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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63년 ~ 1944년 |
신비의 화가 뭉크는 죽음의 검은 천사 속에서
살았다. 인간 뭉크는 5형제의 둘째로 1863년 러턴(Løten)에서
태어났지만, 군대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크리스티아나로 옮겼다.
뭉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소피를 폐렴으로 잃었고, 이후 남동생 안드레아스도 같은
병으로 죽었다.
뭉크는 1879년 엔지니어학교에 입학했으나, 바로
진로를 바꿔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 대학도서관에서
혼자 예술사를 공부했다. 아카데미의 보수성은 그와 다른 여러 젊은 학도들로 하여금 1888년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고 크로그가 가르쳤던 풀토스텐(Pultosten) 스튜디오로 옮겼는데, 당시 크로그는
파리에서 돌아와 뭉크에게 유럽 예술의 국가적인 인식과 흐름을 소개했다.
1883년 뭉크는 크리스티아나 국전에 데뷔하였고, 프리츠 타우로의 오픈 에어 아카데미(Open-Air Academy)에 참석했다. 타우로는 뭉크를 지지하여
그의 「MORNING」을 구매했을 뿐 아니라 그가 1888년 파리를 방문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었다.
다음 몇 년간 뭉크는 정치적 · 도덕적으로 과격한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그룹에 빨려들어 작가 한스 예거, 요나스 리에, 예술가 크로그, 칼
구스타브 옌센의 진보파와 교류하였다. 이 기간은 일생 그의 인간생리,
심리패턴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뭉크의 첫 개인전이
1889년 4월 오스가르드스트란드(Åsgaardstrand)에서 열렸고, 10월 국가장학금으로
파리로 여행, 레온 보나의 스튜디오에 입학, 세계박람회와
테오 반 고흐의 갤러리를 방문했다.
1890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쇠약해졌으나(1908년에도 마찬가지), 예기치 못했던 세 번째 장학금으로 파리에 돌아와서, 크로그에게서
영감 받은 자연주의에서 내적인 인간에 반향을 일으키는 종합주의 예술로 옮겼다. 1892년 크리스티아나
개인전 후 베를린 초청을 받았으나, 그의 그림은 스캔들을 일으켜 전시회가 며칠 만에 끝났고, 함께 참여한 막스 리버만을 주창한 몇 명은 Berlin Secession을
창단했다.
뭉크는 파리를 방문하고 노르웨이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베를린에 남아 『Pan』을 발행했던 보헤미안 작가 및 예술가와 어울렸는데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르그(August Strindberg),
시인 스타니슬라프 비세프스키(Stanislaw Przybyszewski), 비평가 율리우스 마이어 그레페(Julius Meier-Graefe) 등이다.
야심적인 「THE FRIEZE OF LIFE」를 구상한 뭉크는 상징주의자로 1895년
핀란드 화가 갈렌 칼레라와 전시했고, 일 년 후 파리에 돌아와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모임으로
옮기면서 사무엘 빙(Samuel Bing)의 아르누보 갤러리에도 전시했다. 뭉크의
컬러 리토그라피와 우드 컷의 그래픽 실험은 고갱과 펠릭스 발로통의 장식미술에 혜택을 입었으며, 컬러와
라인의 심리적인 잠재성 추구는 그 자신의 독창성이다.
이 세기 초, 뭉크는 정신 피로와 심한 알코올의 고통에도 여전히 창조적으로, 1902년 「THE FRIEZE OF LIFE」를 Berlin Secession에 전시했고,
노르웨이와 파리 연극무대를 디자인했다. 1908년에는 오슬로대학 아우라(Aula) 강당 벽화 경연에 선정되었는데 주제는 빛나는 북구의
태양과 노르웨이 민족주의 철학을 상징하는 근육적인 젊음이다. 뭉크는
1916년 벽화를 완성시킨 후 오슬로 바깥의 에켈리(Ekely)에
집을 사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유럽의 모든 중요 도시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 가장 이름난 국제적인
예술가이자 독일표현주의자에 의해 존경받음에도 1944년 81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의 고립되어 지냈다.
뭉크의 작품
[절규]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작품.
원어명 |
Skrik |
종류 |
템페라화 |
크기 |
83.5×66㎝ |
제작년도 |
1893년 |
소장 |
오슬로 뭉크미술관 |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1893년
작품으로, 오슬로 뭉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뭉크의 작품들 중 가장 표현성이 강하며,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같은 주제를 그린 소묘 작품에는 뭉크의 다음과 같은
글이 덧붙여 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가는 것 같았다."
《절망》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남성의 형상이 이 그림에서는 유령 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표출되었다. 전율하며 양손을 얼굴에 대고 있는 이 인물은 화면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정면으로 관객을 향하고 있다.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는 공포에 찬 절규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온다.
배경 화면의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얼굴선의 동적인 처리와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에 맞추어진 배색 등으로 형식적인 면에서 더욱 강렬한 효과를 나타낸다.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화면 효과를 나타내며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보는 이들의 감성을 집요하게 자극하며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한 화가이다. 그리고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 율동하는 듯한 선 등의 표현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그림에서 인물은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의 모습 또는 유령처럼 표현되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좀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왜곡을 사용하였다.
에드바르드 뭉크( EDVARD MUNCH)에 관한
안내문
뭉크의 작품
[마돈나(Madonna)]
뭉크의 작품
[사춘기]
뭉크의 작품
[생명의 춤]
뭉크의 작품
[그 다음날]
뭉크의 작품
[달빛]
뭉크의 작품
[아픈 아이]
뭉크의 작품
[병실에서의 죽음]
뭉크의 작품
[스페인 독감 후의 자화상]
뭉크의 작품
[재]
뭉크의 작품
[불 붙은 담배가 있는 자화상]
뭉크의 작품
[누이동생 잉게르의 초상]
뭉크의 작품
[다리 위의 소녀들]
뭉크의 작품
뭉크의 작품
뭉크의 작품
노르웨이 최대 미술관인
오슬로 국립 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의
소장 미술품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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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전시관·미술관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주소 |
Universitetsgaten 13, Oslo |
가는방법 |
트램 10, 11, 17, 18번을 이용하여 Tullinløkka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트램 13, 19번과 버스를 이용하여 Nationaltheatret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1836년에 개관하였다.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노르웨이 작가의 작품과 19~20세기 덴마크·핀란드 화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의 주요 전시관은 <사춘기>, <절규> 등 58점의 뭉크 작품을 전시한 뭉크관이다. 뭉크의 더 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면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뭉크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노르웨이 최대 미술관인
오슬로 국립 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의
소장 미술품
노르웨이 최대 미술관인
오슬로 국립 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
노르웨이 최대 미술관인
오슬로 국립 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 앞의
조각 작품
노르웨이 최대 미술관인
오슬로 국립 미술관(Oslo National Gallery)의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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