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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조(金延祖)
자는 효석(孝錫), 호는 광록(廣麓),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김봉조(金奉祖)의 아우이다. 어려서 선생을 따라 배웠고, 학업을 청하는 것이 게으르지 않았다.
가장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력(萬曆) 을유년(1585, 선조18)에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눈썹과 눈이 그림 같았고 타고난 바탕이 남달리 영특하였다. 선친이 특별히 사랑하여 항상 무릎위에 앉히고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훗날 우리 가문을 세울 이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7,8세 때에 선친이 시험삼아 묻기를 “집 한 칸에 서까래가 몇 개이고 합하여 집이 몇 칸인데 계산하면 서까래의 숫자는 모두 몇 개인가?”라고 하자, 공이 의심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선친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서책을 끼고 스승을 따라 공부할 때 부형들의 채근과 독촉을 기다리지 않았으며, 9세 때에 글을 잘 지어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경자년(1600)에 비로소 향시(鄕試)에 입격하였고, 신축년(1601)에 또 입격하였으나 선친이 지나치게 일찍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좋지 않게 여겼고, 또 역병(疫病)을 아직 치르지 않아서 성시(省試)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에 선친을 따라 산음현(山陰縣)에 가서 처음으로 산음 지방 사람인 정언(正言) 오장(吳長)에게 《주역》을 배웠다. 오장은 선정(先正) 오덕계(吳德溪)의 맏아들로 평소에 문장과 품행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공의 단정하고 빼어난 인품을 한 번 보고 좋아하여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다. 가을에 산음현의 지곡사(智谷寺)에서 함께 기거하며 강론(講論)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친께서 공이 뜻을 둔 것이 있음을 알고 손수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써서 권면하였다.
임인년(1602) 봄에 선친이 치소(治所)에서 돌아가시자 공이 관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슬픔과 사모(思慕)함이 지극하여 장사지내는 날에 안색이 매우 어두워 보는 사람들이 놀라 감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병이 나서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갑진년(1604)에 상을 마쳤다. 을사년(1605)에 성시(省試)에 나아가 《소학》과 《가례》를 가지고 강론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겨울에 향해(鄕解 향시)에 입격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서학(西學)에 나아가 《소학》과 《가례》를 강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새롭게 법을 만들고 세 명의 강관(講官)을 정해 규찰하였는데, 공이 바른 용모로 단정하게 앉아 강론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자 고관이 혀를 차며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장차 출방(出榜)하려고 할 즈음에 벗들과 동대문(東大門) 밖에서 과방(科榜)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성(榜聲)이 오래도록 이르지 않자 사람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윽고 방이 붙게 되었는데 공은 과연 합격하였다. 겨울에 폐주(廢主 광해군)가 서총대(瑞葱臺)에 거둥하여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이 지은 글이 합격되어 은혜가 내려졌다.
임자년(1612) 봄에 회시(會試)에 나갔을 때 대사간(大司諫) 오억령(吳億齡)이 공의 용모와 거동이 맑고 빼어나며 음성이 낭랑한 것을 어여쁘게 여겨 앉은 자리에서 크게 말하기를 “이 선비는 글을 잘 읽으니 경연(經筵)에서 아뢸만하다.”라고 하였다.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명성이 성대하여 곧바로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제수되었다. 장차 천거하여 예문관 한림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공은 이미 병이 들었다. 울면서 백씨(伯氏) 지평공(持平公 김봉조(金奉祖))에게 말하기를 “저는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맛난 음식이 걸맞지 않으니 부지런히 글을 읽어 과거에 급제하겠습니다. 한 글자를 읽고 한 구절을 외울 때마다 마음이 어찌 부모님을 편히 봉양함에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계축년(1613) 10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참의(參議) 김용(金涌)이 부고를 듣고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정련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은데도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12월 모일에 예천군(醴泉郡) 광석산(廣石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이곳은 선친의 무덤 아래이다.
아, 공은 총명하고 빼어난 자질과 단정하고 방정한 지조와 빼어난 재능으로 일찍이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받아 취향(趣向)이 이미 범상하지 않았다. 조금 성장하여 더욱 스스로 뜻과 행동을 가다듬어 개연히 선정(先正 이황)이 남긴 풍도를 사모하였다. 산음(山陰)에 있을 적에 선부인(先夫人)께서 조금 편찮았는데 공이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똑바로 앉아 곁에서 모시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부인이 애써 타이르시며 말하기를 “나의 병은 대단한 것이 아닌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느냐?”라고 하였다.
선친의 병이 위독하였을 때, 걱정하며 허둥대고 울부짖으며 몸소 스스로 변을 맛보아 질병의 길흉을 시험하였다. 매번 선친께서 세상에 뜻을 펼치지 못함을 상심하여 일찍이 아우인 나 응조(應祖)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우리 선친께서 도덕(道德)을 품고 서울에서 낮은 벼슬을 하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우리들이 훗날 어찌 차마 후한 복록으로 봉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으니, 어버이를 사랑하는 정성이 천성에서 나옴이 이와 같았다.
선조를 받들 때에 오직 삼가서 매양 선조의 기일을 만나면 반드시 미리 종가(宗家)로 달려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치재(致齋)하였다. 만약 갈 수 없으면 반드시 밖에서 재숙(齋宿)하였다. 친척들을 대할 때에 정성이 지극하여 원근을 따지지 않고 찾아가 살폈다. 그리고 선조의 사당이 있으면 반드시 참배를 청하여 먼 조상을 사모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동기(同氣) 사이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다. 일찍이 부인 김씨(金氏)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말세의 시속에서 동기(同氣) 보기를 길 가는 사람처럼 하는데, 이는 처첩(妻妾) 사이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으니 당신은 마땅히 삼가라.”라고 하였다. 서얼 누이가 밀양(密陽)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천한 종처럼 여기자, 공이 몸소 그 집에 가서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집안에서 의롭게 여기고 공의 뜻을 따랐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선을 행한다면 비록 머슴이나 걸인처럼 천한 사람이라도 좋아하기를 지초와 난초처럼 여겼고, 진실로 착하지 않으면 비록 조맹(趙孟)의 권세가 있더라도 그를 개와 돼지처럼 보았다. 거울처럼 공평무사하고 저울대와 잣대처럼 반드시 공정하게 살피고 지나치게 미화하는 말은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훌륭한 스승을 따라 공부할 때에 더욱 스스로 분발하였으나 언어문자(言語文字)를 위한 공부는 부끄럽게 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學問)은 흐릿하고 황홀한 일이 아니고 학문의 요령은 오로지 일상생활 속에 있다. 큰 것으로 말한다면 충(忠)과 효(孝)가 이것이다. 사람이 여기에 힘쓴다면 이미 절반 이상을 깨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공은 학문에 있어서 공부의 성글고 정밀함과 효과의 깊고 얕음을 헤아릴 수 없으나 우선 한두 가지를 들어 말하겠다. 공은 젊은 시절에 성질이 조금 급해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짢게 여겨 집안의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곤 하였는데, 비록 부모가 곁에 계셔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장성하여 어버이를 섬길 적에 반드시 유순한 태도와 즐거운 얼굴로 직접 뵙고서 말씀을 드리니 혼연히 따사로운 봄기운과 같아서, 비록 거슬리는 일이 있더라도 조금도 말과 얼굴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일찍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적에 여러 형제와 한 친구를 따라서 놀았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노여워하며 크게 꾸짖고 욕을 하자 여러 형제가 모두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하기를 “저 사람이 비록 도리를 잃었으나 내가 어찌 그와 함께 따지겠는가?”라고 하니, 그 친구가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그리고 집안에 있을 적에는 더욱 근엄하였는데, 이따금 바른 안색과 엄숙한 용모로 종일토록 말이 없으면 집안사람들은 간혹 노여움이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
병석에 있을 때에 어떤 친구가 와서 문병하였는데, 공이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말쑥한 용모로 해가 기울도록 이야기를 하자 병이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친구가 참으로 내심 탄복하였다. 친구가 물러날 때에 같은 고을의 노인들에 대해 두루 물었다. 나이가 80세를 넘긴 사람이 마침 병을 앓고 있었는데, 공이 오는 것을 보고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벗들이 나와서 친한 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하루에 두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이와 같았고, 한 사람은 저와 같았다.”라고 하였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인품의 높고 낮음은 천백 층이 있다.[人品高下, 有千百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믿을만 하다.
아, 앞의 몇 가지를 통하여 본다면, ‘성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부터 이겨 나가야 한다.’라고 한 것은 성인께서 전수(傳授)한 지결(旨訣)이고,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점이 다만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데 있다.’라고 한 것은 죽고 사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군자가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니, 마음이 안정되면 기(氣)는 따라서 조용히 자득됨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극기(克己)에 힘을 기울이고 주경(主敬)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죽고 사는 이치에 깊이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하늘이 더 오래 살게 해주어 더욱 학문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면 공이 성취한 바를 어찌 쉽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공의 벗 지평(持平) 류진(柳袗)이 공의 행적에 뇌문(誄文)을 지어 이르기를 “공은 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는 의지를 지녀서 화평(和平)함을 이루었고, 맑고 고결하게 홀로 빼어난 지조를 지녀서 학문을 함에 보탬이 있었다. 얼굴빛이 온화하고 기개가 매서우며 지혜가 둥글고 행실이 방정했네.”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공에 대해 알고 한 말이다.
공이 일찍이 작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 찰방(察訪) 안숭검(安崇儉)을 문안하자 안숭검이 매우 난감해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이유에 대해 묻자 안숭검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氣)를 받은 것이 지나치게 맑아 육기(六氣)가 쉽게 탈 수 있으니, 약을 먹어도 진실로 바꿀 수 없다. 비유하자면 한매(寒梅)와 고죽(苦竹)을 심어 가꾸는 것과 같은데, 혹시라도 마땅함을 잃게 된다면 쉽게 말라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 끝내 안공의 말이 증명되었으니, 천명이다.
아우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주)
오장(吳長):1565~1617.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익승(翼承)ㆍ경지(敬止), 호는 사호(思浩)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와 폐모론(廢母論)을 둘러싸고 대북 세력과 각축을 벌이다가 삭직당였고, 정온(鄭蘊)의 처벌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사 토산에 유배를 갔다가 죽었다. 저서로 《사호집》이 있다.
오덕계(吳德溪):오건(吳楗, 1521~1574)으로, 덕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이다. 1558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1년 이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경상도 산음 덕계리(德溪里)로 낙향하였다. 저서로 《덕계집》이 있다.
참의(參議) 김용(金涌):1557~1620.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이다. 1590년(선조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로 옮겼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뒤에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 참의를 지내고, 1616년에 여주 목사로 나갔다. 저서에 《운천집(雲川集)》ㆍ《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시례(詩禮)의 가르침:가문에서 전해온 학문과 유풍을 가리킨다. 공자가 홀로 뜰에 서 있을 때 아들 이(鯉)가 지나가자, 공자가 이에게 시(詩)를 배웠느냐고 물었다.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라고 말하였다. 뒤에 공자가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었고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예를 배우지 않으면 사회에 발 딛고 설 수 없다.[不學禮, 無以立.]”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이가 시와 예를 배웠던 데에서 나왔다. 《論語 季氏》
조맹(趙孟):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직계 후손들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남이 존귀하게 해준 것은 진실로 존귀한 것이 아니다. 조맹(趙孟)이 존귀하게 해준 것은 조맹이 다시 천하게 만들 수도 있다.[人之所貴者, 非良貴也. 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라는 말이 있다.
이미……것이다:원문의 ‘사과반(思過半)’은 생각이 반을 넘는다는 말로, 이미 절반이 넘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아, 또한 존망과 길흉을 살피고자 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자가 단사를 보면 헤아림이 반을 넘었다.[噫, 亦要存亡吉凶, 則居可知矣. 知者觀其彖辭, 則思過半矣.]”라고 하였다.
성질이……한다:《심경부주》 〈안연문인장(顔淵問仁章)〉에 “극기는 모름지기 성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부터 이겨 나가야 한다.[克己, 須從性偏難克處, 克將去.]”라는 사양좌(謝良佐)의 말에서 온 것이다. 사양좌는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 중의 하나로 자(字)는 현도(顯道)이며, 세상에서 상채(上蔡) 선생이라고 불렀다. 정문 사선생은 사양좌ㆍ양시(楊時)ㆍ여대림ㆍ유초(游酢)를 말한다.
천덕(天德)과……있다:《심경부주(心經附註)》 서(序)에 “배우는 자가 어디에 힘을 쓴 뒤에야 사람이라는 이름에 욕됨이 없겠는가?……천덕과 왕도는 그 요점이 다만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데 있다.[學者宜何所用而後, 無忝于人之名哉?……天德王道, 其要只在謹獨.]”라고 하였다.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謹獨]’는 《대학》에는 ‘신독(愼獨)’으로 되어 있다.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이름이 ‘신(愼)’이므로 정이(程頤)가 휘하여 ‘근독(謹獨)’으로 쓴 것이다.
안숭검(安崇儉):1554~1619.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백공(伯恭), 호는 오지당(五芝堂)이다. 진사(進士) 안질(安軼)의 아들이고, 효행으로 천거되어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창락 찰방(昌樂察訪)으로 있을 때 소백산 산수를 사랑하여 태장(台庄)에서 살았다.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육기(六氣):질병을 일으키는 풍(風)ㆍ한(寒)ㆍ서(暑)ㆍ습(濕)ㆍ조(燥)ㆍ화(火)의 여섯 가지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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