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城金門 청계 김진(金璡)/1500(연산군 6)∼1580(선조 13)|
◆ 김진(金璡) 1500(연산군 6)∼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 증조부(曾祖父)는 원사공(院事公) 김한계(金漢啓)이고,조부(祖父)는 통례공(通禮公) 김만근(金萬謹)이며,부(父)는 교위(校尉) 김예범(金禮範)이다. 참봉(參奉) (贈)통정대부(通政大夫) 이희안(李希顔)의 처남(妻男)이며,통훈대부 의흥현감(通訓大夫 義興縣監)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의 외숙부(外叔父)이다. 안동(安東)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邪神을 祭祀하는 사당)나 귀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멀리하매 무당이 그의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을 남쪽 산에 염흥방(廉興邦)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는 “네가 전조(前朝:고려)의 간신으로서 죽었어도 남은 죄가 있는 터에 어찌 너의 귀신을 용납하여 백성들을 미혹(迷惑)하게 하랴.” 하고 이를 헐어버렸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文守弘>
<청계공(靑溪公)의 교육철학(敎育哲學)> 청계가 자신의 성취보다는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逸話)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參判)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관하여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인 특별한 아버지였다는 것은 자식들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넷째 아들 학봉이 작성한 아버지 행장(行狀)에는 가슴 뭉클한 내용이 나온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새끼들이 밤에 젖을 찾으니 중년 남자인 자신의 젖을 물릴 정도로 자녀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인물이 청계다. 그는 인근에 살던 퇴계에게 다섯 아들을 보내 공부시킨다. 다섯 아들은 일찍부터 퇴계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그중 넷째 아들인 학봉은 후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한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있다.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玉)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도 ‘너희가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오히려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아줄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오히려 죽은 사람과 같이 볼 것이다(人寧直道以死 不可枉道以生 汝等爲君子而死 則吾視猶生也 爲小人而生 則吾視猶死也)’고 강조하였다.
직도(直道)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라는 가르침,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찾아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각오, 이것이 조선조 선비정신의 정수가 아닌가 싶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회 중에 미꾸라지 회가 제일이다’는 자기 보존의 남루한 처세요령을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너무나 눈부신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임금에 직언하는 강직한 성품>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일화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1573년 9월 학봉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선조가 경연장에서 “경들은 나를 전대(前代)의 어느 임금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정언 정이주가 “요순 같은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더니, 학봉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이와 같이 비슷한가?”라고 물으니 학봉이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간언(諫言)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한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주상이 얼굴빛을 바꾸고 고쳐 앉았으며 경연에 있던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서애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두 사람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고 응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고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이니, 모두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얼굴빛을 고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게 하고서 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보통 직장생활에서 윗사람이 듣기 거북한 직언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이 최소 3년은 계속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데 학봉은 임금 면전에다 대놓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직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있다”는 직언을 할 정도로 기백이 있었다. 학봉의 그 기백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는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 청계의 평소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학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풍신수길을 평하여 “그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것 없다”라고 했던 말이 임진왜란 상황을 오판하게 했다고 하여 체포령이 내렸다. 학봉은 그 소식을 듣자 금부도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서울로 자진출두하였다. 출두하던 도중 충청도 직산에서 경상도초유사를 임명받고 영남으로 돌아와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학봉이 진주성에 도착하니 목사와 주민이 모두 달아나 성은 텅텅 비어 심난한 상황이었다. 옆에 있던 송암(松庵), 대소헌(大笑軒) 두 사람이 산하를 쳐다보고 비통해하면서 강에 빠져 죽자고 하자 공은 웃으면서 사나이가 한번 죽는 것은 어려울 바 없으나 도사(徒死)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이때의 비장한 심정을 시로 읊었다. 이 시가 식자층 사이에 회자되는 ‘촉석루중삼장사(矗石樓中三壯士)’라는 유명한 시다.
‘촉석루에 오른 세 사나이(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 마시고 웃으며 남강물 두고 맹세하네(一杯笑指長江水)/ 남강물은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누나(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마르지 않듯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학봉은 이 시를 쓰고 난 후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진주대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진주공관에서 과로로 죽는다. 평소 학봉을 미워하던 서인들도 그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학봉의 성품이 강직하고 의리가 있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 장군(霽峰 高敬命, 1533∼1592년)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광주에서 살던 제봉은 아들 종후(從厚) 인후(仁厚)와 함께 전쟁터로 나가면서 셋째 아들인 용후(用厚, 당시 16세)만큼은 나이도 어린 데다 대를 잇기 위해서 안동의 학봉 집안으로 피란하라고 당부한다. 학봉집은 의리가 있는 집이니까 네가 가면 틀림없이 돌보아줄 것이라며. 이때 고용후는 안동에 혼자 간 것이 아니라 아녀자를 포함한 가솔 50여 명과 함께 피신을 갔다고 한다.
학봉 가족도 이때 임하(臨河)의 납실(猿谷)이라는 곳에 피란하고 있는 중이라 산나물로 죽을 끓여 연명하면서도, 학봉의 장남 애경당(愛景堂) 김집(金潗)은 이들과 같이 동고동락하였다. 고용후는 이곳에 머물면서 아버지와 형들을 포함한 칠백의사가 모두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으며, 학봉부인과 김집은 상주가 된 고용후가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와주고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고용후는 50여 명에 달하는 식솔들과 함께 학봉집에서 3∼4년쯤 머물다가 전라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고용후는 학봉집에 머물 당시 학봉의 손자인 김시권(金是權)과 같이 상을 당한 처지고, 거의 동년배라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였는데, 이 둘은 1605년 서울의 과거 시험장에서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고용후는 생원과에 장원으로, 김시권도 동방(同榜)으로 진사급제를 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1617년 안동부사로 부임하게 된 고용후는 파발마를 보내 학봉 선생 노부인과 장자 김집을 안동관아로 초대하여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잔칫날 고용후는 “소생에게 오늘의 영광이 있는 것은 후덕하신 태부인(太夫人)과 애경당(愛景堂)의 20년 전 은혜 덕택입니다. 두 분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하고 울면서 큰절을 올렸다. 비슷한 연배인 고용후와 김시추, 김시권 형제는 그 후로도 친형제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지냈다. 영·호남 간의 이념적 동지들 사이에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다.
조용헌 <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한국의 명가 명택 6] 의성김씨 내앞(川前) 종택...中에서 발췌(拔萃)함. [출처] 義城金門 청계 김진(金璡)/1500(연산군 6)∼1580(선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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