 미국 90분 찰리 채플린
집시의 시간 유고 138분 에밀 쿠스트리차
블레이드 러너 미국 117분 리들리 스코트
컴 앤 씨 소련 142분 엘렘 클리모프
황토지 중국 89분 첸 카이거
몽콕하문 홍콩 90분 왕가위
목련응시 한국 36분 박정대
2 목련응시
아무 말 없이 목련을 바라보네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점점이 돋아나는 몇 점의 불빛들, 사랑하는 것들 모두 떠난 뒤에 기침처럼 남아 있는 목련을 보네 유리의 밖은 어둡고 유리의 안은 더 어둡네 內外를 불문하고 세상의 봄은 환한 폐허 위로만 오네 그 폐허를 밟아가는 내 눈동자의 그림자 아득히 어두워질 때 난 자꾸만 목련 쪽으로 기울고 싶네 목련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 늦은 망명 정부의 불꽃 다시 피우고 싶네
3 펄럭이는 숨결 속에서
나는 나뭇잎처럼 아프게 될 것 같다 그대여, 아무래도 나는 나뭇잎처럼 퍼렇게, 퍼렇게 멍들며 아프게 살아갈 것 같다 그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노래를 잊었네 잊혀진 노래 사이로 바람이 불어 나, 나뭇잎처럼 얇은 가슴 하나로 펄럭였네 가면을 벗어버리고 숨소리조차 한없이 떨고 있었네 누가 나의 숨소리를 함부로 사랑이라고 말하는가 나는 그대의 침묵 앞에서도 깃발처럼 펄럭이는데 그대여, 조용히 나에게로 와서 내 핏속을 강물로 흐르는 그대여 노래를 잊은 곳에서 나,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푸른 한 잎의 섬으로 돋아나노니 이 한없이 쓸쓸한 숨결을 누가 사랑이라고 하겠는가 아, 나는 가면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영혼, 그대를 보는 순간 한숨의 거미줄에 사로잡힌 아픈, 사랑의 現在
4 검은빛 소파 위에서
내가 검은 바지를 입고 오래도록 앉아 있을 때 햇살은 자꾸만 쳐들어오고 삭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와르르 와르르 자꾸만 무너진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지 말아야 하는가 아프지 않은 것들은 아픈 것들의 나뭇가지, 아픈 잎사귀들을 자꾸만 바람에 버린다 노래하는 자, 더 이상 노래 부르려 하지 않는 자, 바야흐로 이제 막 목련꽃 질 무렵이다, 퇴각하는 남부군처럼
5 그토록 차디찬 음악 속에서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나무들과 함께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나뭇가지에 걸린 검은 구름들이 울고 있었네 무언가 서러운 일이 있었다는 듯 울고 있었네 우는 구름 아래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길을 잃은 듯 하염없이 비를 맞고 서 있었네 주머니 속에서는 성냥과 담배가 젖어가고 시선 속에서는 고양이와 새들이 젖어갔네 젖은 지붕들 위로 비가 내리고 젖은 지붕들이 울고 있었네 우는 지붕 위에서 누군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네 빗줄기의 현을 오래도록 켜고 있었네 아름다운 노래가 될 때까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듯 침묵의 나무 둥치 곁에 서 있었네 그가 찬 손목시계는 오후 두시에서 젖어들고 있었네 초침들은 습기를 밀어내며 힘들게 회전하고 있었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멀리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연인들은 빗속을 뚫고 골목길로 사라지고 나무들은 추운 듯 자꾸만 몸을 떨었네 몸을 떨 때마다 잎사귀들의 눈물이 떨어졌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차들은 흙탕물을 튕기며 컴컴한 오후로 달려갔네 추억의 커피들은 식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온몸을 웅크렸네 누군가 빗속에 춥게 서 있었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네 누군간 빗속에 떨면서 서 있었네 그의 턱에선 턱의 눈물이 떨어졌네 누군가 빗속에 서 있었네 그토록 차디찬 음악 속에서
* 지구의 북호텔에서 - 박정대
---- 새벽에,
너는 잠들고
창문을 열면 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먼 별을 향해 날아가는 새들,
아직 귀향하지 못한
인공위성들이
밤하늘에서 반짝일 때
나는 밤새도록
지구 여인의 음모를 쓰다듬으며
주파수가 잡히지 않는
머나먼 고향의 숲과
그 숲에서 흘러나오던
따스한 바람의 음악에 대하여 생각한다
잠의 기슭으로
고용히 밀려오던 한 바다와
숨결처럼 따스하던
목덜미와
어느 먼 별의 저녁과
--- 아침에,
우편엽서를 사가지고 오면서 잊은 게 있다
복제인간에 관한 진실, 오늘은 너에게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몇 끼니 밥을 굶어도 우리의 일상은 채워진다, 문제는 아이들인 것이다
찬바람 속에 아이들을 서 있게 해서는 안 된다
--- 여러 날의 저녁에,
북호텔의 남쪽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흘렀다
남들은 누군가의 육체를 갖기 위하여
이곳에 온다지만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
자꾸만 저 별에 남겨두고 온
어린 아들이 생각난다
아들이 찰흙으로 만들었던
잠자는 곰도 생각이 난다
나는 그 잠자는 곰을
내 전화기 옆에 두었었다
지금도 그 잠자는 곰을 깨우기 위해
전화벨이 울리고 있을까
북호텔의 남쪽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렁이는 차들을 본다
돌아갈 곳이 없어도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저 거룩하고도 장엄한 지구인들의 歸家,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뿌려
주석도 없는 황혼의 유서를 쓰면
멀리서
지구를 물고 날아오르는
검은 새 한 마리
*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 피의 적군파 - 박정대
얼마나 적나라하게 불행한 것이냐 너는 장미꽃
으로부터 온몸이 아프고 가랑이 사이로 황혼을 피워
올리는 오 너는 피의 적군파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행복해한다
두려움에 치를 떨며 네 불행의 지도를 넓히려 한다
석양에 물들어 가는 저물녘의 강은 무슨 이유로
저리도 아픈 것이냐 너를 생각하면 나는
장미꽃보다 더 아프고 황혼보다 더 깊어져
네 피의 쓸쓸함에 취해 가는 오오 피의 적군파
* 무가당 담배 클럽과 바람의 국경선 - 박정대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이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이것은 무가당 담배 클럽의 그 흔한 농담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런 농담만을 듣고도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을 색출해 내는 귀신같은 자들이 있다, 그 비밀 요원들은 바람의 국경선 저 너머에서 왔다, 그들은 무가당 담배 클럽 저편의 세계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에는 이런 비밀 요원들과 회원들이 서로 뒤섞여 있기 때문에, 막상 무가당 담배 클럽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산책을 하고 농담을 하고 때때로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누가 진짜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의 남자와 여자들도 어느 날은 술에 취해 밤새도록 침대 위를 뒹굴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몸을 뒤섞어도 서로가 진짜 회원이라는 확신을 가지지는 못한다, 간혹 또 어느 날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이 무가당 담배 클럽 회원으로 밝혀져 바람의 구경선 저 너머로 압송되기도 한다, 그의 죄는 너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가당 담배 클럽을 너무 낭만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지금 조용히 고백하건대(이 글을 읽는 그대들만 알고 있으라), 사실 나는 무가당 담배 클럽의 핵심 요원이다, 그런데 이런 나조차도 정확한 회원의 숫자와 그 규모를 알지 못한다, 나는 지금 무가당 담배 클럽 한구석 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젯밤 심하게 과음했더니 숙취 때문에 나는 지금 몹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 이 글을 쓰는 것도 몹시 힘든데 야, 식당 먹으로 가자, 누군가 또 저 건너편에서 외친다, 가자,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에 무가당 담배 클럽은 있다, 식당 먹으러 가자
* 누군가 떠나자 음악 소리가 들렸다 - 박정대
1. 失
그가 기타를 치자, 나무는 조용히 울음을 토해냈네. 상처처럼 달려 있던 잎사귀들을 모두 버린 뒤라 그 울음 속에 공허한 메아리가 없지는 않았으나, 공복의 쓰라린 위장을 움켜쥔 낮달의 창백한 미소가 또한 없지는 않았으나, 결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출가한 수도승의 머리 위에서 아무렇게나 빛나는 몇 점의 별빛처럼 그런대로 빛나는 음률을 갖추고는 있었네.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사랑이 아파서 그렇게 울고 있었는가, 텅 빈 귓속의 복도를 따라 누군가가 내처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는데, 아무런 생각도 없이, 느낌도 없이, 슬픔도 없이, 처음부터 그 울음 소리는 자신이 울음인 줄도 모르면서 음악을 닮아 있었네. 누군가의 손끝에 걸려 있는 노래가 자신인 줄도 모르면서 아픈 상처의 살점들을 음표로 툭툭 떨구어 내고 있었네. 빗방울에 부딪혀 기타 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지만, 자꾸만 아래로 흘러가지만, 그 소리의 향기는 빗방울을 뚫고 보이지 않는 영혼의 低音部를 조용히 연주하고 있네.
2. 音
누군가 떠나자, 음악 소리가 들렸네. 처음에는 그것이 떠나는 자의 발자국 소리인 줄 알았으나, 발자국 위로 사각거리며 떨어지는 흰 눈의 부드러운 속삭임인 줄 알았으나, 햇빛 한 점, 바람 한 조각 남겨 두지 않고 떠난 자의, 後景 속으로 밀려오는 것은, 경련하는 눈썹의 해변으로 밀려오는 것은, 거대한 幻의 물결이었네. 비록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떠난 것들의 길다란 그림자가 서로 부딪히며 어두워져 갈 때, 어둠의 중심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빛의 흔적들, 빛의 和音들. 보이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이 여적 남아서 추억의 힘으로 허공을 맴돌고 있었네. 허공에 입김을 불어, 몇 개의 電球를 환하게 밝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빚어내고 있었네. 아픈 것들만이, 뜨거운 것들만이 남아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갈비뼈가 되고, 또 더러는 갈비뼈 속의 바다로 흘러가 덩그마니, 눈동자의 섬으로 돋아나고 있었네. 바람도 없는 깃발의 노래, 깃발도 없는 추억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네. 그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 노래의 끝에서 피어나는 새들은 눈부시지만, 누군가 다시 노래를 부르자, 새들은 조용히 소리를 물고 어디론가 날아오르고 있네.
* 버찌 - 박정대
허공의 경계선을 지나
운석처럼 버찌들이 떨어진다
저들이 태어나 한 생애를 견디고
끝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한 점 핏방울로 맺히는
망명점. 북반구의 유월
기억나지 않는 生涯
저 너머로,
지가 그 무슨
열혈남아라도 되는 양
핏빛으로 버찌가 떨어진다
이해받지 못한
울음 덩어리의 生
* 겨울 浮石寺 - 박정대
아무래도 나는 가야겠다
오늘은 문득 바람이 불어
앵두나무 푸른 잎들이 손사래치는
적막한 내 저녁의 창가에서
이 언덕과 저 구릉을 지나
한 소절 음악처럼 너에게로 가야겠다
밥짓는 마을의 저녁 연기 속으로
개 짖는 소리는 컹, 컹, 컹
돛배처럼 올라오는데
겨울바람이 밀고 가는
한 척의 저녁
끝끝내 밀려가지 않는
얼어붙은 폭포 속
절벽의 악기 하나
내 사랑의 의지가 돋을새김해 놓은
겨울 浮石寺
그 단단한 生의
악기 속으로
아무래도 나는
음악처럼 가야겠다
* 우편함 속에 사랑을 - 박정대
창 밖에는 노을이 밀려오구요
燒酒 한잔 생각만 간절하구요
바람에 섞여 소문들 흘러가네요
나는 앉아서 늙어만 가요
내 눈꺼풀의 창문은 어둡고 쓸쓸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당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요 떠나가는 염소구름도
이제는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금 추억 안에 서서
거리의 나무들과 함께
걸어가네요
거리는 이미,
하늘로 통하는 동굴의 입구 같은
별들이 무수한 길들을 만드는 밤이구요
* 앵두꽃을 찾아서 - 박정대
앵두꽃을 보러 나, 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들으며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앵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꽃을 보기에 그대만한 장소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사 고요히 철들어 나, 앵두꽃을 보러 그대에게로 가노니, 하늘 아래 새로운 사실은 없고 그 사실 앞에서 앵두꽃이 피지 않는 곳 또한 없음에랴
*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 박정대
나는 스스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절망스러워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광란에 몸을 맡기고 싶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자유의 목적이거나 목적의 자유에
나는 스스로 적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죽음의 그 향긋한 냄새에 도취하고 싶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시간의 손에 목 졸리우고 싶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욕망에 항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패퇴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사유하고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변태성욕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밀입국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정신의 유배지로 망명가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윤회에 관한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탕자가 되어 용서받기 위함이 아니며
나는 스스로 후기산업사회의 쓰레기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불면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오리무중으로 속수무책으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인질 납치극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절대적 창조를 향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원고료를 받아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구호를 따라 외치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엄숙주의나 경박함으로 달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며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위하여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스스로 감히 글을 쓴다
* 달맞이꽃 - 박정대
달빛 한 줄기 없는 다락방에서
추억의 꽃씨처럼 누워
어린 시절의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들
누가 눈치채기나 할까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밤의 기둥을 깎아
저 먼 은하수로 통하는 동굴을
파고 있는 생쥐들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해요, 저 튼튼하고 긴 앞니의 자유
열 손가락 꼽아본들 나에겐 그런 신기한
재주도 없어
그저 풀썩거리며 먼지만 내다 만 하루
노을을 접어 뒤춤에 구겨넣지요
문을 열고 나가 사랑을 하고
돌아와 문을 닫고 그리워하는 건
흔하디흔한 습관성 발작
달빛 한 줄기 없는 다락방에서
추억의 꽃씨처럼 누워
어린 시절의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들
누가 눈치채기나 할까요
*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깎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다네
가슴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 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돌다 이제서야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길을 홀로 걸어왔는지
지금 내 앞에 망연히 서있네
서러운 악보처럼 펄럭이고 있네
* 슬픈 열대야 - 박정대
이곳은 창문 너머로
야자수 같은 게 흔들거리는 슬픈 열대야
아니 자세히 보면 수족관의 물풀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어
지금은 오래된 유행가처럼
어디선가 한 소절 바람이 불어온다
슬픈 열대야,
나 지금 대야에 찬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있어
지금은 안 보이는,
너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씻고 있어
그러나 내 발밑
깊은 땅속으로는
스무 량을 단 밤열차가
기적도 없이 흘러가지, 전갈처럼
제 몸을 물어뜯어서라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어, 사막을
통과하는 바람처럼
뜨거운 목울대로 울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가끔은, 인간이 창문 너머로 보이기도 한다
이곳은 슬픈 열대야
* 베티와 나(영화 37도 2부) - 박정대
조금은 어두운 대낮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정지된 풍경들 속에서 색소폰 소리가 나네
아, 난 어지러워
무너진 언덕 너머에는
출렁이는 네 어깨와도 같은
신열의 바다가 있네
어디라도 가려하지 않는
바람과 배 한 척 있네
베티,
내 푸른 현기증과
공터의 육체 위에
너의 보라색 입술을 칠해 줘
베티 기억하고 있니
내 어깨 위에 걸려 있던 너의 다리
그 아래로만 흐르던 물결,
물결 속의 달
바람불어,
경사진 사랑의 저 너머에서
함께 출렁거리던
깊고도 위험했던 나날들
기억해?
그때 네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던
37도 2부의 숨결들
전기 플러그를 꽂으면 달이 뜨네
조금은 어두운 대낮,
막판의 희망이
게으른 새들처럼
엎드려서 울고 있는
* 베티 : '베티블루' 속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이름
* 달 : 내가 가지고 있는 비디오의 이름
* 몰운대에 눈 내릴 때 - 박정대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강물에 투신하는 건 차마 아득한 눈발뿐
몰운대는 세상의 끝이 아니었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다시 시작되는 세상
몰운리 마을을 지나 광대골로 이어지고
언제나 우리가 말하던 절망은 하나의 허위였음을
눈 내리는 날 몰운대에 와서 알았네
꿩 꿩 꿩 눈이 내리고 있었네
산꿩들 강물 위로 날고 있었네
불현듯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리운 이름들.
바람이 달려가며 호명하고 있었네
세상의 끝을 보려고 몰운대에 갔었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 더 깊은
눈이 내리고, 눈이 내리고 있었네
강물은 부드러운 손길로 몰운대를 껴안고
그곳에서 나의 그리움은 새롭게 시작되었네
세상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었네
*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 박정대
그녀의 방은 그녀의 머릿결 속에 숨어 있었네
숲은 잎사귀들만으로도 어두웠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우리는 만났네
그녀의 방은 아주 조그만 다락방이었네
하늘은 칸칸의 별들을 하숙방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네
그녀의 옆구리에는 하나의 밤바다가 있어
물고기들 사이에서 외로웠네
외로움으로 하숙비를 지불하던 그녀를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는 사랑했네
겨울 내내 도마뱀의 꼬리처럼 툭, 툭
끊어지며 눈이 내렸네 추억은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부터 생겨나네
나는 개들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아네
그녀의 방은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한 낮달처럼 꽂혀 있었네
그녀의 문을 열면 아주 어두운 대낮이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는 떠나갔네
그녀는 하나의 숲과 하나의 바다를 가지고 떠나가버렸네
툭, 툭 끊어지며 추억이 내렸네 눈이 내리고 있었네
추억은 또한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창문을 닫고 있었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잉크로 그려진 애인들 노래를 부르네
아무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하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그녀의 방은 어디에도 없었네 그녀는 그녀의 방을 가지고
그녀의 기억 속으로 떠나가버렸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나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알랭 로브그리예 원작,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시로 쓴다. 무지하다는 것은 때때로 무지하게 자유로운 것이다.
* 아이다호 - 박정대
아무데서나 나도 팍 쓰러지고 싶었다
화염에 휩싸인 채 흘러가는 구름들, 들판 위의
집들 빠르게 빠르게 하늘을 건너갈 때
누군가의 깊은 한숨이 마리화나의 새떼를 날릴 때
날아가는 새떼들 위로 쏟아지던, 화염방사기 속의 여름
나는 아무데서나 어디로든 도피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참새구이들이 투툭 떨어져, 소주병 속으로 떨어져
푸른 정맥 속에서 하나의 길이 예감처럼 솟구쳐오를 때
사랑을 잃고 나는 걸었네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네
추억이 페달이었네 폐허와
폐허와 폐허와 또 다른 폐허
속에서 푸푸
푸른 현기증이 나도, 페달을 밟으면서
길 옆으로는 가기도 잘도 갔네 아 하면
아이다 아이다 호호호, 푸푸푸 하면서
세월이 갔네 아무데서나
사랑을 했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쓴 것이 몸에는 좋다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기형도, [빈집]중에서.
* 두 달 정선 - 박정대
안녕, 셔릴린 펜* 이제야 너를 떠난다
청자다방의 식은 커피와 구겨진 추억 몇 장
그대로 남겨두고 이제야 너를 떠난다
황혼녘의 엽서는 어둠에 지워졌으니
우리들의 사랑은 진부했구나
별어곡에서 원주까지 눈이 내리고
성냥곽 같은 지붕들이 젖은 날개를 털 때
출렁이는 산맥의 눈발 속으로 잠수해가는
청량리行 야간 열차,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젖어 있는 것들로 가득하여
기억의 협곡 사이로 밀려오는
무수한 눈보라
읽혀지지 않는 우리들의 不眠
아아, 어느 황혼녘에
다시 엽서를 띄울 수 있을까
술을 마신다 자작나무 숲의 속삭임과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청춘의 무모한 질주 사이에서, 글쎄
짐짝같이 출렁이는 저마다의 고독을 가늠하며
나는 떠난다 누군가 子正의 撞球를 치고 있을
그곳을 무슨 終止符처럼 남겨두고 나는 떠난다
안녕, 셔릴린 펜
黃色 필라멘트를 가진
삼십 촉의 추억이여
*셔릴린 펜: 영화 two moon junction에 나오는 주연 여배우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새들은 목포에 가서 죽다 - 박정대
그곳에 가면 네가 있을 것만 같다
바람에 부서지는 섬들과 모래톱 사이로 스며드는
따스한 물방울들, 그곳에 꼭 네가 있을 것만 같다
어젯밤에는 바람 속으로 망명하는 꿈을 꾸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단풍잎들이 밤새도록 내려
서럽도록 그리운 너의 안부를 덮어주었다
* 자작나무 뱀파이어 - 박정대
그리움이 이빨처럼 자라난다
시간은 빨랫집게에 집혀 짐승처럼 울부짖고
바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별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상처,
눈물보다 더 깊게 빛난다, 聖所
별들의 운하가 끝나는 곳
그 고을 지나 이빨을 박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차갑고 딱딱한 공기가
나는 좋다, 어두운 밤이 오면
내 영혼은 자작나무의 육체로 환생한다
내 영혼의 살결을 부벼대는
싸늘한 겨울바람이 나는 좋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욕망이 고드름처럼 익어간다
눈에 덮인 깊은 산속, 밤새 눈길을 걸어서라도
뿌리째 너에게로 갈 테다
그러나 네 몸의 숲속에는
아직 내가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짐승이 산다
* 재스민 푹푹 삶는 밤 - 박정대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저녁이 온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의 지붕보다 높은 내 방의 창가에서 눈에 뒤덮인 지붕들을 보았다
눈발의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가면 저 낮고 순결한 영토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이 내려서 저녁인지도 몰랐다, 계속 눈이 내려서 계속 저녁인지도 몰랐다
등불들이 돋아나는 밤, 등불들은 내리는 눈발을 받아먹으며 발그레 피어올랐다
먼 곳의 소식처럼 먼 곳의 불빛들은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불빛을 애써 보려하지 않듯 나는 그 순간 먼 곳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 속으로 또 눈이 내렸다
허공에서 당당하게 어깨동무하고 내리는 눈이
아직 뭐라 아무런 이름 붙여지지 않은 눈이
地上의 고단한 옆구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까지 눈발들은 다 가주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내가 묻지 못하는 사랑까지 눈발들은 다 물어주었다
밤새 재스민 푹푹 끓이던 밤이었다
* 백두산 꿈을 꾸었다 - 박정대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어제는 백두산 상상봉에 올라
단풍나무숲을 달리는 호랑이를 보았다
숲을 빠져나온 호랑이가 나는 좋았다
그 놈의 거칠 것 없는 질주가 나는 좋았다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네가 내 꿈으로 달려오면
나는 단풍나무숲이 되어
나의 잎사귀를 떨구어도 좋겠네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어제는 백두산 꿈을 꾸었다
너는 부드럽고 세찬 백록담이 되어
뜨겁고 뜨거운 사랑으로 내게 달려오고
나는 천지의 문을 열어
너와 한바탕 뒹굴 꿈만 꾸고
나의 사랑하는 여자야
만주벌판을 휘달려
바이칼湖까지 가 닿는
불타는 눈의 호랑이
우리들의 새끼를 낳자
* 거리에서 - 박정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어요,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어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지,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지.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발성연습 좀 해 봤어요).
나는 티브이를 끄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더이상 쓰레기를 볼 수 없다고
더이상 힘이 없다고
나는 거의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그러나 당신은 잊지 않았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고
옷을 입고 나갔다, 아니 뛰어나갔다고
그리고 나는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그리고 이 밤을 자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날씨가 좋아요 사흘째나 비가 와요
비록 라디오에서 그늘도 더운 날씨가
되겠다고 예보하지만 하긴 내가 앉아 있는
집 안 그늘은 아직 마르고 따스해요
아직이라는 것이 두려워요
시간도 빨리 흘러요 하루는 밥 먹고
삼 일은 술 마셔요
창 밖에 비가 오지만 재미있게 살아요
오디오가 고장나서 조용한 방에 앉아 있어도
기분이 좋기만 해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창 밖에는 공사중이에요
크레인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 옆의 레스토랑이 5년째 휴업해요
책상 위에는 병이 있고 병 안에는 튤립이 있어요
창턱에는 컵이 있어요
이렇게 해가 지고 인생이 흘러가요
참으로 운이 좋지 않아요
하지만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운 좋은 날이 오겠지요
나는 대답을 기다려요 더이상 희망은 없어요
곧 여름이 끝날 거예요 그래요
어제는 바람이 몹시 불었네, 명동엘 갔었는데 사람들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어느 죽은 가수의 노래가, 여름이라는 노래가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네. 너무 가까운 거리가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불안이었네. 참으로 많은 비밀들이 휘청거리며 나부끼고 있었네. 가수의 노래가 천 개의 귀를 흔들고 있었네.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영혼 이 천 개의 추억을 마구 흔들고 있었네. 마침표가 없는 걸음들이 끊임 없이 쉼표처럼 뒤뚱거리며 걷고 있었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어, 거리에서, 그 거리에서 염소처럼 나는 담배만 피워대고
* 동정 없는 세상 - 박정대
새벽에는 박하*와 나만이 깨어 있다, 동정 없는 세상
나는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고
박하는 글을 쓰는 나를 쳐다보다
가끔 졸기도 한다, 졸면서 박하가 꾸는 꿈이
나는 몹시 궁금하다, 짐노페디라는 음악
참 멀리 가는 그 음악의 성분이 나는 그립다
매실들이 둥둥 떠 있는 매실주 술병을 쳐다보면
나는 자꾸만 음악이 고파져서 밤새도록 마시고 또 마신다
그러다 또 내 낡은 턴테이블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다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던
맑디맑은 강물 같던 그 음악
어느 국경을 지나왔는지 몰라도
어떤 집시의 노래 같던 그 음악
나는 그 음악이 아마
포르투갈 어느 집시의 노래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금세 집시처럼
새벽의 별빛 아래에서
오랫동안 서성거리는 것이다
낮에,
에릭 로샹의 동정 없는 세상을 봤다
방학이라서 나는 몹시도 심심했을 터,
그리고 또 하루가 가서
저녁을 지나 새벽이 되었다
새벽에는 나와 박하만이 깨어 있다, 동정 없는 세상
나는 지금 북반구의 열대야에 앉아
남반구의 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 몸속 깊이 파고드는
짐노페디라는 음악을 마시며
나는 이 밤도 취하려고 한다, 동정 없는 세상
나를 취하게 하는 성분이
결국 나를 꿈꾸게 하리
*<박하朴賀>는 영화 「박하사탕」의 촬영지에서 얻어와
집에서 기르고 있는 태어난 지 두 달 된 강아지의 이름이다.
*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 - 박정대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영상은, 현상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상의 허무이다 ―롤랑 바르트
―어떤 입맞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구체적인 저녁은 오네 거미줄 위의 오솔길을 따라 저녁은 동그란 시간을 굴렁쇠처럼 굴리며 쌍둥이 구름을 데불고 흘러가네 그리고 누군가 동그란 입술을 벌려 <나문닙>이라고 말할 때 그 입술 위에 돋아나는 반짝이는 나문닙들은 언덕 위에 멀거니 서서 나부끼는 <나뭇잎>의 허무를 허무네
―구름 저편에 있는 나,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하루 종일 나무를 바라보던 마음이,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처럼, 딱딱한 입술로 중얼거리네, 새들은 날아다니는 저마다의 섬인 거, 그 섬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물결을, 공기의 물결을 밀어서, 누군가의 생각 한가운데로 몰아가고 있는 거,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바다, 푸른 바다, 검은, 푸른 바다, 검은, 깊은 푸른 그녀, 어젯밤 누가 그녀를 헤엄쳐 건넜는가, 오늘은 또 누가 그녀 속에서 익사하는가, 추억의 헛간 같은, 구름 저편엔 뭐가 있나, 호수를 닮은 영혼들, 머리카락 휘날리며 바람 속을 달려가는 나무들, 물 속의 나무들, 나무들 속을 흐르는 격렬한 침묵들, 오래된 추억 때문에 태양은 더욱 더 뜨거워져가는데, 바다, 그녀의 정맥 속으론 왜 차가운 구름장들이 흐르는가, 구름의 발바닥들, 잎사귀의 무릎들, 아니 <나문닙>의 관절들, 그 동그란 발음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나와 나 사이엔 혹은 나와 나 사이엔, 뭐가 있나, 흐르는, 뭉쳐진 구름들, 흩어질 시간들, 저편엔 도대체 뭐가 있나, 거기에서 누가 침묵의 노래를 부르나,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깊은, 아주 먼, 먼 먼, 나
―도대체 이건 뭔가(창 밖엔 자욱히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나는 쌍둥이 구름에 관한 시를 쓰려다가 잠시 보류하고 창 밖 깊은 숲, 시베리아 호랑이에 관한 시를 다시 써보네
―시베리아 호랑이에 관한 시,
지금 창바껜 포구, 비만는 단풍나무들
그 푸른 나문닙 속엔 도대체 뭐가 인나
* 음악들 - 박정대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 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어느 맑고 추운날 - 박정대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옹기 위에
옥잠화가 심어진 토분을 올려놓아 보네
맑은 가을 하늘 어딘가에
투명한 여섯 줄의 현이 있을 것만 같은 오후
생각해보면, 나를 스쳐간 사랑은 모두
너무나 짧은 것들이어서
옹골찬 옹기 같은 내 사랑은
왜 나에게 와서 오래 머물지 않았던 것인가
안타까워지는 이 오후에
햇살과 바람이 연주하는
내 기타 소리는 너무나 낡고 초라하지만
나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직직 끌며
온몸으로 그대에게로 가네
이제는 떠나지 못하게
오래된 옹기 위에 묵직한 토분을 올려놓으며
정성스레 물을 주고 있네
그대는 옹기, 나는 토분
이렇게 우리 옹기종기 모여
추운 한 시절 견디며
킬킬대고 있네
햇살 두툼한 오후를 껴입고 나와 앉아
옹기 위에 토분을 올려 놓으며, 근사하다고
우리의 삶도 이만큼 근사해졌다고
* 푸른 돛배 - 박정대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순간의, 그 꿈꾸는 듯한 속도에 실려 출렁이는
저 푸른 돛배의 계절을 보셨나요 가을이거나
또 다른 가을의 틈새, 간혹 눈 내리는 초겨울
탁구공 같은 우주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흘러가거나 멈추는 것들의 영원,
그 매 순간의 황홀하고도 무서운 영원 속에서
수십 장의 나뭇잎들이 몸 뒤척일 때마다
푸른 돛배로 바뀌는 신비를 보았나요
촛불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푸른 돛배
그대 무심히 내뿜는 담배 연기 속의 푸른 돛배
그 푸른 돛배가 황금의 노을로 사라질 때까지
눈감지 못하는 그대 눈동자 속의 푸른 돛배
그대 눈동자 뒤편에서 출렁이는,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탁구공 속의 푸른 돛배를 보셨나요
가볍고도 아름다운 그 동그란 공기 속에서
가기도 잘도 가는
푸른 돛배 한 척
* 하얀 돛배 - 박정대
창밖엔 눈이 내렸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 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 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 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 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 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 멎고, 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 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 박정대
촛불을 켜들고, 나는 이제서야 내가 만든 음악을 듣는다
*
그녀는 지금 밥 딜런 공장에서 만든 노래를 듣고
그는 밤새도록 알베르 카뮈 공장에서 만든 책을 읽는다
*
맥주는 맥주 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휴일에 만든 맥주에는 불량품이 많다
*
그 많던 벚꽃잎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저 나뭇잎 공장에서는 왜 백만 년 전부터 고독의 음악만 만들고 있나
*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대답한다, 백년 동안 고독해지세요
*
누군가 다시 나에게 묻는다, 고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백년 동안, 사랑을 하세요
*
그러나 지금은 버찌들도 다 떨어지고 벚나무 공장도 문을 닫을 시간, 노을이 지는 그대의 아름다운 공장으로 가서 누군가 밤새도록 고요히 촛불을 밝히는 시간
*
음악이 있는 곳에서, 음악이 다 떨어진 곳에서
촛불을 켜 들고, 그래도 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 네 영혼의 중앙역 - 박정대
키냐르, 키냐르……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음악처럼, 문지방처럼, 저녁처럼
네 젖가슴을 흔들고 목덜미를 스치며
네 손금의 장강 삼협을 지나 네 영혼의
울타리를 넘어, 침묵의 가장자리
그 딱딱한 빛깔의 시간을 지나
욕망의 가장 선연한 레일 위를 미끄러지며
네 육체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저녁마다 너를 만나던 이 지상의 물고기 자리에서
나는 왜 네 심장에 붙박이별이 되고 싶었는지
네 기억의 붉은 피톨마다 은빛 비늘의
지문을 남기고 싶었는지
내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한 마리 외로운 몸짓으로
네 몸을 거슬러 오를 때도
내 영혼은 왜 또 다른 생으로의
망명을 꿈꾸고 있었던 것인지
생이 더 이상 생일 수 없는 곳에서,
생이 그토록 생이고만 싶어하는 곳에서
부르지않아도 은밀한 생은 온다
은밀해서 생일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확실한 생이
겨자씨처럼 작은 숨결을 내뿜으며
덜컹거리는 심장의 비밀을 데리고
저녁처럼, 문지방처럼, 음악처럼
네 영혼의 중앙역으로 은밀한 생은 온다
*키냐르-「은밀한 생」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
* 나는 음악처럼 떠난다 - 박정대
― 7월,
나는 거의 할 일이 없어, ……灣 바라보다
― 8월,
자, 이제는 해변으로라도 가야 한다
― 혜화灣,
테베에서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발칸 반도의 서쪽 해안을 따라 아르타로 간다. 이 해안선의 어디쯤엔가, 자다르와 가에타, 툴롱과 말라가가 있을 것이다. 말라가에서 바라보면 지브롤터 해협 건너 오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랑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고와 히혼을 거쳐서 라로셸로 향한다. 라로셸에서 바라보는 비스케이灣의 황혼은 아름답다. 그러나 칼레로 가는 우리는 비스케이만의 아름다움에 쉽게 눈멀지 않는다. 더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해안선을 따라 칼레를 지나 암스테르담과 오르후스와 탈린과 말뫼와 페쳉가와 아르항겔스크를 지나 카닌 반도로 간다. 카닌 반도는 춥다. 너무 추워서 아름다운 반도, 카닌 반도에서 水晶의 나무들이 산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숲의 나무들과 순결처럼 차가운 계절을 가슴 속에 품고 우리는 해안을 따라 계속해서 간다. 야말과 기단과 턱시를 지나 추코트 반도를 돌아 캄차카 반도에 다다를 무렵,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한 사람이 죽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지가와 빌 리가, 이레트와 마가단을 거쳐 추미칸에서 잘 생긴 어부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투구르를 지나 오랜 산책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면 어느새 겨울이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청진과 함흥과 원산을 거쳐 대포항에 다다를 것이다. 대포항에서 우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하여 서울로, 혜화灣으로 달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혜화灣에서 플라타너스 잎들의 서쪽을 향해 걸으며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테베로 간다. (그런데 도대체 테베는 어디 있지?) 속으로 묻기도 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 센테멘탈 실업 동맹,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바다호스*를 거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랑에서 삼년을 살았다. 오랑의 집들 사이로는 거미의 입김 같은 바람이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끔 알제市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한 달간을 달려가기도 했다. 알제에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을 아니다. 다만, 지중해 저 너머를 향한 우리의 그리움이 그곳에 추억을 실어다 나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가숨엔 언제나 푸른 지중해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우리들의 귀에는 바다 갈매기의 울음 소리, 음악처럼 들려왔다. 코코넛 향기처럼 달콤했던 우리들의 청춘 시절, 우리의 청춘은 깃발처럼 나부끼며 그 바닷가에서 오래, 페스트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랑에서 세투발에 가기 위하여 우리가 바다호스를 거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세투발에 갈 일이 없었으며, 더구나 바다 건너 대륙의 바다호스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슴 속의 내륙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우리들의 그리움이란 센티멘탈 실업 동맹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랑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기 떄문이다. 맥주와 담배, 센티멘탈 실업 동맹, 그리고 실연과 실업과 실업수당까지도, 심지어는 센티멘탈 실업 동맹의 파트롱인 시시껄렁한 삶까지도.
말라가에서 계속 해안을 따라 가다보면 세투발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센티멘탈 쟈니, 기타를 치며 노래하네. "워∼워, 난 테베로 갈 거야." 센티멜탈 쟈니 밤새도록 별빛 아래서 목이 쉬도록 노래하네. "테베에는 어여쁜 아가씨들이 많아, 그 중에서도 제일로 이쁜 아가씨와 워 ∼, 달빛 아래서 난 사랑을 할 거야, 워∼워, 난 테베로 갈거야, 난 테베로 ……"
*테베 : 고대 그리스의 도시 이름
*, ** : '센티멘탈 실업 동맹'에서의 삽입 구절은 앞에서 인용. 이런 것을 문학적 용어로는 '반복'이라고 한다. 한국시에서는 특별한 강조의 뜻이 없을 때도 '반복'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비문학적 용어로는 '쓸데없는 반복'이라고 하며 또 다른 용어로는 '야, 너 계속 장난치면 맞는다'라고도 한다.
*라사 : 티벳 자치구의 수도.
* 쇼몽에 대하여 말하다 - 박정대
-석남에게
한 때 나의 꿈은 저 불란서의 뒷골목에나 가서 푸른 눈의 女子와 놀다가 객사하는 것
또 한 때 나의 꿈은 아무도 모르는 고장에 가서 포플라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
또 다른 한 때 나의 꿈은 야간 열차처럼 덜컹거리는 바람을 타고 노래의 끝까지 가서 술을 마시다 죽는 것 술을 마시며 몽롱한 꿈 속에서만 살다가 죽는 것 죽어서 하루 종일 바다의 음악이나 듣는 것
1 돌을 찾아서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와, 어린 아들과 함께 강가에 갔었네. 딱히 마음 속에 두었던 돌의 얼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은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강변을 헤맸네. 귀여운 수달이라도 보았던 걸까, 다섯 살 박이 아이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中秋의 햇살이 부서지는 강변에서 나는 하루 종일 침묵하는 돌들을 만났을 뿐이네. 말을 건네면 저만치 달아나던 돌들, 네 흐린 눈동자로 날 쳐다보지 마, 속삭이며 네게서 등을 돌리던 돌들. 등돌린 돌들 일으켜 세우면 돌들은 그들의 껍질 뿐인 몸만을 그곳에 남겨두고, 영혼은 말을 타고 멀리, 영원으로 달아나 버렸네. 강언덕 나뭇잎 새로 靑色의 어둠이 오고 초저녁 별들 새초롬히 부르튼 발가락을 내밀 때, 배고른 귀가길에서 드디어 만난 먹청석 하나. 푸르고 깊은 밤에 만난 '멍청한 영혼'이라고, 아이와 나는 그 돌을 '멍청석'이라고 불렀지만 먹청석 하나 껴안고 돌아오는 저녁은 다 늦은 꿈길처럼 아늑했네.
2 꿈 이야기
그날 밤 나는 고구려 꿈을 꾸었네. 아주 높은 산 위였는데, 그곳엔 광활한 평원이 있었고 그곳을 사람들은 고구려라 불렀네. 그 고구려의 중심부분을 사람들은 集安이라 불렀고, 그 아래 산기슭을 集下라고 불렀네. 나는 集安에서 한 여인을 만났네. 그 여인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는데 그 초대는 은밀하고도 부드러웠네. 集安 촛불이 타오르던 그녀의 방, 나는 그 방에서 하룻밤의 달콤한 잠에 혼곤히 빠져 들었던 것인데, 새 한 마리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소리에 깨어나니 아침이었고, 방은 텅비어 있었고 밖으로 달려나가 사방을 살펴보니, 그곳은, 내가 낮에 주워온 돌 위였네.
3 첫가을
나는 지금 내가 주워온 돌을 보고 있네. 이 돌은 약 삼십 센티미터 정도의 먹청색인데, 돌 한가운데 밝은 갈색의 'ㅅ'자 모양 무늬가 있네. 그 돌무늬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는 가을을 느끼네. 밝고 넓은 평원, 그러나 고요하고 아늑한 평원. 그 위로 조용히 날아가는 새, 새 주변엔 온통 밝은 갈색의 풀들이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고, 밝고 넓은 평원 그러나 내 마음에 꽉 들어차 오는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 나는 돌의 이름을 '고구려의 가을'이라고 붙여보네. 그러자 돌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 속으로도 가을이 오네. 가슴을 설레게 하던 첫사랑의 밀어처럼 밀려와, 하 아득하게 천년만에 처음인, 가을이 오네. 그러다 다 늦은 사랑이어서, 서러운 것들만이 그런 것들만이 떼지어, 아 아득한 돌무늬로 왔네.
4 쇼몽에 대하여 말하다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쇼몽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말하는 게 아니라네. 쇼몽은 아느날 문득 내게로 왔다네. 그것은 아마 내 마음의 작은 지도 속에서 왔을 것이네. 쇼몽을 찾아,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네.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遼)를 금(金)을 홍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네.* 그대는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나는 언젠가 그곳에 가본적이 있다네(아마 전생에서였을 것이네, 낯설지가 않은 걸 보니).
그대는 쇼몽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쇼몽은 파리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이상 걸리는 곳에 있을 수도 있고, 그렇제 않을 수도 있다네.
5 白石行
아무르, 아무르,
이제 첫눈이 오리, 덕적도에, 인천에, 은율에, 정선에, 백석에, 쇼몽에,
격렬비열도에, 늦은 가을바람은 햇살을 뱃고동처럼 물고와서는 그래도는
서럽고 맑은 눈동자들에게 한 짐씩 부리고 간다
음악이 있어서 좋았던 것이다
때죽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
* 먹청석 : 검은빛과 푸른빛이 도는 돌.
* 集安, 集下 : 내가 꿈 속에서 분명히 보고 들었던 지명. 꿈에서 깨어난 후 그곳이 실제로 어디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음.
* 쇼몽 : 프랑스 파리에서 가까운 곳에 실제로 쇼몽이라는 도시가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말하는 쇼몽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대는 쇼몽에 가본 적이 있는가?
* '아득한 옛날에 ∼ 나는 떠났네' : 백석, [북방에서] 중에서
* 등려군 / 박정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나무 아래 누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무슨 시를 쓰지, 잠시 고민하다 등려군이라는 제목을 써보았을 뿐이다
깊은 밤에, 뜻도 알 수 없는 중국 음악이 흐른다, 나 지금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뿐이다
모니엔 모 위에 디 모 이티엔
지우 씨앙 이 장 포쑤이 더 리엔
난이 카우커우 슈어 짜이 찌엔
지우 랑 이치에 저우 위엔
쩌 부스 찌엔 롱이 디 쓰
워먼 취에 떠우 메이여우 쿠치
랑타 딴딴 디 라이랑타 하오하오 더 취 따오 루찐
니엔 푸 이 니엔
워 부 넝 팅즈 화이니엔
화이니엔 니화이니엔 총 치엔 딴 위엔 나
하이펑 짜이 치 즈웨이 나 랑화 디 셔우치아 쓰 니 디 원러우
그렇다면 지금 그대들이 읽고 있는 이것은 노래인가 시인가, 등려군이 부르는 노래인가 내가 쓰는 등려군에 관한 시인가
등나무 아래서 등려군을 들었다고 하기엔 밤이 너무 깊다 이런 깊은 밤엔 등려군의 노래나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다, 깊은 밤에, 시란 그런 것이다
* 동사서독」에 의한 변주 - 박정대
― 사막의 여관,
찬바람이 태양을 몰고 가네, 바위보다 더 깊은 시간들이 오동나무잎 속에 있네, 나 이제 웃지 않고 말하지 않으려네, 시간이 없네, 사소한 추억 속의 그대들은 길 건너편에서 밤마다 이빨을 닦고 있네, 시간이 없네, 가야할 길의 눈 끝에 걸려 있는 수평선, 어둡네, 나 어둠이 밀고 가는 검은 돛단배, 시간이 없네, 그대들을 사랑했던 시간들이 나를 어둠 속으로 보냈으니 내 혓바닥 속에서는 사막의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네, 찬바람이 태양을 몰고 그대 그림자 너머로 가고 있네, 찬바람이 태양을 몰고 그대 그림자 너머로 가고 있네, 그대여, 너의 낮은 그대의 밤보다도 어둡네, 5842개의 밤과 5843개의 낮을 보내고, 지금은 내 눈동자의 검은 태양이 유리창에 뜨는 5843번째의 밤
― 무사들,
오동나무에 달이 뜨는 밤이면 나는 무사들을 본다
그들은 음악처럼 섬세하므로 나뭇잎 몇, 목이 베인다
때로 이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칼날보다 더 무섭다
칼날에 베인 자국은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에 베인 자국에서는 밤마다 달이 뜬다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에서 풍경소리 들려온다
그 풍경소리, 눈을 감고 바라보는 세상의 저편에까지 간다
그 소리의 끝에 무사히 도착한 바람이 고요히 복사꽃을 피운다
오동나무에 달이 뜨는 밤이면 나는, 날아다니는 무사들을 본다
― 난,
화분의 난들이 죽어갔다, 화분의 흙은 어느새 사막이었다. 팔로 유학을 갔던 후배가 돌아오던 어느 날 밤, 우리는 단골 카페에서 술을 마셨다. 화분의 난들이 죽어갔다. 머리를 기른 후배가 프랑스의 이발값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화분의 난들이 죽어갔다. 그도 「동사서독」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동사서독」에 나오는 한 여자만을 보았다고 했다. 그 여자는 누군가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화분의 난들이 죽어갔다. 후배는 그 곳에서 넉달간 하숙을 했다고 했다(나는 사막의 여관을 떠올렸다).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나는 무사들을 떠올렸다). 우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나는 도화림을 떠올렸다). 누군가 시월에 군대에 간다고 했다(나는 술잔을 권했다). 긴 여행 잘 다녀오라고 했다(나는 맹무살수의 비장한 최후를 떠올렸다). 누군가 소주를 마시자고 했다(사람들이 소주 쪽으로 몰려갔다). 누군가 나에게 소주를 권했다(나는 좀 어지럽다고 말했다). 포장마차는 다리 위에 있었다(난, 흐르는 강물 위에 날 방뇨했다). 이제 집으로 가자고 했다(난, 죽음 뒤편으로 어떤 구름들이 흐를까 생각했다). 화분의 난들의 죽어갔다, 내 가슴은 어느새 사막이었다. 모두들 어디로 흩어진 걸까, 화분의 난들이 죽어갔다. 누군가 가을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난, 가을이 올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나는 눈이 멀어가는 무사다(어두워지기 전에 오렴, 가을아).
그런데 도대체 기타는 어디에다 두었을까?
― 술을 마시면 몸을 데워주지만 물은 몸을 식혀줘!
― 그런데 도대체 기타는 어디에다 두었을까,
또 잠이 오지 않아서 나는 거실로 나와 커턴처럼 드리워진 달빛을 본다
저 달빛은 흐르는 물과도 같아서, 나는 달빛에 머리를 감으며 물빛 추억에 잠긴다
또다시 목이 말라 나는 커피 포트에 물을 부으며 출렁이는 물빛을 바라본다
어느 항구에서 나는 손수건 흔드는 사람을 홀로 두고 나왔는가
그대여, 별빛을 손수건처럼 흔들고 서 있는 창 밖의 한 그루 나무여
나는 아직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또 잠이 오지 않아서 바람은 내 방의 자질구레한 꿈들을 흔들고,
가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밤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어디서부터 또 잠을 시작해야 되는 걸까
어디까지 또 꿈을 가지고 가야 되는 걸까
그런데 도대체 내 기타는 누가 가져간 걸까
또다시 잠이 오지 않아서 나는 자꾸만 읽었던 시간의 앞쪽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 사랑의 적소 - 박정대
― 창밖엔 하염없이 비가 와, 저게 바로 사랑의 적소야, 빗방울들!
― 3월에는 모든 게 허하다
― 그대여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며칠째 황사가 자욱하여 동쪽엔 사악한 기운이 승하고 서쪽 또한 지독한 날들이 이어지네, 이젠 내 약시의 두 눈마저 멀어 그대에게 가는 길 나 잃었네, 이제 내 미력한 사랑으로는 그대에게 닿을 수 없도다, 그대여 기억하는가, 언젠가 우리 복사꽃 휘날리는 벌판에서 하루 종일 함께 술잔을 부딪히며 사랑했었지, 기억나는지 그때, 그대 맑은 눈동자 속에서 나 죽어도 좋았을 것을
― 4월에는 모든 게 허하다
― 프리데리케 마이뢰커
파스칼 키냐르
호치민
이런 사람들하고 술 마셔
싫지 않으면 전화해줘, 함께 마시게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올 거야
황사가 가고 황약사가 올 거야
취생몽사라는 술을 들고 구양봉에게로 말이야
― 5월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랑의 적소다
― 여기에는 없는 곳, 산초나무 잎사귀가 음악처럼 피어나는 곳에서 그대를 만나고 싶어라, 그대와 내가 만나 지극한 사랑의 힘으로 허공에 한 채의 소슬한 부석사를 지어 올릴 수 있는 곳, 꿈에도 그리워지는 꿈이 있어 눈 뜨면 다시 잠들고 싶어지는 생(生)의 이 황막한 저녁에 누이처럼 맑은 그대는 어느 산녘에 산초나무 잎사귀처럼 조그맣게 피어 있는 것이냐, 그대 생각에 초저녁별들이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켜지는 밤이 오면 내 손끝에서 떠나간 노래들은 그대 가슴 어디쯤을 흐르고 있을까, 풍경(風磬) 소리 바람을 따라 흘러가버린 곳, 그 소리를 좇아서 마음이 한 열두 달 헤매던 곳에서 오늘도 그대는 산초나무 잎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나는데, 그대여 이 밤도 나는 술잔을 들고 하염없이 걷나니, 복사꽃 휘날리는 벌판을 지나 지금 여기에는 없는 곳, 가난한 등불 아래 산초나무 잎사귀가 피는 곳으로, 그대는 오라
―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에는 매순간이 허하다
―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밖에
내 사랑은 강철로 된 갠가 보다
― 12월엔 과연 비, 풍, 초, 다 버리고 백마 탄 초인이 오기는 할 것인가
― 사랑의 적재적소에 사람의 적소(謫所)가 있다
사랑의 적재적소에 사랑의 적소(謫所)가 있다
사랑의 제재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랑의 읍사무소엔 사랑의 급소(急所)가 있다
12월엔 읍사무소로 가서 사랑을 하자
1월과 2월은 비워두고
또 앞으로 다가올
그 많은 날들은 그냥 비워두고
-=-=-
* 적멸과 허무, 그리고 ‘삶에의 의지’ - 강정 기자
벤 하퍼의 세 번째 앨범 ‘The Will to Live’(1997)의 부클릿을 열면 인상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첫 번째 사진에는 풀 몇 포기 없는 초원에 거죽만 남은 코끼리 한 마리가 죽어있고, 또다른 사진에는 역시 비슷한 초원에 수십여 마리의 소떼가 몰살당한 풍경이 있다. 그러면서 제목은 ‘삶에의 의지’다. 부클릿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두 장의 사진 사이에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다소 어설픈 자세로 두 팔을 펼친 벤 하퍼의 모습이 실려있다. 무슨 예언자나 선지자 흉내를 내는 듯한데, 그 모습이 과히 멋들어지거나 폼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어설픔은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수줍게 던져보는 유머인 모양이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민음사)는 시인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이다. 약간의 오버센스가 느껴지는 긴 제목에다 담겨있는 시들 또한 단장 형식을 하나의 테마로 묶은 것들이 많다. 그중 첫 번째로 실린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란 작품 중 3번째 단장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전문을 인용해본다.
눈물로 새기는 음악들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 지나오는 길에도 生은 내 갈비뼈 사이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필사적으로 사랑을 흔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 난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악을 들은 것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벤 하퍼의 노래에서 밥 딜런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굳이 위의 시구와 연결시키자면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이나 ‘生은 내 갈비뼈에서 푸른 잎들을 꺼내어 사랑을 흔든다’는 구절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절들 역시 어떤 최초의 인상 - 허탈하고도 부드럽고 세심하면서도 울림이 큰 전체적인 사운드 스케이프와 시적 공간의 유사성 안에서만 설득력 있게 연결된다. 사실 ‘눈물도 음악이 될 수 있다면’이란 표현은 지극히 감상적이다. 그만큼 모든 애절한 사랑노래와 쉽게 연결될 소지가 크다. 그럼에도 시인 박정대가 눈물로 새기는 음악들은 단순한 감상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또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고통의 한 세기를 흔들던 바람의 신경증이 도지나 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선의 적막함을 어루만지며 패망인 듯, 패망인 듯 힘차게 바람이 불고 있다. (〈음악들〉중 75)
이 시는 왠지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를 연상시킨다. 그러면서 다시 벤 하퍼의 노래, 특히 강한 기타프레이즈가 걸리는 ‘Faded’나 타이틀곡‘The Will to Live’가 떠오른다. 쉼표를 사이에 두고 ‘패망인 듯’을 반복하는 시인의 어사에선 머뭇거림과 확신, 절망과 의지, 좌절과 극복의 반대항들을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삶의 열정이 그야말로 ‘음악 같은 눈’처럼 쏟아진다. 적멸과 허무가 감도는 재킷 사진 안쪽에서 벤 하퍼가 그 살풋살풋하고도 비애어린 음성으로 생의 의지를 벼리는 것처럼 말이다.
벤 하퍼에겐 세 명의 음악적 스승이 있다. 거기에 밥 딜런이 포함되는 건 물론이다. 나머지 둘은 밥 말리와 지미 헨드릭스다. 벤 하퍼의 노래엔 이 세 명의 신화적 뮤지션들이 고스란히 재생돼 있다. 그들은 벤 하퍼의 내성적인 음악을 안으로 조이면서 깊숙한 슬픔의 심부에서 한데 섞인다. 부드럽고 고요한 흥취와 세계에 대한 냉소적인 통찰, 격렬한 열정이 매 순간 그 세기와 방향을 변화시키는 바람처럼 오간다. 물론 압권은 곱고도 슬프고, 연약하면서도 힘있는 벤 하퍼의 음색이다. 그 목소리엔, 시인 박정대의 시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들의 외마디 울음, 광물질처럼 빛나는 햇살들의 알 수 없는 풍요’(〈음악들〉77) 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런 시적인 울림은 앞에서 언급한 부클릿 속 사진들과 거의 정확하게 겹친다. 벤 하퍼는 자신의 음악이 환기시키는 시각적 풍경을 알고 있었던 걸까. 또는, 그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그런 적멸감을 느끼길 원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는 자신이 포착한 세계의 풍경과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박정대는 또 이렇게도 노래한다.
그러나, 이곳이 내 고독의 터전이고, 실패한 내 사랑과 혁명이 있는 곳이다 (〈음악들〉중74)
시인은 대부분 일인칭 주어로 노래하지만, 그 일인칭의 발화자는 종종 세계 자체의 음성과 겹친다. 시인은 세계에 대해 노래하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되어 세계를 노래한다. 시의 언어는 주술의 종속관계를 넘어 대상과 주체가 육체적인 합일을 이루어낼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시인 박정대가 ‘나’라는 주어를 내세울 때 그건 시인이 보는 풍경이자 시인을 낳는 풍경과 동일시된다.
삶 앞에서 과부가 돼버린 예술가들의 고독
죽은 코끼리의 사진은 말라붙은 대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면으로 눌어붙어 있다. 그 코끼리는 본래의 대지로 회귀하면서 대지 자체가 된다. 그리하여 대지의 표층이 변화한다. 그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반복을 시각화한다. ‘내 사랑과 혁명이 있는 곳’이 ‘내 고독의 터전’이라는 시인의 진술이 그래서 거창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 거창함엔 지독한 쓸쓸함이 배어있다. 그 쓸쓸함은 ‘나’ 아닌 타인에 의해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벤 하퍼의 음악 속에 깊게 패여있는 고독의 회오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바람만이 공전하는 세계의 메마른 사각지대다.
벤 하퍼의 쓸쓸한 공허감이 극에 달한 ‘Widow of a Living Man’이 노래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고독의 터전’에 관한 것이다. 먼저 떠나버린 삶 앞에서 과부가 돼버린 심정이랄까. 콤플렉스에 가까울 정도로 무사나 게릴라에 대한 연정을 과잉투사하는 시인 박정대에겐 사랑과 혁명이란 영원한 지상명제인 동시에, 죽음보다도 먼, 그리하여 죽음을 초극하는 삶에의 의지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것들을 경원하는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고독을 극대화한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가. ‘뒤돌아보지 말라, 추억이란 공기들의 이합집산에 불과하다’(〈음악들〉중 87)고. 이건 생명의 온기가 싸늘히 식은 극지의 공간에서 시간의 먼지들로 회귀하는 거대한 짐승들의 마지막 울음소리 같다. 바람의 무사가 그 위로 섬뜩한 칼바람소릴 휘날리며 사라진다. 앙상하게 드러난 뼈마디에서 배어나오는 적나라한 이 악취. 그러나 그 전신(全身)감각적인 부패는 너무 아름답고 쓸쓸하다. 삶 앞에서 과부가 된 이들의 고독이 이토록 아름답다니. 그래, 어쩌면 그게 바로 모든 인간들의 진정한 이름인지도 모른다.
* 눈 먼 악사의 외로운 망명정부 - 엄경희
1.
외로운 자는 불면의 밤을 지새며 눈물을 흘리고, 그보다 더 외로운 자는 자기의 외로움을 베기 위해 날카로운 劍이 된다. 그보다 더욱더 외로운 자는 마침내 스스로 외로운 악기임을 깨닫는다. 박정대의 시에서 그 악기는 다섯 개의 검에 베어진 한 개의 심장이며, 열 두 개의 촛불이며, 한 척의 흰 돛배이다. 음악이 먼 곳까지 울려가듯 아픈 심장으로, 촛불로, 바람의 돛배로 먼 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단편들}(세계사, 1997)과 쌍생아라 할 수 있다. 꿈에서 내려왔다가 꿈으로 오르지 못한 자([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의 떠돎과 외로움은 이 두 권의 시집에서 반복되고 있는 주요 테마이다. 박정대가 등단한 1990년으로부터 시간을 따져보면 그는 10년이 넘게 동일한 테마에 붙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주제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또한 유사함을 보인다. 아니 동일함을 의식적으로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주 구사하는 패러디와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는 여러 개의 변주들,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단상 형식의 글 모음 등은 이전의 시집과 동일성을 구축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집요함이 지루함이 아니라 절실함으로 공감되는 까닭은 그의 반복적 상상력이 단순한 반복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적 혁명을 위해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자를 수 있는 '검객'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劍도 자신의 슬픔은 버히지 못하는 법"([貞陵에는 별이 많다])이라고 劍의 방식을 부정한다. '劍'이 예리한 판단과 의지에 맡겨진 세계라면, 슬픔이나 외로움은 판단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 {단편들}은 그것을 알아 가는 과정이며,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다섯 개의 劍으로 베어진 한 개의 심장이 다섯 개의 劍보다 더 끈질긴 '외로움의 악기'임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劍은 악기보다 무력하다. 즉 박정대는 劍으로 베어낼 수 없는 것들을 음악으로 풀어내야 함을 이 시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판단이나 의지보다 더 자유롭게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내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 유독 여러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동일한 형식을 지닌 시가 많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2.
판단과 의지, 사유와 인식이 아니라 음악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는 박정대의 시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사랑'이며 '꿈'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로서 존재한다. 시인은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가슴속에 품고 꿈의 세계에서 현실로 귀환한 것이지요"([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라고 말한다. 그 현실은 이전의 시집 {단편들}에서는 잔인한 추억, 폐허로운 세월, 버림받은 오후로 표현되며, "내 가슴으로부터 한번 떠나간 애인은 영원히 복구되지 않았다"([물질적 황홀 8]), "황혼녘의 엽서는 어둠에 지워졌으니/우리들의 사랑은 진부했구나"([두 달 정선]),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추억도 없는 길을/가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도 없는 길])라고 말해진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현실'이다. 상실감으로 가득한 현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박탈되었음을 뜻하며, 결국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 속에 시인을 유폐시킨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위하여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스스로 감히 글을 쓴다
―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부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기 부정으로서의 존재 확인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넘어서게 하는 내적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존재는 적어도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無化된 자신을 "꿈꾸지 않는데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없는데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라고 거듭 확인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다시 명명한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중략)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수 있다. 내가 아픈 건 네가 아프기 때문이다. 갑자기 숲의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바람이 아프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바람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나무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누군가 끊임없이 술잔을 비운다. 술잔 밖 세상이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만하다. 그러나 네가 아픈 건 내가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부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가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이전 시집과의 또 다른 점이다.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편재'하는 나를 의미한다. '당신'이 부르는 것에 따라 나는 그 모두일 수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타자의 아픔에 도달하는 절묘한 방법임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숲과 바람과 나무가, 술잔과 세상이 아픔으로 상생하듯, 나는 너와 아픔으로 상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가 아니라 나는 너인 것이다. 내가 너의 아픔으로 비벼지며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나는 비로소 음악 소리를 낸다. 그 음악이 폐허 위에 "새롭게 이 세계의 지도를 그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가는 방법인 것이다.
3.
그러나 음악이 되려하는 나를, 아니 음악이 되어야만 하는 나를 그대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문장 속의 생애는 끝나지 않고 생애 속의 문장은 여전히 읽혀지지 않"([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는 것이다. 즉 나는 꿈으로 가는 도정에서 수없이 많은 마음의 촛불을 꺼뜨리고, "어디로도 가려 하지 않는/바람과 배 한 척"([달])을 밀며 여전히 "차갑고도 딱딱한 밤"([뼈아픈 후회])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정을 그는 길고 긴 밤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을 덮고 나니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라는 노래를 들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빅토르 최의 노래를 더 들으며 세 대의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났다, 휴지로 코를 풀었더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생각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아직 기타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부분
마침표가 없는 밤의 길, 끊임없는 쉼표로 지속되는 밤의 공허 속에 시인은 시와 영화와 노래를 퍼담는다. 로르카와 에밀 쿠스트리차와 전인권과 빅토르 최와 기타 등등의 것들은 그의 외로움의 하중과 비례하는 밤의 백일몽들이다. 그것들은 '나'의 '흰 돛배'가 방랑했던 페루이며, 혜화灣이며, 은척이며, 아침가리이며, 모래郡이며, 해미읍성이며, 부석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정대의 화자는 늘 어디론가 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그는 "우리는, 우리들 가슴속의 내륙에서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나는 음악처럼 떠난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나뭇잎들이 보내주었던 그 한 척의 음악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당도하지 않네, 나는 지금 미완의 자세로 앉아 담배 연기만 자욱히 날리며 내 방의 새벽 공기를 더럽히고 있는 불모의 사막이네"([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라고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지구의 북호텔에서])고 그는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먼 곳으로 풀려나 '너'의 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매번 당도하는 곳은 "허공에 매달린 항구"([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이며, "텅 빈 그릇처럼 캄캄해져 오는 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이며, "자꾸만 텅 비어가는 링거병 같"([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은 겨울 하늘이다. 즉 그의 음악은 가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그러나 갈 수 없는 비애 속에서 탄생한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너'와의 화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연주되는 푸르디푸른 추운 음악이다. 외로움과 슬픔은 그가 말하는 음악과 동일어인 것이다. 부재와 상실이 '나'를 음악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부재하는 '사랑'을 기억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아이러니하게도 불멸의 '사랑'인 것이다. 이 음악 속에서 이미 상실한 추억과 사랑은 불멸한다. 따라서 "떠날 때는 한꺼번에 모두 비명을 지르며 떠나"([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간 애인은 "내가 두 눈이 멀어/음악만이 나를 끌고 가는 곳"([은척에서])에 '나'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홀로 연주되는 푸르디푸른 추운 음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사랑을 확인하는 연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세운 고통과 꿈의 '망명정부'이며 '격렬비열도'이다. 아직도 그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이 내리고, 흰 돛배가 겨울 바람을 밀고 가고, 열 두 개의 촛불이 불타고 있다. 그러는 한 그는 외로울 것이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리나 그러는 한 그는 불멸하는 사랑과 추억을 간직할 것이다.
4.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가는 '밤의 여행자'의 노래이다. 길고도 긴 밤처럼 그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여행지는 이곳과 저곳이 단절되어 있으면서 또한 완강히 이어져 있다. 아무도 없으면서 '너'로 가득하다. 과거이면서 현재이다. 외로움이면서 사랑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마음의 상징물이다. 마음에서 넘쳐나는 '음악'은 '劍'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이 시인의 내적 힘이다. 그것으로 그는 내려왔던 꿈의 사다리를 다시 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자신 '경계'에 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는 리차드 브라우티건과 황지우와 로르카와 짐 자무쉬와 보르헤스와 폴 발레리와 로맹가리와 백석과 체 게바라와 뒤섞여 있다. 풍자나 비판이 아니라 인유에 가까운 다성성으로서의 패러디 방식은 이것과 저것을 해체하고 모든 것이 넘나들 수 있는 경계적 사유를 반영한다. 그것은 음악이 구획된 공간을 벗어나듯 상상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패러디는 한 시인의 상상력의 풍요를 말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빈곤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패러디는 근본적으로 창조적이기보다 해석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에 박정대의 아름다운 상상력이 침윤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