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웃음으로 죽음을 떠나보내라.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같이 하나이니 웃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웃음으로 죽음을 떠나보내라.
대칭되는 것 같지만 같은 말이 있다. 바로 밝음과 어둠(明暗), 삶과 죽음(生死), 길고 짧음(長短), 젊음과 늙음(老少), 남자와 여자(人), 낮과 밤(晝夜), 손바닥과 손등(手), 숫컷과 암컷(雌雄) 等等이다.
이 양자는 어느 하나가 없으면 그 다음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佛家의 敎祖인 고다마 싯달타는 "같다(生死一如)"고 했던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은 똑같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다르게 보아서 태어나는 아이를 보면 웃고 떠들고 축복하지만, 죽은 사람을 보면 울고 슬퍼하고 애도한다.
반면, 정착 태어나는 당사자인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슬픈지 울고(呱呱聲 ), 죽는 당사자는 阿鼻地獄 같은 이 세상을 떠나는게 기쁜지 웃는다(일부 욕심이 끝까지 차 오르 자들은 최후 발악하듯이 흉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버이날이 하루 지난 오늘은 이같은 삶과 주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1, 과연 살만하니까 떠나는게 인생일까?
살만하니 떠나는게 아니라 살만큼 살았으니 마치 나뭇잎이 겨울되면 저절로 떨어지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떠나는게 인생이다.
택시 기사들은
흥미진진하거나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는다.
택시들은 "잠들지 않는 도시" 곳곳을 누비며 승객을 이곳 저곳으로 분주하게 실어 나른다.
어느 날, 택시기사가 콜을 받았다.
그리고 그 날 그에게 일어난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
여느 때와 같이 콜을 받고 해당 주소로 가서 경적을 울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또 한 번 경적을 울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 손님이 그 날 교대 전 마지막 콜이었기에
그는 마음이 급해저 얼른 포기하고
차를 돌릴까 하다가
일단 문으로 가서 다시 불러보기로 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간이 꽤 지나 문이 열렸고
90이상 되어 보이시는 작고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문가에 서 계셨다.
손에는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계셨고
문이 조금 열려 집 안이 보였는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안에는 사람 산 흔적이 싹 지워진듯
모든 가구는 천으로 덮여있었고
휑한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단지 사진과 기념품이 넘쳐나는 상자 하나만 구석에 놓여 있었다.
"기사 양반!
내 여행 가방 좀 차로 옮겨 줄래요?
부탁해요!"
할머니의 요청대로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할머니에게 돌아가 천천히 차까지 부축해 드렸더니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모든 승객을 제 어머니처럼 모셔야죠!”
"굉장히 친절하시네요!"
할머니는 택시에 탄 뒤 목적지 주소를 알려주며 시내를 가로 질러가지 말아달라고 하셨다.
"음!... 그럼 목적지까지 가는 지름길이 없는데요!
시내를 통과하지 않으면
많이 돌아가게 될 텐데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저만 괜찮다면
급할 게 없으니 돌아가도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말씀을 덧붙이셨다.
"지금 요양원에 들어가는 길이랍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에 죽으러 가는 곳이죠!"
할머니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 가셨다.
"의사가 말하길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하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재빨리 미터기를 껐었다.
"어디 가 보고 싶은 데 없으세요?"
저는 그 후 두 시간 동안
할머니와 함께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 분은 젊은 시절 일했던 호텔을 비롯해
고인이 된 남편과 함께 살았던 예전집 등등...
그 동안 인연이 있었던
시내의 여러 곳을 다녔다.
그 동안 할머니는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 처럼 바라보시기도 하고
때로는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눈물을 보이시기도 하셨다.
"이제 피곤하네요!
목적지로 가주세요!"
도착한 요양원은 생각보다 작았고
차를 세우니 두 명의 간호사가 나와서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웠다.
나는 트렁크 속에 두었던
여행 가방을 꺼내 들었다.
"요금이 얼마죠?"
할머니는 핸드백을 열며 제게 물었다.
"오늘은 무료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아!
생계는 꾸려가야지!"
"승객은 또 있을테니까
걱정마셔요.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할머니를 꼬옥 안아드렸고,
그 분 역시 절 꽉 껴안았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여행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할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요양원을 나왔다.
교대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정처없이 차를 몰고 돌고 돌아다녔다.
누구하고도 만나거나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오늘 이 손님을 태우지 않았더라면...
그날 밤 일은 인생을 살며 제가 해 온 것 중에 가장 뜻깊은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정신없이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종종 크고 화려한 순간에만 집중한다.
더 크게, 더 빨리, 더 멀리...
하지만 정작 인생에 의미있는 순간은
조용하고 사소하다.
여유를 가지고 그런 순간을 맞이하면 어떨까요?
천천히, 또박 또박 진지하게 말입니다...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기 전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세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바쁜 일상에서 잠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가치있는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겨본다.
나는 지금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나요?
바쁘다는 이유로 인생의 소중한 의미를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소중하다.
좋은 사람을 찾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어주고,
좋은 조건을 찾지말고
내가 좋은 조건이 되는 사람이 되고
좋은 애인을 찾기 전에
좋은 애인이 되어주고
좋은 사랑을 찾기 전에
좋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준다.
좋은 하루가 되길 바라지 말고 좋은 하루를 만들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됩
된다.
털어봐! 아프지 않은 사람 있나?
꾹 짜봐! 슬프지 않은 사람 있나?
찾아봐! 힘들지 않은 사람 있나?
건드려 봐! 눈물나지 않은 사람 있나?
물어 봐! 사연없는 사람 있나?
살펴 봐! 고민없는 사람 있나?
가까이 다가가 봐!
삶의 무게가 없는 사람이 있나?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다.
장미가 좋아 꺾었더니 가시가 있고,
친구가 좋아 사귀었더니 이별이 있고,
세상이 좋아 태어났더니 죽음이 있더라!
"살만 하니 떠나는 게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살만큼 살았으니 떠나는게 인생이다.
사람이 죽으면 호들갑 떨면서 울고 불고 대성통곡을 하는 나라는 儒敎문화권인 한중일과 동남아 밖에 없다.
물론, 기독교, 불교 문화권에서도 장례식을 치루고 애도하고 추모하기는 하나 우리처럼 3일장, 5일장, 7일장 등등 긴 시간동안 애도하면서 추모하지를 않는다.
심지어 히말라야 깊은 산속에 있는 록파족이나 아프리캉의 원주민 및 아메라칸 인디언들은 죽음을 축제로 맞이한다.
물론 한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기에 일손이 아쉽고 정착생활하는 농경민족과 일손이 아니라 유랑방목했던 유목민족들의 삶의 차이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겠지만, 이제는 일손이 필요한 농경민족을 탈피한 공업민족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는 이같은 유교적 사고 방식을 탈피할 때가 되었다.
굳이 불가에서 주장하는 生死一如를 이야기하지 않드라도 삶과 죽음은 어찌보면 하나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며, 가을이 끝날때쯤이면 낙엽이 떨어지듯이 우리네 삶도 이와같다. 때문에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에 形이 있는 萬象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시간의 문제일뿐 必然이기 때문에 그냥 담담하게 받아드리면 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축북일수도 있기에 굳이 울고불고할게 아니라 웃고 떠들고 기뻐하는게 맞다고 볼 수도 있다.
해서 살만하니 떠나는게 인생이 아니라 살만큼 살았으니 떠나는게 바로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이같은 점에서 역경을 발판삼아 발달.발전해온 인류문명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春花現象을 알아야 한다.
(1) 열악한 환경이 인류문명을 일으킨다.
무쇠가 단단한 강철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단한 제련이 필요하듯이 인간도 동일하다. 시련과 마주 하면서 부단히 단련될때 무르디 무른 무쇠철이 鐵도
벨수있는 단단한 强鐵처럼 거듭나면서 종국에는 찬란한 인류문명을 꽃피운다.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은 매우 의미심장한 책으로, 그는 이 책에서 '좋은 자연환경에서는 인류 문명이 태어나지 않았고 거의 다 거칠고, 가혹한 환경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고대 문명과 세계 종교 발상지는 모두 曠野 같은 척박한 땅이였다.
이집트 , 수메르 , 인도 , 간데스 , 중국 문명이 모두 다 그렇다.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아프리카 북쪽에서 수렵생활을 하며 지내는 이들이었는데, 지금으로 부터 5, 6천년 전 강우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하며 아프리카 북쪽이 사막으로 변하자 이들은 세 부족 으로 나뉘어지면서 흩어진다.
원래 있든 그 자리에 남아 그대로 사는 부족은 끝내 소멸되었고, 북쪽으로 강우 전선을 따라 북유럽쪽으로 간 부족도 종국에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맹수들이 우글대는 나일강 지역으로 이주
하여 농경과 목축, 어업으로 생활을 바꾼 부족들은 마침내 찬란한 이집트 문명을 만들었으며 나일강의 범람시기를 알아내기 위해 천문 지리 태양력을 발달
시켰다.
그들은 또한 나일강이 범람했다가 빠지면 쑥밭이 된 토지를 나누기 위하여 기하학, 측량술이 발달되었고,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술이 발달되었다.
도르래가 발명되고 축대를 쌓는 기술이 탁월하여 불가사의한 피라미드를 만들어냈다.
중국을 서동으로 가로 지르면서 흐르고 있는 유명한 두 강은 바로 長江(양자강)과 黃河로 이 두 강가에 사는 중국인들의 삶은 克明하고도 判異하게 갈라졌다.
長江 유역은 기후가 좋다.
강도 범람하지 않아 강주변은 사람이 살기 좋고 편안하다.
반면, 黃河은 쿤룬산맥(崑崙山脈)에서 발원하여 발해만으로 흐르고 있는데, 혹독한 추위로 겨울이면 얼어 붙어 배가 다닐 수 없으며 해마다 범람하여 수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다.
그래서 중국을 다스렸던 역대 제왕은 모두 황하의 물길을 잘 다스린자 즉 治水를 잘한 者가 天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정도로 그런 거친 환경에서 황하의 문명 즉 黃河文明이 꽃을 피우면서 발달
되었다.
민족도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가장 거친 환경에서 살아온 민족은 유대인이다. 서기 70년 7월 9일 나라를 빼앗기고, 서기 1948년 5월 14일 독립할 때까지 무려 1900년 동안 전세계 구석구석으로 쫓겨 다니면서 유랑하고 나라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심지어는 히틀러는 '총알 하나로 몇 명을 죽일 수 있는지를 알고자 유대인을 잡아서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는 실험'을 하기도 하면서 무려 600만 명을 학살하였다.
그 결과, 이같은 유대인들을 반기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기에 가장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온 세계가 유대인을 박해할 때 미국이 유대인을 품어주었다. 그 결과 2차 대전 후 몰려드는 유대인에 미국은 험악하고 최악의 조건인 거찬 환경의 땅 허드슨강변을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옹벽을 쌓아 허드슨 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았고,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금융업을 하여 지금은 세계 금융 중심지로 변모시켰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월가다. 그 결과, 유대인은 세계의 새로운 문명을 꽃피운 민족이 되었다.
세계인구의 0.3% 밖에 안되는 민족이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프리 메이슨 등의 그림자 정부라는
암흑의 조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주무르기까지 하고 있다.
이같이 유대인의 몸속에는 거친 환경을 이길 수 있는 DNA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한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무인도 하나를 구입하여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면서 天上 極樂같은 아름다운 섬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토끼를 풀어 놓았는데, 이 地上 樂園에 사는 토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눈빛이 흐려지고 털은 윤기가 없고 병든 토끼처럼 되어 갔다.
마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정부가 무한대로 지원하는 생계보조금을 받고 살면서 빈둥빈둥 놀다보니 눈알이 풀리고 살이 찌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체 허리멍텅해져가서 현재 미국내 일부 식자층에서는 인디언 멸종론까지 대두하듯이 이 무인도의 토끼도 닮아간 것이다.
부자는 탄식을 하며
"이렇게 좋은 천상낙원 같은 환경에서 병이 나다니?"
그래서 수의사를 불렀지만, 그 또한 고개를 저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그냥 돌아갔다.
고민 고민하다 결국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는데, 랍비는 웃으면서
“이리와 함께 키우세요.”라고 간단하게 답을 했다.
부자는 놀라 "토끼를 다 잡아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었드니, 뜻밖에도 랍비는
“토끼의 병은 환경이 너무 좋아서 생긴 병이기에 이리와 함께 기르면 안잡혀 먹히려고 힘차게
도망다니며 눈빛이 빛나며 다리에 힘이 생기고 털에는 윤기가 흐를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 후 그의 말대로 토끼들은 비록 몇 마리 잡혀 먹혔지만 나머지 모두는 전부 다 건강하였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사공을 만들게 한다.
인간도 너무 天國 같은 곳에 살면 저 위의 토끼처럼 변한다. 해서 일부 종교가 信徒들을 欺瞞하면서 惑世誣民하고 뻥치는 實存하지도 않는 '天國'을 너무 동경하지 마시라.
어디에도 존재하지도 않는 '天國'이나 生長盛衰滅絶로 흐르는 자연의 이치상 애시당초부터 불가능한
'永生'을 기대하거나 동경할게 아니라, 차라리 그렇게 쓸데없이 꿈꾸고 憧憬하는 시간에 움직이고, 생각하고, 자기개발하고 노력하는게 훨씬더 오래 살수 있는 無病長壽의 지름길이자 지구상에 이름을 남겨서 永生하는 길임을 있지 마시라.
'五代史' '王彦章傳'에 "豹死留皮 人死留名"이라 했으니.....
(2) 春化現象으로 呻吟하는 나라.
春化現象 을 아시는가?
군자란은 겨울에 얼지 않을 정도의 추운 곳에 내놓아야 꽃대를 올리는 식물이다. 겨울에도 따스한 곳에 두면 꽃대가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거나 아예 꽃을 피우지 못한다. 이처럼 꽃이 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겨울을 경험해야 하는 식물이 있다. 겨울을 경험해야 봄에 꽃이 피는 것을 春化現象이라고 한다.
군자란이나 튤립, 수선화 등의 일부 알뿌리 꽃, 보리나 밀 등의 곡물이 春化現象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다. 이 원리를 파악하여 이제는 냉장고를 이용하여 식물이 겨울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원하는 때에 꽃이 피게 할 수 있다. 인공적으로 식물이 겨울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春化處理
(vernalization)라고 한다
또한,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Dr. Paul G. Stoltz)가 만든 1997년 만든 용어로 '살면서 접하는 많은 逆境에 굴하지 않고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지수화한 수치인 '역경지수(AQ, Adversity Quotient )'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같이 역경지수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능력을 의미한다. 지능지수(IQ)가 아니라 역경지수(AQ: 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이 새로운 스트레스에 생산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보리고개(春窮期)'를 겪은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주어진 힘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 그러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역경지수를 높였던 것 같다. 그 힘들었던 시절이 오히려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게 한 축복이었음을!
해서, 몇 해째 겨울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나가는 군자란을 보며 새롭게 깨닫는다.
지난 몇년 간 코로나19로 인류 사회가 기반부터 흔들리고 있다. 이를 이겨낼 신체 면역력도 어렸을 때 감기에 걸리기도 하고, 유사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극복할 기회를 가질 때 자연스럽게 커진다.
우리 인간도 대부분은 추운 겨울을 경험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존재다.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한다며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키우는 것은 오히려 아이가 자연스럽게 면역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성장하여 꽃피울 기회마저 빼앗는 愚를 犯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내 아이는 나처럼 고생하지 않게 해야겠다며 더 편안하고 쾌적한 여건을 만들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아이를 위하기보다는 실은 내 욕심 채우는 것이고, 아이가 역경지수를 기를 기회를 빼앗는 길이다. 이는 군자란을 사랑하여 겨울에도 따뜻한 실내에서 키우려는 것과 유사하다.
온실에서 그저 안락하게만 자라온 아이들에게는 특히 춘화처리 교육이 필요하다. 동사하지 않을 정도의 역경 프로그램을 만들고, 아이들이 이를 헤쳐 나갈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각종 스카우트 활동은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춘화처리 교육 프로그램이다.
한국에 초빙교수로 살다가 귀국한 세계적인 정신 의학계 교수에게 한국인의 이미지가 어떠냐고 묻자,
“한국인은 너무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하면 오해다. 권력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지만,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서민에게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 놀랄 때가 많다.
특히 식당 종업원에게는 마구잡이로 무례하게 대해 같이 간 사람이 불쾌할 정도다. 잘 나가는 엘리트일수록 이 같은 이중인격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면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만을 떤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롭지가 못하다.
말은 유식한데, 행동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준법정신이 엉망이다.”
힘 있는 사람부터 법을 안 지키니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인사가 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을 인정할 정도니 정부 요직에 있는 다른 인사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한국엘리트들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뭐가 잘못되면, 전부 윗사람, 아랫사람 탓이고, 자기반성은 조금도 없다. 특히 정치인들, 게다가 정치지도자라는 인간들은 더하다.
세상 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네거티브하다. 모여 앉으면 정치 이야기인데, 완전히 흑백논리로 평한다.
호남 친구들과 만나면 박정희 혹평하는 것 듣다가 시간 다가고, 경상도 친구들과 만나면 김대중을 씹어댄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대통령은 없다.
모두가 이래서 죽일 놈이고, 저래서 죽일 놈이다.
국민 소득은 3만 달러 수준인데, 국민 의식은 5백 달러 수준이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자랑 하지만, 그것은 곧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벼락부자의 단점이 무엇인가?
그저 남에게 내가 이만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공의 의미가 너무 좁다.
돈 있고 잘사는 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항상 뭔가 불만족이다.
春化現象(Vernalization)이 바로 이것이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이듬해 봄이 되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 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다.
첫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을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다.
화려하면서 눈부신 인생의 꽃들은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맛도 좋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젊은이들이 짊어지고 겪어야 할 춘화현상이라면, 감내해야 할 세대들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3) 生死輪廻 - 죽음이 삶을 가르치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술과 강연에서 청어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다. 자신의 역사이론서책인 'A Study of history'에 쓰여진 '도전과 응전'의 법칙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靑魚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이다. 하지만 청어가 잡히는 곳은 북해나 베링해협 같은 먼 바다였기에 싱싱한 청어를 먹기가 쉽지 않았다. 등푸른 생선들이 다 그렇듯이 성질 급한 청어는 배에 싣고 오는 동안에 대부분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살아있는 청어가 런던 수산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청어를 운반해오는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함께 넣는 것이었다. 청어가 물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힘껏 도망 다니다 보니, 그런 긴장이 청어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토인비가 청어 이야기를 자주 인용했던 것은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자신의 역사이론을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인비는 문명이 만나는 도전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①척박한 땅이 주는 자극, ②새로운 땅이 주는 자극, ③갑작스런 외부의 공격, ④외부의 계속적인 압박, ⑤그리고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압제이다.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폴리네시아, 에스키모, 유목민 사회처럼 문명이 성장을 멈추고 만다. 도전이 가혹할수록 응전하는 힘도 커지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면 문명 자체가 나타날수 없기에 지나치지 않은 수준의 도전이 문명의 성장에 큰 자극을 준다.
역사를 봐도 그러하다.
자연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는 문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토인비는 문명을 일으킨 자연환경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가혹한 환경이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는 늘 발전에서 뒤처졌다는 지적이다.
고대문명과 세계 종교의 발상지가 모두 척박한 땅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집트 문명을 예로 들어보면 이집트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원래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수렵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5,000~6,000년 전 아프리카 북부를 걸치고 있던 강우 전선이 북유럽 쪽으로 이동해 가자 아프리카 북부와 남아시아 지역은 빠르게 건조, 사막지대로 변해갔다.
이들에게는 이론상 세 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었다. 그곳에 남아 기존의 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연명하거나, 혹은 그 자리에 남아있으되 수렵 생활 대신 유목이나 농경 생활로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거나, 거주지역과 생활방식을 모두 바꾸는 것, 이 셋 중 하나였다. 세 가지 응전 중 어느 것을 택했느냐에 따라 이들의 운명이 갈렸다.
그 자리에 남아 조상들의 방식대로 수렵 생활을 계속했던 부족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생활방식을 바꾼 부족은 아프리카 초원 지역의 유목민이 되었다, 그리고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일강 변 밀림 지역으로 옮겨 가 농경과 목축을 선택한 부족들은 마침내 찬란한 이집트 문명과 수메르 문명을 일구었다.
토인비는 청어와 메기를 예로 들면서, "가혹한 환경이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내고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다. 즉 아놀드 토인비는 청어와 메기 이론을 통해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반증하였던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지적대로 생존을 위해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
척박한 땅, 티베트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저절로 생겨난 여러가지 生存法이 있는데 一妻多夫制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슬람에서는 현재도 일반화된 이와 비슷한 一夫多妻制도 삭막한 사막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부득이한 방편으로 생겨난 제도다.
현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이들에건 생소한 제도이고 또 아직도 세상에 이런 제도가 있는가 하겠지만 생존환경이 척박한 티벳 장족들에겐 신판 고려장과 더불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제도이기도 하다.
이와관련하여,
1997년 KBS에서 방영했던 《일처다부제의 전통, 인도 록파족》은 우리들에게는 낯선 문화에 대한 생경함을 안겨준다.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자동차로 꼬박 나흘을 달려 가야 만날 수 있는 인도 西北部 히말라야 깊은 산골.
자동차 길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해발
5,360m의 타그랑고개.
지대가 너무 높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갈색의 민둥산이 아득하게 이어진 이곳에는 산소가 적어
보통 사람은 숨쉬기조차 힘든 언덕 너머엔
2,000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록파족이 살고 있다.
구름마저도 험준한 히말라야를 넘지 못해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영하 40도의 혹독한 酷寒의 날씨를 견디도록 집은 돌로 쌓았는데, 록파족은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까지만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반년은 보름에 한 번씩 자그마치 열두 번이나 가축들을 몰고 풀을 찾아 여기저기 떠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의식주 모두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백여 마리의 양과 염소에 한 가족의 생계가 매달린
그들에게 혼인으로 인한 형제들의 재산 분할이 불가능하자 생존을 위해서 일처형제혼 등 일처다부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궁여지책이
었다.
이같은 특이한 결혼풍습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에 없어진 현대판 高麗葬과 같은 풍습이 있어서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록파족 어느 노인의 죽음 의식과 거기에 깃든 그들의 生死觀은 오래전 사라진 궁핍했던 시절의 우리네 高麗葬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같은 풍습은 지금부터 십수년전 네팔의 제2도시 포카라에서 출발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ABC의 最奧地를 돌아다닐때 보았던 장족의 풍습과도 일견 흡사했다.
록파족들은 3월 말, 봄이 되면 가축의 방목을 위해
겨울을 보냈던 돌집을 나선다.
처음 자리 잡은 곳에서 보름 남짓 머물면 풀이 바닥나 새로운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이삿짐을 싸고 여자는 가는 도중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데 시아버지인 일흔여덟 살의 노인은 성치 못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시무룩하게 이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물이 있는 다음 정착지까지는 대략 40km에서 80km. 움직임이 더딘 고산지대에서는 사흘을 꼬박 걸어야 한다.
하지만, 팔순을 바라보는 일흔여덟살의 노인은 오늘 가족과 함께 떠나지 않는다. 이젠 너무 늙어 며칠씩 걷기에는 힘에 부칠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갈수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평한 자연의 순리이기에 자식들은
노인을 위해 혼자 지낼 텐트와 두툼한 옷을 준비한다. 버터차와 밀가루빵 등, 한 달 치 식량을 남겨두고 떠나는데 .다시 돌아왔을 때 노인이 살아 있으면 또 한 달 치를 마련해 준다.
그러나 결코 한 달을 넘겨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이 고독한 죽음 의식은 노인과 가족 간의 타협이 아니다. 힘든 이동을 거듭해야 하는 고산지대의 오랜 풍습으로 노인 스스로의 결정과 가족들의 수긍이 만든 고립이고 헤어짐이다.
손자에게 마지막 차를 대접받는 노인은 착잡한
표정을 짓고 마침내 아들과 손자는 울음을 삼킨다.
정든 사람과의 살아있는 마지막 이별을 두고 어느 누가 슬프지 않겠는가? 마침내 열여덟 살의 어린 손자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자 쉰두 살의 아들도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에 걸음이 휘청거린다.
"새로운 생을 받기 위해 몸을 바꾸는 것"이니 "슬퍼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오래된 극진한 信仰도 이 순간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78년이라는 긴 인연에 비해 '瞬間'이라는 짧은 離別은 刹那같이 너무나 짧기에,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노인은 모든 걸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심경을 묻자, “나도 27년 전에 아버지를 이렇게 했다. 해서 자식들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무탈하고 행복하기만 빌 뿐이다”라고
노인은 담담히 말하면서 연신 그들의 신앙경전이 적힌 마니차를 돌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나 절망이 아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걸려 넘어지는 문턱이 아니라,
이번 生과 맞닿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위한
매듭이고 통로다.
늙고 병든 몸에서 벗어나 스스로 평온을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자, 일상의 수행이 일러준 혼자만의 여행이다.
눈 맑은 그들에겐 지구의 지붕인 저 히말라야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신성한 발걸음인 것이다.
가축들을 앞세우고 멀어져 가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인은 자리에 눕는다.
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몸을 티베트 말로 '루’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두고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서 神에 대한 겸손을 배워왔을 노인, 원망이나 미련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영혼은 몸뚱이를 남겨둔 채 이제 어디로 떠날 것인가?
이마 위로 테 굵은 안경이 벗겨지고 손톱 밑이 까만 그의 손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죽음의 이유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근본적인 까닭은 단 하나,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변함없는 철칙이 적용되는 순간이다.
처음 왔던 그대로 다시 돌아가는 길, 그 길을
巨峰 히말라야는 微動도 않은체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바로 대자연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하나가 되는 시간이다.
‘죽음은 태어남을 뒤쫓고, 태어남은 죽음을 뒤쫓아 돌고 돌면서 그것은 끝이 없다’고 티벳인들의 최고 經典인『티베트 死者의 書』는 말하고 있다.
1990년 경, 내가 道阪에 처음 入門할때 '죽음 후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 감명 깊게 읽었던 이 책은 지금도 티벳인들의 生死를 좌우하는 信仰이 되어 그들 몸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듯이 죽은 자는 무엇으로든
반드시 세상에 다시 온다'는 믿음으로 모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사람들, 죽음의 하늘길을 열기 위해
그것과 홀로 마주하는 悲感한 모습이 高僧의 열반처럼 차라리 崇高하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평생 떠남에 익숙하다.
또한,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생명이 남아있는 부모를 저승으로 보내는 것도 담담하게 이승의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지구의 지붕으로 地上의 巨峰인 히말라야의
가혹한 자연과 더불어 이천 년 세월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
어쩌면 그 가혹한 자연덕에 어느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전통을 배우면서 生死關을 익히고 이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만 삶을 배울 것이다.’
라고 외치는 듯한 巨峰 히말라야 雪山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돌풍 한 자락이 하늘의 소리를 전하며 漆黑 같은 벌판을 짐승처럼 내달으면서 외친다.
온 宇宙의 形이 있는 萬像은 그 무엇도 生長盛衰滅絶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
태어남이 있으면 언젠가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죽음이 있어야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자란다.
그럼, 이들 록파족의 노인들이 자연환경상 어쩔수없이 담담하게 맞이하는 죽음 후의 세계는 있는가?
티벳인들의 최고 경전인『티베트 死者의 書』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는 있지만, 나는 이를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자는 죽지 않았기에 죽음 후의 세계를 알수가 없고, 죽은 자는 살아돌아올 수가 없기에 죽음 후의 세계를 말해줄 수없기에 그 누구도 죽음 후의 세계를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서 죽음 후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極樂이나 天堂은 산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이자 宗敎가 信仰心을 이끌어내기 위한 虛荒하고 欺瞞的인 수단이자 방편에 不過할 뿐이다.
네팔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맞으면서 거대한 히말라야 14좌 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오색찬란
하고도 신비스러운 일출풍광을 보면서 이 또한 그저 하나의 자연현상에 不過할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티끌이 되어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 過保護 하지 말고 적당히 혹독한 환경을 만들어 주어라.
1980년대 한국자생란을 개발, 보호한다고 한국자생춘란개발동호회 초창기 멤버들과 정읍, 함평 등 전라도 산야를 무작정 헤메고 다닐때였다.
희귀품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만 들으면 즉시 차를 끌고 찾아갈 정도로 열심히 하다보니 족히 그 당시 아파트 한 채값은 날린 듯하다.
그때 인위적으로 난꽃을 보기위해서 난화분에 주던 물을 끊고 생장조건을 가혹하게 만들면 종족번식의 DNA가 있는 난들은 종족번식을 하고자 죽기 전에 꽃대를 올린다. 소위 인공開花다.
반대로 질소를 충분히 공급하여 생장환경을 좋게 하면 잎만 푸르고 윤기나면서 싱싱하게 자랄뿐 절대로 꽃대를 올리지 않았다. 즉 환경이 좋으니 죽을 염려가 없기에 종족번식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식물이나 사람이나 자식이나 너무 過保護하지 마라.
좋은 환경에서 자란 花草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듯이 인간도 이와같다.
가혹하고 척박하면서도 혹독한 환경이 현재의 인류문명을 만들었듯이 혼독한 겨울 추위를 견딘 사람들이 또다시 새로운 인류문명을 화려하게 꽃피울테니...
첫댓글 가슴이 아프네요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여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고운 날 되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 날 되세요
정말좋은글.읽고갑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 날 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