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득실 / 백남일
장맛비 추적대는 늦여름 한나절이다. 심심파적으로 이 서랍 저 수납장을 뒤지다 보니, 케케묵은 잡동사니들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선다.
한때 취미로 모은 퇴색한 넥타이핀만도 십여 개가 넘었다. 각종 기념 메달은 또 무엇에 쓰려고 이리도 정성스레 수집했던지, 마치 아이들이 갖고 놀던 딱지를 연상케 했다. 우표수집 스크랩북은 2권하고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우표는 책갈피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금싸라기 시간을 헛되이 보낸 부질없는 소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열정과 의욕을 학문이나 이재理財에 쏟았으면 대가大家 아니면 갑부가 되었을 게다.
궁상맞은 노리개 나부랭이들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한갓졌다. 아니, 호주머니 속에 뭉쳐 있던 휴지쪽들을 말끔히 떨어낸 기분이었다. 입성과 세간도 마찬가지다. 유행이 지난 옷가지며, 부속품 하나만 교체하면 사용이 가능할 것만 같아 꼼꼼히 꾸려놓은 전자제품도 고물상 리어카에 실어 보내니 마음이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구저분한 것들을 깡그리 정리하고 나니 법구경의 한 말씀이 들려왔다. “논밭은 잡초 때문에 손해 보고, 사람은 탐욕 때문에 손해를 본다.” 대저, 허욕은 황금알을 낳는 닭을 죽인다는 이솝 우화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까닭은, 잡된 물욕을 경계하라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일 게다.
내 오른쪽 정강이에는 마치 도끼날에라도 찍힌 듯 반달 모양의 흉터가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그해 부모님을 졸라 구입한 자전거의 물성物性이 끼친 내 육신에 난 지울 수 없는 상흔이다. 꿈에 그리던 삼천리 표 자전거를 처음 샀을 때는 마치 천하라도 얻은 듯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핸들을 처음 잡고 마당가를 빙빙 돌며 연습한 뒤, 자신감이 생기자마자 서낭당 고갯길 내리막을 신나게 내달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길가 돌부리에 채어 그만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때 칼날 같은 차돌에 찍힌 영광의(?) 상처인 셈이다.
오매간 갖고 싶어했던 것을 얻어 소원 풀이를 했을 그때에는,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헛간에 모셔둔 2륜차를 어루만져 보지 않으면 단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내 생애 최초의 자가용은 물욕物慾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그때 생긴 흉터를 내려다볼 때마다 호기심이 유발한 과욕의 인과응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묵화墨畫에 심취한 집사람은 쓰레기 집하장 앞을 지날 때마다 나뒹구는 액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개중에는 새것이나 진배없는 명화가 들어있는 사각 틀이 있는가 하면, 결혼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금테 올린 멀쩡한 물건이라도 몇 개 정도야 모른 척 눈 감았지만 이건 숫제 액자 수집광이다. 하여, 본인 모르게 그것들 일부를 내다 버리는 게 나의 일과였다. 반면, 내가 주워 온 공산품 나부랭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걸 보면 아내 또한 눈엣가시를 나 몰래 내박치는 모양이다.
‘버리다’의 어근語根은 ‘벌’이다. 이는 팔 또는 손의 뜻을 지닌다. 버린다는 건 내 수중에 든 획득물을 방기放棄하는 행위다.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날짐승은 먹고 남은 것을 몸에 지니는 법이 없다. 배고프면 그때그때 벌레 따위를 잡아먹고, 배부르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여유를 지지배배 노래 부르며 생의 열락을 찬미한다.
한데, 인간은 배부르면 부를수록 곳간에 욕심을 비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사슴을 보고 얻은 토끼를 잃기 다반사다. 그래서 가진 것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늘 없는 것에 연연하기 때문에 인간의 비극은 끊이지 않는다. 소유한다는 건 권리와 함께 의무가 부여된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선 안 되겠다.
근자에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있었던 여객선 침몰 사건에서 해괴한 현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객은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구조선에 의해 구명되었으나, 단 한 사람만이 오리무중이었다는 것이다. 즉시 잠수부가 해저에 내려가 수색 중 시신 한 구를 발견하고 인양했는데, 그는 다량의 금덩이를 전대에 꾸려 허리에 두른 채 익사했더라는 것이다. 신원을 확인해 보니 채금을 업으로 하는 광부였다는 것이다. 목숨보다도 중한 금붙이를 끌어안고 저세상으로 떠난 그는 과연 행복한 종말을 누린 셈이었을까?
인생 항로 어영부영 노를 젓다 보니 모항母港 등댓불이 저만치서 깜박인다. 훗날 이생을 마감하고 저세상에 당도했을 때, 염라대왕 왈 “그대는 뭘 가지고 왔노?”하고 물을라치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게다. “한데, 그대의 눈알이 왜 그리도 뒤집혀 있능교?”하고 재차 물을 것 같으면 “평생 이를 악물고 억척스레 모은 재물 깡그리 두고 온 것이 너무나 억울해 이 꼴이 되었습니다.”하고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을 게다.
욕심이 많으면 자루가 찢어질 수밖에 없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역리逆理를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애오라지 소유한다는 건 나를 구속하는 올가미임을 자각할 일이다.
첫댓글 젊은이들이 외치는 미니멀라이프
그 방향성은 같지만 깊고 짙은 고결함이 묻어나는 글이라 너무 좋습니다. 잘 읽고갑니다.